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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속 변주된 감성적 전언
박철영 <시인, 문학평론가>
가을이 건너오고 있다. 첩첩이 놓인 장애물들을 어찌 잘도 넘어왔는지 감탄할 따름이다. 우리가 처한 코로나 19 바이러스 환경은 반전이나 호전될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사회, 정치, 경제 어느 것 하나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한 해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은 성큼 다가와 버렸다.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의 정취에 빠져들 틈도 없을 것 같다. 더 강해진 코로나 19의 ‘델타’ 변이형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는 삶은 더 팍팍해질 것 같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마음만큼은 주눅 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 강해져야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생존에 대한 의식의 대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작금의 혼란스런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지 못한다. 인간 중심의 산업혁명적 경쟁이 심화되면서 발생된 코로나 19는 인간에게는 대재앙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쉽게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할지 모른다. 거대한 홍수가 휩쓸고 간 뒤 폐허가 되어버린 처참한 모습을 상상해본다. 다행스럽게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한 작은 노력들이 희망이 되어줄 것 같은 예감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혼곤하게 밀려드는 지속적인 피로에도 가슴속 희망을 끝없이 충전하고 그 기운을 시적 전환으로 환기해낸 시편들에 눈길이 끌리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끝없이 고뇌하는 긍정과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존재를 실재하는 시적 형상으로 구체화하는 노력은 인간 의지의 지속 가능한 서정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빛으로 다가온 사물의 감각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정중히 맞이한 시편들을 함께 공감하는 시간은 언택트 시대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미우뱀이 어디에 알을 낳는지 아니?
세상에는 그렇게 우리가 모르는 일이 너무 많아
날개가 있으면 다리는 두 개 뿐이고
다리가 네 개 달린 짐승에게는 날개가 없다는 사실도
가끔 잊어버리지
관찰력의 한계일 수도 있고 무심함일 수도 있어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 뿐이야
원시의 얼굴로 태초처럼 다가와도 괜챦아
너라서 소중하다는 말,
빈말 아니야
네가 가진 어떤 것보다
그냥, 그냥 너라서 좋아
너의 곁을 허락해 줄래?”
-<프로포즈/ 김봄서> 전문
김봄서 시인이 툭 던지는 말 “미우뱀이 어디에 알을 낳는지 아니?” 라는 화자의 막연한 설의성이 의도한 바는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질문의 대상은 시를 읽는 독자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일반적인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는 그것의 인식을 상회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사실 뱀의 서식 환경은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풍부한 먹이사슬이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먼저 뱀은 산란을 위해 생태적으로 천적이 없는 안전한 곳을 찾아낼 것이다. 굳이 기초적인 답을 꼭 들으려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한 상식 밖의 것들 “세상에는 그렇게 우리가 모르는 일이 너무 많”은 것처럼 다음 행에서는 또 다른 상식을 일깨워 준다. 세상의 다양한 상식들을 완벽하게 알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간과해선 안 되는 화자의 속내는 2연 “원시의 얼굴로 태초처럼 다가와도 괜챦아/ 너라서 소중하다는 말,/ 빈말 아니야/ 네가 가진 어떤 것보다/ 그냥, 그냥 너라서 좋아”라는 말에 있다. 이 말은 먼저 다가감으로써 해체된 현대 사회의 필연적 관계 복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사회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생존 경쟁의 일상이 이기적 사고로 개인화되어 있는 폐해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냉혹한 현실 사회에 대한 우려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회복을 희망하고 있다. 김봄서 시인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고 있는, 개인주의화된 이면의 불편함을 시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너의 곁을 허락해 줄래’라는 완곡한 표현 속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관계의 단절보다 회복을 문장으로 전언하고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만나야 하는 것들>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아주 가끔 맑은 그리움이/ 아침에 마시는 커피잔에 빠지곤 한다/ 그러면 나는 그만 하루 일정을 취소하게 된다”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을 상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사실 현대인들의 자기만을 위한 최소한의 여유조차 넉넉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약에라는 가정하에 얻어진 자유를 현실에 대한 일탈로 활용하려 한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반복적인 노동에서 가중된 피로와 중압감에서 비롯된다. 그 시간만큼은 부담 없이 화자만의 온전한 사유의 파격으로 감행할 준비를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빠진 징검다리’는 현실과 과거 속 상상 세계와의 경계에 놓여있다. 그곳을 건너면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나오고 , ‘파르테논 신전’을 지나, ‘아고라’까지 다다를 수 있다. 그곳에서 실행한 것들은 현실사회에서 금기시한 것들로 당시 사회의 강력한 규제로 관리되던 것들이다. 사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들어선 자체가 소중한 존재의 각성을 의미한다. 당당한 인간의 주체성을 확인해가는 ‘광장’에서 토론은 존재에 대한 확신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또한, 신들의 영역인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신성모독을 감행하는데 그 행위는 인간 중심적 사유의 회복을 갈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각성은 찰나에서 얻어온 빛의 속도로 소멸할지 모른다. 화자는 그러기 전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사명을 수행한다.
