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서두르지 않으면서 천천히 걸으리라
뜻 세워 가는 길에 여유롭게 살펴 가며
빈손에 무거운 짐도 필요하면 짊어지리
2025년 여름
박홍재
핑계에도 거리가 있다
할머님 밭농사는
육신 갉아 먹는 좀비
날마다 허리 아파 앉으면서 아야! 아야!
일하지 마시라 해도 눈만 뜨면 밭에 간다
평생 하던 일 관두면
뭐 하고 살아가노
동무와 화투도 치고 쇠고기도 사묵야지
손주들 연필 한자리 사줄 돈도 벌어야제
할매 일손 못 막는다
핑계에도 거리가 있다
손주들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봐도
뾰족한 대책이 없네, 할머니 곁 안 지키면
오늘도 아픈 허리
복대를 두르고서
호미를 지팡인 양 밭머리 들어서면
어디서 나온 힘인지 아들 손주 따돌린다
돌확의 둘레
암자 뜰 귀퉁이에 낙엽에 둘러싸여
하늘이 흘린 눈물 온몸 가득 머금은 채
수시로 하늘빛 풍경 새겼다가 지운다
산새들 지저귐도 우듬지 춤사위도
햇볕을 소복하게 담아도 보았다가
산그늘 내러올 때쯤 염불 소리 담는다
하루를 보내는 게 곰곰이 생각하면
눈물도 흘려보고 기쁨도 맛보지만
쌓는 공 받아내는 일 둘레마다 우주다
문고리
갑자기 빠져버린 방안의 고리 하나
밀기는 쉬웠지만 당기긴 어려웠다
오가는 추의 균형이 멈춰버린 어둠이다
날마다 살 비비며 정이 깊어 가는 동안
뻣뻣한 내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
악수는 우리의 관계 습관이 돼 닮았다
홍시
비바람 몰아쳐도
보살핀 햇살 덕에
담장 옆
먹감나무
잘 익어
낯 붉혔다
서너 개
쟁반에 담아
엄마 앞에 놓고 싶다
가뭄
몸에 밴 물기마저
송두리째 걷어가고
모른 척 지나가는
구름 한 점 미운 짓에
메말라
쩍 벌어진 틈
고개 떨군 풀잎 하나
새끼손가락
비바람 눈과 햇살
하물며 향기까지
장독대 옹기장 속
푹 삭혀 우린 맛을
콕 찍어
맛본 손가락
집안 내력 꿰찼다
박홍재 선생님,
시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카페 게시글
회원신간
박홍재시조집《핑계에도 거리가 있다》2025.08.18.작가
김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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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8
25.08.1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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