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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여행기③ 절박했던 순간을 넘어(2018.9.19.수.)
18시 30분 나리따 →달라스 행(13시간 소요)
페루 여행 중 비행시간이 가장 긴 경로였다.
저녁 시간대에 출발해서인지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소고기 요리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우리 셋 모두 맛있게 먹고 이내 잠이 들었다.
7시간쯤 흘렀을까. 남편이 속이 답답하다며 옷이 축축하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체한 듯싶어 계속 등을 두드리고 손의 혈을 찾아 꼭꼭 눌렀지만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더럭 겁이 났다.
승무원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으나 해결책이 없었고, 고작 탄산수(진저에일)를 부탁해 내가 복용하고 있던 몸살 감기약이라도 먹어보는 도리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막막했던 순간이었다. 다행하게도 한참 후 차츰 진정이 되는 듯 했다.
매스컴에서나 접했던 비행 중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돌발 상황, 위급 사태에서 동승한 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얘기. 그 숨막히는 두려움 속에서 절감할 수 있었다.
여행 출발 며칠 전부터 출발 직전까지 무리한 일정과 여행 사전 준비로 피로가 겹쳤을 테다. 게다가 답답하고 더운 비행기에 대비한답시고 반팔, 반바지, 샌달을 신고서 강한 에어컨 바람을 계속 쐤으니 한기(寒氣)가 들어 체했었나 보다. 이건 쿠스코까지 이어져 남편을 힘들게 했던 목감기의 전조 증상이기도 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이 되어 남은 비행시간 별 일이 없었다.
미국이 넓은 나라라는 인식 때문인지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이는 광활한 녹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공항 내부 또한 타국에 비해 구석구석 시원스레 넓었다.
달라스 공항에서도 페루 리마행 환승 시간이 6시간이나 틈이 있었다.
공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유명 대형 쇼핑몰 쇼핑 계획이 있었는데 딸은 나의 건강을 우려해 취소를 했다. 너무 미안해서 말도 못하고 눈치가 살펴졌다.
다음부터는 딸이 절대 엄마와 함께 여행하지 않을 것 같다고 미안한 내심을 남편에게 비치면서도 이순(耳順)의 몸은 무겁기만 하였다.
9/20(목) 페루 리마에 첫걸음 하다
미국 달라스에서 출발하여 7시간의 비행 끝에 페루 리마에 도착하였다. 시간은 새벽 5시(한국시간은 19시)였다.
산고(産苦)와 같았던 기나긴 비행시간을 견디고 산뜻한 새벽녘 리마에 도착했다.
달라스에서 출발하여 리마가 가까워오자 다시 설레고 긴장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남편과 난 상당히 가벼운 몸이 되었다.
비행기 내에서 ‘꽃보다 청춘’ 동영상을 즐겁게 보고 아들의 블로그를 교과서인 양 훑으며 곧 마주할 페루에 대해 열심히 예습을 했다.
우리를 반겨주는 리마의 새벽 공기는 생각보다 차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공항, 여행객들의 다양한 계절 불문의 패션, 피부색, 언어들. 세계가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인간의 무한을 향한 욕망의 상징, 바벨탑으로 인한 만국인들의 불통거리인 언어 장애. 온 지구인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면 세계가 한 민족 , 한 지붕 같을 텐데.
공항을 나서자마자 아들의 말처럼 “탁시!”, “탁시!”하며 택시 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미터기가 없는 리마 택시는 부르는 값에서 무조건 깎아야 한다고 단단히 교육을 받은 터라 우린 느긋했다. 딸이 우버택시(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택시로 거리와 시간에 따라 요금을 산정하는 특징이 있음)를 스마트폰으로 불렀다. 그러나 소통에 착오가 있어서 일반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40솔(1솔은 약 400원 정도)에 흥정을 한 후 호텔 숙소를 향했다.
흐릿하고 안개 낀 리마의 구시가지는 말 그대로 구식 건물에 구식 거리답게 깔끔하지도 않고 너저분한 느낌이었다. 도로의 자동차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탈 수조차, 타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낡고 고물이 다 된 소형차들이 덜덜거리며 활보를 했다. 한국의 현대, 기아가 생산하는 리오, 프라이드, 레이, 모닝, 아반테, 엑센트, 엘란트라가 자주 눈에 띄었다. 페루의 경제 수준이 가늠되었다.
“Korea, Kia, Best!”
