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 이전의 글만 올려서 아쉽지만 그래도 잘 읽어보시면 작곡가 김홍전 목사님과 그의 음악 및 신앙을 알아볼 수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최초가 최초를 지휘하다’, 대한민국 최초 교향곡 ‘김홍전 심포니’ 연주회
https://www.youtube.com/watch?v=_nfQVHQR7hY
작성자 : CTS 작성일시 : 2024-09-10
앵커: 김홍전 작곡가를 아시나요. 그는 깊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찬송을 작곡한 한국 교회 음악사의 중요한 인물로 불려지는데요. 앵커: 오는 12일, 그런 그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열립니다. 관련 소식 박주성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오는 12일, 김홍전 작곡가 탄생 110주년을 맞아 기념 연주회가 열립니다. 이번 공연에선 그의 대표작이자 1942년 완성되며 대한민국 최초의 교향곡으로 알려진 ‘심포니 디 마이너’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82년 만에 그의 교향곡이 공개될 이번 공연은 국내 최초 여성 지휘자 김경희 교수,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 위너오페라합창단 그리고 국내 다수의 성악가들이 함께 무대를 꾸밉니다.
[김경희 지휘자 / 숙명여대 교수] 최초에서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갔느냐 내가 걸어온 발자취가 없어져 버렸는지 이게 진하게 각인이 돼서 내 발자국이 남겨지는지 최초라는 그 이름으로 그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최초가 최고가 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겠습니다). “자신은 굶어 죽어도 괜찮지만 지금 가장 급한 일은 음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일기에 기록한 목사인 김홍전 작곡가. 김경희 교수는 이번 연주회가 그런 그의 깊이 있는 음악적 통찰력과 고유의 음악 세계를 전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했습니다. (김홍전 목사님이) 하나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찬양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 그것만을 생각하고 쓰신 것 같아서 그 자체가 굉장히 저한테는 감동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굉장히 그런 부분에서 감격스럽고 또 그런 감격이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CTS뉴스 박주성입니다.
이아경 교수 - 김홍전의 최초 교향곡 김경희 지휘자 손끝에서 피어나다
http://music.koreaipm.com/contents/bbs/bbs_content.html?bbs_cls_cd=005011001&cid=24090415442919&bbs_type=B 2024. 09. 04
우리나라 최초 교향곡을 작곡한 故 김홍전 박사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그의 박사학위 작품인 “Symphony in D. Minor" 교향곡이 마에스트라 김경희 지휘자의 손끝에서 새롭게 피어난다.
김홍전 작곡가는 신학박사, 음악박사이다. 김 박사는 어린 시절 신흥보통학교, 신흥중학교, 경신중학교를 졸업, 전주 화산동에서 거주하면서 성경연구, 음악공부를 했다. 이후 일본과 미국 등에서 음악공부, 신학공부를 했다. 그의 족적의 한 페이지(음악)를 조심스럽게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지휘 김경희 교수)가 조명한다. 마침내 김홍전 작곡가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오는 12일 오후 7시 롯데콘서트홀에서 이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연주회는 국내 최초의 여성 지휘자 김경희 교수의 지휘와 국내 최고의 솔리스트 4중창, 위너오페라 합창단이 함께하고 국내 최초 선보이는 교향곡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날 연주회는 1부 ‘루디아’ 2부 ‘심포니 d minor’로 나눠 펼쳐진다. 성악가 소프라노 박현주, 메조소트라노 이아경, 테너 박성근, 바리톤 한규현 등이 출연해 음표에 리듬을 더한다.
1부 오라토리오 ‘루디아’는 “1942년에 시작해 1944년에 완성됐으며 성경 룻기에 있는 서사를 가감 없이 음악이란 장르 위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김경희 교수는 말한다.
2부 ‘심포니 d minor’는 일제의 감시와 핍박으로 곤궁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피어난 곡이다.