별 수 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산 능선이다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아
웃자란 틈새의 간격이 우뚝, 측면을 만들고 있다
철새울음 여과하는 치맛자락
두루마리 파도의 용도는
더 이상 머물지 않겠다는 속셈이었을까
되바라진 갈매기를 내쫓는 트롤선은
그득그득 다산多産을 쫓는 거다
뱃놈들이 스멀스멀 물질하면
어기영차장단, 흥얼흥얼거리는 아가리들이
파상문자波狀文字 내어주고
지느러미 벼린 그물을 내려놓는다,
봉인된 지느러미를 가득 담고
돌아서는 뒤꿈치들, 재촉하며
젖은 문자 발굴하는 거라 했다
더 이상 쓸려나가지 않으며
꿰어가는, 짠 젖줄이라 했다
-<파상문자/ 박봉철> 전문
박봉철 시인의 시 ‘파상문자’의 시제가 호감을 촉발한다. ‘파상波狀’은 물결 모양의 풍경에서 감각된 이미지를 시적 심상으로 치환해낸다. 그 파상은 일회성이 아닌 우리 일상의 구조화된 언어(기표)처럼 매번 같은 모양으로 발음되듯 문양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 기표적 의미가 함의하는 바는 매번 상황에 따라 완곡함과 강약이 심리 상태에 따라 속뜻(기의)이 다르게 전달될 것이다.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바다의 풍경은 시각적인 묘사에서 보여주듯 조수간만의 시차에 따라 “별 수 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산 능선이다/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아/ 웃자란 틈새의 간격이 우뚝, 측면을 만들고 있다”라고 파상문자를 해독해낸다. 파도의 크기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파고의 크기만큼 존재하는 언어적 풍경도 위태롭다는 것까지 의미한다. 시인의 눈빛 속 정황은 바다의 파도가 아니라 파도의 ‘파상’이 던지는 환경적 메시지에 주목하고 있다. 그렇기에 ‘파상문자’라는 조어를 형상화했을 것이다. 그 징후는 ‘두루마리 파도’처럼 연속적으로 밀려왔다 안착하지 못하고 되돌아간다는 회귀본능의 단절을 불안적인 요소로 기입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저인망 조업 방식인 그물 작업 위주로 하는 ‘트롤선’이 빈번하게 출몰하여 갈매기의 안정된 서식환경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바다 환경의 변화 속에 노출된 위기는 갈매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트롤선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한 어류의 고갈 즉 “되바라진 갈매기를 내쫓는 트롤선은/ 그득그득 다산多産을 쫓는 거다”라는 것처럼 갈수록 열악해져 가는 바다 환경의 파괴로 인해 인간의 삶도 위협 받게 된다는 문제 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3연에서는 고단한 어부의 일상을 말해준다. 바다의 삶은 위험 환경에 무시로 노출되어 있다. 어쨌거나 어쩔 수 없이 거친 파도 속으로 그물을 던져야 하는 어부에겐 별다른 방도가 없다. 만선의 행운을 빌며 장단을 맞추지만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물에 담긴 고기의 양만큼 저마다의 사연은 있는 법,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 돌아가야한다. 어부들의 생존을 위해 노동으로 빚어낸 ‘젖은 문자’는 생존을 위한 피로를 비밀로 봉인했다. 모든 것을 훗날로 전해야 할 비밀들은 어딘가에 보존해야 한다. 비밀이라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노루발 일기> 시적 상관물로 변주된 ‘노루’는 야행성 동물이다. 시적 대상으로 편입된 이상 노루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노루와 고라니를 구분하기가 일반인은 쉽지 않다. 수컷과 암컷의 차이 말고는 필자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없다. 1연은 노루가 선호하는 서식 환경의 최적지를 언급하고 있다. 낮은 관목류가 적당히 펼쳐진 구릉형의 산 능선을 가리킨다. 그런 환경에서 조차 살아가는 것이 만만찮은 위험과 고통이 상존한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노루는 질주 본능을 억제할 수 없어 마냥 달리다 그만 발목을 다치게 된다. 그렇다고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과 맞닥뜨릴 때마다 “금간 발목이 자국마다 아팠어요/ 밤새 울면서 쉼표를 깔아뭉개고 마른 욕설들을 삼켰죠”라며 밤의 고통을 적고 있다. 그 고통의 밤은 쉽게 끝나지 않을뿐더러 팍팍한 인간의 삶 속 현실과 다르지 않다. 끝의 바닥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은 더 절망적이다. “강한 바늘도 아픈 것은 아니고 스스로 둔감해질 수 있어요/ 차르르 차르르 휘감기며 어지러울 때는 모르는 척해요” 라며 고통에 대한 둔감성으로 대처하지만, 결국 절망과 다르지 않다. 삐뚤어진 ‘선’에 맞닿은 ‘면’을 뒤집어야 한다는 논리만큼 실천을 쉽지 않다. 여기에서 ‘선’은 생존의 방향성을 말해준다면 첨예한 경계와 맞닿아 있는 노루(화자)의 생존(면)에 대한 전망은 매우 불안한 것이다. 항상 극심한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시간을 떨칠 수 없다. 질주 본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침묵’ 같은 ‘양보’도 괜찮은 방법임을 깨달아간다. 대 자연 속 만물 중 하나인 인간도 마냥 일(노동)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어떤 간절함이다
