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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싸늘하다.
몸서리 치도록 싫었던 지난 여름의 40도를 넘나들던 폭염이 새삼 그리워지기까지하는 것은 찬기에 쩔었음일까? 아니면 어느새 나이를 제법 먹었음일까?
'아빠. 건강 조심하셔야 해요. 이제 아빠나이 어느새 환갑이예요.'
두 달전 내 생일에 아들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환갑이라니? 아직 멀었어...... 또 그땬 나이 같은 것 너무 익숙해져서 이젠 별로 신경 안써. 아덜. 아빤 그냥 지나가는 세월에 너무 익숙해진듯 아주 무덤덤해.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내 시간은 별 의미가 없고....... 우리 손녀 태리의 시간이나 빨리 지나가서 쑥쑥 자랐으면 좋겠고...... 너희(아들 부부)의 시간은 나름 소중하게 좀 더디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이제 내 시간은 아무렇다해도 별 상관이 없을것 같애. 엄마 생각은 물론 다르겠지만...........'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의 차창밖으로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씩 떠올리면서 많은 생각들을 해본다.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을 떠나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 도착한 고속 열차는 이내 나를 차가운 낯선 도시에 덜렁 내려 놓았다. 역사를 나서니 트램(전철)과 시내버스들이 지나가고, 차가운 날씨 때문인지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도 몹시 분주해 보인다. 잔뜩 흐린 하늘에 싸늘한 바람만이 스치고 지나간다.
어디로 가지?
지금 나에겐 어디 정해놓은 호텔 바우처 한장 쥐어져 있지 않다. 이제부터 어딘가에 숙소를 구하러 찾아 나서야 한다. 허기도 몰려온다.
지난해 잠시 들른적이 있어 두 번째 방문이지만,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다시 찾은 해거름의 피렌체는 역시나 낯선 이국의 땅이었다.
스산하게 바람이 분다.
언제나 처럼.......... 내 여행은 늘 조금은 암울하고 슬픈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느낌들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지금 이탈리아를 여행중이다.
여행.
나는 왜 이토록 여행에 열중하고 있는 것일까?
'집 떠나면 고생인데 죽어라 여행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여행은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라고 내게 진지하게 물어오던 친구가 생각난다.
글쎄.
그때는 딱 꼬집어 뭐라고 정확히 답변을 못했던것 같은데, 마음 속에야 여행이 좋은 이유를 항상 간직하고 있지만, 때와 상대에 따라 그 대답이 묘하게 어려울 때가 있다. 미묘한 상황이면 늘 이렇게 에둘러서 회피하듯 '그 대답은 너가 직접 여행을 해보면 알 수 있어' 라고 대답해 주곤 한다.
'여행이란 것은 말이야...........'
여행이 가져다 주는 첫번째 즐거움은 '일탈(逸脫)'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긍정적이고 유익한 선에서의 일탈을 말한다.
일상을 떠난다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은 우리의 이성을 쉽게 마비시키고 주변과의 단절을 상기시키며 끊임없이 망설이게끔 조장한다.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잠시 벗어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어느정도의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부딪치게되는 낯선 환경속에서 얻게되는 자기성찰의 기회와 열망을 막연한 두려움이 자주 실행에 앞서서 좌절 시키곤 한다. 이를 과감하게 극복하고 낯선 길을 나서는 것이 바로 여행의 시작이며 첫 느낌이자 감동이다.
미지의 시간과 접해보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비밀의 문이 하나씩 하나씩 열려가면서 깨닫게되는 그 가슴 설레이는 떨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는 실제로 접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히 설명조차 불가능한 여행의 묘미이자 기쁨이라고 하겠다.
물론 여행이 늘 설레이고 기쁨만 있는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에 치이고, 차를 놓치고, 비행기가 날씨로 결항 되고, 소매치기로 여행비용을 모두 잃어버리고, 여행의 한복판에 태풍이 불어오고 하는 등등 때로는 여행이 우리를 가혹하게 배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때는 상처받고 커다랗게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여행의 일부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는 여행의 일정 단계에 올라서게 되면......... 그 시련과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이자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것이다.
지금 나는 그런 불편함이나 계획이 어긋나거나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나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여행 도중의 어려움 까지도 나름 내 방식대로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여행자가 되어있다.
가끔은 주변에서 여행을 '휴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곧 잘 접하고는 한다.
물론 가능한 일이다. 형편과 여건을 조정하면 그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주관하에서는 '여행'과 '휴가'는 별개의 사항으로 받아들인다.
휴가를 즐기려면 그 돈으로 '호캉스'나 '집에다 맛난거 좋은거 잔뜩 쌓아놓고 그냥 편히 쉬라'고 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늘 분주하고 준비할 것과 스스로 찾아서 해결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여행은 떠나온 일상보다 더 바쁘고 준비가 필요하고 불편하고 힘들고 늘 바쁘다. 중간 중간에 긴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때론 명상의 시간도 가져보지만, 여행을 통해 낯선것을 익숙하게 만들고, 이제까지의 나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결코 낭만적인 휴식을 기대하기는 좀 무리가 아닐까 싶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새로움을 얻어서 무사히 다시 돌아오는 것이 여행이다. 그리고 곧 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것이 진정한 여행이다.
여행의 본질은 어떻게 생각하면 구도자의 수도생활과 같으며, 명상적인가 하면 다분히 고루하고 따분하며 쓸쓸하다 못해 후회스럽기 까지 하는것이 바로 여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내가 지금 이탈리아 피렌체에 도착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대략 다섯개 정도의 권역으로 나누어서 여행을 준비 할 수가 있다.
첫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세적인 매력이 차고 넘치는 (움부리아 지방)을 꼽을 수 있겠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심장인 '로마'를 시작으로, 중세 성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 '오르비에토'를 포함하여,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한 '페루지아' ,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가 포함된다.