김 교수 역시 “처음에는 고전 형식으로 된 2관 편성 정도의 작품으로 짐작했는데 스코어를 받아 본 후 3관 편성에 오르간, 하프, 합창까지 나오는 대규모의 교향곡이라서 놀랐다”고 말한다.
특히 ‘심포니 d minor’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곡을 작곡한 1942년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김홍전 박사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며 창씨 개명, 신사참배 등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와 핍박으로 곤궁에 처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오로지 음악에만 매달리며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후 시카코중앙음악원(Central Conservatory of Chicago)에서 공부를 하던 김홍전 작곡가는 1950년 7월 한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 미국과 스위스를 돌며 얄타회담의 부당성과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알리고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각국 기독교단체와 언론, 재야인사들을 찾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시카고중앙음악원에서 작곡을 꾸준히 공부해 마침내 1951년 10월 19일 ‘Symphony in d minor’로 음악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당시 박사학위를 위해 작곡한 작품은 교향곡 ‘Symphony in d minor’ 외에 ‘할렐루야’, ‘민가조’(民歌調), 피아노연주, 음악이론 등이었다.
김홍전 작곡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에 따른 음악적 재능으로 음악박사를 취득했지만, 그 후 1957년 리치몬드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마침내 신학박사(Th. D. Richmond Union Theological Seminary)까지 취득하고 목사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생애 후반기라 할 수 있는 1964부터 2003까지는 개신교회 목사로서 그동안의 사회 활동과 일반 음악 작곡 활동을 멈추고, 오직 말씀을 전하는 목회와 찬송 작곡에만 전념했다. 1964년~1967년 사이 김 작곡가는 찬송가를 가장 많이 작곡하기도 했다.
그가 쓴 ‘수상록 517’에서 찬송은 왜 하느냐?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찬송하고도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명시(明示)가 없고 증명할 아무것도 없다면 이는 과연 하나님이 들으시는 찬송일까? 아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털끝만치도 어둠이 없으시다. 그 지시 그 응답 그 가납은 항상 지극히 명료하고 그렇게 우리에게 비추신다, 참으로 들으시는 찬송은 그 부른 자에게 가납(嘉納)의 확증을 주시는 것이니 곧 찬송하는 자의 생활이 세상 앞에 확증하고 부른 자기 신의 가납의 확증으로서 은혜를 받아 실생활에서 사람들 앞에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외의 찬송을 부름은 억지요 강작(强作)이오, 인간의 종교적 감정의 발로뿐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김홍전 박사는 1934년 일본 동경에 가서 음악 개인연구를 했다. 이후 Dwight R. Malsbary 박사에게 음악이론, 작곡학, 피아노, 연주, 지휘를 배웠다. 김 박사는 ‘전라북도 관현악단 조직’으로 작곡, 편곡, 지휘를 맡으면서 1945년 9월과 11월 두 차례 발표도 했다.
