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여행기⑦ 쿠스코 12각돌과 산 페드로 시장
고산증과 약간의 추위로 밤새 자다 깨기를 몇 번, 이내 잠을 포기하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남편은 벌써 깨어 충혈 된 눈으로 아침 기도문을 쓰고 있었다.
일기를 쓰고 있는 내게 서울에서 혼자 추석 전야를 보내고 있을 아들에게 전달한 장문의 메시지(편지급)를 보여준다.
“……새길(아들 이름)이 새 길을 열어 우리 가족이 네가 걸었던 그 길을 새기며 가고 있다……”
동트는 고산 쿠스코의 신선하고 고요한 새벽을 맞으며, 14시간이 빠른 한국의 저녁, 음력 8월 보름 저녁 풍요로움이 몹시 그리웠다.
친정엄마께 전활 드렸더니 막내동생댁의 반가운 목소리가 대신한다. 고속도로 하행길 얼마나 힘들었을꼬.
탐진강둑 보름달이 그리워 안부했더니 구름 속에 숨어버렸단다.
남편이 끓여 준 코카차를 한 컵 마신 후, 교회를 찾아 아르마스광장으로 갈까 하다가 오름길 고산증이 두려워 숙소 바로 위에 있는 교회당을 찾아갔다.
새벽 기도를 드렸던 교회
예배시간이 아직인지라 인적 없는 예배당에 앉아 기도와 헌금만하고 나왔다. 곧장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헤수스교회로 발길을 옮겼다. 헤수스교회의 육중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실질적으로 예배는 행하지 않고 입장료를 지불하는 관람만이 가능했다.
몇 발자국 걸음하여 건너편에 있는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많은 신도들과 관광객들이 들락날락하는 속에서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찬송과 신부님의 설교가 마이크 없이도 아주 우렁차고 묵직한 울림으로 경건의 도를 높이고 있었다. 유럽의 성당들처럼 석조로 건축한 건물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스페인어 설교, 찬송에 귀머거리인 우리는 조심스레 성당 안의 벽화와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살피는 것으로 쿠스코에서의 일요 예배가 값진 선물이 되었다.
대성당
일요일 아르마스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성대한 페스티벌로 시끌벅적거렸다. 꽤 뜨거운 태양 아래 각 팀별로(유치원생 ~ 노인까지)유니폼 혹은 악기, 기구 등을 갖춘 무리들이 행진을 하고 군악대도 합세하여 요란한 분위기였다. 지역민,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지역 축제였다. 흡사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민속 축제를 보는 듯 했다.
아르마스광장의 일요일 페스티벌
골목길도 휴일이어선지 가지각색 사람들로 넘쳐났다. 우린 대성당 뒤편 골목길에 있는 페루의 문화유산인 12각돌을 보러 갔다. 12각돌은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된 쿠스코 왕국의 대궁전 벽면의 일부이다. 이 벽면을 기초로 올린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현재 종교 예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치 퍼즐을 맞춰 놓은 것처럼 돌들 사이에 간극이 없고 아주 정교하다. 지름이 약 1.5m인 하나의 바위를 12각으로 다듬어 주위의 다른 돌과 맞물려지게 만들었고 벽과 벽 사이가 두부 자르 듯 정교하게 다듬이질 되어 있다. 돌 형태를 그대로 살린 완벽한 작품 12각돌은 퓨마의 배 부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12’는 잉카의 12명의 왕을 의미한다는 설과 잉카의 달력에서 각각의 달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세상에 없는 자기들 잉카인들만의 방식인 위대한 석조 건축 기술 앞에 우리 그리고 관광객들은 한참을 머물며 깊은 경의를 표했다.
12각돌을 본 뜬 담벼락 앞에서
12각돌 앞에서
아•점 시간이 되어 딸이 먹고 싶어 하던, 맛있다고 추천한 ‘치차론’(돼지 등뼈를 삶은 뒤 기름에 바싹 튀긴 음식)과 ‘아도보’(한국의 돼지 감자탕과 비슷함)를 먹으러 쿠스코 대표 음식점 Los Mundialistas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고수향이 코끝을 스치며 식욕을 반감 시키더니 남편과 딸까지 입맛을 잃게 만들었다.
페루 전통음식 '아도보'와 '치차로'
점점 페루 음식에 대해 기대와 자신감이 없어졌다. 아점을 고프게 먹고 오늘 일정 중 가장 기대가 되는 곳, 아르마스 광장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산 페드로 시장을 지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 가며 찾아 갔다.