둘째는 로맨틱한 풍광이 사시사철 넘실대는 로맨틱한 (토스카니 지방)을 꼽겠다. 르네상스를 꽃피원던 찬란한 '플로렌스(피렌체)'와 중세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산 지미냐노', 캄포 광장으로 유명한 '씨에나'가 있고,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꼽히는 '피사"와 푸치니의 고향 '루카' 등이 포함된다.
셋째로는 이국적인 색채가 가득한 휴양지 (나폴리 지방)을 꼽을 수 있다. 가장 이탈리아적인 일상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나폴리'와 화산폭발로 한순간에 한줌의 재로 변한 고대도시 '품페이', 그리고 푸른 동굴로 유명한 '카프리 섬'을 포함해, 해안 절경을 간직한 '포지타노'와 '소렌토'가 여기에 포함된다.
넷째는 북쪽의 알프스 산맥을 기점으로 인접국가인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롬바르디아 지역)이 있다. 아름다운 풍광의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가 있으며, 알프스의 비경을 간직한 '코모 호수'와 '코르티나 담페초' '볼차노' 등이 포함된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 상업의 중심이자 최고의 도시인 '밀라노'를 여기 북쪽지방 여행지에 포함시켜야만 하겠다.
다섯째는 진짜 이탈리아를 만나려면 반도의 남부로 가라는 말이 있듯이 (시칠리아 지방)을 꼭 보아야만 할 것이다. 아랍풍의 문화유산이 그대로 남아있는 '팔레르모'를 필두로,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유명해진 '팔라조 아드리아노'와 '체팔루'를 포함해서, 살아 있는 화산 '에트나'와 시칠리아 최고 여행지 '타오르미나', 아테네에 버금갔던 고대 그리스 유적지 '시라쿠사'와 고대 그리이스 신전의 도시 '아그리젠토'와 보면 볼 수록 매력이 넘치고 머물고 싶은 '카타니아'를 결코 빼놓을 수가 없겠다.
끝없이 이어지는 코스 메뉴처럼 이탈리아는 전혀다른 매력으로 끊임없이 다가오고, 한 번 '이탈리아'라는 마법에 걸리게 되면 결코 헤어나지 못하고 또다시 이탈리아를 찾게된다.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또 사계절의 풍경과 느낌이 모두 전혀 다른 아주 독특한 매력을 가득 간직한 곳이 바로 이탈리아다.
그렇게 보자면 이탈리아만큼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 그리고 다채로운 줄거움을 선사해주는 여행지도 매우 드물것이다.
"이탈리아는 욕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욕망을 주고, 스스로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준다. 그리고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는 진지한 목표 없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 작가 루이지 바르치니.
이탈리아는 찬란한 서양 문화의 보고(寶庫)이다.
지중해를 건너 온 이집트 문명의 밑거름 위에 찬란했던 그리이스 문화와 헬레니즘까지를 하나로 융합시켜서 받아들였으며, 소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며서 부터는 오리엔탈 문명까지 흡수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문명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그런 문명의 터전 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시와 회화와 조각을 사랑하였고, 이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아름다움으로 승화 시켜서 마침내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다. 풍요로운 그들의 정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리골레토)와 (아이다) 같은 주옥같은 음악을 남기기까지 했다.
지중해의 눈부신 태양 아래로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완만한 산과 계곡에 둘러 쌓인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 여행자의 마음까지도 넉넉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이탈리아로의 여행은 언제나 각별하다.
이제 그 이탈리아의 제대로 된 매력을 피렌체에서 찾아 나서기로 해보자.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로 상징되는 피렌체(Firenze)는 아주 작은 도시다.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작아도 있을 것은 다 있는 도시가 바로 피렌체'이다. 아무리 헤집어 보아도 속이 꽉찬 도시, 그래서 여행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생각하던 무엇을 원하던 바라는 모든것을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곳이 또한 피렌체다.
발길닿는 곳으로 어디를 향하던지 역사적인 문화 유적지거나 미술관이다. 골목길을 싸돌아다니는 것이나 전시된 그림이나 조각들을 감상하는 것이 지겨워졌다면, 낮에는 거리 곳곳에서 펼쳐지는 작은 공연이나 퍼포먼스를 찾아 볼 수가 있고, 가끔씩은 늦은 시간 광장이나 골목안이나 작은 공연장에서 울려퍼지는 길거리 오페라 향연에 취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피렌체는 느껴야 할 것이 많은 도시 입니다. 낯선 이방인의 눈에는 많은 것들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코 사라지거나 없어진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비로소 피렌체를 느끼기 시작했을때........ 그때에서야 진정한 피렌체를 모두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모든것은 결코 아니랍니다.'
지난해 이맘 때 나는 아주 잠시 피렌체를 스쳐가듯 다녀간적이 있다.
그 시간 이후 어찌나 아쉽고 후회가 막심했던지........
그래서 이번 여행을 출발하기도 전에 피렌체에 대한 나의 간절함은 이미 피렌체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젠 즐기는 일만 남았다.
이젠 마음을 활짝 열고 두발로 걷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두 눈과 가슴에 담고 새기면 될 일이다.
아침을 맞아 상쾌해진 심신을 이끌고 내 발걸음이 가장 처음으로 향한곳은 (우피치 미술관) 이다.
여행자가 피렌체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바로 '우피치 미술관 입장권'을 예약하는 일이다. 하루나 이틀전에 예약하지 않고서는 미술관을 관람하기가 결코 녹녹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피렌체를 찾은 지금의 시기는 여행에 있어서 가장 비수기에 해당하는 씨즌이었다. 그래서 나는 에약이 없이 당일치기를 감행하기로 했다.
'까짓 오전에 예약만이라도 마친다면 설마....... 오후에는 들어갈 수 있겠지........'
--- 바사리의 걸작 '회랑.'