이후 1945년 11월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 전라북도 미군정청 군정지사의 수석고문관 겸 군정고문회 의장, 군정지사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미국 유학길에 나선다. 1950년 9월 22일 미국 델라웨아주 윌밍톤시 소재 Faith 신학교에 입학(문학사 등 자격시험 합격 후 정규학생으로 입학), 1951년 5월 30일 캔자스 주 위치타 National Bible College 명예신학박사 취득, ‘51년 6월부터 10월 시카코중앙음악원(Central Conservatory of Chicago)에서 작곡한 연구 ‘Symphony in d minor’로 음악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귀국 ‘52년 4월부터 ’54년 8월까지 전주에서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 출판부장 겸 월간기독교지 주간 “복된 말씀”을 전하기도. 김 박사는 다시 미국 유학 2차에 오른다. ‘54년 9월 23일부터 1957년 5월 27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 Dropsie 대학원(히브리어, 중동어, 중동문화)에서 수학 종합시험에 합격, 철학박사 학위 후보 자격을 획득한다. 이후 Richmond Union 신학교에서 구약연구로 신학석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귀국 ’57년 9월부터 ‘60년 5월까지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대전 기독학관‘(현, 한남대학교)을 설립, 학장대리 겸 이사회 고문을 역임했으며, 미국 남장로교가 WCC에 가입하자 사임했다. 이후 사회활동으로 ’60년 11월 ‘62년 9월 13일까지 민국일보사 사장 겸 발행인, 관동대학 이사장(’62.1-‘70.5), 국동방송 이사장(’67.7-‘70.12)을 역임했다. 이후 ’64년 1월 5일 독립개신교회(IRC) 성약교회 창립 교역자로 취임봉사, ‘85년 7월 성약교회 사임, 일본인 교회 초청으로 동경에 있는 신학교와 동경, 경도, 북해도 등지의 교회에서 설교와 신학 강의를 했다. 이후 캐나다 위니펙으로 이주, 그곳에서도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등 그의 선교사적 사명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저서로는 창세기와 누가복음, 사도행전, 신약개론(전주 “복된 말씀”사 발행 1953년), 복음이란 무엇인가(일본어 동경 생명지언사 발행 1966년. 한국어판 1973년), 구약 이사야서 주석(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발행 1954년), 1982년부터 성약출판사에서 강설 저서(100여권)와 찬송, PRELUDE 발간 등이 있다.
그는 시와 음악 ‘수상록 62’에서 별이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을 듣는가?! 맑은 하늘에 깜박거리는 별을 자세히 바라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신비의 노래를, 별의 노래를 받아 음악을 쓰자,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별의 노래를 써보자! 고 회고했다. /박상래 기자
마에스트라 김경희의 지휘, 그 손 끝에 우리의 최초 교향곡 피어나다
https://ireview.kr/23420 07/08/20241911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 통해 초연
우리나라의 음악사에서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오페라가 1948년 테너 이인선이 제작한 ‘라트라비아타’로부터 출발했듯이 우리에게도 교향곡을 처음 작곡하고 연주한 작곡가가 분명 존재한다. 지금까지 그 점을 밝히려고 노력했던 음악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연구했으나 알지 못했던 것일까? 혹자는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등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성곡일 뿐이다. 그러던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다. 바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김홍전 작곡가의 무수한 작품 중 ‘심포니 d minor’가 최초의 교향곡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홍전 작곡가는 알면 알수록 그가 우리나라에 남긴 족적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선 그 엄혹한 강점기 시대에 최초의 오라토리오 ‘루디아’를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루디아’는 국내 음악인들이 몇 차례 연주한 적은 있지만, 재정상 규모를 원전대로 재연하지 못해 김홍전 작곡가가 보여주고 싶은 음악 세계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는 한계를 두고 있었다.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가 김홍전 작곡가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오는 9월 12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에서, 한국음악사의 역사를 새롭게 기록할 두 작품을 연주한다. 특히 심포니 d minor 작품은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발견하고 그 두꺼운 먼지의 더께를 털어내 세상에 빛을 받게 한 것만큼이나 우리 음악계로서는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이 위대한 공연의 지휘를 맡은 이는 마에스트라 김경희 교수로서 이미 ‘루디아’를 지휘한 바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김홍전 작곡가의 음악적 이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연주회는 1부 ‘루디아’ 2부 심포니 d minor로 펼쳐지는데 소프라노 박현주, 메조소트라노 이아경, 테너 박성근, 바리톤 한규현 등이 김 작곡가의 음표에 생명을 불어넣는 성악가들로 출연한다. 공연을 앞두고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연주할 것인지 자못 궁금해 먼저 김경희 교수에게 작품세계를 물었다.
루디아, 1942년에 시작해 1944년 완성한 룻기 이야기
오라토리오 ‘루디아’는 2020년에 이미 지휘한 바 있기 때문에 김경희 교수야말로 이 작품의 서사적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 교수는 ‘루디아’는 사실 일부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공연하긴 했지만 크게 알려진 것은 2020년 2월, 정식으로 무대에서 연주되었을 때라고 말한다.
