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세대, 격동의 시국에
강병철(소설가, 2대 회장)
새천년 밀레니움의 문이 열리면서 『대전·충남작가회의』의 제2대 지회장으로 역임했으니 내 나이 40대 초반에 명함에 새길 이력 하나 건진 것 같다. 연임으로 4년(2001-2004년)을 맡았으니 내 인생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랬다. 초대 회장 김흥수 선배의 시스템에서 부회장을 맡았으므로 혹여 바통을 이어받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있긴 했었다. 여차저차 사연을 거쳐 마침내 임했으니, 운명이다.
나는 보스 체질이 아니었으나 『민중교육』 해직교사 캐리어와 몇 권 소설책의 후광으로 겁 없이 ‘풍덩’ 던졌던 것도 같다. 벗들 중 일부는 서울행 출향 작가가 되었고 우리 지역에서는 이은식, 김백겸, 백남천, 김흥수, 최교진, 이은봉, 황재학 등의 선배 세대와 권덕하, 이강산, 전병철, 유지남, 박수연 등의 후배 그룹이 그물망으로 받쳐주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사무국장은 함술래 시인이었고 2년이 지난 후 김열 시인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두 작가 모두 탁월한 친화력으로 많은 글지들을 끌어안아 항상 전화통에 콩이 튀었다. 나는 주로 도장만 찍고 쏘주잔 따라주는 역할에만 충실했으나 홀가분했던 건 결코 아니다. 함술래 국장에게는 거의 지급하지 못한 활동비를 김열 시인 때부터는 소액이나마 지급이 되는 소소한 변화도 간신히 만들어냈다. 오래도록 미안한 일이다. 연간지 『작가마당』을 네 차례 발간하면서 부족한 비용은 사적 친분을 찾아 스폰서를 받기도 했다.
기우는 청춘의 막바지, 당시의 작가들은 여전히 급박한 사상가였다. 시국이 그랬다. 제5공화국 신군부 정권하에 해직과 투옥을 옆구리에 끼고 살던 앞 시대 그 몸의 연장선이다. 해방과 통일과 민주화의 슬로건이 일상화되었다. 거대 보수 야당이 ‘대통령 탄핵’을 의결하자 시민들의 촛불 시위로 후폭풍이 더 커지던 스크린도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응원단 ‘붉은 악마’의 유니폼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자물쇠처럼 닫혀있던 ‘레드 콤플렉스’의 덫도 타의에 의해 벗겨졌다. 언제부터였나,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면서 자본주의의 약진이 감지되던 시국이었고.
그즈음 발간을 시작한 청소년 잡지 『미루』는 회장의 직책을 내려놓고도 10년 동안 더 이어갔다. 이 잡지는 최은숙 편집장, 이정섭, 김병호, 국은정 시인 등이 몸을 투자했던 의욕 충만의 생산물이었다. 송성영 르뽀 작가, 윤여관 화가, 기수네 엄마 등을 찾아 발품도 팔면서 후일담 막걸리에 푹신 젖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면서 더 이상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마감했으니 안타까운 사태이다.
대천 임해수련원에서 실시한 170여 명이 참석한 1박2일의 ‘청소년 캠프’는 규모나 기획 과정 모두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문청 질풍노도들의 야간 외출을 철저히 금지했으나 젊은 럭비공들의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튿날 즈이끼리 해변가 캔맥주 후일담을 훔쳐들었으니 그게 꿈나무들의 에너지이다. 그 후로도 시화전과 청소년 백일장 강연회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힘들었지만 몸값이 올라갔다. 내 직장 서산여중으로 신경림 시인을 초청할 수 있었던 것도 회장이라는 배경 탓도 있었으리라. 그 와중에 『엄마의 장롱』, 『닭니』 『쓰뭉 선생의 좌충우돌기』 등 몇 권을 출산하면서 나름 몸집도 부풀렸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남북 자유 왕래의 기대로 부풀었고 평양에서 각각 100여 명이 넘는 대규모의 <남북작가회의 회담> 성사되었다. 그 교류가 지속될 줄 착각하고 나에게 배당된 티켓을 넘겨준 게 오래도록 후회스럽다. 그 후 북녘 땅 자물쇠가 열리지 않음을 보고 가슴을 쳤으나 지나간 일이다. 또 하나, 우리의 명칭이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한국작가회의>로 개명되었다. 민족이란 용어가 “진보냐? 보수냐?”의 그 치열한 토론 와중에 조직원끼리의 갈등과 상처도 있었으니 따로 거론하는 건 적절치 않다.
4년의 임기를 끝내고 김백겸 선배에게 회장을 넘기면서 나의 임기가 끝이 났고 몇 년 후 <작가회의>도 대전과 충남으로 분리되었다. 그래서일까, 긴 세월 내 몸처럼 붙어있던 <대전작가회의> 모임에 나가는 게 지금은 낯설다. 다시 2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 대전과 충남 그리고 세종시 작가들이 번개 모임으로 회동하는 구상을 꿈꾸기도 한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몇몇 벗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