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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1일 피곤한 저녁과 달리 잠을 푹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에 몸이 한결 가볍다. 어제 도서관에서 보낸 딸도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는데 사실 공부하는 것이 노동하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힘들다. 시간이 늦어 학교에 태워다 주려다가 혼자 간다기에 배웅만 했고 식사를 하는 중에는 아들이 오늘도 말없이 등교를 한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가서 기구운동을 하고 이어 런닝을 했지만 실전에서는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아직도 아쉬움이 있었다. 12시경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수업을 한다고 교실로 향하고 점심을 하면서 바라본 11월의 창밖은 분명 어제와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는 눈 내리는 겨울이 더 생각났고 역시나 학원으로 가면서 바라본 거리는 낙엽과 함께 코트 깃을 올린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오후에 수업을 마친 뒤에는 춘천마라톤의 미련을 씻기 위함으로 11월20일 토요일 서울에서 실시하는 하프마라톤을 신청했다. 풀코스의 절반이지만 이번에는 화려하게 골인지점에 들어올 수 있도록 남은 기간 열심히 연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했고 내일은 아내와 관악산을 가기로 약속한 날이라 일찍 자리에 누웠다.
2일 식사를 마치고 관악산에 가면서 아내가 매주 화요일은 오늘처럼 산행하는 날로 정하자지만 생활을 하다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새벽마다 안산을 오르면 몰라도 작년에 북한산을 겨우 두 번 갔고 2010년 올해도 처음으로 산행을 나서는 마당에 매주 동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4호선 지하철을 이용하여 과천역에 내렸더니 9시30분이 되었고 과천중학교 후문과 과천향교 앞을 지나 관악산에 들어섰다. 산 입구는 그림에서나 보는 것처럼 낯이 익었고 흐르는 물에 떠가는 단풍은 무릉도원을 연상케 할 만큼 아름다웠다. 컵라면과 장갑을 구입하고 1시간20분을 걸어 땀이 흐른 채 남서쪽 연주사에 올랐더니 평일임에도 등산객들이 적지가 않았다. 커피를 마시고 능선을 따라 연주암 부근으로 갔더니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아내가 걷지를 못하여 할 수 없이 아래로 이동했다. 낙엽이 날리는 관악사지 터에서 가져온 음식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소풍을 온 것처럼 가볍게 시간을 보내다 3시경 왔던 길로 내려왔다. 집으로 오는 중에 영식이 전화가 와서 이수역에서 내렸다가 방배동 골목으로 이동하여 함께 식사를 했다. 늦은 시간에는 지하에 있는 노래방까지 갔는데 긴 시간을 아내와 보냈더니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유익했다.
3일 늦게 들어와 자다가 일어나니 어지럽고 속까지 불편한데 그 동안의 술 마신 다음 날 증상과는 분명히 달랐다. 식중독인가 화장실만 드나들며 오전을 보내다가 11시경 가까스로 체육관으로 걸어가 운동을 시작하고 땀을 흘리며 보냈다. 점심에 홍제역 근처로 가서 얼큰하고 따뜻한 동태탕을 사 먹었더니 정신이 들고 속까지 편안하여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니 점심을 먹은 아들은 PC방에 간다며 나가고 이후 몇 시간을 누워서 보내다가 저녁에는 논술교실에 가서 수업을 했다. 어제 관악산 산행은 모처럼 즐거운 나들이가 되었지만 밥과 술 노래까지 비용을 많이 쓴 친구한테는 미안함이 많았다. 수업을 마친 저녁에 아내가 다음 수업으로 미리 올라와 기다리고 집에서는 딸이 아프다며 시들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4일 어제 저녁부터 안색이 좋지 않은 딸을 태우고 학교에 갔다가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5천원 용돈을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쉬는 중에 아내가 아들 성적표를 가져왔는데 충격과 실망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고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학업에 소홀히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할 수도 없는 기대 밖의 성적이었고 옆에 있는 아내도 돌처럼 굳어 있다. 국어 4등급에 영어와 수학이 각각 6등급이라니 정신 없는 속에서도 잘못 전달된 것인가 싶어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현재 상태로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어림도 없고 2,3학년 때를 기대한다지만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정신과 마음을 잡으려고 바로 홍제천에 나가 50분을 달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넋을 잃은 상태로 점심이라고 아내와 라면을 먹었다. 학원에서 수업을 하는 오후에 부천 고모님께서 위독하다는 연락이 와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간 이식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한다. 