“이 곡은 성경 ‘룻기’의 서사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번 9월 공연에는 루디아 1부 3부 전곡과 2부에서 발췌해 30분 정도 연주합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구약의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목숨을 유지하려고 모압으로 갔으나 오히려 이방 땅에서 죽게 됩니다. 또한 이방 여인과 혼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며 모압 여인을 아내로 취한 두 아들까지도 죽고 맙니다. 결국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와 두 며느리인 룻과 오르바, 세 과부만 남게 되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크게 회개하고 두 며느리에게 소망없는 자기를 따르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합니다. 그런데 룻은 어머님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며 나오미를 따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쁨으로 노래합니다. 이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이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내립니다. 이후 룻은 다윗의 할머니가 되는 복을 받게 되지요.”
김경희 교수는 ‘1942년에 시작해 1944년에 완성된 오라토리오 루디아는 성경 룻기에 있는 서사를 가감없이 음악이란 장르 위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일제의 감시와 핍박으로 곤궁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심포니 d minor 작곡
이 작품을 접하면 당장은 현대 한국 작곡가들의 교향곡과 비교해보게 된다. 우선 매우 탁월하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어찌 그 엄혹한 시절에 이같은 대곡들을 구상하고 음상으로 현상화할 수 있었을까? 김경희 교수 역시 이 곡을 접했을 때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고전 형식으로 된 2관 편성 정도의 작품으로 짐작했었죠. 그런데 스코어를 받아 본 후 3관 편성에 오르간, 하프, 합창까지 나오는 대규모의 교향곡이라서 놀랐습니다. 그 시대에는 풍금으로 건반악기를 배웠던 시절일텐데 김홍전 박사님은 파이프 오르간의 음색까지 이미 간파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롯데콘서트홀에 장착된 파이프오르간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며 빛을 내리라 믿습니다. 또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오르기 때문에 작곡가의 생각대로 그 웅장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작곡기법도 화성적 요소와 대위법적 요소가 어우러져 현대 작곡가들에게도 좋은 지침이 되리라 믿고요.”
특히 이번에 세계 초연하는 심포니 d minor는 현대 음악 작곡가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작품이 아닐까? 악식의 구조상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심포니 d minor 작품은 훨씬 진보적인 느낌마저 든다. ‘심포니 d minor’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곡을 작곡한 1942년의 시대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며 창씨 개명, 신사참배 등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와 핍박으로 곤궁에 처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오로지 음악에만 매달리며 이 작품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대 극심한 고난 때문에 힘들어하는 느낌은 표면적으로 그의 음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대 상황과 고난을 넘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음악과 천상의 세계만을 노래하는 찬송만이 가득할 뿐이거든요. 합창 가사는 모두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 연주 때 한국 말로 번역을 해서 할까도 생각했는데 원작 그대로 하는 것이 초연의 의미가 더 짙게 느껴질 것 같아 그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넘어 순전한 음악과 찬송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베토벤 심포니 9번보다 더 큰 스케일의 합창교향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동적인 선율과 음향의 심포니 작품
인터뷰 전에 이 곡을 들어보았다. 진실로 감동적인 선율과 음향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그토록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WCN코리아의 류성근 본부장은 김홍전 작곡가는 한국전쟁 이후 대중을 상대로 한 음악을 일절 삼가고 오직 신학적 주제를 담은 작품만 교회를 통해 내놨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잘 알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김경희 지휘자는 이처럼 꼭꼭 숨어 머리카락이 보지 않은 작품을 어떻게 발견하고 지휘봉을 잡게 되었을까?