한국자동차는 페루에서 인기라고 했다.
퇴색한 구시가지에 비해 신시가지인 미라플로레스는 깨끗하고 조용한 거리, 깔끔하고 현대적인 건물들이 남태평양을 빙 둘러 아름다운 항구 리마로서 체면을 살리고 있는 듯 했다.
전형적인 페루인의 모습(짙은 눈썹, 숱 많은 검은 머리, 순박하고 선하게 보이는 쌍꺼풀진 큰 눈, 오동통한 몸짓, 작은 키, 까무잡잡한 피부)이 아닌 세련되고 진화된 페루인, 서양의 백인들이 신시가지를 활보하고 있었다.
아담하고 스마트한 호텔에 도착하여 예약을 확인하고 무거운 케리어를 맡기고, 우리는 리마의 심장, 문화의 중심이랄 수 있는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이른 아침의 아르마스 광장!
동쪽의 대주교 궁전과 리마대성당, 서쪽의 산토도밍고 교회와 수도원, 리마 시청, 남쪽의 출판 검열본부, 북쪽의 대통령 궁으로 둘러싸인 네모난 아르마스 광장에는 몇몇 사람과 뚱뚱한 비둘기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남미라기보다는 유럽풍의 느낌이었다.
대통령궁 앞. 미동도 없이 보초를 서고 있는 미남 근위병. 근거리마다 제복 입은 경찰들의 배치는 여행객들의 치안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 아‧점의 해결과 필요한 용돈을 위해 환전을 하기로 했다. 마침 우리에게 파란 조끼를 입은 거리의 환전상이 다가와서 생각보다 쉽게 환전을 했다.(페루에서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정식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는 거리의 환전상들에게 환전을 한다. 가짜 환전상들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검색한 맛집 식당을 찾기 위해 경찰이나 현지인들에게 물었더니 옆 사람들에게 물어가면서까지 하나같이 최선을 다해 길을 안내해 주었다. 우리가 만난 페루인들은 모두가 참 친절하고 순박했다. 만국어인 영어가 페루에서는 별 소용이 없어서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 가까이에 정보센터가 있어서 여러 가지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시내에서 스마트폰 유심칩을 사서 장착을 하고, 가고자 했던 식당은 문을 닫아버려서 안내받은 중국인거리로 방향을 잡았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도보를 하는데 70,80년대 한국의 정경을 보는 듯했다. 길거리, 차도 옆에서 밀차에 음료, 꼬치구이, 밀빵, 장신구 등 아주 비위생적이고 조잡한 물건들을 팔고, 사고 하는 인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말끔하지 않은 거리에 허접한 상점들, 거무튀튀한 흑인들이 많았다. 모든 것이 청결해 보이지 않아 선뜻 들어가고 싶은 식당이 없었다. 한참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사람이 많이 들어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인상 좋고 친절한 젊은 청년들이 잽싸게 주문을 받더니 금세 흰죽과 빵을 대령하였다. 숙주나물이 들어간 흰죽인데 닭뼈를 고아 육수로 만든 영양죽 같았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가격도 아주 저렴하였다. 한 그릇에 9솔밖에 안 되는. 거기다가 서비스로 나온 튀긴 빵도 맛이 담백하여 먹을만 하였다.
이틀만에 지상에서 먹은 식사였다. 보잘 것 없는 소찬이었지만 원기회복제가 되어 리마거리를 힘차게 걸을 수 있는 활력이 되었다.
다시 걸어서 아르마스 광장에 이르니 대통령궁에서 군악대의 우렁찬 군악에 맞춰 근위병들의 교대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매일 정오에 행하는 의식이라는데 내 보기에 침묵의 엄숙함만 있지 군인다운 기개나 절도가 없어 보였다. 많은 관광객, 현지인들로 한낮의 아르마스 광장은 활기가 넘쳐났다. 유명 여행지다움이 역력했다.
발길을 돌려 대성당의 지하에 있는 카타콤으로 향하였다. 카타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서 예배를 했던 곳이다. 가운데(cata), 무덤들(tumbas)의 합성어로써 무덤들 가운데 (among the tomb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카타콤은 꼬불꼬불한 어두운 굴속에 있었고 내부가 꽤 넓었다. 예배당의 흔적, 무덤, 수많은 해골, 뼈 등이 보존되어 있었다. 어둡고 음산한 카타콤을 돌아보며 예수님을 향한 당시 신앙인들의 확신에 찬 신념과 그로 인한 긴박했을 그들의 신산스런 땅속의 삶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실증적 현장을 두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당시의 고초한 신앙의 생활을 선택한 그들을 도무지 상상해 볼 수 없었다.
