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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원문보기 글쓴이: 그리움의 끝은
고무신이냐? 짚신이냐?
"짚신을 애용하고 고무신을 배척하자!"
틀림없이 외래품이면서도 마치 우리 것처럼 느껴지는 생활용품을 굳이 하나만 꼽아보라면, 그건 단연 '고무신'의 몫이 아닐까 한다. 지금이야 고무신하면 촌티 나는 물건의 대명사인양 취급되기 십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핫바지에 고무신일망정 이건 분명히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고무신이라는 물건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쯤의 일일까?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지만 고무신이라는 것이 단순히 '고무'라는 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을 모두 일컫는 것이라면, 그 연원은 생각보다 꽤 오래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 의료선교사로 건너왔다가 조선주재 미국공사에까지 오른 알렌이 남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885년 2월 10일)...... 그런데 오늘 짜증나는 일이 일어났다. 민영익이 내 고무장화를 보더니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새것처럼 깨끗이 닦아서 주었더니 1피트 정도나 너무 커서 그의 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고무장화를 돌려주면서, 이보다 더 좋은 고무장화를 사줄 수 없겠는가라고 했다. 그것도 비싼 것으로 사달라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는 내가 그를 치료해준 댓가로 나에게 준 돈으로 그를 위해 물건을 사는 데 써달라는 것이었다." [자료출처 : 김원모 번역,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56~57쪽]
이 글은 말하자면 갑신정변의 와중에 개화파의 칼에 맞아 크게 다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알렌이 치료하던 때의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 '고무장화'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걸 보면 고무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을 엿볼 수 있다.
▲ <매일신보> 1920년 1월 17일자에 수록된 '총고무화'의 광고내용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가장 빠른(?) 고무신 관련 광고이다. 우리 나라에 고무신이 막 들어오던 시기의 것이긴 한데, 이때에 수입되어 들어온 고무신은 그림에서 보듯이 '단화형' 고무신이다.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이 이보다 약간 늦은 때의 일이다. | |
하지만 이 고무장화라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무신이라는 관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물건이다. 더구나 이러한 고무장화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었다는 흔적은 잘 보이질 않는다.
일찍이 조선 사람들이 신어왔던 '조선신발'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은 이것보다는 한참 후의 일이 된다. 이에 관한 기록을 뒤져봤더니 일본을 통해 고무신의 유입이 본격화한 때는 1919년이며, 특히 조선신발 모양의 고무신이 사람들에게 널리 선을 보인 것은 1921년이 되어서야 이뤄진 일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 잘 요약되어있어 참고할 만하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하는 표현은 곧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표기이며 발음 역시 '고무'이다.
호모화의 이입(移入)은 대정 8년(즉 1919년)경부터 부글부글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근소(僅少)한 수량에 불과했으나, 대정 10년(즉 1921년) 봄경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서 별안간 조선인의 환영하는 바가 되어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여 도회(都會)로부터 시골에도 점차 보급되어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고무신 수요의 격증은 동품 제조공장의 족출(簇出)을 불러와서 조선에 있어서도 대정 10년 중 설립된 것이 둘, 대정 11년(즉 1922년) 중 설립된 것이 넷, 계획중의 것이 다섯에 달했는데, 내지(內地)에 있어서는 거듭 현저한 증가를 가져왔던 것 같으며, 이에 따라 동업자간의 경쟁은 격렬해져 마침내 생산과잉에 빠진 결과 내지품의 투매물이 쇄도하여왔고, 대정 11년 5, 6월경에는 동년 1월경의 반값 이하로 하락했으며, 목하 각지 상장(相場)이 구구하여 모두 혼란상태에 있고, 이것 때문에 경성에 있어 공장설치계획중이던 것이 사업의 착수에 주저하는 것 같다.
▲ <매일신보> 1919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타비' 즉 일본식 버선의 광고내용이다. 이 물건은 기존의 '타비'에다 고무바닥을 덧붙인 것인데, 이걸보면 고무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고무재질을 활용한 다양한 제품의 생산이 시도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이 업계의 현상이 상술한 것과 같지만, 선화형의 고무신은 다른 신발류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선인(鮮人)의 기호에도 들어맞음에 따라 장래 오히려 수요의 증가를 볼 것이며, 일방 체화(滯貨)도 점차 소화되어진다면 본품 제조업은 조만간 순조로운 발전을 이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글은 조선총독부 상공과에서 직접 조사 정리한 자료이므로 내용의 정확성은 비교적 높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부터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무렵의 신문광고를 훑어보면 간혹 조선화(朝鮮靴)를 지칭하는 '경제화(經濟靴)' 혹은 '편리화(便利靴)'도 고무신이라는 구절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신발 전체가 고무재질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고무저화(底靴)'라고 하여 기존의 경제화나 편리화에 고무바닥(밑창)만을 덧붙인 것이어서 온전하게 '고무신'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앞으로 조선사람들이 즐겨 찾게 되는 '조선신발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1년 봄 무렵이었다. 이는 <매일신보> 1921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공업소'의 광고문안에 '순고무 경제화'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대륙고무'는 대한제국 때에 외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이하영(李夏榮)이 설립한 것으로, 그 시절에는 '대륙표(大陸標)'하면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고무신회사였다.
▲ <매일신보> 1921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의 광고문안으로 여기에는 '순고무 경제화'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으로써 이 무렵에 처음 이러한 고무신이 등장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중외일보> 1928년 11월 1일자에 수록된 "[저명상점과 저명상품] 대륙호모사(大陸護謨社)의 대륙고무신, 매일생산 5만 족(足)"이라는 기사에는 이 회사가 "1919년에 조선고무경제화를 발명하여 경성 용산 원정 1정목에 대륙고무공업소를 설립 제조함에...... 운운"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소개했던 <조선> 1923년 1월호의 관련기사에는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통계표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 부분에는 집계수치가 전무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 걸로 봐서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매일신보> 1922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의 광고문안에는 '순고무 경제화 원조(元祖)'라는 구절이 또렷하다. 조선산 고무신의 대명사 '대륙고무'는 대한제국 시절에 외부대신을 지냈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던 이하영이 설립한 회사였다. | |
어쨌거나 1921년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를 연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아울러 조선신발모양의 고무신이 조선 사람들의 호응을 받게 되자 눈치 빠른 일본인 상인들은 일본에서 '고무경제화'니 '고무편리화'니 하는 이름으로 고무신을 만들어와서는 대량으로 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무신의 빠른 보급은 곧 기존 신발의 쇠퇴를 의미했다. 고무신의 위세 앞에서는 서양식 구두는 물론이고 기존의 짚신과 조선화 역시 똑같은 처지였다. 고무신의 인기비결은 무엇보다도 값이 싸고 질기다는 데에 있었다. <조선> 1924년 3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글에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성과 방수력이 있어 중류자 이하의 수요가 격증함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鮮內)생산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즉 1921년)에는 가격 17만 8천 원(13만 7천 족)의 생산이 있었고, 11년(즉 1922년)에는 일약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즉 1923년)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백 8십만 원(4백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에서의 이입액은 12년(즉 1923년)에는 약 4백 8십만 원(6백 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천 백 85만 족(足)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고무신)의 수요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즉 1921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즉 1922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즉 1921년)에는 일시 70만 4천 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즉 1922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 <동아일보> 1921년 8월 9일자에 수록된 '일본산 고무신'의 광고문안이다. '단화형' 고무신에 이어 조선신발모양의 '경제화' 고무신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자 눈치 빠른 일본인들이 일본에서 급조한 '고무경제화'를 들여와서 조선 전역에 공급하기도 했다. | |
그런데 인기폭발의 고무신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고무라는 재질이 우선은 질기기는 하지만, 도무지 땀이 빠져나가지를 않았으니 위생의 관점에서는 빵점이었다. 가령 <동아일보> 1922년 6월 18일자에는 "호모화(護謨靴) 중독으로 종기가 유행하여"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전라남도 광주(光州)읍내에는 어린 아해들이나 여자들의 발과 다리에 용이히 낫지도 아니하는 부스럼이 전염되어 매우 욕을 보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그 병의 원인은 근래 크게 유행되는 고무경제화로 말미암아 병이 생긴 듯하다는 바 일기가 더워올수록 땀이 많이 나는 발에 버선도 아니 신고 함부로 고무신만 신는 까닭에 여름이 닥쳐올수록 더욱 병자가 많다더라.