“김홍전 작곡가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과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시절입니다. 당시 기획팀장을 하시며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류성근 선생님을 통해서였죠. 오라토리오 ‘루디아’를 연주하기 위해 김홍전 작곡가의 유족들이 김홍전 작곡가의 ‘영’을 음악으로 올바르게 옮길 지휘자를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발탁(?)이 되어 오늘날까지 인연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의 최초 여성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보니 어떤 분야에서 최초로 기록을 남기신 분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고, 작곡가든 연주자든 특정한 작품이 인정받고 자리잡기까지 주위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번 연주는 단지 호기심만으로 지휘하기보다 엄중한 사명감을 느낍니다.”
‘루디아’ 연주 후 유족들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심포니를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정하고 수기로 써진 악보를 컴퓨터 작업을 통해 재정비했다. 그런 지난한 작업을 통해 심포니 규모상 재정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최초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존재감이 분명합니다. 이는 최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인정받고 자리잡기까지 그만한 책임감을 가지고 무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교향곡이 한 번의 연주로 끝나지 않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처럼 늘 우리 곁에서 사랑받으며 세계 각국까지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이번 연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홍전 작곡가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심취
김홍전 작곡가는 이미 하나님께서 음악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천재였다. 1914년 11월 15일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의 재능과 의지가 워낙 강해 소년 시절에는 오직 열정만으로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화한 기독교 집안이자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그 집안은 선교사들과 음악가와의 교류가 끊이지 않았다.
신흥학교 교사(1924년)였던 현제명 작곡가도 김홍전 부모의 집에 기거하기도 했다. 워낙 어린 시절이기 때문에 현제명의 특별한 지도나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릴 때부터 음악적 분위기에서 성장했음은 분명하다. 그는 마치 바흐가 그의 형의 작품을 한번 듣고 모두 기억해 기록했듯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음악 대가들의 곡을 베끼는 작업을 무수히 반복했다.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이 정도의 열정으로 음악에 심취해 있었을까? 신은 분명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1932년 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3년(1932년~1934년) 동안은 김홍전 박사의 신앙과 사상이 단단한 기초를 이루던 시기였다. 약관 20세에 쌓기 시작한 신앙과 사상, 음악 찬송은 이후 초지일관 관통하는 삶의 대주제가 되었다. 그의 수상록에 따르면 경신학교를 졸업하던 봄(1932년), 김홍전은 커다란 신앙적 은혜를 체험했던 것 같다.
“오늘 받은 은혜는 과거 은혜 위에 쌓인 것임에 틀림없다. 열심히 기도하고, 힘써 성경을 공부하고, 또 생에 충실하며 매일 가치 있는 일에 매진해야겠다. 음악을 스스로 익히고 깊이 생각하며 독서를 충실히 해 기본 지식을 키워야겠다.” 이 고백은 1933년쯤의 기록인데 당시 19세인 그는 이미 경배송 33번, 헌상송 3번 등을 작곡했다.
그는 음악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1934년 4월~9월, 1938년 4월~11월 등 두 차례에 걸쳐 도쿄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만큼 음악을 공부하고 연구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우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데다 건강이 악화되어 두 번 모두 몇 달만에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몸은 아프지만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고 싶어 유학의 기회를 얻기 위해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알 수 있다. 1934년 4월 도쿄에 가면서 그는 ‘그저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간다. 이 땅에서 들을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음악을 듣고 배우고 공부하려고 간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1938년 4월 동경으로 갔을 때는 나까노 아파트에 칩거하여 작곡과 습작에 전념하곤 했지만 결과적으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말스베리 선교사의 음악 수업