피렌체의 중앙역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에는 서점을 겸한 카페가 24시간 운영되고 있다. 내 취향에 딱 적격인 그런 장소다.
따뜻한 카푸치노 한잔에 크로아상 하나를 놓고 아침나절의 여유를 누려본다.
트램과 시내버스가 오가는 너른 도로를 가로질러 골목에 들어서면 길이가 족히 백미터가 넘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옆면을 바라보면서 따라 걷게 되고, 벽이 끝나면 파사드(facade. 건축물의 정면 구조물)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면서 비로소 여기가 피렌체라는 것을 여행자에게 상기시켜 준다.
광장을 가로질러 우측으로 휘어지는 골목을 쭈욱 따라나서다가 왼편으로 돌아다 보면 웅장하면서도 위엄이 가득 풍겨지는 요새같은 건물이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우피치 미술관이다.
건물의 위용에 놀라고, 건축물의 전면부 곳곳에 놓인 피렌체를 빛낸 위인들의 빼어난 조각상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갈릴레이가' 먼곳에서 온 낯선 이방인을 반긴다.
지난해에 비해서 미술관 입장료가 올랐다. 유럽의 물가상승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까?
하긴 '유럽 여행은 입장료와 기차표로 지출의 대부분을 쓰게된다는것 이미 오래전부터의 내 결론'이었으니........
'선조들의 유산으로 거져 먹고 사는 유럽 부러워하지 말고, 별반 남겨준거 없는 우리 조상 흉보지 말자.(상대적으로 평가할 때)'
특별 전시회 입장료가 다르고, 예약 수수료가 따르고, 또 돈으로 해결하라는 말 처럼 기다리지 않고 속행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또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면 가능하다. 어차피 우피치 미술관을 꼭 보겠다고 피렌체 여행중에서 가장 먼저 찾아나섰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급행 티켓을 12 유로에 구입했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
서로 관련이 없는 업종이 결합해서 전혀 다른 뜻밖의 폭발적인 효과를 나타내는것을 '메디치 효과'라고 한다. 아울러 이 말의 기원이 된 것이 바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이다.
메디치 가문은 14세기경 금융업과 지중해 무역, 그리고 국제적인 외교를 통해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4명의 교황을 배출한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들은 부를 통한 권력자로 세상 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들을 뒷바라지 하는 후원자로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여기에는 에술가에 대한 지원이 일회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우정을 담아 그 예술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되었기에 더 큰 존경을 받았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크리벨리. 바사리 등이 메디치 가문으로 부터 후원을 받은 대표적 예술가들이다.
이러한 이들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인류 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태동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디치가의 기반을 닦은 사람은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 1360~1428)'로서 정치와 경제의 흐름을 오랫동안 심도있게 파악한 연후에, 마침내 그는 금융업이야 말로 명문가를 이룩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메디치가를 금융업에 뛰어들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로 인해서 '금융 가문 메디치'가 탄생했다.
후대에 '로렌초 메디치(Lorezo, 1449~1492)'에 이르러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최고 통치자로서 권력의 정점에 서기까지 한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로렌초 대제'라 불렀다. 이 시기부터 메디치가는 부와 권력을 모두 거머 쥔 유럽 최고 반열의 명문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피렌체는 곧 메디치였고, 메디치가 바로 피렌체였다.
16세기 초, 메디치 가문에 또 한명의 위대한 후계자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코시모 1세(Cosimo, 1519~1574)'로 명실상부 메디치가의 최고 전성기를 그가 이끌게 된다. 가장 많은 부를 쌓았고, 최고 정점의 권력자였으며, 가장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피치 미술관 또한 그가 남긴 업적중의 하나이다.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은 13세기에 건립되어서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을 코시모 1세가 사들여서 자신의 집무실과 사택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물 내부의 확장공사를 벌였다. 그러다가 다시 아르노 강 건너의 피티 궁전을 매입해서 이사를 가게 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이탈리아어로 옛(Vecchio, 영어의 Old)라는 의미를 담아서 '베키오 궁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코시모는 집무실인 베키오 궁전에서 부터 강 건너 피티 궁전 사이의 약 1km에 이르는 모든 건물들을 사들였다. 당시는 권력의 암투 끝에 청부살인이나 암살이 비일비재하던 시기였다. 집무실과 피티 궁전 사이를 출퇴근 할 때마다 엄청나게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곤 했다. 하여 코시모는 자신이 후원하던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르조 바사리'에게 새로운 건축을 의뢰했다.
베키오 궁전에 이어 붙여서 새로운 자신의 집무실을 포함한 관청을 웅장하게 세우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피치(Ufizi. 관청)'다.
우피치를 건설한 바사리는 아르노 강을 건너 피티 궁전에 이르기까지 긴 '회랑(복도식 통로)'를 만들기 위하여 '베키오 다리' 위에까지 건물을 증축했다. 바로 오늘날의 모습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이다. 이제 코시모는 피티 궁전과 베키오 궁전 사이를 긴 회랑을 통하여 안전하게 오고 갈 수가 있게된 것이다. 회랑은 중간 중간에 외부로 부터 빛이 들어오고 밖을 내다 볼 수 있게끔 안전한 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출퇴근이 지루하지 않게 하기위하여 수백점의 초상화를 벽에 걸었다.
현재 '바사리 회랑'은 공개되지 않고 내부 수리중에 있다. 미술관 측에 따르면 2021년에 회랑을 재개방 할 예정이며, 그렇게 되면 수백점의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를 새롭게 다시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입장료가 또 그만큼 올라야하겠지만 말이다.
우피치가 어느정도 완공되어가고 자신의 새로운 집무실에 입주한 코시모 1세는 바사리에게 새로운 주문을 하게 된다.