이것 말고도 고무신의 인기상승과 더불어 조선신발이나 짚신을 만들어 팔던 이들의 실직문제도 불거졌다. 고무신 하나를 사려면 약간의 목돈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것이 훨씬 더 편리하고 질긴 것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동아일보> 1922년 8월 11일자에 수록된 "조선혜상(朝鮮鞋商)을 위협하는, 근래 유행되는 '고무'경제화, 시내에서 실직자가 오백여 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작년 이래로 고무신이 어찌 잘 팔리는지 경성은 물론이요 지방 벽촌에서 굵다란 짚신을 신던 사람까지 필경은 물렁물렁한 고무신을 신게 되어 짚새기를 삼아 팔아서 한푼 두푼씩 부시쌈지 속에 똘똘 말아 넣었던 귀한 돈으로도 서울 가는 편이나 장꾼에 부탁하여 고무신을 사다가 신고 싶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적어도 고무신 한 켤레를 사려면 짚신 네 켤레나 또는 다섯 켤레를 삼지 아니하면 아니 되며 결국 그 돈은 호박씨를 까서 한입에 넣는 셈으로 모두 고무신 만드는 회사의 재산이 되어 버린다. ... (중략) ... 조선의 인구가 이천 만이라 하면 어린 아해와 기타 신발을 많이 사용치 아니하는 사람의 수효가 반은 될 터인데 이와 같은 통계로 보면 거의 조선사람의 반은 고무신을 신게 되면 조선 안에서 산출하는 조선신과 짚신과 미투리는 거의 신을 사람이 없게 될 터인즉 방금 경성에서 업을 잃은 오백 명의 직공은 고사하고 전조선에 업을 잃은 사람이 몇만이나 될는지 실로 칭량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무신의 세력은 일본에서는 이미 위생에 적당치 못하다는 평판이 유행하여 전과 같이 사용치 아니하는 까닭에 고무신을 제조하던 회사들은 전문으로 조선으로 수출할 고무신을 제조한다 하나 경성에서는 요사이 고무신이 전과 같이 팔리지 아니하며 지방 사람들이 많이 사갈 뿐이라 한다. 그러나 지방사람들도 짚신을 팔아서 고무신을 사는 것이 과연 어느 때까지 유행될는지 모르겠다더라.
고무신이 등장한 지 불과 한 해만에 세상은 너나 할 것 없이 짚신이라도 팔아 고무신을 사 신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고무신의 색깔도 이내 백색(白色), 흑색(黑色), 적다색(赤茶色) 등으로 다양해지고, 가지가지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고무신은 빠른 속도로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예전에 즐겨 신던 신발들은 하나 둘 씩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짚신의 시대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나버린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롭게도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에는 "보통학교 아동들의 고무신 배척운동, 외국사람에게 돈을 품은 우리 손해, 조선 짚신 재봉춘(再逢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난데없이 고무신을 밀어내고 짚신을 애용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에는 경기도 지역의 보통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고무신배척운동'이 벌어진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른바 '자급자족'과 '자력갱생'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이 운동은 자연스레 '짚신애호운동'으로 이어졌다.
고무신을 신는 것이 개인적으로 경제(經濟)가 되지 않음은 아니나 그러나 조선사람의 전체적 경제로는 결국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하여 나 어린 아동(兒童)들이 일제히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草鞋)을 신게 되었다는 일찍이 전례가 없는 눈물겨운 미담(美談)이 있다. 경기도 관내에 있는 28개소의 보통학교졸업생지도학교(普通學校卒業生指導學校)의 육백여 명 생도들은 고무신이 모양도 좋고 인내력(忍耐力)도 있어서 어느 점으로 보나 짚신보다도 경제가 되기는 하나 금년과 같이 조선의 농촌경제(農村經濟)가 극도로 고갈된 때에 신발 한 켤레에 오륙십 전 내지 일원 각수를 소비하는 것은 결국 가난한 조선의 돈을 까닭 없이 외국사람에게 내어버리는 것이라 하여 일제히 자기들의 손으로 다시 짚신을 만들어 신기로 하고 은연중에 고무신의 배척운동(排斥運動)을 일으키어 목하 전동리에 그것을 선전중으로 부근 보통학교 아동들은 점차 고무신 대신에 짚신을 애용(愛用)하는 경향이 농후하여가는 중이라는데 비록 그 영향은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 나 어린 아동의 눈물겨운 노력은 점차 경제사정에 눈 떠가는 조선민중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의 일단을 보이는 것으로 각 방면에 비상히 충동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경기도 학무과 당국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어린 학동들이 좋아하는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을 신는 것은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기쁜 현상입니다. 조선의 문화(文化)라는 것은 아직껏 실력에 맞지 않는 변체적 발전이니까 덮어놓고 남의 흉내만 내어오다가는 결국 파탄이 생기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상인데 외국의 산품으로 만든 고무신이 좋기는 하지마는 결국은 가정이나 한 동리이나 한 사회의 크나큰 손실이라 하여 비록 불편은 하지마는 내곳에서 생산하는 재료를 가지고 내손으로 만들어 신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필요 또 긴절한 일인줄 압니다. 연고로 학무과에서도 장래에는 특히 그러한 방면에 전력을 다하여 일반 아동들을 교화코자 합니다" 운운.
세상은 이미 고무신이 생활필수품인 시대로 바뀐 지 오래인데, 이러한 마당에 느닷없이 '고무신배척운동'과 '짚신애용운동'이 벌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봤더니 이는 순전히 경제사정이 어려워진 탓이었다. 1930년이라고 하면 바로 전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가 한창 밀어닥치던 때였다. 제 아무리 고무신이 경제적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러한 호사조차 누릴 여유나 형편이 되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씀씀이를 줄일 수 있고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해야할 처지였다. 이러한 일은 대개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자력갱생', '자급자족', '농촌진흥'이라는 구호와 이름으로 진행되곤 하였다. 한푼이라도 아끼려면 고무신을 버리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짚신을 다시 삼아야 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무신배척운동은 꽤나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 분명하나, 생각만큼 굉장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무신을 벗어버리고 짚신을 신자고 아무리 외쳐보았자 편리함과 내구성을 따지면 도무지 짚신이 고무신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탓이었다.
예를 들어 짚신 하나를 삼는 데에 있어서 비록 재료비용은 적게 들지라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고무신을 사서 신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오래 신지도 못할 짚신에 연연할 아무런 까닭이 없었다.
결국에 짚신애용운동이란 것은 농촌지역에나 어느 정도 먹혀드는 얘기였지, 도회지나 비농촌지역에서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었다. 이때는 벌써 사람들이 고무신에 단단히 길들여진 상태였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무신폐지운동은 이 시기의 일과성 행사로만 끝나질 않았다.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까지 고무신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억제하고 그 대용품으로 짚신과 나막신, 심지어 일본식 게다의 착용을 장려하는 일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전시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고무신의 수급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그만큼 악화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럴 때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고무신의 몫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면 고무신이라는 존재가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온 지는 80여년 남짓한 세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주 해묵은 우리네의 생활용품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함께 나눈 핍박과 고난의 시절이 깊고도 길었던 탓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의 심성이나 고무신이나 '끈질긴' 것으로 치자면 참 많이도 닮지 않았던가?"짚신을 애용하고 고무신을 배척하자!"