여기는 고립된 아고라의 제단
제사장의 휘둘리는 붓으로나 전생이 가늠될 뿐
방치된 채 오래 붙박여왔다
뜨거운 심장이 시나브로 식어갔듯
형상으로 사육되거나 신화로 살아온 날들이
미필적 구속이었음을 알았을 땐
지층의 일부로 진화된 뒤다
어느 연대기의 짧은 구절로 기억되거나
바래 읽지 못할 문장으로나 남을
억겁 인연이다
주검을 섬기려 또 다른 주검을 탁발한 오류다
잊히기 위해 잡혔단 말은 소통을 위한 변명
어떤 게 최선인지 몰라 화살은 매번 과녁을 비껴가고
생의 기대치는 늘 부재의 방죽을 넘는다
청동의 부러진 바퀴살은 퇴화된 시제
툭 던진 빈말이 아직 영원을 달리는 것처럼
무관심만큼 무서운 폭력은 없다
클릭 한 번에 박제된 외벽이 사라진다
찰나는 얼마나 긴 구속인가
시간의 층위가 광장의 서열이 될 수 없듯
발기를 영영 잊은 야생이
야사로 수장收葬될 때
지층을 둘둘 말아 별자리로 이주하는 무리들
도피안 너머까지 빛낼 뭇별로
다투어 허공의 품을 밝히는
너는,
-<별의 미장센/ 박위훈> 전문
하늘에 떠 있는 ‘별’이 지상의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따져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다. 태초부터 현재까지 자연조건에 맞춰 천체의 별자리에서 변함없이 지구를 향해 반짝일 뿐이다. 그 별은 어느 순간부터 인간에게 절대적이면서 초월적 대상으로 길흉화복을 해소하거나 회피를 기원하는 대상으로 받들어진다. 그만큼 인간은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간구하는 인간에게 별을 신성한 대상이 되어주었다. 화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낭만적 여유가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를 질문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별’의 운행은 인간의 존망에 대한 징후를 예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절박함은 신성성의 대상으로 ‘별’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화자의 “어떤 간절함”은 그만큼 절실한 삶에서 오는 박탈감일 수 있다. ‘별’처럼 유력한 존재감을 회복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상상 속의 “고립된 아고라의 제단”이 갖는 신성성과 그에 걸맞은 상징성의 상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 시대가 부여한 그 권위(신성성)를 현실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제사장의 휘둘리는 붓으로나 전생이 가늠될 뿐/ 방치된 채 오래 붙박여왔다”는 자괴감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또한, 아고라는 일반적인 여론이나 상업적 시장 기능을 위주로 행해지는 그리스 시대의 개방형 소통 장소의 전형으로 보면 된다. 그 광장에서 바라본 하늘의 ‘별’을 통해 화자가 간절하게 기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아크로폴리스’라는 광장은 종교 행사를 위해 건축되어 사용되었고, 사람들이 모여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통상적 교류와 소통을 위한 아고라와는 용도의 차이가 있다. 정치와 종교적 행사를 위한 아크로폴리스에의 접근은 신분적 차별로 출입에 제한이 있었다. 세상의 주체로 살고 싶은 인간적 욕망의 한계를 화자는 “미필적 구속”으로 예견하고 있었다. 무대 장치의 예정된 소품처럼 벗어날 수 없는 찰나의 선택은 누군가에 의해 이미 정해져 버렸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늘에 뜬 ‘별’을 통해 잠시나마 고달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을 실현하고자한다. 어차피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밝기라는 것도 한순간일 것이라는 시적 상상을 더해준다. 별이 빛날 수 있는 시간은 낮과 밤으로 구분되어있다. 빛나거나 빛나지 않는 시간도 별의 시간은 분명한 데 타자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시간은 “발기를 영영 잊은 야생이/ 야사로 수장收葬”되어버린 것이어야 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움의 광장을 지나야 만남의 광장이 나오는 걸까
멀리 빌딩 사이 위태롭게 껴있는 낮달을 본다
누군가 달을 구조해야 한다면
그건 누구의 손일까
그리움의 광장은 너무 멀어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스팔트 위로 가시가 자란다
해가 난파된 달을 삼켰다
해가 난파된 달을 뱉었다
길은 피를 흘리고 걸음은 복잡해 진다
대형 전광판에 그리움의 광장이 나온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그리움의 광장은 너무 멀어
만남의 광장으로 영원히 갈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다시 처음으로 리셋된다
