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곽재구)
시인 곽재구
어릴 적 밥을 거른 채 동화책에 빠진 내게 할머니가 말했다. “어쩌끄나 책 각시에 빠지면 평생 가난하게 사는디….”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셨다. 책 각시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책 각시가 뭔데?”라고 물으니 할머니는 “이놈아, 서방이 네 각시도 모르냐?”고 되물어 나를 당황케 했다.
할머니가 책 각시 이야기를 할 때면 어린 마음속에 아련한 여운 같은 게 느껴졌다. 모국어가 지닌 어감이 살갗을 스친 최초의 기억이라 할 것이다.
여자아이는 자라 볼 붉은 사춘기가 된다. 볼에 붉은 연지를 바르고 길게 땋은 머리에 자줏빛 갑사댕기를 드리운다. 이름만 불러도 부끄럽고 바람이 머리칼만 흔들어도 설레는 열일곱, 열여덟의 나이. 붉어진 볼을 감추기 위해 연지를 바르고 세상에 대해 한없이 설레는 마음을 갑사댕기로 표현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갑사댕기를 가만히 만지는 어깨 듬직한 사내의 손을 만나고 손의 주인과 혼례를 치르게 된다.
깨 쏟아지는 신접살림. 신랑은 말한다. 오메, 내 각시 어디서 왔는가. 각시라는 말은 그렇게 세상에 태어난다. 각시라는 말에는 삶에 대한 시정이 스미어 있다. 삶이 아무리 핍진해도 각시야, 라고 부르는 순간 마음 안에 아카시아 꽃 내음이 물큰 피어난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이라고 노래한 백석의 시를 처음 읽다 박각시라는 말을 만났을 때 내 가슴이 설렜다. 할머니의 책 각시 생각이 난 것이다. 박각시는 저물 무렵 초가지붕 위에 핀 박꽃을 향해 날아오는 나방의 이름이다. 박각시가 날아올 때 사람들은 산언덕에 올라 바람을 쐰다. 고개를 꺾어 은하수를 보며 마음이 답답하지 않을 그날을 꿈꾼다. 백석이 남긴 아름다운 북관 사투리 중에서 나는 박각시란 말을 가장 애틋하게 생각한다. 박꽃과 나방의 세상 인연을 각시라는 말로 살갑게 엮어준 흰옷 입은 사람들의 배려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말없이 산언덕에 앉아 은하수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속으로 박각시가 날아오르는 것이다.
각시라는 말 속에는 한국 사람들이 세월 속에서 만난 삶의 원형질 같은 게 느껴진다. 각시라는 모국어가 있는 한 한국인의 어떤 슬픔도 가난도 미래도 초라하지 않을 것이다.
첫댓글 박꽃과 나방의 세상 인연, 박각시.각시.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엿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