틀림없이 외래품이면서도 마치 우리 것처럼 느껴지는 생활용품을 굳이 하나만 꼽아보라면, 그건 단연 '고무신'의 몫이 아닐까 한다. 지금이야 고무신하면 촌티 나는 물건의 대명사인양 취급되기 십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핫바지에 고무신일망정 이건 분명히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고무신이라는 물건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쯤의 일일까?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지만 고무신이라는 것이 단순히 '고무'라는 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을 모두 일컫는 것이라면, 그 연원은 생각보다 꽤 오래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 의료선교사로 건너왔다가 조선주재 미국공사에까지 오른 알렌이 남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885년 2월 10일)...... 그런데 오늘 짜증나는 일이 일어났다. 민영익이 내 고무장화를 보더니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새것처럼 깨끗이 닦아서 주었더니 1피트 정도나 너무 커서 그의 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고무장화를 돌려주면서, 이보다 더 좋은 고무장화를 사줄 수 없겠는가라고 했다. 그것도 비싼 것으로 사달라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는 내가 그를 치료해준 댓가로 나에게 준 돈으로 그를 위해 물건을 사는 데 써달라는 것이었다." [자료출처 : 김원모 번역,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56~57쪽]
이 글은 말하자면 갑신정변의 와중에 개화파의 칼에 맞아 크게 다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알렌이 치료하던 때의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 '고무장화'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걸 보면 고무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을 엿볼 수 있다.
▲ <매일신보> 1920년 1월 17일자에 수록된 '총고무화'의 광고내용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가장 빠른(?) 고무신 관련 광고이다. 우리 나라에 고무신이 막 들어오던 시기의 것이긴 한데, 이때에 수입되어 들어온 고무신은 그림에서 보듯이 '단화형' 고무신이다.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이 이보다 약간 늦은 때의 일이다. | |
하지만 이 고무장화라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무신이라는 관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물건이다. 더구나 이러한 고무장화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었다는 흔적은 잘 보이질 않는다.
일찍이 조선 사람들이 신어왔던 '조선신발'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은 이것보다는 한참 후의 일이 된다. 이에 관한 기록을 뒤져봤더니 일본을 통해 고무신의 유입이 본격화한 때는 1919년이며, 특히 조선신발 모양의 고무신이 사람들에게 널리 선을 보인 것은 1921년이 되어서야 이뤄진 일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 잘 요약되어있어 참고할 만하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하는 표현은 곧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표기이며 발음 역시 '고무'이다.
호모화의 이입(移入)은 대정 8년(즉 1919년)경부터 부글부글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근소(僅少)한 수량에 불과했으나, 대정 10년(즉 1921년) 봄경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서 별안간 조선인의 환영하는 바가 되어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여 도회(都會)로부터 시골에도 점차 보급되어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고무신 수요의 격증은 동품 제조공장의 족출(簇出)을 불러와서 조선에 있어서도 대정 10년 중 설립된 것이 둘, 대정 11년(즉 1922년) 중 설립된 것이 넷, 계획중의 것이 다섯에 달했는데, 내지(內地)에 있어서는 거듭 현저한 증가를 가져왔던 것 같으며, 이에 따라 동업자간의 경쟁은 격렬해져 마침내 생산과잉에 빠진 결과 내지품의 투매물이 쇄도하여왔고, 대정 11년 5, 6월경에는 동년 1월경의 반값 이하로 하락했으며, 목하 각지 상장(相場)이 구구하여 모두 혼란상태에 있고, 이것 때문에 경성에 있어 공장설치계획중이던 것이 사업의 착수에 주저하는 것 같다.
▲ <매일신보> 1919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타비' 즉 일본식 버선의 광고내용이다. 이 물건은 기존의 '타비'에다 고무바닥을 덧붙인 것인데, 이걸보면 고무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고무재질을 활용한 다양한 제품의 생산이 시도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이 업계의 현상이 상술한 것과 같지만, 선화형의 고무신은 다른 신발류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선인(鮮人)의 기호에도 들어맞음에 따라 장래 오히려 수요의 증가를 볼 것이며, 일방 체화(滯貨)도 점차 소화되어진다면 본품 제조업은 조만간 순조로운 발전을 이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글은 조선총독부 상공과에서 직접 조사 정리한 자료이므로 내용의 정확성은 비교적 높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부터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무렵의 신문광고를 훑어보면 간혹 조선화(朝鮮靴)를 지칭하는 '경제화(經濟靴)' 혹은 '편리화(便利靴)'도 고무신이라는 구절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신발 전체가 고무재질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고무저화(底靴)'라고 하여 기존의 경제화나 편리화에 고무바닥(밑창)만을 덧붙인 것이어서 온전하게 '고무신'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앞으로 조선사람들이 즐겨 찾게 되는 '조선신발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1년 봄 무렵이었다. 이는 <매일신보> 1921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공업소'의 광고문안에 '순고무 경제화'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대륙고무'는 대한제국 때에 외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이하영(李夏榮)이 설립한 것으로, 그 시절에는 '대륙표(大陸標)'하면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고무신회사였다.
▲ <매일신보> 1921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의 광고문안으로 여기에는 '순고무 경제화'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으로써 이 무렵에 처음 이러한 고무신이 등장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중외일보> 1928년 11월 1일자에 수록된 "[저명상점과 저명상품] 대륙호모사(大陸護謨社)의 대륙고무신, 매일생산 5만 족(足)"이라는 기사에는 이 회사가 "1919년에 조선고무경제화를 발명하여 경성 용산 원정 1정목에 대륙고무공업소를 설립 제조함에...... 운운"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소개했던 <조선> 1923년 1월호의 관련기사에는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통계표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 부분에는 집계수치가 전무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 걸로 봐서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매일신보> 1922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의 광고문안에는 '순고무 경제화 원조(元祖)'라는 구절이 또렷하다. 조선산 고무신의 대명사 '대륙고무'는 대한제국 시절에 외부대신을 지냈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던 이하영이 설립한 회사였다. | |
어쨌거나 1921년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를 연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아울러 조선신발모양의 고무신이 조선 사람들의 호응을 받게 되자 눈치 빠른 일본인 상인들은 일본에서 '고무경제화'니 '고무편리화'니 하는 이름으로 고무신을 만들어와서는 대량으로 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무신의 빠른 보급은 곧 기존 신발의 쇠퇴를 의미했다. 고무신의 위세 앞에서는 서양식 구두는 물론이고 기존의 짚신과 조선화 역시 똑같은 처지였다. 고무신의 인기비결은 무엇보다도 값이 싸고 질기다는 데에 있었다. <조선> 1924년 3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글에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성과 방수력이 있어 중류자 이하의 수요가 격증함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鮮內)생산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즉 1921년)에는 가격 17만 8천 원(13만 7천 족)의 생산이 있었고, 11년(즉 1922년)에는 일약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즉 1923년)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백 8십만 원(4백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에서의 이입액은 12년(즉 1923년)에는 약 4백 8십만 원(6백 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천 백 85만 족(足)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고무신)의 수요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즉 1921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즉 1922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즉 1921년)에는 일시 70만 4천 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즉 1922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 <동아일보> 1921년 8월 9일자에 수록된 '일본산 고무신'의 광고문안이다. '단화형' 고무신에 이어 조선신발모양의 '경제화' 고무신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자 눈치 빠른 일본인들이 일본에서 급조한 '고무경제화'를 들여와서 조선 전역에 공급하기도 했다. | |
그런데 인기폭발의 고무신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고무라는 재질이 우선은 질기기는 하지만, 도무지 땀이 빠져나가지를 않았으니 위생의 관점에서는 빵점이었다. 가령 <동아일보> 1922년 6월 18일자에는 "호모화(護謨靴) 중독으로 종기가 유행하여"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전라남도 광주(光州)읍내에는 어린 아해들이나 여자들의 발과 다리에 용이히 낫지도 아니하는 부스럼이 전염되어 매우 욕을 보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그 병의 원인은 근래 크게 유행되는 고무경제화로 말미암아 병이 생긴 듯하다는 바 일기가 더워올수록 땀이 많이 나는 발에 버선도 아니 신고 함부로 고무신만 신는 까닭에 여름이 닥쳐올수록 더욱 병자가 많다더라.