머리를 들고 시야를 길 끝에 고정하고
천천히 천천히 그리운 그때를 생각한다
-<그때/ 박주이> 전문
시간 속에 존재한 ‘그때’는 현재를 기점으로 한 과거까지의 층위의 인과관계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어떤 형태든 인간은 만남과 이별, 태어남과 죽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광장을 지나야 만남의 광장이 나오는 걸까”라며 질문하는 ‘광장’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으로 의식한다. 그러나 그 만남을 위한 광장은 많은 장애물이 존재한다. 우선 이정표가 되어줄 하늘의 ‘낮달’을 가리는 ‘빌딩’이 있다. 그 달을 찾아 걷지만 “그리움의 광장은 너무 멀어/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며 찾아가는 그 길은 만만치 않은 난관이 도사린다. 결국 광장 속 만남은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그리움의 광장은 너무 멀어/ 만남의 광장으로 영원히 갈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것을 알게 된다. 만남이란 것의 욕망은 항상 미완의 숙제처럼 기억될 수밖에 없다. 그리움을 매개로 한 만남도 인간의 무의식 속 욕망이자 영원한 타자의 욕망이어서 절대적으로 충족할 수 없다. 인간이 꿈꾸는 욕망은 항상 현재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광장 속 만남의 ‘그때’는 밴다이어그램 속 전체에서 부분으로 분리되고 거기에서 더 긴밀한 의식은 자아라는 교집합을 형성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전체라는 만족은 도저히 이룰 수 없다. 그리움(그때)이란 관념을 밴다이어그램으로 도식화한다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서 보여주는 다변적 사유는 또 다른 미끄러짐을 통해 끝없는 사유와 질문을 불러 확인될 수 없다는 것으로 명확히 설명될 수 없다. 다행스럽게 화자는 현재를 기점으로 한 과거라는 시간의 ‘만남’을 추억으로 떠올리고 있다. 사실 그리움이란 것 자체가 처음부터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사건이 빌미가 되어 미추의 형태로 무의식을 통해 기억되어 있다가 감성적 충동으로 소환될 뿐이다. 현재 소환하려는 ‘그때’의 시간 속에 내장된 ‘그리움’은 화자의 추억으로 존재한 아름다움임을 말해준다. 시인은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간의 집합체를 ‘광장’이란 장소로 한정하고 있다. 그 광장은 내면의 심상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지리적 특정을 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남의 대상도 모호성을 더해주고 있다. 결국 화자가 찾아가는 그리움의 ‘그때’는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한 아름다웠던 시절을 의미하고 그 시절에 대한 향수로 상기된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과거에만 존재한 ‘그때’를 사회가 팍팍해질 때마다 소환할 것이다. 가다 멈출 때는 “다시 처음으로 리셋된다/ 머리를 들고 시야를 길 끝에 고정하고/ 천천히 천천히 그리운 그때를 생각한다”면 광장에 이미 당도하여 아름다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초>는 일반적 식물성에 대한 특이한 생태성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이미 ‘부활’이란 말 자체가 종교적 의미를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풀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자연법칙이다. 풀도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부활초’란 것의 영원성은 정신적 지향으로 위안 삼을 수밖에 없다. 마음 속에 존재한 현실감에서 비롯한 시적 비유로 한정한다면 부활이란 의미가 부적절한 것만은 아니다. 어차피 일상을 살아가며 누구나 부닥치는 현실이 곧 절망일 때가 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현실은 주체가 아닌 주변인적 타자로의 강요가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삭막한 ‘사막’같은 현실에서 나눔이나 포용의 의미가 실현된다면 절망적인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결과를 놓고 본다면 부활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공중전화 부스를 지나칠 때면
나도 모르게 돌아보는 오래 된 습성,
달개비 꽃 같은 문방구를 지나 칠 때마다
하얀 편선지와 0.5촉 볼
모나미 볼펜이 사고 싶어지는 습성처럼
빨간 그리움이 우두커니
늙어가고 있는 그 곳에는
이제 너에게 보내는 송신음도
닳아지고 없지만
회억의 모퉁이를 돌아 올 때마다
한 줄기 바람으로 안겨오는 네 모습
풋보리처럼 푸르기만 했던
청춘의 한 가운데에서
네 가슴으로 다이얼을 돌리면
여러 날 뚜뚜뚜~
몇 날 며칠 네 전화번호는
처참하게도 내 그리움만 갉아먹었지
되돌아오는 길에는 늘
달무리, 짓물러진 내 눈매처럼
아슴아슴 번지던 밤이었으리라
딸깍!