그 당시까지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미술품들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주도록 요청한 것이다. 곧바로 바사리는 우피치 3층 복판에 미술품을 전시할 공간을 따로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두 칸으로 이루어진 '트리부나의 방(La Trubuna)'이다. 하지만 코시모는 이 전시실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거기에다 바사리 또한 우피치를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결국 우피치는 코시모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도 1세(Ferdinando,1549~1609)' 시기에 바사리의 뒤를 이은 '베르나르도 부온탈레티'에 의하여 완성된다.
페르디난도 메디치는 코시모 메디치의 유언을 받들어 아버지가 소장했던 미술품들을 트리부나의 방에 전시했다. 바로 현재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1581년에 이르러 우피치 건물 전체를 통털어서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일반에게 공개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던 것이다.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작품의 이름과 작가를 표시한 최초의 미술관이다.
우피치 미술관은 'ㄷ'자 형태의 3층 건물에 45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졌다. 1층엔 고문서. 2층엔 소묘와 판화. 3층엔 회화가 전시되어 있으며, 복도에 조각품과 천장에 초상화들이 전시되어있다.
영원할것만 같았던 이 위대한 '메디치 가문'도 끝내는 몰락하고 말았다.
시대의 흐름과 변혁 속에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됨과 동시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가문에 남자 후손들이 태어나지 않게된 것이다. 핏줄이 단절된 것이다.
결국 메디치 가문의 마직막 후손이었던 여성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는 가문이 소유했던 건물들과 모든 미술품을 피렌체 시(市)에 기부하면서 단 한가지 조항만을 요구했다.
'단 하나의 작품이라도 피렌체 외부로는 일절 반출하지 말아달라.'(매각 금지 요구)
우피치 미술관은 현재 연간 약 2백만명의 관람객이 찾고있다.
기본 입장료에 급행비나 예약 수수료나 특별전시회비를 포함해 1인당 10유로씩만 잡아도......... 미술관 하나만으로도 연간 2천만 유로의 입장 수입이 창출된다. 피렌체 시의 수입이다.
어휴...........................
미술관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것은 고대 초기로마 시대의 조각품들이다. 많은 조각품들이 전시라기 보다는 그냥 한곳에 대충 모아놓고 보관중이란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많이 훼손된 고대 조각상들 앞으로 압도적 느낌으로 다가오는 조각상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비교적 근대의 (헤라클레스의 고난)이라는 작품으로, 자신의 아내를 납치하려 했던 켄타우루스(半人半馬)인 나수스를 헤라클레스가 죽이는 조각상이 압권이다. 이 조각상은 같은 소재로 시뇨리아 광장 옆 '로자 데이 란치' 회랑에 전시된 '잠볼로냐"의 헤라클레스와 매우 닮았다.
또한 유리 전시관에는 커다란 조각상을 만들기 위한 초기 작업의 (회화의 데생 같은) 과정을 보여주는 연습용 습작들이 놓였는데, 이 습작들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면 이내 최종으로 완성된 작품이 무엇인지 알게 될것이다. 물론 어느정도 미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해당되겠지만 말이다. 나는 알아냈다.
이 습작들의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조각품은 역시 시뇨리아 광장 옆 란치 회랑에 전시되어 있는 '삐오페디'의 (폴리세나의 약탈)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스가 파리스의 독화살에 발뒤꿈치를 맞고 죽자 그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유리시즈와 함께 트로이 목마에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 트로이를 멸망 시킨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트로이를 약탈했으며, 아킬레스를 유혹한 적이 있는 트로이의 공주 폴리세나를 끌어다가 아킬레스 무덤에 제물로 받쳤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소재로 '삐오피디'가 (폴리세나의 약탈) 조각상을 만드는 과정을 사실 그대로 재현해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아하! 거대 조각상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구나.........'
--- 시모네 마르티니作 (수태고지) 좌측부분 그림.
---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作 (동방박사의 경배)
--- 파올로 우첼로作 (산 마리노 전투)
--- 필리포 리피作 (성모와 두 천사)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作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우피치 미술관 3층의 회화관을 본격적으로 관람하기로 한다면 가장 먼저 만나게되는 장소는 일명 '마에스타(Maesta)의 방' 이라고 불리는 방을 처음 만나게 된다. 본래 '폐하'라는 경칭의 뜻을 가진 이 단어가 이곳에서는 '천사들에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옥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뜻한다. 이곳에는 '치마부에' ' 두치오' '지오토'의 마에스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인파에 밀리면서 겨우 찍었던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여행하면서 '지오토'를 배제하고는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기에, 이해를 위해 다른 곳에서 지오토의 작품사진 한장을 퍼오게 되었다.
<네이버에서 퍼 옮> --- 지오토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파도바 아레나 성당 소장.
---- 지오토作 (프란체스코 성당 벽화 연작중에서 일부). 이탈리아 아시시.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가 말했다.
"인간은 산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고, 바다를 보고 강물을 보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경탄하지만, 정작 인간 내면의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이 한마디 말이 곧 (르네상스의 시작) 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 내면의 본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라고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고대 그리이스 시절에 수학과 문학과 조각과 건축과 예술과 철학과 인문학의 중요성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던 인간이, 중세 천년을 지내오는 동안 인간은 출생에서부터 이미 그 탄생 자체가 죄악덩어리(원죄론) 라고 하는 신(神)에대한 왜곡된 교회(카톨릭)의 가르침과 억압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천년 가까이를 죄인으로 생각도 표현도 하지 못한채 쇠뇌당하며 살아온 결과였다.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도착한 '단테'는 (신곡)에서 이렇게 썼다.
'내 인생의 최고 전성기에 문득 길을 잃고 뒤를 돌아보니,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라고 적었다.
비로소 '자기 성찰'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처음 (르네상스)는 분명 이렇게 '문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내 그러한 새로운 사조는 회화 분야에 까지 번져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 바로 '지오토'가 있었던 것이다.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그는 피렌체 사람이다.
당시까지의 그림은 고대 그리이스에서 시작되어 비잔틴에서 만개한 중세 고딕미술의 마지막 시기였다.