이것 말고도 고무신의 인기상승과 더불어 조선신발이나 짚신을 만들어 팔던 이들의 실직문제도 불거졌다. 고무신 하나를 사려면 약간의 목돈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것이 훨씬 더 편리하고 질긴 것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동아일보> 1922년 8월 11일자에 수록된 "조선혜상(朝鮮鞋商)을 위협하는, 근래 유행되는 '고무'경제화, 시내에서 실직자가 오백여 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작년 이래로 고무신이 어찌 잘 팔리는지 경성은 물론이요 지방 벽촌에서 굵다란 짚신을 신던 사람까지 필경은 물렁물렁한 고무신을 신게 되어 짚새기를 삼아 팔아서 한푼 두푼씩 부시쌈지 속에 똘똘 말아 넣었던 귀한 돈으로도 서울 가는 편이나 장꾼에 부탁하여 고무신을 사다가 신고 싶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적어도 고무신 한 켤레를 사려면 짚신 네 켤레나 또는 다섯 켤레를 삼지 아니하면 아니 되며 결국 그 돈은 호박씨를 까서 한입에 넣는 셈으로 모두 고무신 만드는 회사의 재산이 되어 버린다. ... (중략) ... 조선의 인구가 이천 만이라 하면 어린 아해와 기타 신발을 많이 사용치 아니하는 사람의 수효가 반은 될 터인데 이와 같은 통계로 보면 거의 조선사람의 반은 고무신을 신게 되면 조선 안에서 산출하는 조선신과 짚신과 미투리는 거의 신을 사람이 없게 될 터인즉 방금 경성에서 업을 잃은 오백 명의 직공은 고사하고 전조선에 업을 잃은 사람이 몇만이나 될는지 실로 칭량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무신의 세력은 일본에서는 이미 위생에 적당치 못하다는 평판이 유행하여 전과 같이 사용치 아니하는 까닭에 고무신을 제조하던 회사들은 전문으로 조선으로 수출할 고무신을 제조한다 하나 경성에서는 요사이 고무신이 전과 같이 팔리지 아니하며 지방 사람들이 많이 사갈 뿐이라 한다. 그러나 지방사람들도 짚신을 팔아서 고무신을 사는 것이 과연 어느 때까지 유행될는지 모르겠다더라.
고무신이 등장한 지 불과 한 해만에 세상은 너나 할 것 없이 짚신이라도 팔아 고무신을 사 신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고무신의 색깔도 이내 백색(白色), 흑색(黑色), 적다색(赤茶色) 등으로 다양해지고, 가지가지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고무신은 빠른 속도로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예전에 즐겨 신던 신발들은 하나 둘 씩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짚신의 시대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나버린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롭게도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에는 "보통학교 아동들의 고무신 배척운동, 외국사람에게 돈을 품은 우리 손해, 조선 짚신 재봉춘(再逢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난데없이 고무신을 밀어내고 짚신을 애용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에는 경기도 지역의 보통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고무신배척운동'이 벌어진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른바 '자급자족'과 '자력갱생'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이 운동은 자연스레 '짚신애호운동'으로 이어졌다.
고무신을 신는 것이 개인적으로 경제(經濟)가 되지 않음은 아니나 그러나 조선사람의 전체적 경제로는 결국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하여 나 어린 아동(兒童)들이 일제히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草鞋)을 신게 되었다는 일찍이 전례가 없는 눈물겨운 미담(美談)이 있다. 경기도 관내에 있는 28개소의 보통학교졸업생지도학교(普通學校卒業生指導學校)의 육백여 명 생도들은 고무신이 모양도 좋고 인내력(忍耐力)도 있어서 어느 점으로 보나 짚신보다도 경제가 되기는 하나 금년과 같이 조선의 농촌경제(農村經濟)가 극도로 고갈된 때에 신발 한 켤레에 오륙십 전 내지 일원 각수를 소비하는 것은 결국 가난한 조선의 돈을 까닭 없이 외국사람에게 내어버리는 것이라 하여 일제히 자기들의 손으로 다시 짚신을 만들어 신기로 하고 은연중에 고무신의 배척운동(排斥運動)을 일으키어 목하 전동리에 그것을 선전중으로 부근 보통학교 아동들은 점차 고무신 대신에 짚신을 애용(愛用)하는 경향이 농후하여가는 중이라는데 비록 그 영향은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 나 어린 아동의 눈물겨운 노력은 점차 경제사정에 눈 떠가는 조선민중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의 일단을 보이는 것으로 각 방면에 비상히 충동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경기도 학무과 당국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어린 학동들이 좋아하는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을 신는 것은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기쁜 현상입니다. 조선의 문화(文化)라는 것은 아직껏 실력에 맞지 않는 변체적 발전이니까 덮어놓고 남의 흉내만 내어오다가는 결국 파탄이 생기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상인데 외국의 산품으로 만든 고무신이 좋기는 하지마는 결국은 가정이나 한 동리이나 한 사회의 크나큰 손실이라 하여 비록 불편은 하지마는 내곳에서 생산하는 재료를 가지고 내손으로 만들어 신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필요 또 긴절한 일인줄 압니다. 연고로 학무과에서도 장래에는 특히 그러한 방면에 전력을 다하여 일반 아동들을 교화코자 합니다" 운운.
세상은 이미 고무신이 생활필수품인 시대로 바뀐 지 오래인데, 이러한 마당에 느닷없이 '고무신배척운동'과 '짚신애용운동'이 벌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봤더니 이는 순전히 경제사정이 어려워진 탓이었다. 1930년이라고 하면 바로 전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가 한창 밀어닥치던 때였다. 제 아무리 고무신이 경제적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러한 호사조차 누릴 여유나 형편이 되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씀씀이를 줄일 수 있고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해야할 처지였다. 이러한 일은 대개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자력갱생', '자급자족', '농촌진흥'이라는 구호와 이름으로 진행되곤 하였다. 한푼이라도 아끼려면 고무신을 버리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짚신을 다시 삼아야 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무신배척운동은 꽤나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 분명하나, 생각만큼 굉장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무신을 벗어버리고 짚신을 신자고 아무리 외쳐보았자 편리함과 내구성을 따지면 도무지 짚신이 고무신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탓이었다.
예를 들어 짚신 하나를 삼는 데에 있어서 비록 재료비용은 적게 들지라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고무신을 사서 신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오래 신지도 못할 짚신에 연연할 아무런 까닭이 없었다.
결국에 짚신애용운동이란 것은 농촌지역에나 어느 정도 먹혀드는 얘기였지, 도회지나 비농촌지역에서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었다. 이때는 벌써 사람들이 고무신에 단단히 길들여진 상태였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무신폐지운동은 이 시기의 일과성 행사로만 끝나질 않았다.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까지 고무신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억제하고 그 대용품으로 짚신과 나막신, 심지어 일본식 게다의 착용을 장려하는 일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전시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고무신의 수급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그만큼 악화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럴 때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고무신의 몫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면 고무신이라는 존재가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온 지는 80여년 남짓한 세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주 해묵은 우리네의 생활용품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함께 나눈 핍박과 고난의 시절이 깊고도 길었던 탓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의 심성이나 고무신이나 '끈질긴' 것으로 치자면 참 많이도 닮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외래품이면서도 마치 우리 것처럼 느껴지는 생활용품을 굳이 하나만 꼽아보라면, 그건 단연 '고무신'의 몫이 아닐까 한다. 지금이야 고무신하면 촌티 나는 물건의 대명사인양 취급되기 십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핫바지에 고무신일망정 이건 분명히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고무신이라는 물건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쯤의 일일까?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지만 고무신이라는 것이 단순히 '고무'라는 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을 모두 일컫는 것이라면, 그 연원은 생각보다 꽤 오래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 의료선교사로 건너왔다가 조선주재 미국공사에까지 오른 알렌이 남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885년 2월 10일)...... 그런데 오늘 짜증나는 일이 일어났다. 민영익이 내 고무장화를 보더니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새것처럼 깨끗이 닦아서 주었더니 1피트 정도나 너무 커서 그의 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고무장화를 돌려주면서, 이보다 더 좋은 고무장화를 사줄 수 없겠는가라고 했다. 그것도 비싼 것으로 사달라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는 내가 그를 치료해준 댓가로 나에게 준 돈으로 그를 위해 물건을 사는 데 써달라는 것이었다." [자료출처 : 김원모 번역,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56~57쪽]
이 글은 말하자면 갑신정변의 와중에 개화파의 칼에 맞아 크게 다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알렌이 치료하던 때의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 '고무장화'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걸 보면 고무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을 엿볼 수 있다.