발음이 별로 좋지 않은 영어 해설사는 카타콤의 어둡고 절박한 내용처럼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애써 해설을 하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영어 청취능력이 부족한 난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눈치껏 본 대로 느낀 대로 이해하며 채워지지 않는 궁금증은 영어의 필요성만 통감하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안내 리플렛조차 없는 것은 또 다른 아쉬움이었다.
카타콤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오니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카타콤 관람을 마치고 성당 층계에 나란히 앉아 점심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인데 풀풀 날아갈 것 같은 식은 쌀밥에 소시지 정도의 반찬이 전부였다. 한국 아이들 같으면 바로 쓰레기통에 내다 버릴 내용의 도시락이었다. 마주치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까맣고 큰눈의 아이들에게 동정심이 일었다.
광장 곳곳에서 여행객을 상대로 페루 전통물건을 파는 행상인들의 깊고 까만 눈도 사슴처럼 순박해 경계의 벽을 무너뜨리곤 했다.
리마의 첫날 일정이 마무리 되어 이른 오후이지만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껏 고생했던 사지를 쭉 뻗고 넉넉하게 휴식을 취한 후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푼토아줄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푼토아줄레스토랑’은 페루여행객들에게 상당히 유명한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보니 대기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내부는 피스코사워(Piscosour)처럼 예쁜 인테리어로 낭만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대기 끝에 우리 차례가 되어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메뉴는 페루의 전통음식인 “세비체(생선 등 해산물에 야채와 여러 가지 향신료를 첨가해 숙성시켜 만든 음식)”와 페루의 국민 칵테일인 “피스코사워(Piscosour)”였다. 한국에서부터 기대했던 “세비체”는 내 입에 썩 호감을 주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페루에서 정식으로 먹는 첫 음식이고 꽤 비싼 가격이기에 국물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이후로는 한 번도 ‘세비체’를 먹지 않았다)
낯선 이방에서 살짝 오른 밤의 취기는 케네디 공원의 낭만적 야경에 마음을 오래 머물게 했으며 이 감정은 여행을 마치는 때, 리마에 들렀을 때 다시 한 번 그 공원을 찾아 거닐게 하였다. (그러나 첫날 그 밤의 낭만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멀고 먼 나라 남미 페루에 와서 생전 처음으로 보고, 듣고, 걷고, 먹고, 느끼는 경험들이 꿈일까 생시일까 잠깐 혼돈 속에 빠지며 밀려드는 감사함에 “나도 누군가에게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하는 기도를 드리며 리마의 첫날밤을 맞이하였다.
첫댓글 4탄이 있겠네
마르코 폴로가 한국와서 무엇을 느꼈을까?
모두가 사람사는 곳이라 협잡꾼, 사기꾼, 안내꾼, 말동무꾼, 별이 별 사람이 다 살아사는 곳이 이 조그마한 지구 덩어리라 조금은 긴장도 되지만 나를 던져 버리면 그렇게 편한 것을 !
조그만 울타리를 벗어난 노년 부부, 그리고 딸, 할 말도 참 많고 느낌도 많았으리라 생각되요.
하지만 되짚어 보면 모든것 그 놈이 그 놈이고, 이 놈이 이 놈이고, 그 곳이 이 곳이고 결국은 그 곳이 이 곳이라는 생각
사람 사는 곳 모두 같은 곳이라는 생각 가끔 하여봅니다.. 4탄 기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커가는지요?
페루여행기.아주 소상히 읽었습니다. 누군가가 페루를 여행한다면 아주 많은 도움도 될 거 같아요.기온과 환경들이 바뀌니 힘든 부분도 있었나 봐요.사모님의 영어 실력,여행을 통해 점점 더 늘어날 듯합니다. 현지에서의 살아있는 경험만큼 더 큰 공부가 어디 더 있겠어요..페루여행 간법적인 경험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사모님 기도에 이미 응답해 주셨네요. 제 생각으로는(어디 저뿐이겠습니까) 사모님께서는 모든 하하님들에게 감사를 불러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한아씨 말이 맞아요^^
쫌 나이먹은 요정님 같아요~
선하신 눈매에 늘 앵두같은 입으로 감사를 전파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