그리고 그가 활동했던 13세기 말엽에는 이미 '피렌체'라는 도시국가와 '시에나'라고 하는 도시국가 사이에는 이미 '철천지 원수'를 방불케 하는 영원한 앙숙지간이 무르익어 있던 시기였다. 아직 키안티 지역을 놓고 '검은닭과 흰닭의 한 판 대결'은 벌어지기 전이었지만, 두 도시간에는 영토. 정치. 경제. 사고방식. 관습 뿐만이 아니라 이질적 가치관을 넘어서 뼛속까지 서로 앙숙이었던 것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서로 상대에게만은 어떤것이던 지고 살 수가 없었다.
'씨에나 대성당'의 위엄에 기가죽은 피렌체는 결국 일백오십년을 투자해 기어코 '피렌체 두오모'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사이였다.
이런 와중에 불쑥 '아시시(Assisi)'가 끼어들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두 도시간의 사이에 끼어들면서 한바탕 '미술(회화)전쟁'을 부추긴 것이다.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인 '성자 프란체스코(San Francesco)께서 1226년 고향인 아시시에서 운명하신 것이다. 아시시 사람들은 곧바로(1228년) 성 프란체스코를 기리며 그분의 유해와 유품을 안치하기 위하여 교회 건축에 나섰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기도 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이다. 도시의 위세가 피렌체나 씨에나에는 비견할 수 없지만 나름의 자부심으로 가득한 아시시 사람들은 '성 프란체스코'의 고귀한 인품에 걸맞는 아름답고 빼어난 성당을 원했다. 그래서 그들이 주안점을 둔 것은 외형보다 내부의 치장에 있었다. 그런 심중에서 그들은 피렌체와 씨에나 사이에 은근슬쩍 전쟁을 부추긴 것이다. 경제뿐만이 아니라 회화를 비롯한 예술에 있어서도 씨에나와 피렌체는 앙숙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아시시도 결코 이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자신하는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회화 였다. 그들에게는 '시모네 마르티니'가 있었던 것이다.
프란체스코 성당 건축을 담당하던 고위 성직자들이 피렌체 공화국과 씨에나 공화국에 정식으로 서한을 보냈다.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내부 벽화를 그려줄 화가를 보내줄것을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다. 이는 곧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만큼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씨에나'가 불같이 선공에 나섰다. 이탈리아 최고화가의 반열에 우뚝 솟아있는 '두치오(Duccio)'를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두치오는 '옥좌의 성모'라는 작품을 남긴다. 하지만 결코 이쯤에서 맘을 놓을 씨에나가 아니었다. 상대편엔 피렌체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씨에나는 두치오에다가 로렌제티 형제를 얹어서 파견했다. 뿐만아니라 로렌제티 형제는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들을 모두 이끌고 사단급으로 파견을 떠난 것이다. '피에트로 로렌제티(Pietro Lorenzetti)'는 이곳에서 (성모의 출산)이라는 페놀화를 그린다. '암부로시아 로렌제티(Ambrogio Lorenzetti)'는 대담한 구성이 매우 돋보이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라는 작품을 그리게된다.
그러자 이에 뒤질세라 피렌체도 최고의 회화군단을 구성해 아시시로 파견한다.
그리이스풍의 화가로 크게 명성을 얻고있던 '치마부에(Cimabue)'를 파견한 것이다. 씨에나에 두치오가 있다면 피렌체에는 치마부에가 있었다. 이곳에서 치마부에가 그린 그림이 '마에스타(옥좌의 성모)'로 바로 여기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거기에다 피렌체는 로렌제티 형제의 아성에 대적하기 위하여 또 한사람을 파견하는데, 씨에나 대표 로렌제티 형제가 바로 이 사람에게서 배운바가 무척이나 많았었으니........ 바로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였다. 지오토 역시 수많은 자신의 문하를 군단급으로 꾸리고 아시시로 내려갔다. 지오토는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를 담은 연작의 벽화를 남긴다.
한바탕 회화 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아시시가 숨겨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이내밀었다.
아시시 출신의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로 그는 씨에나 대표 두치오의 제자였으나 스승을 뛰어넘는 천재로 새롭게 명성을 얻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르티니는 이 성당에 (성 마르틴의 생애)란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된다.
마르티니야 말로 위대한 거장 '지오토'가 남긴 그림자가 너무도 컸던 당시 상황속에서 추종자가 아닌 새로운 분야의 개척자로 제 길을 달려간 훌륭한 씨에나 미술가로고 부를만 하다. 힘찬 인물의 모델링을 뛰어넘어 극적인 몸짓과 표정은 정말 압권이다. 찬란한 색체가 빛나는 옷차림과 다양한 육체적 표현은 그 누구도 따라나서지 못할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에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가 소장되고 있다.
르네상스의 거장 '지오토'는 화가이자 위대한 건축가였다. 조각가이자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미첼란젤로'처럼 말이다.
흔히들 '화가 - 지오토'라 부르고 '건축가 - 조토'라고 부르지만 같은 사람이다.
피렌체 대성당 옆의 (조토의 종탑)을 건축한 사람이 바로 '화가 지오토'다.
피렌체 대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경우 '깜비오'가 성당의 본체를 지었고 '브르넬리스키'가 돔을 얹었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기실은 깜비오의 경우는 성당 본체의 설계자이자 시공자였지만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건설이 자주 중단되고 하던중에 일찍 사망했다. 이를 보완해서 두오모 공사를 대부분 완성함과 동시에 종탑 건설에 박차를 가했으나 끝내 그도 모두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 거기에 그는 이 당시 두오모 돔에 대해서 이미 설계를 마친 상태였으나 실행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 설계를 보완해서 아주 독특한 시공방법으로 최후 돔을 완성한 사람이 부르넬리스키인 것이다.