▲ <매일신보> 1920년 1월 17일자에 수록된 '총고무화'의 광고내용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가장 빠른(?) 고무신 관련 광고이다. 우리 나라에 고무신이 막 들어오던 시기의 것이긴 한데, 이때에 수입되어 들어온 고무신은 그림에서 보듯이 '단화형' 고무신이다.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이 이보다 약간 늦은 때의 일이다. | |
하지만 이 고무장화라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무신이라는 관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물건이다. 더구나 이러한 고무장화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었다는 흔적은 잘 보이질 않는다.
일찍이 조선 사람들이 신어왔던 '조선신발'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은 이것보다는 한참 후의 일이 된다. 이에 관한 기록을 뒤져봤더니 일본을 통해 고무신의 유입이 본격화한 때는 1919년이며, 특히 조선신발 모양의 고무신이 사람들에게 널리 선을 보인 것은 1921년이 되어서야 이뤄진 일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 잘 요약되어있어 참고할 만하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하는 표현은 곧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표기이며 발음 역시 '고무'이다.
호모화의 이입(移入)은 대정 8년(즉 1919년)경부터 부글부글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근소(僅少)한 수량에 불과했으나, 대정 10년(즉 1921년) 봄경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서 별안간 조선인의 환영하는 바가 되어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여 도회(都會)로부터 시골에도 점차 보급되어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고무신 수요의 격증은 동품 제조공장의 족출(簇出)을 불러와서 조선에 있어서도 대정 10년 중 설립된 것이 둘, 대정 11년(즉 1922년) 중 설립된 것이 넷, 계획중의 것이 다섯에 달했는데, 내지(內地)에 있어서는 거듭 현저한 증가를 가져왔던 것 같으며, 이에 따라 동업자간의 경쟁은 격렬해져 마침내 생산과잉에 빠진 결과 내지품의 투매물이 쇄도하여왔고, 대정 11년 5, 6월경에는 동년 1월경의 반값 이하로 하락했으며, 목하 각지 상장(相場)이 구구하여 모두 혼란상태에 있고, 이것 때문에 경성에 있어 공장설치계획중이던 것이 사업의 착수에 주저하는 것 같다.
▲ <매일신보> 1919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타비' 즉 일본식 버선의 광고내용이다. 이 물건은 기존의 '타비'에다 고무바닥을 덧붙인 것인데, 이걸보면 고무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고무재질을 활용한 다양한 제품의 생산이 시도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이 업계의 현상이 상술한 것과 같지만, 선화형의 고무신은 다른 신발류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선인(鮮人)의 기호에도 들어맞음에 따라 장래 오히려 수요의 증가를 볼 것이며, 일방 체화(滯貨)도 점차 소화되어진다면 본품 제조업은 조만간 순조로운 발전을 이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글은 조선총독부 상공과에서 직접 조사 정리한 자료이므로 내용의 정확성은 비교적 높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부터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무렵의 신문광고를 훑어보면 간혹 조선화(朝鮮靴)를 지칭하는 '경제화(經濟靴)' 혹은 '편리화(便利靴)'도 고무신이라는 구절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신발 전체가 고무재질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고무저화(底靴)'라고 하여 기존의 경제화나 편리화에 고무바닥(밑창)만을 덧붙인 것이어서 온전하게 '고무신'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앞으로 조선사람들이 즐겨 찾게 되는 '조선신발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1년 봄 무렵이었다. 이는 <매일신보> 1921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공업소'의 광고문안에 '순고무 경제화'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대륙고무'는 대한제국 때에 외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이하영(李夏榮)이 설립한 것으로, 그 시절에는 '대륙표(大陸標)'하면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고무신회사였다.
▲ <매일신보> 1921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의 광고문안으로 여기에는 '순고무 경제화'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으로써 이 무렵에 처음 이러한 고무신이 등장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중외일보> 1928년 11월 1일자에 수록된 "[저명상점과 저명상품] 대륙호모사(大陸護謨社)의 대륙고무신, 매일생산 5만 족(足)"이라는 기사에는 이 회사가 "1919년에 조선고무경제화를 발명하여 경성 용산 원정 1정목에 대륙고무공업소를 설립 제조함에...... 운운"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소개했던 <조선> 1923년 1월호의 관련기사에는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통계표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 부분에는 집계수치가 전무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 걸로 봐서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매일신보> 1922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의 광고문안에는 '순고무 경제화 원조(元祖)'라는 구절이 또렷하다. 조선산 고무신의 대명사 '대륙고무'는 대한제국 시절에 외부대신을 지냈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던 이하영이 설립한 회사였다. | |
어쨌거나 1921년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를 연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아울러 조선신발모양의 고무신이 조선 사람들의 호응을 받게 되자 눈치 빠른 일본인 상인들은 일본에서 '고무경제화'니 '고무편리화'니 하는 이름으로 고무신을 만들어와서는 대량으로 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무신의 빠른 보급은 곧 기존 신발의 쇠퇴를 의미했다. 고무신의 위세 앞에서는 서양식 구두는 물론이고 기존의 짚신과 조선화 역시 똑같은 처지였다. 고무신의 인기비결은 무엇보다도 값이 싸고 질기다는 데에 있었다. <조선> 1924년 3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글에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성과 방수력이 있어 중류자 이하의 수요가 격증함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鮮內)생산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즉 1921년)에는 가격 17만 8천 원(13만 7천 족)의 생산이 있었고, 11년(즉 1922년)에는 일약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즉 1923년)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백 8십만 원(4백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에서의 이입액은 12년(즉 1923년)에는 약 4백 8십만 원(6백 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천 백 85만 족(足)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고무신)의 수요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즉 1921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즉 1922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즉 1921년)에는 일시 70만 4천 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즉 1922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 <동아일보> 1921년 8월 9일자에 수록된 '일본산 고무신'의 광고문안이다. '단화형' 고무신에 이어 조선신발모양의 '경제화' 고무신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자 눈치 빠른 일본인들이 일본에서 급조한 '고무경제화'를 들여와서 조선 전역에 공급하기도 했다. | |
그런데 인기폭발의 고무신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고무라는 재질이 우선은 질기기는 하지만, 도무지 땀이 빠져나가지를 않았으니 위생의 관점에서는 빵점이었다. 가령 <동아일보> 1922년 6월 18일자에는 "호모화(護謨靴) 중독으로 종기가 유행하여"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전라남도 광주(光州)읍내에는 어린 아해들이나 여자들의 발과 다리에 용이히 낫지도 아니하는 부스럼이 전염되어 매우 욕을 보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그 병의 원인은 근래 크게 유행되는 고무경제화로 말미암아 병이 생긴 듯하다는 바 일기가 더워올수록 땀이 많이 나는 발에 버선도 아니 신고 함부로 고무신만 신는 까닭에 여름이 닥쳐올수록 더욱 병자가 많다더라.