너의 귀에 빨간 그리움을 걸어두고
공중전화 부스를 걸어 나오면
너는 어디에도 없는 빈 다이얼처럼
오래토록 공명음만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차르르 딸깍 뚜뚜뚜~
-<공중전화 부스를 지나칠 때면/ 서지숙>
공중전화는 우리 일상의 중요한 통신 수단이면서 생활의 편리와 도시 수준의 척도를 나타내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주어진 기능을 수행할 때의 이야기다. 휴대폰이 급격히 보급되면서 공중전화도 차츰 생활에서 멀어져 예전처럼 빈번한 이용률은 볼 수 없다. 도시의 거리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가 잊었던 향수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마저 향수라는 기억을 갖고 있는 세대와 달리 더 이상 수요층은 멀지않아 사라지고 말 것이다. MZ 세대라는 요즘 청년들은 공중전화보다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활용해 SNS 같은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거리 곳곳에는 통신 수단으로 잘 활용되고 있는 듯 공중전화부스가 예전 자리를 그대로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거의 방치된 경우가 많다. 그것은 시대 착오적 이면서 미관상 불편한 것일 수 있다. “공중전화 부스를 지나칠 때면/ 나도 모르게 돌아보는 오래된 습성,/ 달개비 꽃 같은 문방구를 지나 칠 때마다/ 하얀 편선지와 0.5촉 볼/ 모나미 볼펜이 사고 싶어지는 습성처럼” 멈칫거려지며 다가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는 것이다. 공중전화 한 통을 사용하기 위해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진기한 풍경으로 멀고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공중전화를 요긴하게 활용했던 세대에게만 존재한 추억이다. 그렇게 생활의 한 부분을 담당해왔던 공중전화가 늙어가는 것처럼 쇠락을 거듭해 젊은 세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늙어버린 할머니에게도 생기발랄한 소녀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공중전화 부스는 혼자서 옛날의 영광을 생각하며 찾아오는 사람 없는 자리를 우두커니 지키고 있다. 시인이 살아오며 경험한 모든 것과 함께하고 있는 “빨간 그리움이 우두커니/ 늙어가고 있는 그곳에는” 인생의 생로병사처럼 회한 같은 그리움만 가득하다. 그 공중전화를 통해 무수히 날렸던 사랑의 밀어도 상대방 없는 송신음으로만 남아있다. 사랑을 얻고자 해서가 아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즐거웠던 아름다운 청춘기의 추억들이 가득 묻어있다. 그런 공중전화부스는 단지 화자만의 가슴속 추억이 아닌 2000년 대 초반까지만 해도 모두의 통신 수단으로 사회의 신경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제 그것마저 세대 간극이 커서 옛날이야기처럼 까마득해질 날도 멀지 않다. “딸깍!/ 너의 귀에 빨간 그리움을 걸어두”었지만, 그리움의 시간을 향수할 세대는 과거 속 전설처럼 사라질 것이니 말이다. 시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범주로 한다.
<서해에서>는 시간의 경과를 추억으로 회상해간다.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는 시간의 중첩으로 축적된 시간들이 고스란히 ‘과거’로 내장되어 있다. 그 시간 속에는 빼곡하게 존재할 기억들이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 기억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방황하듯 “핏빛노을 속을 달려 서해, 서해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사람’이 아닌 ‘파도’만이 ‘찰강찰강’ 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움의 대상인 사람이 아닌 파도라니 그 파도와의 만남을 통해 역지사지하는 공감에 빠져든다. 그 파도도 누군가의 그리움을 향한 일념으로 먼바다를 건너 찾아온 것임을 안다.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파도의 단념을 보며 “순간, 초췌해진 내 안창으로 무너지는 사구/ 그리운 사람들의 ...” 상상 속 모습을 만나게 된다. 과거 속으로 무너져 쌓여가는 추억들은 마음에 고스란히 저장될 것이지만, “서해에서는 덧없는 기다림도 더 그리운 것도/ 다시는 없으리라 했다 다시는”이란 문장처럼 사람에 대한 절실함을 드러낸다. 그리움은 기다림만큼이나 지루한 시간을 읽어내는 것임을 ‘서해바다’는 말해준다.
