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열매가 익기까지
추대식
choopr412@naver.com
농원은 처참했다. 과목은 부러져 나뒹굴고 익다만 낙과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유달리 심술을 부린 50여 일의 태풍과 장마를 뚝심만으로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숯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속이라 했다. 친구 창해는. 하늘의 무심함에 그동안의 경배마저 모두 지워졌다고 했다.
처진 어깨가 부러진 나뭇가지 닮은 창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의 어깨를 다시 곧추세워주는 일은 피해복구에 동참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아내도 내 뜻에 선뜻 공감을 보냈다. 10여 년 전 귀농한 친구는 대봉감과 아로니아 재배를 제2의 천직으로 삼았다. 나는 지난봄까지도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거들어 그의 즐거움을 보탰다. 매해 빠짐없이 내 일처럼 동참한 청송농원이다. 가지마다 화사하게 봄을 맺고 있었는데, 그 희망이 모두 바닥으로 떨어진 셈이다.
챙 넓은 밀짚모자가 한여름 뙤약볕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이 때를 만난 듯 불끈 힘을 썼다. 몸 빼 바지에 팔 토시를 낀 아내도 부산하게 거들었다. 바둑판 위에 흩어져 마구 뒤섞인 흑백 바둑알을 복기復棋하듯 농원의 질서를 되찾는 일이 아득해 보였다.
채 익지도 못한 낙과들이 안쓰러워 조심조심 걸음을 뗐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마구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안의 모든 서러움까지 다 쏟아놓고 싶은 속내를 눈치라도 챈 듯 아내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나로도 충분한 아침 식사가 되는 귀한 과실이 슬픈 표정을 짓고 올려다봤다. 불현듯 지난 시절이 비바람에 얻어맞은 농원과 오버랩 되었다.
스물여섯에 두 해 뒤따르는 아내와 결혼했다. 준비랄 것도 없이 시작한 살림은 몇 만 원짜리 월세 단칸방이었다. 연탄아궁이 부엌과 비키니 옷장, 흑백TV, 간이화장대가 고작이었다. 새벽녘 좁은 부엌에서 연탄과 석유 타는 내음을 맡으며 신접살림하는 신부는 고역이었다. 심심치 않게 연탄가스 중독사고 소식도 들렸던 터라 아내가 부엌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삶은 달걀과 우유 한 잔 곁들인 사과 한 알로 아침을 대신했다. 점심은 근무지에서, 저녁도 잦은 야근으로 인해 밖에서 해결했다. 평일 가정식은 아침 한 끼가 대부분이었다. 그때부터 습관이 된 ‘과일 식의 아침’이었다.
공직에서 스물여덟 해, 기업에서 열두번의 가을을 보내고 은퇴했다. 소식을 접한 친구는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인생 2모작의 선배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은퇴했으니 삼식이다. 군소리 말고 먹어라. 모쪼록 주는 대로 먹어야지, 투정이나 잔소리는 안 된다.”는 농담까지 섞었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바깥 활동도 해야 한다.”는 덧붙임에 고맙기도 했고, 은퇴 이후 삶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퇴직 이후 달라진 점 중의 하나는 눈치를 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아내의 옆모습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역경을 함께한 동반자로서 내 부족함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동반의 역할을 못 한 것 같은 회한이 밀물졌다. 직접 짐을 꾸려 이사를 해야 했던 그 시절, 잦은 이동으로 스물네 번을 옮겨 다녀야만 했던 군인 아내의 고충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부산 강원 호남 서울 등 전국으로 장거리 이사를 하다 보니 애지중지 아끼던 살림이 파손되기도 했다. 뒷수습은 순전히 아내 몫이었다. 아찔한 위험도 따랐다. 1984년 1월, 전남 광주에 있던 부대에서 강원도 근무를 위해 이동했다. 통운 차량에 짐을 싣고 6시간쯤 이동할 때쯤 폭설이 내렸다. 도로 폭이 좁아 절벽 끝에 붙어있다는 화천 아흔아홉 고개. 차는 미끄러운 오르막을 오르는가 싶더니 움찔, 비틀거렸다. 천길 낭떠러지. 아차, 기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두 딸을 양팔에 품어 앉고 동승한 아내, 몸을 떨며 얼굴이 두려움과 공포로 뒤덮였다.
어린 시절 신작로를 오가던 장돌뱅이 차량들이 있었다. 오일장에 보따리를 풀고 싸며 이동하는 장면들은 장난 섞인 호기심과 동경이 있었지만, 막상 내가 겪고 보니 그때의 과정과는 판이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에 나를 다독였다. 오로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그 와중에 아이들의 학교를 옮겨야 했고 보살펴야 했다. 이사 후에는 정리를 도맡아 하면서 항상 통증과 고열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가정사에 무심했고 나랏일에 몰두한다는 핑계로 도와주지 못했다. 아내의 머리맡에 놓아둔 감기약과 해열제가 가장의 사랑 표시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집안일이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하고도 표시가 나지 않는 것. 강원도 찰옥수수를 까는 것처럼 담양 대나무밭에서 캔 죽순을 벗기는 것처럼 끝이 없는 일이었다. 아이 둘을 반듯하게 내보내고 둘만 지내는 요즘도 그런데, 한창 클 때 그 고충이 오죽했으랴. 지나간 사십 년은 이미 엎지른 묵힌 포도주다. 바닥을 흥건히 적셔도 다시 담을 수 없는 미안함이다. 이제야 청소기를 돌리고 분리수거하고 음식 쓰레기를 버리며 소소한 잔정을 뒤늦게야 배우고 있다.
부부란 결국 비바람 견디고 끝까지 매달려, 튼실하게 결실을 맺는 열매 같은 존재가 아닐까? 때로는 쓴맛, 신맛이었다가, 단맛에 이르는 열매. 거기에 오묘한 감칠맛까지 보태진 숙성된 열매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른 나이에 나를 믿고 서약했던 그 약속을 지켜준 마음이 지금을 맺게 했다.
세 번의 주말 봉사의 끝이 보인다. 농원도 질서를 잡아가는 것 같다. 목발 짚은 나무도 있지만, 그 표정은 의연하다. 비록 태풍에 상처를 입었지만 나무들은 좌절하는 기색이 없는 듯하다. 소리 없이 아픔을 삼키는 것 같다. 어떤 조건에서든 모든 생명력을 끌어 모아 결실을 맺으려는 분투奮鬪만 있을 뿐이다.
하나의 열매가 익기까지, 오랜 기다림과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은 간절한 생의 애착에서 태어난다. 풍요로운 가을을 매달 청송농원. 돌아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에세이 문학, 2021 봄 호》 완료 추천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