이것 말고도 고무신의 인기상승과 더불어 조선신발이나 짚신을 만들어 팔던 이들의 실직문제도 불거졌다. 고무신 하나를 사려면 약간의 목돈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것이 훨씬 더 편리하고 질긴 것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동아일보> 1922년 8월 11일자에 수록된 "조선혜상(朝鮮鞋商)을 위협하는, 근래 유행되는 '고무'경제화, 시내에서 실직자가 오백여 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작년 이래로 고무신이 어찌 잘 팔리는지 경성은 물론이요 지방 벽촌에서 굵다란 짚신을 신던 사람까지 필경은 물렁물렁한 고무신을 신게 되어 짚새기를 삼아 팔아서 한푼 두푼씩 부시쌈지 속에 똘똘 말아 넣었던 귀한 돈으로도 서울 가는 편이나 장꾼에 부탁하여 고무신을 사다가 신고 싶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적어도 고무신 한 켤레를 사려면 짚신 네 켤레나 또는 다섯 켤레를 삼지 아니하면 아니 되며 결국 그 돈은 호박씨를 까서 한입에 넣는 셈으로 모두 고무신 만드는 회사의 재산이 되어 버린다. ... (중략) ... 조선의 인구가 이천 만이라 하면 어린 아해와 기타 신발을 많이 사용치 아니하는 사람의 수효가 반은 될 터인데 이와 같은 통계로 보면 거의 조선사람의 반은 고무신을 신게 되면 조선 안에서 산출하는 조선신과 짚신과 미투리는 거의 신을 사람이 없게 될 터인즉 방금 경성에서 업을 잃은 오백 명의 직공은 고사하고 전조선에 업을 잃은 사람이 몇만이나 될는지 실로 칭량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무신의 세력은 일본에서는 이미 위생에 적당치 못하다는 평판이 유행하여 전과 같이 사용치 아니하는 까닭에 고무신을 제조하던 회사들은 전문으로 조선으로 수출할 고무신을 제조한다 하나 경성에서는 요사이 고무신이 전과 같이 팔리지 아니하며 지방 사람들이 많이 사갈 뿐이라 한다. 그러나 지방사람들도 짚신을 팔아서 고무신을 사는 것이 과연 어느 때까지 유행될는지 모르겠다더라.
고무신이 등장한 지 불과 한 해만에 세상은 너나 할 것 없이 짚신이라도 팔아 고무신을 사 신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고무신의 색깔도 이내 백색(白色), 흑색(黑色), 적다색(赤茶色) 등으로 다양해지고, 가지가지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고무신은 빠른 속도로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예전에 즐겨 신던 신발들은 하나 둘 씩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짚신의 시대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나버린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롭게도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에는 "보통학교 아동들의 고무신 배척운동, 외국사람에게 돈을 품은 우리 손해, 조선 짚신 재봉춘(再逢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난데없이 고무신을 밀어내고 짚신을 애용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에는 경기도 지역의 보통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고무신배척운동'이 벌어진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른바 '자급자족'과 '자력갱생'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이 운동은 자연스레 '짚신애호운동'으로 이어졌다.
고무신을 신는 것이 개인적으로 경제(經濟)가 되지 않음은 아니나 그러나 조선사람의 전체적 경제로는 결국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하여 나 어린 아동(兒童)들이 일제히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草鞋)을 신게 되었다는 일찍이 전례가 없는 눈물겨운 미담(美談)이 있다. 경기도 관내에 있는 28개소의 보통학교졸업생지도학교(普通學校卒業生指導學校)의 육백여 명 생도들은 고무신이 모양도 좋고 인내력(忍耐力)도 있어서 어느 점으로 보나 짚신보다도 경제가 되기는 하나 금년과 같이 조선의 농촌경제(農村經濟)가 극도로 고갈된 때에 신발 한 켤레에 오륙십 전 내지 일원 각수를 소비하는 것은 결국 가난한 조선의 돈을 까닭 없이 외국사람에게 내어버리는 것이라 하여 일제히 자기들의 손으로 다시 짚신을 만들어 신기로 하고 은연중에 고무신의 배척운동(排斥運動)을 일으키어 목하 전동리에 그것을 선전중으로 부근 보통학교 아동들은 점차 고무신 대신에 짚신을 애용(愛用)하는 경향이 농후하여가는 중이라는데 비록 그 영향은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 나 어린 아동의 눈물겨운 노력은 점차 경제사정에 눈 떠가는 조선민중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의 일단을 보이는 것으로 각 방면에 비상히 충동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경기도 학무과 당국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어린 학동들이 좋아하는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을 신는 것은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기쁜 현상입니다. 조선의 문화(文化)라는 것은 아직껏 실력에 맞지 않는 변체적 발전이니까 덮어놓고 남의 흉내만 내어오다가는 결국 파탄이 생기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상인데 외국의 산품으로 만든 고무신이 좋기는 하지마는 결국은 가정이나 한 동리이나 한 사회의 크나큰 손실이라 하여 비록 불편은 하지마는 내곳에서 생산하는 재료를 가지고 내손으로 만들어 신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필요 또 긴절한 일인줄 압니다. 연고로 학무과에서도 장래에는 특히 그러한 방면에 전력을 다하여 일반 아동들을 교화코자 합니다" 운운.
세상은 이미 고무신이 생활필수품인 시대로 바뀐 지 오래인데, 이러한 마당에 느닷없이 '고무신배척운동'과 '짚신애용운동'이 벌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봤더니 이는 순전히 경제사정이 어려워진 탓이었다. 1930년이라고 하면 바로 전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가 한창 밀어닥치던 때였다. 제 아무리 고무신이 경제적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러한 호사조차 누릴 여유나 형편이 되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씀씀이를 줄일 수 있고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해야할 처지였다. 이러한 일은 대개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자력갱생', '자급자족', '농촌진흥'이라는 구호와 이름으로 진행되곤 하였다. 한푼이라도 아끼려면 고무신을 버리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짚신을 다시 삼아야 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무신배척운동은 꽤나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 분명하나, 생각만큼 굉장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무신을 벗어버리고 짚신을 신자고 아무리 외쳐보았자 편리함과 내구성을 따지면 도무지 짚신이 고무신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탓이었다.
예를 들어 짚신 하나를 삼는 데에 있어서 비록 재료비용은 적게 들지라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고무신을 사서 신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오래 신지도 못할 짚신에 연연할 아무런 까닭이 없었다.
결국에 짚신애용운동이란 것은 농촌지역에나 어느 정도 먹혀드는 얘기였지, 도회지나 비농촌지역에서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었다. 이때는 벌써 사람들이 고무신에 단단히 길들여진 상태였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무신폐지운동은 이 시기의 일과성 행사로만 끝나질 않았다.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까지 고무신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억제하고 그 대용품으로 짚신과 나막신, 심지어 일본식 게다의 착용을 장려하는 일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전시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고무신의 수급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그만큼 악화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럴 때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고무신의 몫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면 고무신이라는 존재가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온 지는 80여년 남짓한 세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주 해묵은 우리네의 생활용품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함께 나눈 핍박과 고난의 시절이 깊고도 길었던 탓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의 심성이나 고무신이나 '끈질긴' 것으로 치자면 참 많이도 닮지 않았던가?틀림없이 외래품이면서도 마치 우리 것처럼 느껴지는 생활용품을 굳이 하나만 꼽아보라면, 그건 단연 '고무신'의 몫이 아닐까 한다. 지금이야 고무신하면 촌티 나는 물건의 대명사인양 취급되기 십상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핫바지에 고무신일망정 이건 분명히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고무신이라는 물건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쯤의 일일까?
