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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폭풍 집필, 최상규 작가여
강병철(소설가)
대선배 동업자를 떠올리며
대선배 최상규 작가님의 글을 짚으면서 감히 동병상련을 논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불안함을 토로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생
산량이 많다. 대학 강단을 박차고 나와 오로지 소설과 겨루며 그의 신장(身長) 높이의 소설책을 발간했으니 엄청난 생산 능력과 그 고독한 도정에 대한 경이감을 감출 수 없다. 또 있다. 주옥같은 작품을 봇물처럼 생산했는데도 그의 지명도가 크게 높지 않은 점도 특이하다.
필자 역시 수십 년 글을 썼다. 필화 사건으로 해직을 겪었고 지역사회 진보 문단 조직의 접장과 평회원으로 수십 년 파묻힌 이력도 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책을 출간했으니 문단의 대소사와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까지 샅샅이 꿰뚫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지금은 늦게나마 최상규 작가를 만나게 됨을 동업자 의식으로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다. 40여 년이 훌쩍 넘었을까, 딱 한 번 객석에서 그를 지켜봤을 뿐인데 그때는 시인이 아닌 소설가라서 기대가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소설의 자존을 평가하는 편이다. 시는 짧다. 일상의 스크린에서 소재를 잡아내는 직관과 감성 그것이 ‘시인의 눈’이요 무기가 된다. 그리고 리듬과 구성을 만들고 언어를 조탁하니 그 타이밍만 놓치지 않으면 생산이 가능하다. 특히 2023년 현재 디지털 시대에서는 더욱 다량으로 쏟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가는 그 작법의 도정 자체가 다르다. 자료를 수집, 취재해야 하며 일단 책상에 앉으면 밤을 새울 정도의 지구력과 집중력을 지녀야 한다.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 철저하고 치열해야 하니 노가다 근성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머리가 아플 수 있지만 소설가는 손가락이 짓무르고 때로는 영혼까지 달그락거린다. 그러나 어쩌랴, 발을 디뎠으면 그 궤도에서 한평생 벗어날 수 없으니 그게 글쟁이의 마약 같은 운명이다.
유일한 만남
1981년, 화창한 봄날. 나는 국문과 복학생으로 작가를 꿈꾸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때까지 지방대의 학보나 교지에 겨우 몇 차례 수록했을 뿐이지만 몸과 마음만은 프로 작가 스타일로 치장하면서 안갯속을 헤치는 중이었다. ‘장발과 고무신으로 등교하기’, ‘철둑길에서 소리 지르기’ 같은 특유의 캐릭터를 모방하다가 이따금 문장 작법의 수렁에 하염없이 빠지곤 했다. 그 와중에 최상규 작가의 강연 포스터를 만났다. 그 대학의 소설가 이봉채 교수와 연세대 동문 겸 지인으로 초대한 것이리라.
‘목원대 교수’로 들었는데 그 당시 강사 혹은 겸임교수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1966년 공주교대 교수로 부임하여 11년 동안 근무하다가 돌연 그 직을 내리고 전업 작가로 몸을 바꾸면서 한양대와 목원대 등을 출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수남, 강태근, 조동길 등 후배 작가들과 조우하기도 했지만 문단 조직과의 교류도 많지 않았단다.
또 하나, 정작 연단에 오른 작가는 장발이나 털보 수염도 아닌 평범한 표정이어서 조금은 뜨악했다. 게다가 나는 그의 강의에 하필 마음이 꼬여 불편했었는데 어쩌면 나의 조급증과 열등감의 발로였을 수도 있다. 강연 서두에.
“심심해서 잡지를 펴봤는데 모르는 이름이 있는 거요. 흐흐. 등단이 된 거지.”