어떠한 새로운 사조가 딱히 한 사람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하는것은 다소 모순일 수 있겠으나 미술사는 분명하게 '지오토로 부터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독창성은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여실히 잘 나타나 있다.
그리이스풍의 회화들이 가진 설화적인 세부묘사나 다양하고 풍성한 공간 표현을 지오토는 철저하게 배제하고 단순화 시켰다. 배경이나 풍경이나 인물은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사 전달에 꼭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흔히 지오토를 '전시되어 있는 그림과 그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의 시선 사이의 공간을 처음으로 자각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속에 이미 삼차원의 현실성을 부여해서 완성함으로써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어느 지점에서 보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애초부터 이미 작가가 의도하고 무언중에 알맞는 위치에서의 시선을 강요하도록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오토는 한 순간에 작품 전체를 보고 느끼도록 우리에게 재촉한다. 당시로서 그런 미술적 실체감은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 서양의 미술사를 (회화의 시대)라고 부르게 되는 정점에 '지오토'가 있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레오나드로 다빈치'로 승계된 (회화의 시대)와 '미켈란젤로'가 고집하는 (조각의 시대)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 봇티첼리作 (라 카룬니아)
--- 봇티첼리作 (뮤디트의 귀환)
*** (비너스 탄생)의 판화본 ***
*** 유명 작가의 작품 앞에는 언제나 관람객이 장사진을 친다 ***
'지오토'로 부터 (르네상스 회화)라는 새로운 사조가 생겨났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원근법'을 회화에 끌어들여 신기원을 이룩한 '마사치오'가 있는가 하면, 또 '원근법'을 건축에 끌어들인 '부르넬리스키' 같은 시대의 장인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불법이었지만 인체를 해부해가면서까지 인간 내면까지에 이르는 과학적이고도 체계적인 인체의 탐험을 계속했던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마사치오'는 잘모르면서도 '카라바조'는 더러 알고 있다. 나아가 '카라바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티첼리'에 대해서는 관심을 넘어서 열광한다. 왜 그럴까? 보티첼리는 당시의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별로 진보적이지도 않았고 실험정신도 부족했고 굳이 새로운 사조의 유형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보티첼리의 그림에는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새로운 회화기술이나 새롭게 등장한 사조인 '원근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미(美).
'보티첼리의 그림은 아름답다.' 그것이 모든 이유이자 해답이다.
원근법도 무시하고 거의 허구에 가까운 설화를 그림으로 표현했으며 등장 인물의 우아한듯 가녀린 동작의 신체는 팔등신을 넘어 거의 십등신에 가까운 기형적인 인체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늘거리듯 부드럽고 유연한 나신을 그대로 드러내는듯한 부드러운 곡선과 섬세한 표현과 화려한 색상의 의상 등은 가히 보티첼리만의 독보적인 회화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르네상스의 3대 거장'에 필적할만한 인기를 지금도 여전히 누리고 있는 화가가 '보티첼리'이다.
'알렉산드로 디 마리아노 디 반니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di Banni Filipepi)가 그의 본명이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는 알렉산드로를 줄인 이름에다가 별병인 '작은 술통'의 뜻을 가진 보티첼리를 합한것이다.
보티첼리는 처음에 '프라 필립보 리피'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나 곧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가지게 되었고 '로렌조 메디치'를 만나 후원을 받으면서 피렌체 문화예술계 이너서클의 최고 우두머리가 된다. 최고 명성을 얻고 인생의 최고 전성기에서 만든 작품이 바로 (비너스 탄생)이다.
보티첼리의 모든 그림은 원근법엔 아예 관심이 없고 배경이 되는 공간의 중요성이나 깊이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다.
그가 묘사하는 인체는 여위고 몸무게나 인체가 가지는 근육도 결여되었고 힘은 전혀 느껴지지가 않는다. 신체의 일부인 다리가 대지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은 하나같이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다. 이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사조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태도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가녀린 거의 나신에 가까운 인체들은 하나 같이 엄청난 관능미를 뽐내고 있다. 중세 시대 나체의 표현은 도덕적 의미를 넘어서 신에 대한 불경의 의미로 절대 금기시 되어왔던 불문율이었다. 그런 시대를 벗어나는 새로운 사조를 만나 렘브란트는 나체를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관능미를 한껏 내뿜는 유혹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이스 시대엔 나체의 여신상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 접어들어서면서부터 중세 1천년의 세월을 흘러오는 동안 신(神)을 나체로 표현하는 회화나 조각은 없었다. (비너스 탄생)은 이런면에서 기념비적인 놀라운 작품이었다.
이는 인문학적으로 '신플라톤주의의 부활'을 나타내는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어서 그는 (봄)을 발표했다. 두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비너스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이처럼 실플라톤주의에 입각해 종교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면 이제부터 보티첼리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런 시선으로 (비너스 탄생)을 바라보게되면, 왼편의 두 바람의 신이 천사와 매우 닮았다는것을 느끼게 될것이고, 바닷가에서 비너스를 마중하고 있는 봄의 여인상이 앞선 시대의 세레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예수의 그림들 중에서 성수를 붓던 요한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례'가 '신 안에서 거듭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비너스 탄생)도 그러한 거듭남(再生) 이라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해서 '르네상스'란 의미 또한 '재생(rebirth)'이란 용어에서부터 나왔다는것을 깊이있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 레오나드로 다빈치作 (수태고지)
--- 레오나드로 다빈치作 (동방박사의 경배)
--- 베로키오와 레오나드로 다빈치 공동作 (그리스도의 세례)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성모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에 의해서 아기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천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수태고지(Annunciation)'라고 부른다. 회화 역사에 있어서 같은 소재로 그려진 그림이 많기로 손에 꼽히는 제목이다.