김홍전은 두번째 도쿄를 다녀왔을 때를 전후한 1935년 2월~1937년 9월과 1939년 4월~1940년 10월 사이, 선교사들의 추천으로 당시 숭실학교 음악교수로 있던 말스베리(Dwight R. Malsbary) 교수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교수 부부에게 음악이론, 작곡, 피아노 개인지도 수업 등 천금같은 음악수업을 받았다. 당시 말스베리 교수의 부인은 저명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피아노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이때 김홍전은 ‘1935년 내 나이 스물 하나, 이때 나는 비로소 정식으로 좋은 선생을 만나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김 박사는 청년 시절(1932~1945년) 일제의 고초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으로 알고 오직 음악에만 전념했다. “나는 굶어도 괜찮다. 이 괴롭고 기막힌 환경에서 가장 급한 일은 돈인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나는 무엇보다 음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의 그 음(音)을 전해야 하며, 또 동시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주를 찬송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1942년 10월 일기 중)
이즈음 작곡한 작품 중 바이올린 협주곡인 ‘제금협주곡’(提琴協奏曲) 제1번을 완성(1935년 9월)했는데 김홍전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지난 9월 1일부터 시작한 ‘제금협주곡’ 제1번을 꼭 한 달 만에, 오늘 드디어 탈고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완성의 희열을 다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자애로 주신 능력과 은혜의 결과일 뿐 내 힘은 아무것도 아니다. 크신 은혜는 내 생활의 동력과 양식이 되리라고 믿는다. 우연한 영감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협주곡을 완성한 9월 말 오늘 아침, 나를 공부시킨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할 뿐이다.”(1935년 9월 30일)
김 박사는 1938년 2월 11일 오전 1시 30분에 드디어 최초의 교향시 ‘물망초’를 완성했는데 이 곡은 1937년 7월 14일 평양에서 작곡을 시작하여 10월 6일 정오 군산 구암리의 여학교에서 초고를 마쳤다. 그날 오후에는 즉시 관현악 편성을 시작하여 끊임없이 보정, 교정하여 이듬해 2월 11일 완성한 것이다.
“완성까지 7개월(1937년 7월 14일~1938년 2월 11일)이 걸렸다. 초고를 쓰는 데 213일이 걸렸고 다시 관현악곡으로 편성하는 데 85일이 걸렸다. 1935년 제금협주곡 F장조 협주곡을 쓴 이래 화성학과 대위법 등의 작곡 이론을 공부하고 완성한 첫 관현악곡이다. 독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지독한 작곡광이었음에 틀림없다.
위대한 음악가 반열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도 준비
김홍전은 이후에도 독학으로 수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청년 시절(1931년~1945년)에도 그의 작곡 주제는 ‘오직 찬송’이었다. 그것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위대한 음악가들이 수세기 동안 이어오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중 하나는 자신의 자리로 만들어주었다고 느꼈다.
“거기에는 나의 자리가 비어 있다.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그리고 바그너 등 그들이 나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와서 우리 곁에 앉아라. 여기 네 자리가 비어있다’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들을 지금 멀리 바라본다. 먼 길이라도 가야만 하는 길이요, 그리 멀지도 않으리라. 무한히 넓은 세계, 저 넓고 높은 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노래를 지상의 사람들에게 전하라 한다. 이는 나에게 주신 유일한 의무다. 하나님, 나는 당신의 것이오니 받으시고 이루옵소서. 아멘”(1936년 5월 1일)
또한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기록도 수상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김홍전에게 준 음악가로서의 사명은 한 나라를 구성하는 데 음악이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만세 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가로서 당신이 매일 음악 생활에 충실해야 이 나라의 진행에 쓰임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그 나라가 이루시기를 원하신다. 물론 내 음악을 통하여서다. 그런데 만일 오늘 그 사명에 충성하지 않으면 그에 정비례해서 그 나라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다. 나의 음악 활동은 그 나라에서 하나의 추진력으로 명료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불충실하고 사명에 철저하지 못하며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진행을 위해서 불가불 불충실한 자를 버리고 다른 충성스러운 자를 기용하실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충성을 다해도 불완전하고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따라서 사명을 맡은 자에게 가장 필요한 요구는 충성인 고로, 우리가 분골쇄신하면 나머지 불비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어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1940년 4월 3일)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거부, 그리고 루디아