그 순간 청중들 모두 아, 하는 감탄사로 집중했는데 나 혼자 얼떨결의 울컥을 다독다독 다스렸다. 그가 불과 23세에 등단 활동 운동화 끈을 매던 연륜에 나는 겨우 대학의 교지나 신문에 글을 올렸을 뿐이라는 거리감으로 더 이상 객석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그전에도 충청도 몇몇 작가들을 먼발치에 바라보기는 했었다. 『관촌수필』의 이문구 작가나 『농무』의 신경림 시인을 만났을 때도 동그랗게 이맛살 맞대지 않고 그저 모퉁이에서 눈의 초점만 슬그머니 맞추곤 했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선배가 대전 산내에 거(居)했을 때도 그랬다. 젊은 벗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가긴 했으나 나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술잔만 만지작거릴 뿐 한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았다. 마찬가지였다. 최상규 작가의 강연 직후 벗들이 오그르르 둘러쌌으나 나 혼자 떠났으므로 그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또 있다. 도서관 잡지 코너에서 우연히 그의 소설을 펼치면서 또 책장을 덮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즈음 나는 박경리나 이청준, 한승원이나 문순태의 늪에 빠진 채 닥치는 대로 필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문체주의자였다. 교과서에 실린 황순원의 「소나기」나 알퐁스 도데의 「별」 같은 단편들을 외우는 건 차치하고라도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은 한 권을 통째로 소화해서 벗들 앞에서 문장 암송을 자랑하곤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볼이 화끈할 노릇이다.
그런데 최상규의 문체와는 소통을 못한 것이다. 문장이 단문으로 끊어지고 럭비공처럼 예측불허였으며 때로는 잔혹해서 더 저어했을 것이다. 사건의 결말 즈음에서 예상이 빗나가며 엉뚱한 쪽으로 과녁이 꽂히는 탓도 있었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그의 문장 캐릭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작가 강용준은 그의 실험적인 기법을 ‘지적인 작가요 스타일리스트’라 호평했으나 당시의 나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문체였던 것 같다. 그저 감미로운 문장만 껴안던 습(習)의 연장이다.
“어디 칼을 꺼내봐.”
신향섭의 얼굴은 잠깐 주저하는 빛을 보였으나 지지 않겠다는 듯이 칼을 꺼냈다.
“펴 봐.”
번쩍, 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뻗쳐 나왔다.
“자, 내가 책상 위에 손을 이렇게 엎어놓고 있을 테니 그 칼로 내 손등을 찍어 봐. 하나, 둘, 셋하고 말이야. 네가 찍었는데 내가 찍히지 않고 손을 빼버린다면 네가 독한 거고, 찍지 못한다면 네가 지는 거야. 그리고 네가 찍고 내가 그대로 찍힌다면 우리는 둘 다 독한 거야. 어때. 해볼 만하겠지.”
(중략)
찍었다.
칼끝이 말랑말랑한 표면을 뚫었다. 살을 통과하고 뼈에 부딪쳤다. 그걸 비켜 손바닥을 뚫었다. 그리고 책상 바닥의 표면에 부딪치며 나무 속으로 파고들어 거기 박혀버렸다.
- 「타조의 꿈」 부분 -
대조(별명 타조)가 신향섭에게 도전장을 내서 그의 손등에 칼을 꽂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칼이 손등에 찍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불량청소년끼리 기싸움을 벌이다가도 대범한 결투를 마감하는 찰나에 드라마틱한 화해로 정리하는 장면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다가 바람과 다르게 칼이 손등을 뚫고 뼈를 지나 책상에 박히는 장면에서 후닥탁 책을 덮은 게 종시 죄스럽다. 살기를 거부하고 비극을 선택하는 최상규식의 스토리와 철학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 세계는 개인 특유의 존재성에 대한 탐색이요,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려는 인식의 깊은 표현이다. 그게 부정적 측면을 극점에 올려놓고 악령화시키기도 하는 이유이니 비극적 실존주의요, 리힐리즘의 색채로 표현되는 예술성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일상의 관성으로 마멸되어가는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과 정면으로 대응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메커니즘에 의해 파괴되는 인간성의 탐구와 그 도정을 자아 찾기의 미로를 통하여’ 제시한다. 물론 그 비극과 허망한 결말로 마감되기도 하니 작품성의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최상규에 대하여
그는 시대적으로 이호철, 최일남, 오유권 등과 함께 전후 작가로 분류되며 그의 작품 성향으로는 장용학, 오상원 등과 함께 실존주의 소설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전후세대 작가들이 주요 소재로 사용한 민주화, 분단된 조국, 노사 문제, 빈곤과 평등, 경제와 근대회 등 정치 사회적 현안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으니 그게 그의 한계이자 특장(特長)이 된다.그 대신 자아의 존재 탐구와 사회 속에서의 삶의 의미 추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대 문명에서의 인간 소외 문제와 자기 해체를 통해 성찰해가는 과정이 주된 사연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그의 문학성은 주제적인 측면과 아울러 주제를 형상화하는 창작기법이 균형을 이루면서 빚어내는 예술적 독창성에 있다. 등장인물의 내면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단문과 명사문, 문장 사이의 많은 생략 등을 사용함으로써 작품을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끌어낸다. 이 문체가 제대로 짜맞춰지면 인간의 일반적 본성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한다는 평을 받게 된다.