이에 관해서는 몇 가지 기록이 엇갈리지만 고무신이라는 것이 단순히 '고무'라는 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을 모두 일컫는 것이라면, 그 연원은 생각보다 꽤 오래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 의료선교사로 건너왔다가 조선주재 미국공사에까지 오른 알렌이 남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885년 2월 10일)...... 그런데 오늘 짜증나는 일이 일어났다. 민영익이 내 고무장화를 보더니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새것처럼 깨끗이 닦아서 주었더니 1피트 정도나 너무 커서 그의 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고무장화를 돌려주면서, 이보다 더 좋은 고무장화를 사줄 수 없겠는가라고 했다. 그것도 비싼 것으로 사달라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그는 내가 그를 치료해준 댓가로 나에게 준 돈으로 그를 위해 물건을 사는 데 써달라는 것이었다." [자료출처 : 김원모 번역,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56~57쪽]
이 글은 말하자면 갑신정변의 와중에 개화파의 칼에 맞아 크게 다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알렌이 치료하던 때의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 '고무장화'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걸 보면 고무재질로 만들어진 신발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을 엿볼 수 있다.
▲ <매일신보> 1920년 1월 17일자에 수록된 '총고무화'의 광고내용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가장 빠른(?) 고무신 관련 광고이다. 우리 나라에 고무신이 막 들어오던 시기의 것이긴 한데, 이때에 수입되어 들어온 고무신은 그림에서 보듯이 '단화형' 고무신이다.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이 이보다 약간 늦은 때의 일이다. | |
하지만 이 고무장화라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무신이라는 관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물건이다. 더구나 이러한 고무장화가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었다는 흔적은 잘 보이질 않는다.
일찍이 조선 사람들이 신어왔던 '조선신발'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는 것은 이것보다는 한참 후의 일이 된다. 이에 관한 기록을 뒤져봤더니 일본을 통해 고무신의 유입이 본격화한 때는 1919년이며, 특히 조선신발 모양의 고무신이 사람들에게 널리 선을 보인 것은 1921년이 되어서야 이뤄진 일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조선> 1923년 1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에 잘 요약되어있어 참고할 만하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화'라고 하는 표현은 곧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호모'는 '고무'의 일본어식 음차(音借)표기이며 발음 역시 '고무'이다.
호모화의 이입(移入)은 대정 8년(즉 1919년)경부터 부글부글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당시는 양화형(洋靴型)의 것으로 극히 근소(僅少)한 수량에 불과했으나, 대정 10년(즉 1921년) 봄경 선화형(鮮靴型)의 것이 나타나서 별안간 조선인의 환영하는 바가 되어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여 도회(都會)로부터 시골에도 점차 보급되어 지금은 한촌벽지에 이르기까지 잡화상의 점두(店頭)에도 고무신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고무신 수요의 격증은 동품 제조공장의 족출(簇出)을 불러와서 조선에 있어서도 대정 10년 중 설립된 것이 둘, 대정 11년(즉 1922년) 중 설립된 것이 넷, 계획중의 것이 다섯에 달했는데, 내지(內地)에 있어서는 거듭 현저한 증가를 가져왔던 것 같으며, 이에 따라 동업자간의 경쟁은 격렬해져 마침내 생산과잉에 빠진 결과 내지품의 투매물이 쇄도하여왔고, 대정 11년 5, 6월경에는 동년 1월경의 반값 이하로 하락했으며, 목하 각지 상장(相場)이 구구하여 모두 혼란상태에 있고, 이것 때문에 경성에 있어 공장설치계획중이던 것이 사업의 착수에 주저하는 것 같다.
▲ <매일신보> 1919년 6월 18일자에 수록된 '타비' 즉 일본식 버선의 광고내용이다. 이 물건은 기존의 '타비'에다 고무바닥을 덧붙인 것인데, 이걸보면 고무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고무재질을 활용한 다양한 제품의 생산이 시도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이 업계의 현상이 상술한 것과 같지만, 선화형의 고무신은 다른 신발류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선인(鮮人)의 기호에도 들어맞음에 따라 장래 오히려 수요의 증가를 볼 것이며, 일방 체화(滯貨)도 점차 소화되어진다면 본품 제조업은 조만간 순조로운 발전을 이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글은 조선총독부 상공과에서 직접 조사 정리한 자료이므로 내용의 정확성은 비교적 높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부터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무렵의 신문광고를 훑어보면 간혹 조선화(朝鮮靴)를 지칭하는 '경제화(經濟靴)' 혹은 '편리화(便利靴)'도 고무신이라는 구절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신발 전체가 고무재질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고무저화(底靴)'라고 하여 기존의 경제화나 편리화에 고무바닥(밑창)만을 덧붙인 것이어서 온전하게 '고무신'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앞으로 조선사람들이 즐겨 찾게 되는 '조선신발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1년 봄 무렵이었다. 이는 <매일신보> 1921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공업소'의 광고문안에 '순고무 경제화'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대륙고무'는 대한제국 때에 외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이하영(李夏榮)이 설립한 것으로, 그 시절에는 '대륙표(大陸標)'하면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고무신회사였다.
▲ <매일신보> 1921년 5월 19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의 광고문안으로 여기에는 '순고무 경제화'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으로써 이 무렵에 처음 이러한 고무신이 등장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중외일보> 1928년 11월 1일자에 수록된 "[저명상점과 저명상품] 대륙호모사(大陸護謨社)의 대륙고무신, 매일생산 5만 족(足)"이라는 기사에는 이 회사가 "1919년에 조선고무경제화를 발명하여 경성 용산 원정 1정목에 대륙고무공업소를 설립 제조함에...... 운운"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소개했던 <조선> 1923년 1월호의 관련기사에는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통계표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 부분에는 집계수치가 전무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 걸로 봐서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매일신보> 1922년 9월 16일자에 수록된 '대륙고무'의 광고문안에는 '순고무 경제화 원조(元祖)'라는 구절이 또렷하다. 조선산 고무신의 대명사 '대륙고무'는 대한제국 시절에 외부대신을 지냈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던 이하영이 설립한 회사였다. | |
어쨌거나 1921년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를 연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아울러 조선신발모양의 고무신이 조선 사람들의 호응을 받게 되자 눈치 빠른 일본인 상인들은 일본에서 '고무경제화'니 '고무편리화'니 하는 이름으로 고무신을 만들어와서는 대량으로 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무신의 빠른 보급은 곧 기존 신발의 쇠퇴를 의미했다. 고무신의 위세 앞에서는 서양식 구두는 물론이고 기존의 짚신과 조선화 역시 똑같은 처지였다. 고무신의 인기비결은 무엇보다도 값이 싸고 질기다는 데에 있었다. <조선> 1924년 3월호에 수록된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글에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성과 방수력이 있어 중류자 이하의 수요가 격증함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鮮內)생산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즉 1921년)에는 가격 17만 8천 원(13만 7천 족)의 생산이 있었고, 11년(즉 1922년)에는 일약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즉 1923년)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백 8십만 원(4백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에서의 이입액은 12년(즉 1923년)에는 약 4백 8십만 원(6백 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천 백 85만 족(足)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고무신)의 수요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즉 1921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즉 1922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즉 1920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즉 1921년)에는 일시 70만 4천 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즉 1922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 <동아일보> 1921년 8월 9일자에 수록된 '일본산 고무신'의 광고문안이다. '단화형' 고무신에 이어 조선신발모양의 '경제화' 고무신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자 눈치 빠른 일본인들이 일본에서 급조한 '고무경제화'를 들여와서 조선 전역에 공급하기도 했다. | |
그런데 인기폭발의 고무신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고무라는 재질이 우선은 질기기는 하지만, 도무지 땀이 빠져나가지를 않았으니 위생의 관점에서는 빵점이었다. 가령 <동아일보> 1922년 6월 18일자에는 "호모화(護謨靴) 중독으로 종기가 유행하여"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전라남도 광주(光州)읍내에는 어린 아해들이나 여자들의 발과 다리에 용이히 낫지도 아니하는 부스럼이 전염되어 매우 욕을 보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그 병의 원인은 근래 크게 유행되는 고무경제화로 말미암아 병이 생긴 듯하다는 바 일기가 더워올수록 땀이 많이 나는 발에 버선도 아니 신고 함부로 고무신만 신는 까닭에 여름이 닥쳐올수록 더욱 병자가 많다더라.
