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의 자랑, 존경하는 박완서 선생
나는 한국 문학의 거목(巨木)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인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선생을 존경한다. 내가 선생을 알게 된 계기는 젊은 시절 그의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를 읽으면서부터다. 그리고 국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과서에 수록된 <그 여자네 집>, <엄마의 말뚝>, <자전거 도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트럭 아저씨> 등 작품들을 읽고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더 친숙하게 되었다. 또한 나도 구리의 한 시민으로서 구리에서 살다 타계하신 선생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애착이 또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남양주에 정약용 선생이 있으면, 구리엔 박완서 선생이 있다. 그의 주옥같은 수많은 작품 중 특히 <휘청거리는 午後>를 가장 재미있고 감명 깊게 읽었다. 이 작품은 1976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결혼 문제를 중심으로 그 당시 우리 사회의 한 풍속도를 그린 세태소설(世態小說)이다. 삶의 방식이 각기 다른 세 딸을 둔 아버지 허성 씨 집안의 몰락을 그린 작품으로 세대 간의 갈등과 가치관을 실감 나게 그려 매우 흥미로웠다. 평범한 가장으로 가족을 더없이 사랑한 아버지가 물질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적 가치에 의해 그만 균형을 잃고 점점 무너져가는 과정을 읽으며 깊이 공감한 작품이다. 제목 <휘청거리는 오후>, 작품 전반적인 내용에 비추어볼 때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없으리라.
선생은 1998년 구리시 아치울로 이사와 13년 동안 살다가 2011년 돌아가셨다. 아치울은 앞으로는 한강이 보이고, 뒤로는 아차산이 둘러싼 아늑한 마을이다. 새 집을 지으며 벽에 분홍색 칠을 희망했는데, 건축업자가 그만 노란색을 칠했단다. 하지만 그는 노란색도 괜찮다 하여 이후로 그 집은 ‘노란 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집 마당엔 100가지가 넘는 여러 종류의 나무와 화초를 심어 길렀다.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놀랍고 아름다운 꽃과 허브가 마당에 철 따라 만발한다. 호미가 닳도록 꽃밭을 가꾸며 비록 힘은 들어도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
그는 아치울에서 전원생활 하며 많은 글을 썼는데, 특히 수필(隨筆)을 많이 썼다. 흙냄새 물씬 풍기는 풋풋한 원고들은 산문집 <호미>, <두부>에 실려 신선한 생명력을 전달하였다.
나는 그중 2002년에 지은 <트럭 아저씨>를 참 좋아한다.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수업한 작품이기도 하다. 문체도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고 섬세하며 유려하다. 날이면 날마다 빠지지 않고 트럭에 싱싱한 청정 야채와 과일을 싣고 동네로 오는 트럭 아저씨 이야기를 소박하게 그리고 있다. 어김없이 하루에 두 번씩 오는 채소 장수 아저씨의 단골이 되면서 흙 묻은 풋풋한 채소를 다듬는 소박한 일상의 기쁨을 생생히 묘사한다.
또한 순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트럭 아저씨를 보며 인간적인 따뜻한 정을 느낀다. 시골 마을에서 싱그러운 자연과의 일체감, 농민과의 유대감,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에 대한 애정(愛情)이 잘 드러나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나도 무척 좋아한다. 그 당시 수업 도중에 “‘툇마루에 퍼더거리고 앉아’는 무슨 뜻이에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어떤 책이에요?”하고 학생들이 질문한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선생은 마을 뒤쪽에 있는 그다지 높지 않아 정겹고 친숙한 아차산을 사랑하여 자주 산책길에 올랐다. 사뿐사뿐 흙을 밟는 쾌감을 느끼며 산책하는 도중 꿩, 다람쥐와 마주치기도 하고, 소쩍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하루는 아차산을 오르다 집 열쇠를 잃어버려 애태웠는데, 그다음 날 산길 나뭇가지에 그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다정한 배려(配慮)에 큰 기쁨을 느끼며 산길이 혼자의 길이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오솔길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선생이 매일 산책했던 그 길을 따라 나도 사부작사부작 걸어 오른다. 푸릇푸릇 연둣빛 신록(新綠)이 우거지고, 온갖 꽃들이 방긋방긋 반기고, 귀여운 다람쥐도 만난다. 길 옆엔 사람들이 오고가며 돌 하나씩 쌓아 만든 서낭당 돌무더기도 있다. 나도 돌 하나를 살며시 얹으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산새들의 청아한 노랫소리도 그저 흥겹기만 하다. 말 그대로 호젓하고 고즈넉한 산책길이다.
