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수 시인 시론>
시적 형사(形似)와 그 모순에 관한 합리성
엄창섭(김동명학회 회장, 『모던포엠』주간)
1. 생명기표의 이끌림과 시적 감응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조락(凋落)의 계절이지만 햇살 눈부신 이아침에 무엇보다 자명한 것은 특정한 한 사람은 살아 숨 쉬는 작은 일상에서도 항상 감사하는 실체이다. 모두(冒頭)에서 필자의 한결같은 지론이지만 ‘한편의 시는 감정의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세계가 숨기고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감지하고 표현하는 언어예술’인 까닭에, 탯줄을 묻은 그 자신의 향리를 지극히 사랑하는 「강릉 가는 길」의 김일수(金日秀) 회장은, 강직한 집념의 시인임은 무론하고 ‘국가경찰위원장,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 등의 공직을 역임한 존경받는 법학자로 천년의 시향(詩鄕)으로 일컬어지는 옛 ‘하슬라(何瑟羅)’의 땅인 강릉태생이다.
모름지기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 월간『모던포엠』 신인상 수상 직후에, 묶어낸 그 자신의 첫 시집 『하늘과 기러기』(모던포엠, 2015)에서 ‘하늘과 기러기의 상징적 관계층위’의 배경지식(schema)을 기억에 담아두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시적 형사와 그 모순에 관한 합리성」의 시적 변명의 심층적 논의에 앞서 조심스런 전제(前提)는, 깊은 사유를 통한 명상호흡의 시각에서 ‘듣고 말하되 집착하지 말라.’는 경계야말로 삶의 방하착(放下着)이며 엄숙한 잠언(箴言)이다. 아울러 장하빈 시인의 ‘우주와 주파수를 맞추는 자가 시인이라.’는 시론은 합목적적인 까닭에, 보다 온전한 시적 작위(作爲)는 곧 천상(天上)의 통로와 잇닿아 있기에 지극히 ‘포엠토피아(poemtopia)를 꿈꾸는 시인임’을 천명하여도 결코 과장되지 아니할 것이다.
모처럼 그 자신의 시적 변이(變異)는, “야생의 골짜기에서 밤공기를 뚫고 울려오던/음울한 곡성이 가까스로 잦아들고/휘황한 도시의 불빛도 차갑게 식어갈 무렵/사냥꾼의 도시는 위장된 문명의 일상으로 돌아가네.(도시의 불빛은 차가왔네)”와 같은 보기나 또는 ‘무너져 내린 고국을 등지고 변방의 그늘에서’ “본디 고국의 울타리 안에선/요긴한 꽤 괜찮은 보석이었는데/죄 없이 길 위에 내버려져/모진 운명의 굴레를 뒤집어쓰고/못생긴 미운 돌처럼 굴러다니다니(길 위의 난민)”를 통해 그 일체감이 밝혀지듯, 비교적 발표한 그간의 시적 양상에 견주어 호흡이 다소 길어져 긴장감이나 응축미가 풀어진 시적 처리나 양식(樣式)은 전의식(前意識)에 견주어 짐짓 숙고(熟考)할 점이다.
특히 그의 시편에서 하나의 특이성은, 인간소외의 문제를 온 몸으로 항변하다 깊은 사유(思惟)와 직면하는 대상과의 관조를 위해 거대한 사각의 도시공간을 뛰쳐나와 자연(physis)과 연계성을 맺는 현존재(Dasein)로서 삶의 본질을 일관되게 입증하려는 신앙심의 발로에 의한 끈질긴 집념의 정신적 소산이기에, “찔림과 억눌림에 짓밟히다/어느 이름 모를 하늘가에서/공황장애의 홀에 빨려들고만/한 가닥 기대와 소망, 꿈마저 떠나가고/이젠 영 돌아갈 수 없는 슬픈 유토피아(아무데도 없는 그 곳)”로 내면의식은 형상화되어 한층 빛나고 있다. ‘진실과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곳, 사랑의 법이 흘러 편만해진 땅’은 화자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이상적 공간으로의 유토피아에 해당하기에,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현상일지라도 미적주권이 상실되어 서정시의 극대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서 새삼 몽접(夢蝶)주인인 장자(莊子)의 핵심사상 관계론인 「장자의 나비 꿈」을 거론치 않더라도 알맞은 시적 토양의 조성을 위한 실험정신으로 ‘행동과 언어’를 시종자의 극대화로 확장시키되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농부의 보폭(步幅)으로 ‘슬로 라이프적인 시학’에 입각한 시각에서 대상에 대한 깊이와 영혼에 잠식되는 자잘한 파동은 묵시적으로나마 짐짓 관망할 점이다.
