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병수(주보회원/주,벡셀 대표)님이 보내온 글: 한계령을 위한 연가! ◈
폭설이 내리면 1947년생 보성 출신 문정희 시인이 2010년에 발표한 <한계령을 위한 연가>가 떠오른다. 팍팍한 현실에 지쳐갈 즈음 폭설이 내린 한계령을 지나다 나무도 숲도 흰 꽃으로 피어난 동화의 세계를 만나면, 누구나 잊고 살던 내면의 심연에 빠져들 것이다.
갑자기 폭설이 내려 고립된 고요 속에서 생명에 대한 시원인 못 잊을 사람과의 사랑을 떠올리며, 현실에 지친 자신에게 주는 상상의 선물, 모든 이해관계를 떠난 한계령의 폭설 속에 진정 사랑하는 이와의 짧은 고립은, 분주한 현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갈 이에겐 삶의 동력이 될 것이다. 비록 한순간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겐 영원일 수도 있음을 짧은 축복에 몸서리쳐본 사람은 안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현실과 순수가 드러나는 이 시는 한겨울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정병수- (주)벡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