이것 말고도 고무신의 인기상승과 더불어 조선신발이나 짚신을 만들어 팔던 이들의 실직문제도 불거졌다. 고무신 하나를 사려면 약간의 목돈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것이 훨씬 더 편리하고 질긴 것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동아일보> 1922년 8월 11일자에 수록된 "조선혜상(朝鮮鞋商)을 위협하는, 근래 유행되는 '고무'경제화, 시내에서 실직자가 오백여 명"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작년 이래로 고무신이 어찌 잘 팔리는지 경성은 물론이요 지방 벽촌에서 굵다란 짚신을 신던 사람까지 필경은 물렁물렁한 고무신을 신게 되어 짚새기를 삼아 팔아서 한푼 두푼씩 부시쌈지 속에 똘똘 말아 넣었던 귀한 돈으로도 서울 가는 편이나 장꾼에 부탁하여 고무신을 사다가 신고 싶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적어도 고무신 한 켤레를 사려면 짚신 네 켤레나 또는 다섯 켤레를 삼지 아니하면 아니 되며 결국 그 돈은 호박씨를 까서 한입에 넣는 셈으로 모두 고무신 만드는 회사의 재산이 되어 버린다. ... (중략) ... 조선의 인구가 이천 만이라 하면 어린 아해와 기타 신발을 많이 사용치 아니하는 사람의 수효가 반은 될 터인데 이와 같은 통계로 보면 거의 조선사람의 반은 고무신을 신게 되면 조선 안에서 산출하는 조선신과 짚신과 미투리는 거의 신을 사람이 없게 될 터인즉 방금 경성에서 업을 잃은 오백 명의 직공은 고사하고 전조선에 업을 잃은 사람이 몇만이나 될는지 실로 칭량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고무신의 세력은 일본에서는 이미 위생에 적당치 못하다는 평판이 유행하여 전과 같이 사용치 아니하는 까닭에 고무신을 제조하던 회사들은 전문으로 조선으로 수출할 고무신을 제조한다 하나 경성에서는 요사이 고무신이 전과 같이 팔리지 아니하며 지방 사람들이 많이 사갈 뿐이라 한다. 그러나 지방사람들도 짚신을 팔아서 고무신을 사는 것이 과연 어느 때까지 유행될는지 모르겠다더라.
고무신이 등장한 지 불과 한 해만에 세상은 너나 할 것 없이 짚신이라도 팔아 고무신을 사 신는 시대가 되고 있었다. 고무신의 색깔도 이내 백색(白色), 흑색(黑色), 적다색(赤茶色) 등으로 다양해지고, 가지가지 모양의 고무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고무신은 빠른 속도로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예전에 즐겨 신던 신발들은 하나 둘 씩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짚신의 시대는 이것으로 완전히 끝나버린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롭게도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에는 "보통학교 아동들의 고무신 배척운동, 외국사람에게 돈을 품은 우리 손해, 조선 짚신 재봉춘(再逢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난데없이 고무신을 밀어내고 짚신을 애용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매일신보> 1930년 12월 22일자에는 경기도 지역의 보통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고무신배척운동'이 벌어진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른바 '자급자족'과 '자력갱생'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이 운동은 자연스레 '짚신애호운동'으로 이어졌다.
고무신을 신는 것이 개인적으로 경제(經濟)가 되지 않음은 아니나 그러나 조선사람의 전체적 경제로는 결국 손해가 되는 것이라 하여 나 어린 아동(兒童)들이 일제히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草鞋)을 신게 되었다는 일찍이 전례가 없는 눈물겨운 미담(美談)이 있다. 경기도 관내에 있는 28개소의 보통학교졸업생지도학교(普通學校卒業生指導學校)의 육백여 명 생도들은 고무신이 모양도 좋고 인내력(忍耐力)도 있어서 어느 점으로 보나 짚신보다도 경제가 되기는 하나 금년과 같이 조선의 농촌경제(農村經濟)가 극도로 고갈된 때에 신발 한 켤레에 오륙십 전 내지 일원 각수를 소비하는 것은 결국 가난한 조선의 돈을 까닭 없이 외국사람에게 내어버리는 것이라 하여 일제히 자기들의 손으로 다시 짚신을 만들어 신기로 하고 은연중에 고무신의 배척운동(排斥運動)을 일으키어 목하 전동리에 그것을 선전중으로 부근 보통학교 아동들은 점차 고무신 대신에 짚신을 애용(愛用)하는 경향이 농후하여가는 중이라는데 비록 그 영향은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 나 어린 아동의 눈물겨운 노력은 점차 경제사정에 눈 떠가는 조선민중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의 일단을 보이는 것으로 각 방면에 비상히 충동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경기도 학무과 당국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어린 학동들이 좋아하는 고무신을 버리고 다시 짚신을 신는 것은 비록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기쁜 현상입니다. 조선의 문화(文化)라는 것은 아직껏 실력에 맞지 않는 변체적 발전이니까 덮어놓고 남의 흉내만 내어오다가는 결국 파탄이 생기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상인데 외국의 산품으로 만든 고무신이 좋기는 하지마는 결국은 가정이나 한 동리이나 한 사회의 크나큰 손실이라 하여 비록 불편은 하지마는 내곳에서 생산하는 재료를 가지고 내손으로 만들어 신은 자급자족(自給自足)의 정신은 무엇보다도 필요 또 긴절한 일인줄 압니다. 연고로 학무과에서도 장래에는 특히 그러한 방면에 전력을 다하여 일반 아동들을 교화코자 합니다" 운운.
세상은 이미 고무신이 생활필수품인 시대로 바뀐 지 오래인데, 이러한 마당에 느닷없이 '고무신배척운동'과 '짚신애용운동'이 벌어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알고 봤더니 이는 순전히 경제사정이 어려워진 탓이었다. 1930년이라고 하면 바로 전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가 한창 밀어닥치던 때였다. 제 아무리 고무신이 경제적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러한 호사조차 누릴 여유나 형편이 되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씀씀이를 줄일 수 있고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해야할 처지였다. 이러한 일은 대개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자력갱생', '자급자족', '농촌진흥'이라는 구호와 이름으로 진행되곤 하였다. 한푼이라도 아끼려면 고무신을 버리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릴없이 짚신을 다시 삼아야 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무신배척운동은 꽤나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 분명하나, 생각만큼 굉장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무신을 벗어버리고 짚신을 신자고 아무리 외쳐보았자 편리함과 내구성을 따지면 도무지 짚신이 고무신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탓이었다.
예를 들어 짚신 하나를 삼는 데에 있어서 비록 재료비용은 적게 들지라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고무신을 사서 신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오래 신지도 못할 짚신에 연연할 아무런 까닭이 없었다.
결국에 짚신애용운동이란 것은 농촌지역에나 어느 정도 먹혀드는 얘기였지, 도회지나 비농촌지역에서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었다. 이때는 벌써 사람들이 고무신에 단단히 길들여진 상태였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무신폐지운동은 이 시기의 일과성 행사로만 끝나질 않았다.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까지 고무신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억제하고 그 대용품으로 짚신과 나막신, 심지어 일본식 게다의 착용을 장려하는 일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전시체제의 강화와 더불어 고무신의 수급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그만큼 악화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럴 때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고무신의 몫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면 고무신이라는 존재가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온 지는 80여년 남짓한 세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주 해묵은 우리네의 생활용품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함께 나눈 핍박과 고난의 시절이 깊고도 길었던 탓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의 심성이나 고무신이나 '끈질긴' 것으로 치자면 참 많이도 닮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