사랑을 떠나왔다는
정법사 비구니
파르스름히 깎은 머리가 슬펐다
떠나온 여자와 남겨진 남자의
저 아득한 거리
빈 마음 목탁소리로 채워보지만
사무치는 그리움일까
쉽게 써 내려가지 못했던
첫사랑의 연서처럼
염불하다가 들썩이는 어깨
무릇, 사랑이란
몇 생을 돌다가 다시 만나는 것
뎅그렁 울리는 풍경소리
잊어라
잊어라 하네
-<정법사 비구니/ 윤혜련> 전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불교 사상에서 ‘사랑’은 진부한 이야기가 된다. 더 큰 붓다의 정신을 수행하기 위해 모시며 정진하는 곳이 사찰이라면 그것은 더 위중한 말이 된다. 부처를 간곡하게 모시는 인연을 수행하고 있는 ‘정법사’ 스님의 모습을 통해 화자는 곡절을 안고 있는 삶을 담담하게 유추해간다. 과거 한 시절 누구나 있을 법한 ‘사랑’의 시간을 힘들게 건너오며 서로 다른 길을 가야만 했던 “떠나온 여자와 남겨진 남자의/ 저 아득한 거리”는 끈질기도록 현재까지 인연으로 존재하는가를 묻고 있다. 한 편의 시 속에 내장되어 있는 미련이 이별 후에도 압축된 서사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시간 속에 많은 사건이 개입되어 있어 현재도 진행 중 일지 모를 속세의 번뇌를 떨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휩쓸고 간 자리에 부처를 받아들인 ‘비구니’의 생애가 꼭 슬플 수만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화자의 관점일 뿐이다. 오히려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것에서 벗어남(해탈)을 통해 인간으로서 갖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과거 속세의 이야기가 ‘비구니’의 현재의 전부인 것처럼 유추해간다는 것은 시적인 발상일 뿐이다. 어차피 시가 감성으로 촉발하는 것이라면 시적인 상상력은 그 의지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가 형태 없는 실체를 문장으로 드러내었듯 화자의 시적 감수성은 정법사 대웅전의 처마 끝 ‘풍경소리’로 재현되어야한다.
<소나기>의 ‘소나기’는 시적인 풍경에서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가 궁금하다. ‘소나기’는 지상에 닿는 순간 형체도 없이 소멸하고 만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형상을 갖고 있으면서 ‘소나기’처럼 스스로 해체되어 사라지는 것들은 많지 않다. 그만큼 소나기가 갖는 속성처럼 화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과거의 시간도 형체가 없음을 암시한다. 그 기억은 철저하게 몸으로 체험한 특수한 것들이다. “저녁밥을 먹는 찰나 번뜩이는 하늘의 빛/ 놀란 별들은 자리를 뜨고/ 툭, 소리와 함께 백열등이 꺼지고/ 텔레비전 속사람들이 일순간 사라졌다”는 시 속 정황도 찰나적인 상황임을 말해준다. 그 사건을 통해 또 다른 기억들이 연쇄적으로 소환되고 있다. 소나기를 동반하여 천둥과 번개가 치며 순간 발생한 정전 사태 속에서 모든 것들이 엉망이 되어 버린 듯 시각적인 분별마저 무용해져 버린 것이다. ‘더듬더듬’이란 것의 시적 의미는 인간의 오감 중 오로지 촉각만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행동해야 하는 하등의 동물성으로 이해된다. 인간의 삶도 알고 보면 손으로 만지고 느끼듯 시간의 축적을 통해 확인해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화자의 가족이 더듬거리며 찾아낸 성냥과 양초는 마음의 지혜를 확인해가는 시간이다. 다시 들어온 전깃불로 불편이 해소되지만, 정전의 시간을 통해 인간의 이성적인 분별력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를 확인했다. 어차피 삶의 일상은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된다. “열차가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오는 찰나/ 그 시절 소나기 잠시 머물다” 간 것처럼 흡사한 과거 경험이 기억으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지저귀던 새 부리 끝에
바람은 흩어지고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는
등 굽은 할머니가
떠놓은 정한수 옆
빨간 왕관이 그려진
라디오 한 대
시작 버튼만 누르면
‘할머니’하고
궤도를 벗어났던 말들이
달려와 안길 것만 같은 그곳에
헬레니움 꽃대를
가만히 품어보는
늙은 호박덩쿨 위로
드문드문 나란히
종일 혼자인 헬레니움
꽃잎 흩날리더니
끝내
꽃그늘진다.
-<헬레니움/ 이윤희> 전문
국화과 식물인 ‘헬레니움’의 각양각색의 꽃 모양을 본다. 꽃이 피는 시기는 요즘 들어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만큼 다양한 일조와 시차 조절을 이용해서 개화 일정을 변경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의지로 변화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간의 생로병사의 과정만큼은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다소 생명의 시간을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노화를 완전히 멈추게 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현상을 바꿔보려는 인간의 의지는 고래古來이후 지금껏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마저 쉽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세월을 얼굴에 가득 담아버린 ‘할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정한수’는 나약한 인간의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그 옆에서 하루의 안녕을 정성으로 빌었을 인간의 모습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그렇게 시작해야만 안심 되어 직성이 풀릴 ‘할머니’의 애장품인 “빨간 왕관이 그려진/ 라디오 한 대”를 시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 라디오는 할머니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 라디오를 통해 잃어버린 추억을 회복하고 조금이나마 삶에 대한 희망을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시인의 상상력이 가미된다. 할머니가 라디오 버튼을 누르면 금방이라도 “‘할머니’하고/ 궤도를 벗어났던 말들이/ 달려와 안길 것만 같은 그곳”에 대한 향수 같은 외로움을 해소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 할머니처럼 묵묵히 늙어가는 호박 덩쿨도 그렇고 그 사이사이 꽃대를 올린 “종일 혼자인 헬레니움/ 꽃잎 흩날리더니/ 끝내/ 꽃그늘진다.”라며 계절을 통해 만개한 꽃의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인간의 생과 비유해서 그려 내고 있다. 그것은 곧 삶의 모든 과정도 자연의 순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도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허물어지고 흩어지는 것은 생명 속에 이미 내장되어 필연적인 것으로 이행되기 때문이다.