여기에서 최상규 소설의 특징을 정리하면
1. 소재가 현실적이며 삶의 부조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2. ‘나’와 타인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3. 실험적이고 기발한 상상력이 동원되는데 그 내용은 철학적이고 어조는 냉소적이다.
4. 문체가 단문이고 감각적이며 박진감이 넘친다. 그리고 때로는 섬세하다.
가족사와 신산(辛酸)의 도정
그는 1934년생으로 충남 보령군 천북면 낙동리 출신이다. 염전 사업을 하던 증조부는 천북면 일대를 거의 소유한 만석꾼이었으나 외아들인 그의 조부가 화폐개혁으로 재산을 날리면서 집안이 급격히 기운다. 그의 부친은 조강지처가 연달아 딸만 낳는 바람에 둘째 부인을 얻는다. 그 둘째 부인에게 태어난 4남 3녀인 7남매의 장남이 최상규 작가이다. 그러니까 부친이 딸 하나를 낳고 다른 부인을 만나 배다른 누이만 넷이나 되는 복잡한 원초적 가정사가 있다.
그가 홍성고를 다닐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고 연세대를 졸업 때까지 떠돌이의 삶을 살아간다. 게다가 남동생과 여동생이 목사이고 또 여동생 한 명까지 목사의 부인이니 기독교와 인연이 깊은 집안이다. 반면에 최상규는 종교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술을 가까이했다. 개인적 이력이 순탄치 않았으나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그나마 인덕은 좋았던 셈이다.
1987년, 그동안 세 들어 살던 용두동 집을 비우고 부인과 수소문 끝에 제자의 도움으로 대전 변두리 학하동 집으로 옮겼다. 이동복(지인, 소아과 원장)은 강태근 소설가와 함께 방문한 학하동의 시골집이 아늑하게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93년 9월, 대전 을지병원에 간경화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 석 달가량 술을 끊고 『악령의 늪』 집필을 마지막으로 원고를 넘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돈도 좀 만지고 대학교수도 이어가면서 좋은 작품으로 명예도 누렸을 텐데, 하며 현실주의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니까 작가로서는 중부권 대표의 우등생이지만 생활인으로서는 천상 열등생 체질이다.
출간 작품과 수상 이력
그가 23세이던 1956년도에 잡지 『문학예술』의 상·하반기 호에 단편소설 「포인트」와 「단면」으로 추천받았으니 빠른 등단이다, 그리고 이듬해 『현대문학』에 「농군」을 발표하고 공군 정훈 장교로 입대한다.
