<보배의 경>은 사람들에게 불교가 무엇인지 알리는 초기경전입니다. 불교의 교단에는,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다시피, 삼보 즉 세 가지 보배가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그리고 성자<참사람>의 모임이지요. <보배의 경>은 이 세 가지 보배의 뜻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합니다.
불교에 귀의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안의 욕망과 집착을 성찰하고 선정을 통해 번뇌를 소멸시키는 선정(禪定)을 배운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욕망이 소멸된 기쁘고 행복한 경지(열반)를 얻습니다. 불교에 귀의하면 이와 같이 열반을 얻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되니, <보배의 경>은 경 첫머리에 그 뜻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4) 싸끼야 족의 성자가 삼매에 들어 성취한 지멸(止滅)과 소멸(消滅)과 불사와 승묘, 이 사실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5) 깨달은 님들 가운데 뛰어난 님께서 찬양하는 청정한 삼매는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삼매이니, 그 삼매와 견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 <보배의 경> 전재성 역
지멸과 소멸 불사 등은 모두 열반을 가리킵니다. 욕망을 가라앉히는 삼매는 바라문이나 노예 등 타고난 종성에 상관없이 얻을 수 있으며, 즉각 그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초기 불교의 수행이 매우 소박하고 실천적인 것을 보여줍니다.
욕망과 집착을 스스로 성찰하여 멈추게 하고 행복을 얻는 진리는 오늘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살펴보면 오늘 어느 누구도 이 당연한 가르침이 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 귀의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버려야 한다고 <보배의 경>은 강조합니다.
(10)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가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의 어떠한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됩니다)
인도 당시 지배종교 계급인 바라문들은 복을 얻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스스로 주문을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그 댓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집 수레 땅 보석 심지어 하인 여자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종교적 제사나 기복행위에는 예로부터 사람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윤회하는 영원한 자아(아트만)가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들의 종교적 이념을 거부했습니다. 불교에 귀의하더라도 세 가지 관념을 버릴 수 있어야 성자(참사람)의 대열에 들 수 있다(入流)고 했습니다. 그것은 위 (10)번 구절에 나와 있듯이,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계금취견), 몸속에 자아가 있다는 생각(유신견), 그리고 매사를 제사와 주문에 의지하는 불안한 의식(매사의 의심)입니다.
부처님은 제사나 주문, 전통적인 규범이나 권위에서 벗어날 때 스스로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위를 바라볼 수 있는 자유로운 성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불교의 행복은 전통이나 외부의 권위가 주는 행복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지성으로 성찰해서 얻는 행복입니다.
(7) 확고한 마음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이, 고따마의 가르침에 잘 적응하는 참사람은 불사에 뛰어들어 목표를 성취해서 희열을 얻어 적멸을 즐깁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부처님은 무엇보다 제사나 주문이나 종교적 규범과 금기 속에서 바라문들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제사나 주문을 만들어 내면서 많은 재물을 착취하는 바라문들의 위선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속에는 전통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권위가 있습니다. 윤회에서의 해탈을 논하며, 복을 구하고 재앙을 피하는 바라문의 종교의식에서 탐욕과 어리석음이 숨어 있는 것을 통찰한 청년 부처님의 맑은 지성에 참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종교적 의식을 되볼아 보게 됩니다. 우리 불교의 의례에도 부처님이 경계하던 세 가지 관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불합리한 권위, 맹목적인 기복의식,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신비한 힘에 의지하는 태도는 결국 우리 스스로 자유로운 지성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아울러 부처님이 통찰하였듯이, 우리 또한 그러한 신비한 의식(儀式)에 집착하는 종교단체의 탐욕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현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절대적 권위나 신비한 존재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우리의 언어와 행위와 삶을 성찰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성찰은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는 수행과 다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성찰하는 삶을 요구하고,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도반들에게 지적해주기를 바라는 모임(포살과 자자)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도반에게 자신의 잘못을 들어내는 일을 칭송했습니다. 자자를 할 때는 부처님 스스로 먼저 제자들에게 당신의 언어와 행위에 어떤 잘못이 없었는지 겸허하게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좋은 도반은 스승과 같으며, 수행의 전부라고도 말씀했습니다.
(11)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감추지 못하니,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욕망과 집착, 분노에 대한 성찰은 맹목적인 권위나 기복의식을 버릴 때 얻어집니다. 권위나 전통에 복종하는 마음에는 성찰된 의식, 지성이 깨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권위나 신통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보배의 경>은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사람의 길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14)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