현지인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전통 시장이라고 생각하기에 한국에서도 타 지역 여행을 할 때면 매우 관심 있게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그 지역의 정서 뿐 아니라 향토 음식의 묘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산 페드로 시장은 네모난 대형 건물 안에 먹거리, 생선, 육류, 과일, 잡화상들이 입점해 있고, 특히 음식점과 치즈, 과일 가게들이 많다.
큰 기대와 호기심을 안고 찾아 간 산 페드로 시장은 아쉽게도 일요일이라 문이 닫혀 있었고 시장 주변은 갖가지 상인들과 소비자들 그리고 관광객들로 붐볐다.(일요일은 시장이 휴장이고, 평일은 새벽 6시에 개장하여 오후 5시경에 폐장한다) 시장 주변 길거리에서 닭국수, 생과일 주스, 빵 등을 사 먹는 광경은 시장 뿐 아니라 페루의 특징인 듯 했다.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이 마음에 걸렸으나 산 페드로 시장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 중 하나인 생과일 쥬스 한 컵을 사서 딸과 나눠 마셨는데 과일 그대로의 맛, 아주 신선한 맛이었다.(매스꺼움이 다소 진정됨)
휑한 배를 안고 근처 대형 마켓인 오리온 마트에 들러 상추와 물을 샀다.(페루의 수돗물은 석회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식용으로 부적합하다) 딸이 허한 속이 머슥거렸는지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물며 내게 한 입 넣어 준다. 어찌나 맛있든지. 속이 다 시원해졌다. 살 것 같았다.
기대했던 산 페드로 시장을 별 볼 일 없이 배회하다 힘든 나 때문에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숙소를 택시로 이동하였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후 이제껏 밀린 세탁물을 근처 Laundry(세탁소)에 맡겨 세탁을 해 왔다. (1kg에 6솔)
석양 무렵, 찬바람이 옅게 일렁이는 아르마스 광장에 이르니 국기 하강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유신 시절, 해거름녘 부산한 발걸음을 엄중하게 멈추게 했던, 나라에 무조건 상명하복하게 했던 70년대 시절이 생각나 하강식이 끝나도록 그 자리에 물끄러미 서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에 어둠이 차츰 깔리기 시작하자 갖은 네온빛 야경이 밤 여행객들을 유혹하며 거리마다 골목마다 낮보다도 더 많은 상인들, 여행객들로 출렁거렸다. 곳곳에서 버스킹과 어울려 춤과 노래가 나라간의 벽을 활짝 열리게 하고, 아름다운 빛색으로 타오르는 폭죽의 기세는 쿠스코의 밤을 더욱 낭만의 열정으로 빠뜨렸다.
화려한 야경을 잠깐 비켜 달빛 밝은 골목에 서서 무심히 떠 있는 둥근 보름달을 보며 지구 반대편에서 한가위 아침을 맞고 계실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자식들과 함께 하는 명절 덕에 목소리가 명랑하시다. 기름지고 풍성한 추석 음식을 생각하니 배가 몹시 고파졌다. 많고 많은 음식, 멋진 레스토랑을 외면하고 KFC 통닭과 엠빠나다(고기 야채 등이 들어 있는 구운 빵)를 사들고 숙소를 향해 돌계단을 올랐다. 첫날보다는 많이 나아진 듯 했으나 여전히 고산병은 나를 힘들게 하였다.
닭튀김과 엠빠나다 그리고 신라면으로 저녁상을 차려놓고 보니 누구보다도 딸에게 미안했다. 고산증으로 인해 페루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더 강해지며 냄새까지도 역겨워하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누룽지 끓여 속 데워주는 남편, 빵 한 조각이라도 먹게 하려고 애 쓰는 딸이 한없이 고마웠다.
닭튀김과 엠빠나다 그리고 신라면
나로 인한 불편함, 실행 못한 일정들, 먹기를 포기한 음식들, 더 무겁게 져야 할 짐 때문에 짜증이 났을 텐데도 인내하고 보듬어주고 쓸어주고…….
내 안에서는 사랑이 자라는 중이었다.
첫댓글 두근두근 또 어떤 얘기들이 들어 있을까? 설레임과 반가움으로 잘 읽었습니다^^
가족과 여행을 다녀보면 더 잘 챙겨주고 더더 위해주니 여행 떠나는걸 저도 좋아합니다^^
사모님, 고산증으로 고생은 많으셨지만 참 따뜻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글 가운데서 여행팁을 은연 중에 배우게도 됩니다.
사랑이 꽃피는 여행기^^ 다음 편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