57년 입대 이후로도 단편 「뚫어진 하늘 아래」를 『현대문학』 4월에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사각(四角)」을 내놓았고 『사상계』 8월에 「비창조자」를 또 발표했으니 첫 물꼬부터 요란한 셈이다. 그 이후에도 「고독」, 「질서」, 「학대」, 「三脚」, 「손의 의미」, 「생명 관리」, 「신지 군(君)」, 「야수」, 「유월의 그림자」 등을 연달아 발표했으니 마치 작품 제조기를 보는 것 같다. 1962년 예비역 중위로 제대복을 입던 날까지 단편 수십 편을 올렸으니 그의 나이 20대 초반의 생산 분량만으로도 이미 다작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제대 이듬해인 1963년 「또 하나의 영광」, 「하얀 밤」, 중편 「황색의 서장」을 『세대』 8-9월에 연달아 발표하였다. 그 후 고향에서 영농 생활을 하면서 집필에 몰입하였다. 1964년 「관서집」, 「사냥」, 「오찬회」, 「녹색의 우물」, 1965년에 「대춘」, 「문을 열고 들어가다」, 「꿩 한 마리」, 「무서운 여름밤」, 「건곤」을 발표했으며 1966년에는 「하오의 순유」, 「필사의 대국」, 「조춘」, 「한춘무사」, 「서울 안내원」, 「태연한 사람들」, 「테두리 안」, 「무덥고 긴 것」, 「영웅은 춥지 않다」를 연달아 발표하였다. 그해에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후 공주교육대학 교수로 부임했으니 이때부터 11년 동안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1967년에 「동춘」, 「적」, 「탈선」을, 1968년 「향연」을 발표하는 동시에 월간 『신동아』에 장편소설 「사탑」을 10개월 동안 연재한 다음 1969년 단편 「동소체」, 「가멸법」 등을 생산한다.
1970년대에도 그의 열정은 가속도를 일으킨다. 대학교수를 하면서 발표한 제목만 열거하면 「유리의 성」, 「고요한 유희」, 「비돈」, 「대합실」, 「산신의 고아원」, 「밤의 끝에서」, 「방문객」, 「나영」, 「푸른 미소」, 「맨손으로」, 「밀사」, 「위대한 자식」, 「청개구리의 외박」, 「충동」, 「답례」, 「독야행」, 「문답서」, 「작은 폭동」, 「가면의 밤」, 「모년 모일」, 「어느 소년의 일기」, 「잠수」, 「목은 이색」, 「동해에서」, 「갈매기」, 「머물러있는 밤」, 「말이 있는 판토마임」, 「감별사」, 「생자의 장」, 「황금의 누에」, 「캄팔아의 향연」이 있다.
그리고 1980년 이후로는 「영하의 전설」, 「창」, 「새 공화국의 고지」, 「뒤로 가기」, 「외등」, 「나방과 거품」, 「그 어둠의 종말」, 「뛰뛰 클럽」, 「달을 따는 아이들」, 「모래 헤엄」, 「겨울 잠행」, 「사람의 섬」, 「마지막 주말」, 「숨박꼭질」, 「구멍」, 「겨울 잠행」, 「나방과 거품」, 「하오의 변신」, 「신의 유역에서」, 「자라나는 탑」, 「여름 단장」, 「한밤의 목소리」, 「바람」, 「지난겨울도 추웠네」, 「최후의 장」, 「땅거미」, 「커다란 그림자」, 「어떤 타결」, 「탈출」, 「타조의 꿈」, 「포옹」, 「돌팔매질」, 「바람 부는 양지」, 「그날의 패주」, 「안아지는 여자」, 「목은 이색」, 「바다로 가는 아이들」, 「악령의 늪」, 「새벽 기행」 등을 장마철 폭우처럼 쏟아내었으니 놀라운 열정이다.
90년대에도 연달아 「어려운 시절의 행복」, 「왕과 닭」, 「기뻐 내리는 비」, 「끈과 매듭」, 「발짝 소리」, 「그날의 산행」, 「누란의 밤」, 「딱딱한 뺨」, 「미망의 뜰」, 「독파드의 여자」 「춘인의 장」을 내었으니 그 열정의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1994년 1월 16일 돌연 대전의 을지병원에서 영면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2월과 3월에 각각 『한밤의 목소리(일신서적)』, 『악령의 늪(문학사상)』이 유고집처럼 출간된 게 마지막이다. 그 장편소설의 네 번째 장인 「함몰하는 늪」을 끝으로 세상를 떠난 것이다.