내일 오전에 가기로 하고 저녁에 돌아와 식사를 하려는데 삼겹살이 상한 채 냉장고에 뒹굴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고기가 상할 정도까지 무관심하다니 아들의 성적이나 음식이 썩어가는 집이나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통곡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5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에 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했고 날이 밝으면서는 아들이 식사도 하지 않고 학교에 간다. 오전에 운동을 마치고 성산동 BMW센터에 가서 엔진오일을 교환한 뒤 성산대교를 건너 경인고속도로를 달려 부천에 있는 순천향병원에 들어섰다. 11시에 병실로 들어가니 얼굴이 노랗고 황달이 심한 고모가 나를 반겨 아픈 마음으로 손을 잡고 인사를 올렸다. 휠체어에서 식사하는 것을 바라만 보았는데 한 눈에 봐도 중증환자의 모습으로 삶의 마지막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급한 마음에 담당 의사를 만나러 갔더니 간이식 외에는 방법이 없고 지금까지 생존한 것도 기적이라며 냉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들이 딸이 며느리가 누가 나서 이식을 자처할 것이며 1억 원의 비용까지 동생의 가족이 결정을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다. 고등학교 동창이 이곳에서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어 통화를 하고 현재의 상황을 전했지만 돌아온 답은 역시 기적이 없었다. 1시에 병원을 나서면서 고모의 얼굴을 다시 보았는데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10살 무렵 마을에서 얼마쯤 거리의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고 나는 벌판을 건너 마당이 넓은 고모가 사는 그 집을 자주 찾아 갔었다. 갈 때마다 반갑게 맞이하여 맛있는 음식을 가득 채워 준 고모가 지금은 죽음의 문턱에 와 있다니 슬픔이 말할 수가 없었다. 학원으로 돌아와 점심을 사 먹고 오후에 수업을 하다가 저녁에 논술교실로 이동하여 9시30분에 일정을 마쳤다. 집으로 내려와 식사를 하는 중에 아들로 인한 충격이 아직도 남은 듯 초점이 없는 아내가 앉아 있고 암담함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6일 토요일 아침에 아들이 특별활동으로 하얏트호텔에 8시30분까지 간다고 서두른다. 거리는 가까워도 차편이 쉽지가 않아 내가 나섰고 서울역을 돌아 남산을 달려 목적지에 시간보다 일찍 도달했다. 11월이 되었어도 남산은 경치가 아름다웠고 아들을 내려준 후에는 약수역과 동대문을 거쳐 9시에 학원으로 들어갔다. 산행을 하자는 영식이 전화가 왔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아 다음으로 미루고 오전에 마라톤 후기를 완성하여 조선일보 사무국에 올렸다. 오후에는 논술교실 학부모들에게 보낼 강의계획서를 만들고 동문회 카페에는 ‘가을에’라는 현대시 한 편을 올려 해설까지 해 두었다.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본질을 탐구하는 정한모 선생의 작품으로 더 성숙할 수 있도록 고독을 만들자는 역설적인 내용이다. 아침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왔기에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괴롭고 울적한 마음에 독립문에서 하차하여 바로 안산으로 올랐다. 중턱을 걷다보니 지난번 폭우로 산의 계곡에 변화가 생길 정도였고 내려와서는 체육관으로 들어가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에 늦게 들어온 아들이 대꾸를 하지 않는다고 아내가 집이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는데 실망과 분노가 많았을 것이다. 당사자인 아들이나 화를 내는 아내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는 나까지 오늘은 차라리 지옥이 더 나을 것만 같았다.
7일 어제의 상황을 지켜본 나로서는 밤새 괴롭지 않을 수 없었고 아침에 창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남산조차 보이지 않는다. 잠실운동장을 출발한다는 중앙마라톤 예고를 들으며 홍대 앞을 지나 양화대교를 건너 7시30분 교회에 들어섰다. 오늘은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나마 예배를 마치기도 전에 나왔다. 한강을 건널 때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온 단감을 가져가라는 영식이 전화도 왔는데 이것도 여유가 없어 다음으로 미루었다. 합정동으로 들어와 아침으로 콩나물 해장국을 사 먹었고 9시부터는 논술교실에서 일요일 일정을 시작했다. 연속으로 수업을 하고 1시경 집으로 내려오니 어제 야단을 맞은 아들이 표정도 없이 자장면을 먹고 있어 점심 값을 포함한 용돈을 주었다. 마음이 불편할 아내는 산에 갔다가 내려오면서 공부하러 간 딸과 도서관 근처에서 만나 칼국수 점심을 먹는다는 문자가 왔다. 오후에 다시 논술교실 올라가 수업을 했고 저녁에 도서관에서 딸을 태우고 돌아와 식사를 하는 중에는 아들과 아내가 연달아 들어왔다. 살얼음을 걷는 거실의 분위기라 먼저 방으로 들어갔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우리 집의 현재와 미래가 불안하기만 했다.