한참을 오르니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앙증스럽게 생긴 물레방아가 홀로 돌고 있다. 쓸쓸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한 산속 계곡물에 맑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보니 퍽 재밌고 인상적이다.
KakaoTalk_20260503_183016861.mp4
10.26MB
산길을 내려와 ‘노란 집’ 쪽을 향해 내려간다. 지금은 선생의 따님 호원숙 작가 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대문 앞에는 ‘유년의 뜰’이란 조그만 팻말이 서 있다. 회양목, 청화 쑥부쟁이, 꽃범의꼬리, 추명국, 목수국, 꼬랑사초 등 각양각색 화초들이 활짝 반긴다. 이 자그마한 뜰에도 선생의 정성과 땀방울이 깃들어 있으리라. 집 안쪽엔 라일락꽃이 피어있고, 목련, 감나무, 대나무도 보인다.
그 노란 집 부근에 아담한 카페가 하나 있어 들어가 향 좋은 커피를 마신다. 카페 주인은 선생에 대하여 익히 잘 알고 있고, 선생의 따님 작가 가족과도 두터운 친분으로 가끔 교류한다고 귀띔해 준다. 나도 언젠가 기회 되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아마 선생이 지금 살아계신다 해도 <트럭 아저씨>와 같은 소박한 글은 다시 쓸 수 없으리라. 왜냐면 그 당시와는 달리 이 마을에도 편의점, 식당, 커피숍 같은 가게가 꽤 들어섰기 때문이다.
나는 구리시립 인창도서관을 많이 애용한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땐 도서관으로 가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신문도 본다. 집 가까이에 이렇게 쾌적하고 좋은 도서관이 있다는 건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도서관 2층에는 2009년부터 많은 애독자들이 선생의 작품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를 중심으로 <박완서 자료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단행본은 물론 친필원고, 신문 스크랩, 영화 테이프와 드라마 대본, 잡지를 전시하고 있다. 선생도 도서관에 자료실 만드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했다고 한다. 도서관에는 특별히 이용객들이 선생의 작품을 직접 필사(筆寫)해 보도록 원고지와 필기구를 마련해 놓았다. 나도 가끔 그곳에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 그의 작품을 음미하며 또박또박 정성껏 필사하기도 한다.
또한 구리시에서는 해마다 선생의 문학적(文學的) 업적을 추모하는 낭독 공연을 열고 있다. 2012년 제1회 ‘다시 만나는 그리움- 박완서, 배우가 다시 읽다!’를 시작으로 매년 선생의 작품을 음악과 연기, 낭독으로 선보이고 있다. 나도 구리아트홀에서 매년 열리는 낭독 공연 행사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2024 작년에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그리고 타계 15주기인 올해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즐거이 관람하였다. 선생은 다방면으로 구리시가 품은 참으로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문학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박완서 선생은 생전에 오로지 책과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어 하였고, 그래서 지금 당연히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변함없이 듬뿍 받고 있다. 앞으로 선생의 훌륭한 작품을 더 많이 찾아 읽고, 선생처럼 깊은 울림을 주는 좋은 작품을 쓰리라 다짐한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1964년 대구의 한 국민학교 이윤복(1951~1990) 학생이 쓴 일기를 묶어 출판한 책. 1965년 이 책을 원작으로 김수용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당시 우리 사회의 가난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나도 당시 국민학생 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이 영화를 관람한 기억이 있다.
가난한 가정의 맏아들 이윤복 어린이의 아버지는 술과 노름에 빠지고, 어머니는 아버지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버린다. 윤복이는 두 동생을 보살피는 한편 구두닦기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그런 와중에도 일기를 꼬박꼬박 쓴다. 어느 날 우연히 윤복의 일기를 읽고 감명받은 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 일기장이 책으로 출판되어 세상에 나옴과 동시에 날개 돋친 듯 팔린다. 그 일기책을 읽고 전국에서 보내오는 온정과 도움으로 윤복은 마침내 가난에서 벗어난다. 윤복의 아버지도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어머니도 돌아와 가족은 다시 함께 살게 된다.
※참고 자료: 구리 인창도서관 <박완서 자료관>
첫댓글 박완서님의 휘청거리는 오후 아직 접하지 못해서 시간 내서
한번 읽어 봐야 겠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가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선생의 자전적 소설이고,
<휘청거리는 오후>는
70년대의 풍속도를 그린 세태소설로
흥미진진한 소설이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