수상의 이력도 만만치 않다. 1966년 「정오의 巡遊」로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은 다음 이듬해 1967년도에 「한춘무사」로 제12회 <현대문학상>을 받는다. 1983년에 「겨울 잠행」으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1989년에는 <박영준 문학상>을, 1992년에는 <조연현 문학상>을 받는다.
그러니까 1956년 등단한 이래 1994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편 127편 중편 15편 장편 9편을 발표하고 창작집 5권을 발간했으며 여러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다. 그러나 40여 년간 도합 170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한 그가 독자나 연구자들에게 그리 주목을 받는 편은 아니었다. 독특한 성격처럼 문단 교류가 드물었다는 얘기이니, 그는 김수남, 강태근 등 몇몇 후배 작가들과 술잔을 나누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영문학과 출신으로 번역 작품도 쉴새 없이 출간하였다. 프랑스 가이다 제럴드의 『서사학이란 무엇인가』, 웨인 부스의 『소설의 수사학』, 시모어 채트먼의 『원화와 작화』, 로버트 홀럽의 『수용미학의 이론』, 찰스 메이의 『단편소설의 이론』 등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지인 김병욱 교수가 ‘그는 한 권의 이론서를 번역한 후 반드시 한 편의 소설을 창작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이다.
학자들의 평가 몇 가지
그에 대한 학술논문으로 이대영의 박사학위 논문 「한국 실존주의 소설 연구」와 나머지 몇몇 정도가 있으니 성과물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는 최상규의 소설을 장용학, 오상원과 함께 실존주의 문학으로 규정하면서 현대 문명 속에서 인간 소외문제를 성찰한 소설로 분류하고 있다. 인물의 소외를 자기 해체를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성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분적 시각에 머무르는 아쉬움이 있으나 소중한 자료가 된다.
비평으로는 충청도 지인 김병욱 교수의 「탐색과 자기 완성」, 「貝穀의 해탈」, 정현기의 「소설의 역사적 사실성과 진실의 보편성」, 「시간 속에 홀로 떠 있는 방황 그리고 구원을 찾는 세 틀의 이야기 혹은 소설」, 「대결 모티브의로망스적 성격」이 보존되며 김윤식의「존엄과 고통」, 「악령의 늪에 이르는 길」 김양수의 「삶 속의 억압과의 끝 없는 싸움」 등도 자료가 있다,
먼저 정현기는 최상규의 중편 「캄팔라의 향연」, 「나방과 거품」의 비평에서 인간의 욕망이 초래하는 불가피한 파국으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이어 다른 논문에서 ‘나’라는 주체가 무한한 시간 속에 홀로 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캄팔라의 향연」은 ‘검은 히틀러’라는 아프리카 독재자 ‘이디 아민’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광막한 사바나 초원에서 벌이는 끔찍한 살육으로 수십만 동족을 학살했으니 상상조차 끔찍한 사태이다. 그 와중에 백인 사업가들에게 그의 가마를 들게 하거나 ‘무하마드 알리’에게 복싱 도전을 요구하는 등 기행을 벌인다. 그 ‘섬찟하게 무서운 코미디’를 최상규 스타일의 필체로 쏟아내는 것이다.
「나방과 거품」은 제목이 암시하듯 불꽃으로 달려드는 나방같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악행의 끝을 묘사하고 있다. 1977년 미국에서 신도 600여 명을 이끌고 가나에 정착한 신흥종교 교주의 잔혹 행위를 소재로 한다. 주인공 J의 반대파 제거 음모 살해 사건이나 여신도 성폭행 등의 만행과 일탈로 이어지다가 집단 자살하게 되는 사태이다.
