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수나라 때의 역사서인 [수서(隋書)] ‘고려전(高麗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연초에 패수(浿水)가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나가 사람들과 함께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의복을 물에 던지는데, 군중들은 좌우로 두 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을 서로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번 되풀이하고 그만 두었다.”
왕이 직접 참관한 돌싸움은 서로의 경쟁을 부추기면서도 서로의 화해를 도모하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놀이로는 신라의 가배(嘉俳)가 있다. 이것은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8월 대보름 한 달 전부터 길쌈 시합을 하는 것인데, 왕녀가 주관이 되어 지휘했다. 승부가 나면 서로가 회소곡(會蘇曲)을 불러 서로의 노고를 칭찬하고 함께 화합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경쟁 구도가 화합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으로 보아 신라의 가배와 고구려의 돌싸움의 본질을 같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이 관람한 돌싸움

[고려사]에는 고려 우왕이 돌싸움 관람을 매우 즐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380년 5월 우왕이 돌싸움을 관람하고자 하니, 이존성이란 자가 “이것은 임금이 마땅히 관람할 것이 아닙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우왕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부하를 시켜 이존성을 때리게 하였으며, 이존성이 도망하여 나가니 우왕이 탄환을 취하여 쏘았다. 나라의 풍속에 단오에는 무뢰배가 큰길가에 떼를 지어 좌우로 나누고 기와조각과 돌을 가지고 서로 던지며, 혹 짧은 막대기를 같이 사용하여 승부를 결정하는데, 이것을 돌싸움(石戰)이라고 한다.”
고려말 학자인 이색(李穡)의 [목은선생문집]에는 ‘단오석전(端午石戰)’이란 글이 있을 정도로, 고려의 단옷날에 돌싸움은 쉽게 볼 수 있는 풍습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역시 돌싸움 관람을 즐겼다. [조선왕조실록]은 1398년 5월 5일 단옷날에
“임금이 궁성의 남문에 거둥하여 돌을 던져 싸우는 놀음을 구경하였다. 절제사 조온(趙溫)은 척석군(擲石軍)을 거느리고, 판중추원사 이근(李懃)은 여러 왕실 호위군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좌우편으로 나누어 서로 쳐서, 해가 질 때까지 하였으니, 죽고 상한 사람이 자못 많았다.”
고 적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태종 역시 돌싸움 관람을 즐겨, 세종과 함께 구경하기도 했다고 한다.
돌싸움은 곧 군사 훈련

1457년 양성지(梁誠之)는 세조에게 “시정(市井)의 무리들까지도 모두 호적(戶籍)에 기록하여 석척군(石擲軍)으로 삼아서 전진(戰陣)의 일을 연습하게 하십시오.”라고 상소를 올렸고, 세조는 이를 병조(兵曹)에 이르겠다고 승낙했다.
돌싸움은 단순한 놀이만은 아니었다. 고려 우왕은 돌싸움에 능한 자들을 직접 불러 상을 주기도 했고, 조선 태종은 단옷날 돌싸움에서 승리한 척석군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주는 한편, 면포, 저화(楮貨) 등을 상으로 주기도 했다. 이러한 포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돌을 잘 던지는 이들을 유능한 군인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397년 7월 왜구가 쳐들어오자, 조선에서는 이천우 등으로 하여금 척석군 등을 거느리고 왜구를 쫓아 잡게 하기도 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서 보듯 척석군들이 1510년 삼포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돌을 던져 적을 물리치는 군사들은 조선시대 이전에도 있었다.
투석기와 석투군

돌은 나무와 함께 인간이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무기다. 돌을 잘 던지면 사냥은 물론, 적군을 죽일 때도 사용할 수 있다.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에 인류는 보다 더 멀리, 더 정확하게 돌을 던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돌을 멀리 던지기 위한 무기인 투석기를 만들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투석기는 돌을 집어 던지듯 날리는 캐터펄트(Catapult)와, 석궁과 같은 원리에 의해 돌을 발사하는 발리스타(Ballista)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포차(抛車), 발석차(發石車)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했다. 고구려도 661년 포차를 이용해 신라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투석기는 무거워 이동이 쉽지 않고, 제작비용도 많이 들며, 산성(山城) 전투나 소규모 전투에서 활용하기에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돌을 무기로 잘 활용하는 방법은 전문적으로 돌을 던져 싸우는 석투군(石投軍, 擲石軍)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신라에는 노를 다루는 노당(弩幢), 사다리를 운용하는 운제당(雲梯幢), 충차를 운용하는 충차당(衝車幢), 그리고 투석당(投石幢)으로 구성된 사설당(四設幢)이란 특수부대가 있었다. 이 가운데 투석당은 포차(抛車)를 운용하거나, 돌을 던지는 것을 특기로 하는 군사들을 일컫는다.
화살을 쏘고, 돌을 던져 성을 공격해오는 적의 군사를 막는 것은 고대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에서도 투석당 등의 부대를 두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려시대에는 별호제반(別號諸班-별무반)과 오군(五軍)에 석투(石投)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에 대비한 돌무더기

[삼국사기] 신라 남해차차웅 11년(서기 14년) 때의 기록에 따르면 낙랑의 무리가 신라 금성을 공격해왔는데, 밤에 유성이 떨어지자 적들은 알천 위에 물러나 진영을 갖추고 돌무더기 20개를 쌓아 놓고 가 버렸다. 신라 군사 1천이 이를 쫓아가다가 적이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보고 적의 숫자가 많음을 알고 추격을 멈추었다. 낙랑 군사가 돌무더기를 쌓아둔 것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
첫댓글 돌싸움 글 잘 읽었습니다. 조금 다른 경험이긴 한데. 제 친가인 경상남도 남해에서는 석전 혹은 석차 혹은 석척이라는 말로 추석에 돌 던지기 행사가 있었습니다. 개울 가운데 아름드리 솟대를 세워놓고 돌을 던져 맞추는 행사였는데 20년 전까지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할머니께 여쭤보니 할머니께서 시집을 오시던 일제시대 때에도 하던 행사라고 하시더군요. 정확한 기억이신지 모르겠지만 저도 해본 기억이 있어 석전과 유사한 행사가 아닌가 합니다. 형태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글쓰신 내용이랑 비슷해 더 와닿네요.
삼포왜란때 황형장군은 안동과 김해에서 돌잘던지는 자들을 모아 출전시켜 돌를 던지니 왜군들의 방패가 부수어져 승기를 잡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