8일 어제 늦게까지 비가 뿌려서 오늘은 기온이 내려갔고 일찍 일어나 새벽을 보내다 아침을 맞이했다. 날씨는 잔뜩 흐리고 딸과 식사를 하는 중에 아들은 식탁 근처는커녕 얼굴도 보이지 않고 도망치듯 학교에 간다. 살면서 자식 농사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성적도 낮지만 예절이나 의리도 없는 아들로 인하여 내 인생은 그리 탐탁하지가 않다. 패배감을 넘어 어떤 때는 굴욕스럽기까지 이런 정신적인 고통이 나에게 있을 줄은 살면서 만분의 일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왔지만 11월20일 마라톤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이래저래 마음이 무거웠다. 점심을 먹은 오후에 시간이 없어 가지 못한 나를 대신하여 영식이가 경상도 단감을 아파트까지 직접 싣고 왔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 나를 이해하고 격려해 준 친구가 고마웠고 언젠가는 보답할 날도 있을 것이다. 3시경 학원으로 나가 수업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했고 아침부터 생긴 혼란스러움으로 일찍 자리에 누웠다.
9일 어제 일찍 잠이 들어 오늘 아침까지 12시간은 잔 것 같은데 그 동안 부족했던 잠을 만회한 기분이다. 딸과 자다가 새벽에 안방으로 들어온 아내가 어제 저녁에 첫눈이 내렸다고 중얼거려 TV를 켰더니 지난밤에 바로 그쳤다는 뉴스다. 아마 잠깐 날렸을 것으로 아무튼 서울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TV화면은 성큼 겨울이 온 것 같은 분위기로 가득하다.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마라톤 연습으로 월드컵경기장을 향하여 달리는데 찬바람에 은행잎이 날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 잎이라도 잡아보려고 팔을 저었지만 닿지 않았고 아마 황금을 탐하는 인간의 욕심이 이 상황과 유사할 것이다. 오늘은 13킬로 1시간 20분을 달렸고 곧바로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더 하다가 돼지고기를 구입하여 점심으로 요리를 했다. 내가 만든 음식이지만 맛이 있어 좋았고 오후에 학원으로 갔다가 저녁에는 홍제동에서 영식이와 동태탕으로 식사를 함께 했다.
10일 자고 일어났더니 아침에 하필 동태찌개를 끓였고 어제 저녁에 많이 먹었던 터라 다시 무국을 만들어 나대로 식사를 했다. 오전에 아내는 김치를 담근다고 부산하고 나는 홍제천에 나가 월드컵경기장 아래를 돌아오는 10킬로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땀이 흘러 기분이 상쾌했고 곧바로 체육관으로 이동하여 운동을 더 하다가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며칠 후에 수능이 있어 주변에 있는 고3 수험생들을 응원하려고 롯데백화점에 들렀다가 학원으로 돌아오니 3시가 되었다. 시내는 G20 회의로 교통통제가 심하여 번잡했고 광화문에서 대학로까지 서울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난 느낌이었다. 마라톤후기 응모가 오늘 마감이라 접수를 미리 한 나도 당선이 되었으면 좋겠고 오후에는 교육청에서 모집하는 상담선생 응시원서를 작성했다. 수업을 마치고 9시경 집으로 돌아오니 사람도 없고 밥도 없어 짜증이 났고 밤에는 대꾸가 없다고 아내가 아들에게 또 목소리를 높여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 착찹한 심정으로 밖으로 나갔다가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구입하여 다시 물었다.