김홍전 작곡가는 일제강점기 일제의 요구를 거절한 것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창씨 개명을 하지 않은 까닭에 늘 일본 순사의 감시를 당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일이 없어 수입도 양식도 없었다. 그러한 일제의 핍박이 극렬함에도 불구하고(1938년~1945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으로 작곡에 전념했다. 고난과 역경의 시기에도 천군 천사와 부르는 찬송을 땅 위에 전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당시 김홍전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 그의 수상록 이곳저곳에 기록돼 있다. 조반은 반 그릇으로 때우며 점심도 없고 저녁 지을 쌀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악적 사명을 다한다면 굶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또 이렇게도 기록하고 있다. “나의 음악이 슬픔에 젖어있는 황량(荒涼)한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자애를 불어넣어, 참으로 사랑이 넘치고 나를 통하여 이 신성이 나타나 주의 영광에 이르기를…”(1942년 6월 16일)
이 시기에 탄생한 대곡 중 하나가 바로 이번 공연에 선보일 오라토리오 ‘루디아’이다. 김 작곡가의 작품 중 일반에게 공개된 곡 중 하나인 ‘루디아’는 성경의 내용 중 ‘룻기’를 음악서사적으로 그린 오라토리오로 그 내용은 김경희 지휘자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대략 다음과 같다.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 모압이라는 지방으로 피신갔다가 남편과 자식들을 잃고, 사람의 힘으로 생명을 연장하려 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땅으로 돌아오는 여인이다.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함께 모압으로 갔으나 남편도 자식도 먹을 것이 없어 모두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겪는다. 결국 결혼하기 이전의 친정 집으로 돌아가라며 나오미가 밀어내려 했으나 룻은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만 믿고 나오미를 따라간다.
룻은 비록 이삭을 주워 먹고 살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 큰 것을 기쁨으로 찬송한다는 내용이다.
시카고중앙음악원과 리치몬드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다
이후 시카코중앙음악원(Central Conservatory of Chicago)에서 공부를 하던 김홍전 작곡가는 1950년 7월 한국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 미국과 스위스를 돌며 얄타회담의 부당성과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알리고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각국 기독교단체와 언론, 재야 인사들을 찾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음악박사 이전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시카고중앙음악원에서 작곡을 꾸준히 공부해 마침내 1951년 10월 19일 ‘Symphony in d minor’로 음악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당시 박사학위를 위해 작곡한 작품은 교향곡 ‘Symphony in d minor’ 외에 ‘할렐루야’, ‘민가조’(民歌調), 피아노 연주, 음악이론 등이었다.
김홍전 작곡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에 따른 음악적 재능으로 음악박사를 취득했지만 그 후 1957년 리치몬드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마침내 신학박사(Th. D. Richmond Union Theological Seminary)까지 취득하고 목사로 활동하게 됐다.
그는 천상의 세계를 담은 곡을 작사하고 그 시를 바탕으로 작곡하며 ‘음악은 시(詩)다. 시는 천상의 세계를 노래(찬송)하는 것이다. 찬송은 신학 위에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가 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수상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늘의 것을 이 땅에 소개하는 일은 얼마나 큰 계시와 영감을 가져오는 것인가! 인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시가 된다면, 하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는 얼마나 고귀한 시인인가? 여기에 문학의 시(詩)보다, 음악이 더 높은 시(詩)의 세계를 인간에게 보여준다. 인간의 사랑, 싸움, 갈등, 분노, 희락, 인내, 슬픔 등을 묘사하여 읽는 사람의 심금을 올려주는 것이 문학시의 역할이라면, 음악은 천계의 사랑, 진노, 의, 영채(榮彩) 등을 드러내는 것이요, 그렇게 하여 인간을 천계에 접(接)붙일 수 있다. 여기에 음악의 진정한 특징이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이런 내용도 있다.