2. 바람의 영혼과 충동의 시적 전율(戰慄)
특히 “우리를 괴롭히는 불의한 세상의 풍차를 향해/끈질기게 돌팔매질을 해대다 보니/어느새 팔이 자주 밖으로 휘어져 버렸구나.(그게 사랑인가 봐)”를 통해서도 유추되어지듯, 우리에게 허락된 목숨의 시간은 언젠가 이름 모를 낯선 항구에 닻을 내리기까지의 지속될 힘겨운 항해이기에, 조급한 삶의 일상에서도 치타 슬로우(citta slow)적인 문화인식의 확장에 의한 삶의 여백은 ‘느림의 시학’을 통한 기다림과 여유로움으로 관계성을 지니기에 깊은 사유에 의한 이중거리는 역동성을 지닌다. 한편 개아적(個我的)인 육성과 체취에 이미지가 또렷하게 형상화한 그의 시편은 사각형의 빌딩 숲이 자리한 도시공간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은 무론하고 ‘작은 산봉우리 오르는 낮은 산자락’의 도정(道程)에서 체득한 그 느낌에 견주어지기에 “끝내 작은 산봉우리에 오르다//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땀이 한숨 쉴 무렵, 신기하게도/쪽빛하늘 문이 열리고 눈이 밝아졌네.(이제 알겠네)”라는 묵언의 응시를 통한 깨달음은 ‘지혜→지식→지성→감성→영성’의 통로로 걸쳐 작동하는 매개체다. 아울러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한 폭의 화폭에 빠져든 그 자신의 감회에 의한 교합은 담백한 시격에서 발현되고 불확실성에 의해 불안하고 초조한 독자의 평상심을 회복시켜주는 생명감을 지닌다.
여기서 덧없이 흐르는 허망한 세월에서도 언젠가 잊혀 질 기억의 편린을 다시 끄집어내어 창조적 언어로 변형시킨 그의 삶은, 마치 “꽃은 작고, 들여다보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조지아 오키프의 역설처럼, 삶의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섬이 지극히 좋은 일임’을 자각한 정직한 시론에 잇닿아있어 흥미롭다. 차지에 반복하여 언급하는 생생한 일탈의 시정신은 말끔 정제된 시어로 그의 시적 인식의 빛남은 어디까지나 영혼의 궁핍함에 의한 시적 추이에 의해 기독교의 신앙과 결속된 실험적 윤무로의 합일임은 입증되고 있다. 이처럼 시학의 질감과 터치에 의한 창조적 활력으로서의 생명적인 시작행위가 따뜻한 감성에서 묻어난 감미로운 눈물과 천상의 층계를 오르는 고독한 순례자의 행보에 기인(起因)한다. 또 하나 그만의 시적 특이성으로 시적 질료이며 종종 즐겨 사용되는 대상으로 천상을 향해 팔 벌려 기도하는 성자(聖者)의 표징인 나무(木)는, 숲을 지키는 대상으로 힘 있고 늠름함 자체이다. 마치 그것은 다음 시편인 <귀소(歸巢)>에서도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선 나무 한그루/홀로 있을 땐 곧잘 의식의 창문을 열고/서재 한 복판으로 성큼 다가와 앉기도 하는/그 가지사이에 이른 봄부터 둥우리를 틀고”의 보기처럼 그 추이(推移)가 식별되지만, ‘어느 날 광릉수목원을 거닐다 밑 둥이 잘려나간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아름드리나무의 나이테와 마주쳤다’는 그 자신의 절제된 정감에서 빚어진 “발 돋음을 하고 낮이면 양팔을 벌려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이웃에게 다가가 바람결에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게 일상의 삶이였다는 거야(연륜에 관한 재해석)”이거나 또는 “목이 타도록 삶은 팍팍해지고/다들 제자리 지키기도 힘겹다 하네.(할 말을 잃은 나무)”를 통해 놀랍게도 확증되듯이 여백의 간극(間隙)을 좁혀가며 종종 ‘매캐한 고층건물 사이로 아무 말 없이 잿빛 도시의 나무가 무겁게 걸어가는 형상’은 어디까지나 그 삶의 노년에 처한 서정적 개아(個我)의 처연(悽然)하고도 때로는 공허한 자화상이다.
보편적으로 우리문학에 수용된 나무의 상징성이 ‘영원, 고결, 절개’ 등으로 이해되는 반면, ‘안식, 사유, 몽상 등’의 어감에서 느껴지는 정적인 기운과 상승, 또는 수직의 형태로 나무의 이중구조는 그 같은 연유에서 기인한 배경지식으로 기억에 필히 담아둘 타당성을 지닌다. 이와 같이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아 한층 불확실한 후기산업사회에서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로 삶의 중량과 그 상처(trauma)를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인 존재의 꽃으로 형상화하여, 목가적 서정으로 빚어낸 에스프리(esprit)로 대변되는 자유분방한 그만의 시적 작위는 지극히 생명적이다. 삶의 일상에서 즉물적 현상의 응시와 탐색의 과정을 걸쳐 이 땅의 충직한 독자로 하여금 착각이나 갈등, 그리고 몽유(夢遊)에 빠져들게 하는 새삼 매혹적인 시적 기법은 지극히 충동적이나 고뇌 끝에 그 자신의 시적 감성과 기법(craft)을 효과적으로 접목시킨 정신작업의 생산물은 소중한 삶의 잠언이다.