11일 오늘까지 서울시 상담교사 신청일이라 오전에 학원으로 가서 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완성하고 가져온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정릉에 있는 고대부고와 집에서 가까운 대신고 그리고 아현동 환일고를 돌며 접수를 했더니 3시가 지났다. 곧바로 체육관으로 이동하여 오전에 못한 운동을 하고 초저녁에는 지하철을 이용하여 이수역에 가서 친구와 순댓국을 먹었다. 11월11일 오늘이 빼빼로 날이라고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유독 많았고 날이 어두워지면서는 갑자기 천둥과 번개까지 동반한 비가 내렸다. 밤에 방배동 골목으로 들어가서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 집이나 낯설지 않아 역시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될 수도 있겠다. 10시경 늦가을의 찬바람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아무도 없는 거실이 썰렁하여 안방으로 갔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12일 어제 일찍 잤다가 아침에 거실로 나오니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갔고 아내도 외출을 하여 혼자서 식사를 했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열심히 했더니 정신이 맑아졌고 고모님 소식을 들어볼까 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불통이다. 아내가 밖에서 칼국수를 먹는다기에 나도 학원으로 나가 해장국으로 점심을 했고 계단을 오르면서 본 아래층 학원은 내일 이전준비로 분주하다. 학원의 규모가 커서 임대료가 너무 많이 지출되었다는 젊은 원장에게 실력이 있으니 다시 시작하라고 위로와 격려를 했다. 오후에 환일고에서 상담교사 연락이 와 동사무소에 나가 등초본 노량진에서 경력증명서까지 필요한 서류를 준비했다. 평일 오전을 활용하려고 시작한 것인데 구속된 시간과 적은 수입 등 이해타산을 따져보니 한편으로 갈등도 생겼다. 저녁에 교회에서 우현이까지 포함된 음악회가 있어 서둘러 출발했는데 차량정체가 심하여 중간에 들어가 자리를 했다. 교회라지만 오늘은 흘러간 노래와 트롯트까지 동원된 음악이 흘러 오랜만에 즐거울 수 있었고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왔다.
13일 자고 일어나 딸과 식사를 하는 토요일 아침에 아들이 서대문 도서관에 간다며 거실을 나선다. 이른 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나가기에 점심이라도 사 주러 가겠다니 그 때는 학원을 간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깜짝 놀라 더 이상 말을 안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이 요즘 왜 이렇게 변했는지 답답함을 넘어 슬프기까지 했다. 오전에 딸을 태우고 정독도서관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점심을 했고 학원으로 가서는 이사하는 아래층을 배웅했다. 오후에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잎들이 사라진 가로수를 보았는데 계절의 변화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그런가하면 주말을 맞이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도심의 분주함을 만들었고 오가는 행렬로 어지러움이 생길 정도였다. 저녁에 딸을 태우러 도서관에 갔다가 집으로 가면서는 쇼핑을 했고 식사를 마친 밤에는 치킨까지 시켜서 함께 먹었다.
14일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갔더니 오늘은 ‘너의 손에 고기가 있느냐’라는 목사님의 말씀이다. 모든 것은 주님이 좌우하는 일이니 매사에 겸손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성경에 밑줄을 그어가며 고심을 해도 아리송하기만 했다. 예배를 마치고 2부가 시작되기 직전에 식당에서 우현이와 식사를 하고 내부순환도로를 거쳐 논술교실로 돌아왔다. 이번 주는 기온이 많이 떨어진다니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이고 수능과 함께 나한테도 긴장된 한 주가 될 것이다. 오후 1시까지 연속으로 수업을 하고 집으로 내려와 점심을 한 뒤에 4시까지 안방에서 TV와 시간을 보냈다. 날이 흐려 산에 가거나 활동을 하기에는 시원하여 좋을지 몰라도 집에만 있는 사람들은 우울해지기 딱 좋은 음침한 하늘이다. 오후에 다시 논술교실로 올라가 의젓해진 고등학생들 수업을 하고 저녁에 정독도서관으로 가서 딸을 태우고 동네로 들어왔다. 중학교 1학년 딸이 시내까지 나가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다니 차를 두고 삼겹살과 갈매기살을 사 주려고 손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15일 거실에 나와 식사를 하는 중에 오늘도 아들은 소리도 없이 학교에 갔다. 어젯밤 뉴스에서 아침에 식사를 잘하는 학생이 그와 비례하여 성적도 좋다더니 아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곧바로 환일고에 들어가 서류를 제출했는데 아현동 언덕에 위치한 서울역이 내려다보이는 학교다. 교장과 교감을 만나 미팅을 하고 학교를 나서는 중에는 조선일보에서 마라톤 후기가 당선되었다 전화가 와서 기쁨과 보람이 생겼다. 곧바로 학원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고 수업을 마친 오후에는 몇몇 친구에게 당선을 알렸더니 문자가 총알처럼 날아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는 대치동 학원에서 투자금 일부와 이익금이 입금되었고 식사를 마치고는 저녁수업을 하러 논술교실에 올라갔다. 밤에 마라톤 후기 당선이라고 아내와 딸이 박수를 치며 축하를 하는데 반응도 없는 아들은 고개를 돌린 채 코만 훌쩍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