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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여행기⑥ 잉카제국, 쿠스코와 고산증
남편의 충혈 된 눈에 눈꼽이 끼고, 잠긴 목에서는 쉰소리가 났다. 수중에 있는 내 몸살감기약이 만병통치약이라도 된 듯 시간 맞춰 꼭꼭 먹는다. 오늘은 쿠스코를 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아쉽게 호텔 조식도 먹지 못하고 시간에 쫓기며 택시를 탔다.
무거운 캐리어 3개를 낑낑대며 트렁크에 싣는 기사의 순박함이 스며있는 눈을 보니 짠하고 고마워 부른 값에 팁을 주자는 남편의 말에 딸은 ‘우리가 지불할 택시비는 충분한 댓가이며 매번 팁을 주다보면 교통비 지출이 너무 많아요’하며 거절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힌다.(여행 출발할 때 딸이 지출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기로 하였음 - 준비한 지갑에 지폐와 동전을 액수별로 넣어 철저하게 지출 관리) 인정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마도 값싼 동정이라고 생각하여 그랬으리라. 또 페루에서의 자유여행은 택시를 자주 타야 했기에 택시비 지출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토요일. 리마 공항은 고속터미널처럼 여행객들로 왁자지껄 붐볐다. 20대 한국 청년들도 3명이나 보였다. 세계 속에서 만난 내 나라 사람. 무조건 반가웠다. 세계 여행이 일상화 된 한국이지만 먼 남미는 아직까지 보편화 되지 않아 한국인 여행객 보는 일이 귀했다.
비행기로 1시간 남짓 걸려 쿠스코에 도착.(버스로는 23시간 걸림)
공항에 들어서니 몸이 약간 휘청거리더니 이내 괜찮아졌다. 마음속으로 은근히 걱정했던 고산증 ‘이쯤이면……’하고 늠름한 나. 이때 고산증에게 좀 더 겸손했어야 했다.
“쿠스코!”
잉카제국의 심장 쿠스코(Cusco,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는 잉카제국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이다. 퓨마가 웅크리고 있는 형태로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는 잉카인들의 세계관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페루 남동부와 안데스 산맥의 해발 3399M에 위치해 있다. 약 3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고 90% 이상이 잉카인들의 후손인 인디오들이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잉카 이전, 잉카, 식민지, 현대의 건축물이 조화를 이룬 도시다.
스페인 식민지가 되어 궁전, 사원 등 모든 건축물이 스페인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거기서 나온 돌을 주춧돌 삼아 수도원, 성당을 짓고 새로운 도시 쿠스코를 건설했다고 한다.
리마, 이카, 와카치나, 나스카와는
다른 마음가짐, 조금은 더 엄숙하고 신성한 호기심, 기대감으로 안착한 쿠스코는 현대와는 동떨어진 세계라는, 환경이나 사람들이 아직도 잉카문명적인 생활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느껴졌다. 돌로 이루어진 도로, 골목길(거의 모든 길이 골목길로 이루어짐), 오밀조밀 작디작은 해묵은 석조 건물들도 잉카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듯. 이것들이 지금의 쿠스코를 있게 했구나 싶어졌다.
여기저기 어슬렁거리거나 누워 있거나 자고 있는 많은 개들이 사람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정경들은 쿠스코인들이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나이 어린 여아는 물론 할머니들까지 양 갈래로 땋아 내린 길고 새까만 머리에 컬러풀한 전통의상(하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을 입고 인디언 모자를 쓰고서 생활하는 쿠스코인들은 교과서나 매스컴을 통해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에 보이는 잉카의 흔적들 모든 것이 쿠스코를 세계문화유적지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과 도로를 번갈아가며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던 택시가 산마루쯤 되는 곳에서 멈췄다. 우리 숙소 앞이었다.
아주 젊고 성실함으로 다져진 듯한 인상의 독일인 주인이 우릴 반기며 숙소로 안내했다.
1층은 침실 2개, 작은 거실 1개, 화장실 1개이고, 2층은 삼면이 통유리로 넓은 응접실과 주방, 바, 오디오까지 겸비한 전망이 아주 끝내주는 근사한 숙소였다.
신축 건물이 아닌데도 목조 건물 곳곳이 아주 정갈하고 꼼꼼한 손길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약 40평이나 되는 넓은 공간을 우리만 쓰기엔 아까울 정도였다.
1년여 전, 실비만의 여행으로 빠듯한 경비 때문에 호스텔 내지 도미토리만 전전했던 아들의 상황이 이제사 뻔히 보이며 많이 미안했다.
한편, 잠자리에 예민한 엄마를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쓴 딸의 속 깊은 배려가 더없이 고마웠다.
4박5일 동안 묵을 숙소이기에 먼저 정부터 붙이고 우린 유유히 쿠스코, 잉카제국의 심장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숙소에서부터 시작된 돌계단은 우리가 가려는 아르마스 광장까지 계속되었다. 계단 곳곳에 쿠스코 전통의상, 수공예품 상점, 여행객을 위한 숙소, 카페, 미니마켓, 레스토랑, 술집, 세탁소 등이 자리 잡고 잡화들을 보자기에 펼쳐놓고 팔고 있는 현지인들이 쉽게 눈에 띠었다.