적막감마저 감도는 “비 갠 하늘/ 나뭇잎을 스치는/ 햇살이/ 미끄럼을 타며/ 폴짝 튀어 오르는/ 놀이터의 텅 빈/ 세계”를 바라봐야 하는 <초록이 짙어지는 날에>의 시제처럼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병상의 불편한 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간절히 갈망하는 “아기 걸음으로/ 오늘은 오십보/ 내일은 육십보/ 천천히 걸어보자”는 심정은 절박한 것이다. 그런 환자처럼 누구나 겪어야 할 생로병사가 과정이라 하더라도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초록이 짙어지는 날’의 단상은 많은 고통을 서로에게 요구할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문 선사시대의
버겁고 어두운 뚜껑을 연다
산계, 수계, 구릉 지대 암울한 흑백사진
용암과 석회암의 으쓱오싹한 동굴에서
힘차게 페달을 소리내어 밟는다
오색등불밑에 시원한 물바람을 맞으며
힐끔힐끔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
괴이한 탄성을 자아낸다
발굴의 흔적을 영상화하고 반복 상영한다
출토된 유물에서 삶의 흔적을 파헤친다
생김새 모양을 따서 이름을 붙이고
전설의 고향을 찾아가 재미있게 입담을 풀어본다
역사의 구석진 뼈조각을 퍼즐하며
병아리 감별사처럼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인간 기본을 바탕으로 상상해 본다
해와 달과 별을 쫓아 돌아가는 흐름을 관측하고
불의 변화에 시간을 쪼개고 더듬어 본다
별들의 빠른 화살에 쾌감을 맛본다
과거속에 발빠른 시간을 건져 올려
뜬구름위에 일목요연하게 나열한다
가상의 세계를 현실에 접목하고
꿈꾸듯이 환상의 멋진세계로
뜬구름의 멋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현재로 정확하게 한바퀴 돌아온다
화석이 남긴 고귀한 발자취를
툭-툭 털어가며 하나도 남김없이
쌍돋보기를 빗겨 대고서 진지하게
현재의 인류에서 발을 멈추고
새신발을 다시 꺼내 신는다.
-<선사시대의 흔적/ 전표건> 전문
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한 세계가 발굴되었다. 평범한 지층 속에 감춰진 또 다른 세계의 유물과 그 유물을 온전하게 누리며 살았을 인골을 발굴해낸다. 그 인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시, 공간을 초월한 시대 공간에서 실재한 것이라면 선사시대를 새롭게 수정해야 한다며 떠들썩할 것이다. 요란한 뉴스들로 온통 도배될 것이고 한동안 흥분한 뉴스를 반복해서 전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고 그렇듯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간이 지나면 관심도 시들해질 것이고 이내 조용해질 것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냉정을 되찾은 현대인들은 그것을 선사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한 거라며 볼거리 문화를 창출해낼 것이다. 당연하게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 상업성은 현대인들에게 현실적이면서 필수 항목이다. “입을 굳게 다문 선사시대의/ 버겁고 어두운 뚜껑을 연” 곳을 단장하여 선사 유적관으로 전형화典型化한 선사 유적관을 찾아간 듯하다. 시인은 동굴 안에 재현해놓은 유구遺構들을 관람하면서 영상으로 확인해간다. 그 확인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유구의 특성과 이름이 붙여진 상세한 내용까지 소상하게 알게 된다. 지금껏 아무것도 아니었던 지층 속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아득하게 단절된 세계의 인간들이 살아온 일말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 죽음 곁에 매장된 선사의 유구들은 존엄을 지켜 사후 영원불멸로 이어가려 하였겠지만, 그 엄청난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죽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사후 세계는 인간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영역도 시대의 요청 앞에서는 허망한 것이다. 작금에 이르러 관람용 이동 수단을 활용해 그곳을 맘껏 돌아다닐 수 있게 해놓았기 때문이다. 전표건 시인의 시적 대상으로 전입한 선사 유적관은 우리가 알지 못한 세계에 대한 리얼한 현장 체험이다. 가상현실처럼 다가온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볼 수 있다는 실재한 인간의 근원을 확인한다.