'레오나드로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의 초기작품으로 알려진 (수태고지)는 사실은 1907년이 되어서야 다빈치가 그렸다고 인정을 받게된 그림이다. 성 발토르멜 수도원 식당에 걸려있을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 그림이 '기를란다요'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더하여 일부 평론가들은 다빈치의 스승인 베로키오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1907년 펜과 잉크로 그린 천사 가브리엘의 소매를 그린 다빈치의 드로잉이 발견되고 나서야 비로소 다빈치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다빈치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여 원근법이 매우 엉성하게 적용되었으며, 마리아의 오른팔이 너무 어색하게 그려졌던 이유에서였다.
30세 때의 다빈치는 이미 피렌체를 넘어 온 이탈리아에 널리 알려진 천재였다.
화가나 건축가. 발명가로서만이 아니라 군사 기술자(공학도)로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다빈치는 밀라노 대공으로 있던 '브라만테(Donato Bramante)'에게 초청되어 밀라노에서 군사기술 고문으로 활동했다. 부업인 군사기술 고문이 본업인 화가나 건축가 보다 훨씬 짭짤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결국 피렌체를 떠나오기 전에 시작했던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Magi)'는 영원히 미완성인채로 남아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이 페놀화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이유는 비록 밑그림 정도의 미완성인 습작이지만 여타의 다른 완성된 그림보다도 더 높은 완성도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앙기아리 전투'와 더불어 다빈치의 미완성 작품중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남았다.
음영속에 있는 인체의 형태는 아직 미완성인 채로 남았으며 윤곽은 단지 외형을 짐작케만 할 뿐이다. 이는 외형적 윤곽보다는 오히려 채광에 따라 다양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인체의 조소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균형잡힌 안정감이 다빈치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마침내 스승 베로키오를 뛰어넘는 경지를 개척하게된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자질이 엿보이는 훌륭한 제자를 만나서 그를 잘 가르쳐서 세상에 두루 유익한 명망있는 인재로 키워내는 것을 학자(스승)의 최고 덕목'이라고 옛 성현들은 늘 생각 해왔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얼마나 보람되고 가슴 뿌듯하겠는가?
하지만, 과연 제자가 성장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후에, 그 이면에서 조용히 스승이었다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보람있고 행복한 일일까? 내가 생각하는 거기에는 한가지의 조건이 수반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그것은 그 제자의 인품(품성)이 스승의 인품을 뛰어 넘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는 대리석. 테라코다. 은. 청동제. 어느것이나 자유자재로 다루어 조각이나 소조 작품을 많이 남긴 초기 르네상스의 저명한 조각가이자 화가였다. 피렌체의 팔랏초 베키오(베키오 궁전) 안뜰에 놓여있는 (돌고래를 안은 동자)의 청동상이 그의 작품이다.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하던 그는 빈치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기연을 얻게된다. 그림 솜씨가 유독 남다른 뛰어난 젊은 화가를 만난것이다. 그는 이 청년을 피렌체로 데리고 와서 기초부터 정성을 다해서 가르쳤다.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던 청년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 그의 스승을 뛰어넘게 되었다.
그 청년이 바로 '레오나드로 다빈치'였다.
이날 이후로 베로키오는 그의 모든 미술활동을 항상 제자에게 비교되어야 하는 매우 힘든 여생을 맞이하게 된다. 위대한 예술가를 제자로 둔 그의 미래는 자꾸만 자꾸만 위축되어 갔다. 말년에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천재이자 위대한 예술가인 다빈치는 곧 메디치가의 로얄 패밀리 집단에 속하게 되고, 스승은 점점 중심에서 멀어져만 갔다.
그래도 이 사람에 비하면 '베로키오'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 보인다.
'도메니코 기를 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는 르네상스 초기 '보티첼리' ' 피에로 디 코지모' 등과 함께 활동하던 당시로서는 제법 명망이 있는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노인과 손자)가 있다.
그런 그에게 횡재가 벌어졌다. 대단히 뛰어난 자질을 가진 소년이 화가가 되겠다고 스스로 자신의 문하생으로 찾아온 것이다. 란다이오는 숙식을 함께하며 지극정성을 다해서 소년을 가르쳤다. 타고난 천재였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해 가는 소년을 보면서 스승은 가끔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고 전한다. 1년쯤 되었을 때, 소년은 냅다 붓과 연필을 내팽개치고 떠나갔다.
몇년이 지나서 (피에타)라는 작품으로 온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위대한 천재의 등장에 세상이 열광했다. 란다이오는 로마까지 찾아가서 (피에타)를 구경했다. 충분히 세상이 열광할만큼 위대한 조각이 탄생했다고 감탄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있었다. 자신에게서 뛰쳐나갔던 소년이 바로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피에타)는 그 소년의 작품이었다. 스승은 기쁜 마음으로 제자를 찾았으나, 제자는 냉정하게 외면했다. 그 소년이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점차 미켈란젤로와 란다이오의 관계가 알려지게 되자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에게 물었다. 그때 왜 란다요의 사숙을 떠났느냐고?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배울게 없어서요. 나는 그곳에서 배운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스스로 혼자 공부하다가 지쳐서 떠난것이지요...........'
이 한마디에 '도메니코 기를 란다이오'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세기의 위대한 천재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어린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칠것이 없었던 무능한 스승이자 형편없는 화가..........
란다이오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슬퍼졌고 비참해 졌다. 그리고 끝내 그렇게 그는 슬픈 생을 마쳤다.
미첼란젤로? 위대한 예술가인것만은 확실하게 맞다.
하지만........ 그는 정말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위대함을 훌쩍 뛰어넘는 싸가지와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가진 정나미 뚝 떨어지는 인간이었다.
베로키오와 다빈치가 함께 그린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는 크게 작품성을 인정받은 그림은 아니다.