20분 정도 걸어 계단 끝에 다다르니 대성당, 교회, 여행사, 레스토랑 건물로 둘러싸인 아르마스 광장이 보였다.(페루는 도시마다 아르마스 광장이 있음)
아르마스광장
아르마스 광장은 세계의 배꼽인 쿠스코의 행정, 종교, 문화의 중심지이다. 세계의 배꼽 속의 배꼽인 셈이다.
아르마스 광장 한 가운데 분수대 위에는 ‘태양신의 후예’ ‘세상의 개혁자’로 추앙받은 통치자로 잉카를 전성기로 이끈 피차쿠텍 황제(태양신전 코리칸차와 삭사이와망 요새를 축조함. 마추픽츄도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함)의 황금 동상이 광장과 그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르마스광장에서 가장 압도적인 건물 대성당은 100년에 걸쳐 완성했으며 성당 안에는 은 300톤을 사용해 만든 제단, ‘지진의 신’이라 불리는 원주민 피부색의 그리스도상, 쿠스코 대표음식 꾸이가 그려진 최후의 만찬 그림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산토도밍고 교회, 헤수스 교회 등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각자 나름대로 여행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여러 인종들의 모습을 보며 언뜻 그들 속에서 내가 담고 있는 쿠스코 역사에 대한 연민을 보는 듯 착각도 해 봤다. 현실과 가슴이 감동으로 한 꼭지점이 되어 그간 고생했던 비행 행로가 말끔히 씻겨나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쿠스코를 거닐며 잉카의 향을 온몸으로 느끼고 마시며 새로운 세계를 탐하였다. 골목문화가 성한 쿠스코의 골목골목은 취향대로 멋을 낸 레스토랑, 카페, 이국인들, 다양한 언어들로 북적거렸다.
피자로 이름난 레스토랑 La bodega138에 들어서니 젊음의 끼가 소용돌이치며 여행의 기분을 북돋운다. 생전 처음으로 피자를 정식메뉴로 먹어본다는 남편, 야채샐러드에 수제맥주까지 곁들이며 멋지게 맛있게 아주 기분 좋게 먹었다.
레스토랑 La bodega138의 피자
아‧점치곤 아주 빈약한, 간식 같은 식사였지만 들뜬 기분으로 배가 불룩했다.
쿠스코에서의 첫 식사는 과하지 않으면서 본격적인 잉카로의 출발이라는 설렘으로 대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더 맛있고 거창한 dinner가 있기에.
눈병으로 맥주를 못 마신 남편을 위해 약국에 들러 안약을 사고, 고산증 대비약(소로체필)을 샀다. (약값이 아주 비쌌다)
쿠스코의 역사 현장을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고 카메라에 넣으며 잠깐 휴식을 위해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이 순간까지만 해도 우린 아르마스 광장의 밤문화와 아름다운 야경의 낭만을 즐길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내려왔던 돌계단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데 숨이 차고, 두통 울렁거림이 시작되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몸무게를 4kg가까이 축나게 한 고산증이 시작된 것이다.
두 계단 오르다 숨을 고르고 등을 두드리고, 또 두 걸음 후에 다시 숨을 고르고 등을 두드리고…… 고난의 길이었다. 23시간 남짓의 장시간 비행은 고산증에 비하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겨우 돌계단을 다 올라 숙소에 도착한 나는 고산증 약을 먹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누운 상태에서도 숨이 가빠 움직임이 힘들었다. 주인에게 코카잎차를 부탁해 끓여마셨지만 금방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이틀 정도면 자연스레 적응이 된다는 말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앉고 서고 고개만 돌려도 토할 것 같고 두통이 심해지니 모든 의욕이 사라져버렸다. 한국 내집 편안한 잠자리가 간절하고 아무리 달려도 숨차지 않는 내 나라 땅이 그립고……
다행히 남편과 딸은 고산 증세가 아주 경미하였다.
내가 잠든 사이 남편과 딸은 그 험난한 돌계단을 다시 내리오르며 쌀, 양파, 감자, 계란을 사와서 밥과 감자볶음을 조리하였다. 고산 지대라서 센 가스불인데도 음식이 쉬 익지 않았다. (3600m쯤)
쿠스코 밤의 근사한 외식 대신 설익고 찰기 없는 밥에 3분 짜장과 감자볶음, 생양파와 고추장을 차려놓고 통유리 너머의 그림 같은 아르마스 광장의 야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쿠스코에서의 첫 저녁식사와 건배를 하였다.
쿠스코에서 첫날밤 식사
미동에도 어김없이 날 고산증세 고통으로 몰아넣는 쿠스코의 첫날밤.
어찌 할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 난 나를 주저 없이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르마스의 광장을 중심으로 한 쿠스코의 밤은 화려하고 찬란하게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건만.
숙소에서 바라보이는 야경1
숙소에서 바라보이는 야경2
첫댓글 아~~아~~우리 사모님이 여행중에 이렇게 힘드셨다니 가슴 아파요 ㅠ
너무 생생한 글 솜씨에 드라마 보다 재미나요^^
글을 읽으면서 페루여행을 생생하게 접한것같아서 좋았습니다
저녁야경이 멋지네요~~
긴 글 읽느시느라 지루하셨을텐데,염려 소심한 제 마음까지 읽으시고 다음 편 쓰기에 용기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산증이 그렇게 힘든 것이었군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찬란한 야경을 방 안에서만 보시기에 너무 안타까우셨겠고요.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외롭지는 않으셨을테니 다행이라...
해도 될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