<거미줄에 버림받은 방앗간>의 풍경처럼 과거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시간이 시대를 구획하고 탄탄했던 토대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시간이 문제인 것이지 금방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다행스럽게 아직까지 유효한 것은 기억해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촌을 기반으로 살아온 삶의 중심에는 ‘방앗간’이 존재한다. 모든 것의 최고를 가리키는 것들은 희소성을 갖고 있다. 면 단위나 몇 개의 마을 단위로 힘깨나 서서 쟁취한 방앗간은 농촌 사회에서 대표적인 부의 상징물이다. 방앗간 집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농촌에서 더 좋은 것은 벼를 가공하여 쌀로 탈바꿈시킬 수 있는 첨단 산업 시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시인도 남들과 다르지 않아 그런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여름 내내 고생한 농부의 보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방앗간이다. 수확한 벼를 잘 말려 도정을 하고 나면 한 해 농사의 전 과정이 하얀 쌀알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잘된 농사는 쌀 모양부터 다르다. 최상품은 쌀이 희고 고르고 통통해서 부스러진 좁쌀이 거의 없다. 농부의 손바닥에 올려진 한 움큼의 쌀은 배고픈 농부의 긴 겨울을 버티는 희망이었다. 온정이 맴도는 방앗간을 주변으로 풍성한 삶의 사연들이 하나 둘 기억에서 소멸되고 있다. 더는 그것마저 입에 올린 사람들이 없어진 요즘이다. 요란하게 돌아가던 방앗간도 예전처럼 활기를 놓아버려 가동을 멈춘 지가 오래되어 “여기저기 온통 거미줄이 쳐 있었다”는 풍경으로 쇠락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표건 시인의 시 두 편 속 생로병사는 무릇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다.
내외담 움켜잡고
얼굴 붉힌 별당 아씨
혼자서는 외롭다며
지척을 다그치다
볼우물 깊게 파놓고
헤죽헤죽 웃는다
-<능소화/ 채동선> 전문
능소화 핀 돌담은 시골스런 풍경을 연출하는 데 있어 그만한 것이 없다. 능소화가 한국적인 전통 가옥 구조의 외곽을 담당했던 돌담이나 느슨하게 개방된 울타리에 잘 어울리는 것은 꽃의 색감과 적당히 줄기를 뻗어내는 습성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능소화 꽃 빛깔은 강렬하지도 않으면서 붉은 계열의 은은한 황톳빛을 품은 농촌의 심상을 닮은 듯하다. 화사하게 핀 능소화 꽃은 이파리로 수줍게 감싼 듯하여 천해 보이지도 않고, 붉어도 요염하지 않아 더 소박해 보이는 절제미를 보여준다. 거기에다 많지 않은 꽃송이를 매달아 피고 지며 줄기의 생육만큼만 키를 높여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그 눈길이 마침 능소화 핀 담벼락에 가린 ‘별당 아씨’가 있는 곳이라면 내면에 은폐된 서사의 진전은 가팔라진다. ‘아씨’의 외로운 마음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유일한 ‘능소화’이기 때문이다. 그날그날 ‘아씨’가 “혼자서는 외롭다며/ 지척을 다그치”는 조급한 마음처럼 능소화 꽃의 색감이나 흔들림은 미묘하게 달라질 것이다. 능소화 꽃의 이미지를 인간의 내면적 소요의 전언체로 활용한 시의 전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시를 통해 조명한 능소화 핀 시점과 ‘별당 아씨’의 청순한 시간은 동일한 것으로 하나로 귀결된다. 전혀 다른 식물성과 인간성의 대비는 결국 시인의 시적 심상 안으로 수렴되면서 비본질적 요소를 거뜬히 해소한다. 따라서 그 자체의 존재 방식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애완견 시대>에서는 요즘 들어 부쩍 일상화된 ‘애완견’의 잦은 노출로 인해 발생되는 풍속을 세태의 사회 현상으로 부각하고 있다. 사회 변화의 추세란 것이 꼭 인간 중심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일부 사람들은 공동체 개념으로 주거공간에서 함께 살며 ‘애완견’도 가족으로 이해되는 세태이다. 그렇지만, 시인이 보는 인식은 아직 거리감이 멀다. 사실 대다수 사람의 인식은 시인과 같은 통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예전 우리네 풍속은 아기에게 은팔찌를 채워 무병장수를 빌어 주었다. 또한, 금목걸이도 특별한 날의 선물로 주고받았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진귀한 물품을 개에게 채워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원에서 수시로 출몰하는 애완견의 호사하는 현실을 보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소중하게 애지중지하던 애완견들이 하찮게 버려진 것도 흔한 일이다. 어차피 소중한 피붙이 이상으로 애지중지한 애완견도 결국은 쇠사슬에 묶여 끌려다닌다는 것의 이해는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가 궁금하다. 애완동물과 인간의 공존에 있어 미치는 영향은 많은 시간을 통해 규명될 것이다.
지금까지 아홉 시인의 시를 통해 가을이라는 계절성을 통해 드러난 심상의 변화가 시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대다수 사람의 삶이 그러하듯 주변적 사물들이 갖는 이미지에서 천착한 사유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동일한 사회 속에서 단순하지 않은 개별성이 단순함을 걸러내고 더 깊은 내면의 소요를 충동할 수 있다면, 시의 정서에 부합한 것이다. 문장으로 구축한 시의 영역은 지난한 고통을 요구하며 수용해야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란 데에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