그림속의 주요 등장인물인 예수와 세례요한 등의 주요 그림은 스승인 베로키오가 그렸다. 나머지 배경과 왼편의 천사를 제자인 다빈치가 그렸다. 그런데 그림이 세상에 발표된 후에 다빈치가 그린 천사의 표정이 어딘가 지루해서 하품이라도 하려는 듯한 표정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스승의 작품에 못돼먹은 제자가 자신의 불쾌한 심정을 대변해 부러 그렇게 그려넣은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소문을 들은 베로키오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소문에 대해 끝내 해명을 내놓지 않은 다빈치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만약에 다빈치가 실제로 그런 불편한 속내를 가졌었다면......... 다빈치는 이와 똑같은 일을 아주 오랫동안 겪게된다. 뿌린대로 거두게 된다는 말 처럼이었을까? 미켈란젤로를 대할 때 마다 다빈치는 아마도....... 스승에 대한 반성이 끊이지 않았을것만 같다. 두고두고 속을 썪게되니까 말이다.
입장료가 무료인 '대영 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바티캉의 '바티칸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그 중에서도 규모면에선 당연히 세계 최고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아주 특이하게 (영국 박물관) 임에도 전시되고 있는 영국산 전시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제국 시대에 지구상의 모든 문화재를 눈에 띄는 쪽쪽 모두 약탈해다가 버젓이 제것처럼 전시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와 지역과 시대와 문화를 가리지 않았다. 눈에 띄는대로 무조건 싹쓸이 했다. 영국신사의 우아한 매너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류 최고의 떼강도 집단이었다. 그런 결과로 지각있는 여행자들은 이 박물관에 새로운 이름을 무료로 선물했다. '대도(大盜) 박물관'이 새로운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이집트의 로제타 스톤에서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에서 시작해서 그리이스 유물을 거쳐 로마시대 유물 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유물을 넘어서 남태평양 피지의 유물까지 샅샅히 흩어 배에 싣고 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그리이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뜯어온 장식물(엘긴 마블)과 기둥들이다. 더하여 파르테논에 있던 대리석 관도 포함된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뜯어서 옮겨왔을까? 영국의 약탈산업은 국가(왕실)가 나서서 직접 운영하는 최첨탄 테그놀로지 복합산업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약탈 제국이 바로 '그레이트 브리테니아' 이다.
이렇게 마음내키는 대로 지구상의 모든 유물과 문화재를 삭쓸이 한 영국이었지만, 아쉬워해야 하는지 다행스러워 해야 하는지....... 대영제국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영국 왕실은 물론 영국 국민들 모두가 대단히 안타까워하는....... 가지지 못한 문화재가 있었다.
바로 (르네상스)였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어서 벌어졌고, 르네상스는 곧 '피렌체'였다.
르네상스에 목이 말랐던 영국왕실의 샬로테 여왕은 화가 '조안 조파니(Johan Zoffany)'에게 손수 청원서를 써 건네주고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파견했다. 내용은 영국의 귀족들이 '우피치 트리뷰나의 소장품'들을 너무도 보고 싶어하니 그림(한장의 사진처럼)으로 베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고심 끝에 피렌체 공국이 이를 수락하자, 조파니는 이곳에서 장장 6년에 걸쳐서 한장의 그림을 그려가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조안 조파니(Johan Zoffany)'가 그린 '우피치 미술관의 트리뷰나(Tribuna of the Uffizi)가 그 작품이다.
이 한장의 그림은 영국왕실은 물론 영국 사회와 온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영국은 인류 역사를 통털어 모든 문화재를 다 가졌지만 단 하나 르네상스만은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레오나드로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도나텔로.브라만테.기베르티.부르넬리스키.지오토.카라바조.보티첼리.마사치오.카스타뇨.만테냐가 영국에는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소장한 미술품들을 집무실 옆에 두고 싶어서 '코시모 메디치'가 건축가 '바사리'에게 요청하여 설계된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전시실이 '트리뷰나(Tribune)'였다. 현재의 모습처럼 다양한 회화와 조각품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코시모도 바사리도 결국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코시모의 유지를 받든 '프란체스코 메디치'와 건축가 '베르나르도 부온탈레티'에 요청해서 1586년에 완성했다.
1737년 메디치가의 마지막 상속녀 안나 마리아 루이자가 미술관과 모든 미슬품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기증하였고, '조안 조파니(Johan Zoffany)'가 '우피치 미술관의 트리뷰나(Tribuna of the Uffizi)를 그려서 영국으로 돌아간것이 1777년의 일이었다.
현재는 이방에 전시되었던 많은 걸작품들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독립해 나갔고, '메디치의 비너스'를 비록한 조각품과 일부 작품들만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하여 조파니가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전시풍경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첨언>
아무리 대충 넘어가고 싶어도 적어도 '미켈란젤로' '만테냐' '루벤스' '마사치오' '라파엘로'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카라바조'는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 한참을 더 가야한다는 결론인데.............
---- 내용이 많이 길어졌네요. 아무래도 2개 파트로 나누어서 써내려가야만 할까봐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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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댓글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음 ^^ - 왜냐면 할말이 너무 많아 댓글을 잘 쓰려다가 그만... 잊기도하고.
어제도 한나절 여기서 놀았는데. 역시 이야기가 풍성하니까 어떻게 줄이나 하다가 ㅋㅋㅋ 깜박 퇴장. 해쮸.
좌우간 님이 부럽습니다. 그 열정이 가장 부럽고. 저는 반대로 내가 처한 장소에서 만방을 느끼는 여유.
더 바랄게 없으니.... 이렇듯 조화로운 세상에 대한 경배 ^^ - 잘 읽고 추억 반추하고. 배웁니다. 아쟈 아쟈 ~ !
모모누님. 패밀리끼리 짜고치는 고스톱 같습니다.
ㅎㅎ
뵌지가 그럭저럭 20년 가까이 되어가네요. 안녕하시지요?
어떻게 변하셨을런지?
다시 뵐날을 고대하겠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막내 야련 드림,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