“예술… 그중 음악에서 구하려는 가장 큰 보화, 유일의 참 보배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시(詩)다. 다만 시! 하늘의 별 같이 천국의 사자로 나타나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참된 ‘시’만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의 보화이다. ‘사상보다 시를! 철학보다 시를!’ 그것은 나의 목표요, 기원이다.”(10월 12일 평양)
김홍전 작곡가는 앞서 기술한 것처럼 1931년부터 1951년까지의 생애 전반기, 음악을 인생의 사명으로 알고 오직 음악에만 전념한 끝에 1957년 신학박사가 되었다. 이후 생애 후반기라 할 수 있는 1964부터 2003까지는 개신교회 목사로서 그동안의 사회 활동과 일반 음악 작곡 활동을 멈추고, 오직 말씀을 전하는 목회와 찬송 작곡에만 전념했다. 1964년~1967년 사이 김 작곡가는 찬송가를 가장 많이 작곡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기 위해 김홍전 작곡가에게 생명을 주시고 음악가로, 시인으로, 신학자로 세워 종국에는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서, 찬송만을 위한 작곡가로서 그 사명을 다하도록 한 것 같다. 그는 찬송 작곡가의 사명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음악의 가장 아름다운 경계는 무아의 경지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의 경지… 그러므로 참된 음악 연주가 무슨 자취(自取)나 자홀(自惚)이나, 잡상(雜像), 잡감(雜感)의 경계와는 달리, 담담(淡淡) 무애(無礙), 무아의 경계에 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도 마땅히 이 경계에 서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을 향한 시를 짓고 곡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가 이 경계에 서야 한다. 이때 작사는 인간의 사상 감정을 전하는 소위 문학시와는 아주 다르다. 하나님께서 계시한 바, 하나님의 세계를 솔직히 표현하면 된다. 하나님은 가사와 곡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 성신의 능력이 있는 작곡자, 신령한 작곡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작시로써 작곡자의 마음에 조명하면, 음악가는 그것을 음으로 읊는 것이다. 여기서 참된 찬송이 솟아나는 법이다.”
찬송과 예배모범(Liturgy)을 만들다
김홍전 작곡가는 예배 형식에 있어서도 한국교회에 큰 밑거름을 세웠다. 교회를 세울 때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 중, 말씀 선포와 찬송을 중심으로 한 예배모범(Liturgy)을 만들어 실천한 것이다. 구약시대, 성전에서 경배드리는 전경을 생각하며 만든 예배모범으로써, 처음에는 영광송을 올리고 그 다음은 성삼위송, 그 다음은 기도, 경배송, 낭독, 그리고 말씀을 듣기 위해 자신을 전부 바치는 헌상송을 올리고 강설을 펼친 후 끝으로 송영을 올리며 성전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예배를 마치는 식의 모범이었다.
“특히 찬송은 음악적 구성요소가 제대로 구비되어야 하고 그 음악을 표현하는 소리 또한 잘 훈련되어야 한다. 신령하고 아름다운 내면을 잘 나타내는 음악이어야 한다. 즉, 찬송은 속과 겉이 같아야 한다.”
김홍전 작곡가의 일생을 살펴볼 때 그가 신학박사로서, 목사로서 전념하기 이전의 작품들이 여전히 세인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인생의 후반기를 오로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까닭이다. 다행히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는 정기연주회를 통해 오는 9월 12일 7시반 롯데콘서트홀에서 김홍전 탄생 11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최초의 교향곡을 발표하기에 아마도 역사적인 공연이 될 것이다. 더구나 국내 최초의 여성 지휘자 김경희의 지휘와 국내 최고의 솔리스트 4중창, 위너오페라합창단이 함께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합창교향곡, 교성곡, 오라토리오의 감동보다 압도할 것이다. 김홍전 박사의 후손인 현대 작곡가들과 합창단, 아니 음악인 모두가 이번 음악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김종섭
김홍전 교향곡 D-minor 공연 실황 2024-9-12
https://www.youtube.com/live/xrMdR2eF0gI?si=6hXk8pQ3DMoG2Zs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