3. 시적 담론과 그 모순(矛盾)의 해법
모름지기 ‘날아가는 새도 지나치게 생각하는데 열중하면 추락하는 이치’로 위대한 창조적 영혼을 지닌 한 사람의 정신작업의 종사자에게 균형과 배려에 의한 관망과 자기성찰은 다시금 요청된다. 인간관계가 소외된 타자(他者)에는 하찮은 배려나 분별력도 저버리고, 그 자신의 아집만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비열한 이기주의적 행동은 멈출 일이다. 새삼 목적전도현상(目的傳導現象)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관된 삶의 목적 아래 최소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되 합리성을 지니고 시적 절제미와 균형성은 깊은 통찰을 걸쳐 짜 맞춰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분망한 일상에서 다채로운 시적 질감을 본질적 고독 앞에서 그만의 고뇌를 견고한 성채(城砦)로 층층이 쌓아놓은 김일수 시인의 경우, 그 자신의 시어의 다의성과 의미를 확장하고 특이성을 점화시킨 시적 수사는 새삼 현재성에 유념할 정황이다. 모처럼 즉물적 현상에 관하여 치밀한 응시를 통한 시각적 자극으로 낯선 변주(變奏)나 영혼의 울림은, 단순한 상황의 모사(模寫)나 재현이 아닌 이미지의 형상화에 해당한다. 일단 이장(移葬)의 문자적 해석은 ‘새로이 묘지를 택하여 시신을 옮겨 매장하는 것’이다. 진실로 무의미하고 아득한 망자의 주검 앞에 ‘허무의 끝을 응시’하는 화자(persona)의 심사(深思)는 ‘깊은 흑암만이 기승하는 빈터’의 그 공허함이기에, “영면에 든 망자의 혼의 흔적도 없는/깊은 흑암만이 기승하는 빈터에서/쉼 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건/산 자들의 욕망과 권력의 투쟁일 뿐/살벌한 탐욕의 산실로 변한 새 무덤 옆(이장(移葬))”라며 아득한 한 폭의 수묵화로 이채롭게 그려내는 점이다. 따라서 강물처럼 덧없이 흐르는 허망한 세월에도 언젠가 잊혀 질 기억의 편린을 다시 끄집어내어 창조적 언어로 변형시킨 그 자신의 정직한 시론은 시적 감흥을 못내 자극하고 있다. 여기서 서정시를 쓰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간대이기에 어설픈 해법일지라도, 삶의 중량감을 확장하기 위해 불확실한 삶의 현장에서 고뇌하는 그만의 행보는 감동의 회복과 맞물려 있다. 또 하나 소외된 인간관계층위의 회복을 위한 ‘김일수 시인의 투명한 영혼과 감성적 화소(話素)’에 의한 생명외경의 탐색과정에서 영혼의 잠식을 통한 은유적 메시지로, 언젠가는 처연한 삶을 마감한 소중한 이들과 ‘치토르에 있는 승리의 첨탑(尖塔)’에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는 ‘아 바오아 쿠(A Bao A Qu)’라는 가상적인 동물과 지극히 필연적인 재회를 이루어 나갈 것이다.
특히 평생을 법학자로 일관한 그 자신의 삶의 편린(片鱗)처럼 ‘조선왕조 500년이 흐르는 동안 창경궁 담장 밖 원서동 빨래터에서 일찍부터 아테네 민주주의가 꽃을 피워갔겠네’는 막연한 추리는 “빨래터를 찾아 모여드는 날이면/어깨높이만큼 수평의 대동세계로 변모하여/격의 없이 수런수런 얘기꽃을 피웠으리라(원서동 옛 빨래터에서)”는 확고한 집념에 의한 사고가능성은 현대시작법에 두려움으로 어려움을 겪는 문학도들에게 ‘얘기(a story)는 수천 년 동안 밀폐된 피라미드의 방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맹아적 힘을 보존하고 있는 씨앗임’을 제시한 발터 벤야민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즉 예술, 문학이라는 것은 향유되지 않고 고립되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는 암시”를 이처럼 능란하게 작동시키고 있는 현재성은 하나의 충동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비정한 시대적 상황에서, 혹여 고통이 주어진 삶일지라도 갈등과 대립구도로 얼어버린 눈물이나 격정도 알맞은 정신기후로 녹여내고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통섭(通涉)의 관계성 회복에 전념할 타당성을 지니기에, 따뜻한 감성과 맑은 영혼의 소유자인 김일수 시인에게 거는 소박한 기대감이라면, 지상에 갈앉은 낮은 음색과 예리한 붓끝으로 불멸의 시혼으로 존재감을 살려내는 역할담당이다. 모쪼록 절제된 언어로 사물의 정체성을 입증하고 본래의 형질을 회복하는데 몰입하는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소외된 인간관계성의 회복을 위해 질긴 인연의 끈처럼 특정한 누군가와의 소중한 만남이 때로는 운명적임을 대륙의 심장에 깊이 간직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