그러나 최상규의 다른 소설들은 개인의 소외와 일탈의 당위성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정현기는 「대결 모티브의 로망스적 성격」에서 그의 글을 로망스 문장이라고 규정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주로 가족과의 관계의 내밀한 심리적 갈등을 추적하고 있고 둘째, 가족·사회로부터 소외된 실존적 고뇌, 셋째, 악에 빠진 인간(여인)을 구출하는 탐색 모티브라고 하였다. 그러한 가정에서의 무관심을 언급하며 ‘둥지로 인한 소외’를 논하였다. 기본적으로 그의 소설을 인간에 대한 증오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김윤식은 조금 다르다. 전쟁 등 극한적 사회 조건이 인간의 선악, 또는 생명력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가를 보여준 도스토예프스키적 실험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우리 문학에서는 아직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옥을 가져보지 못했는데 그가 한국문학에 그러한 수렁의 세계를 보여주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극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인간 내면의 탐구라는 본질적 문제의식의 가능성을 제시해준 것이다. 그러니까 전후세대의 현역 작가로 자리매김시키면서 그 지속성의 근거를 실험정신으로 보았다는 차이가 있다.
문체 실험에서 최상규만큼 참신한 것은 없었다. 영장을 받아 놓은 대학생이 동거 중인 여인과 그를 미워하는 장차 장모 될 여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를 짤막한 감각적 문체로 이끌어 나간 「포인트」는 당시의 많은 실험적인 창작 속에서 단연 이채롭고도 빛 났던 것이다.
-「악령의 늪’에 이른 길」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이러한 와중에 김양수가 유독 ‘최상규가 주목받지 못하는 건 독자의 책임’이라며 특별히 안타까워했으니 필자 역시 그 발언에 적극 동조하는 바이다. 그는 삶의 부조리에 항의하며 타협 없이 부딪치는 그의 소설 작법 태도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현실을 소재로 다루면서 철학적 모색과 추리가 관념적인 것은 깊은 사고의 추리력에서 오는 것이라 하였다,
스토리와 철학적 사유
「사각」은 부부관계가 서먹한 젊은 사내가 주인공이다. 장기 복무 군 생활을 제대하면서 버스 기사로 취업했다가 개 한 마리를 치어 죽이고 취업을 철회한다. 그는 죽어서 피를 흘리는 짐승의 사체보다 백 밀러의 사각을 벗어나 돌진하던 짐승의 눈에서 ‘생의 번뜩임’을 순간적으로 목격한다. 그를 버스 기사로 인도할 뻔했던 장교 출신 벗도 마찬가지이다. 사선(死線)의 전쟁터에서 개미 떼가 움직이는 행동을 관찰했으니 이것이 작가의 레이다요 성찰이다. 대로변 옆에 숨어있는 오솔길을 포착하며 공간적 전형성을 벗어나 최상규만의 독특한 포커스를 구사하는 것이다.
「신지 군(君)」은 가볍고 상큼한 필치로 우연의 발견을 서사화로 연결하는 스토리이다. 청운의 꿈으로 살아가던 주인공이 담배 열다섯 개비를 마감으로 금연을 결심하는데 그 흡연으로 소비하는 하루 동안의 우연과 불안을 유머스럽게 전개하고 있다. 먼저 여관에서의 갑작스런 복통으로 담배 몇 대가 사라진다. 그리고 낯선 여자와 데이트 도중 몇 개비가 또 날아간다. 마지막으로 취업하려는 학교의 교장에게 ‘소설을 쓰겠다’고 도발한 후에도 희소식을 들으며 마지막 담배를 태운다. 실존의 불안에 우연성을 가미시켜 가볍게 터치하며 희화화 시키는 소설이다.
「꿩 한 마리」는 실존의 고독이 지니는 둔중한 무게감을 논한다. 아내가 떠난 후 쥐약을 넣은 콩으로 꿩을 잡는 사연이다. 잡은 꿩으로 해장국을 끓이지만 벗들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떠나고 정호 혼자 먹어 치우니 주인공을 통해 ‘홀로 남겨진 존재의 절대 고독’을 그리는 것이다. 작가는 정호의 미래가 시시포스의 운명처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불안함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의 고독조차 감당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대한 세계 질서 체계는 때때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열외」는 외부 세계의 폭력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작가의 대결 의식이 보이기도 한다. 소설의 공간은 다방 레지가 등장하는 한가한 공간이다. 그리고 의문의 살인범 도주를 알리는 다방의 활기가 오히려 권태로움을 새롭게 표현하고 있으니 그게 작가의 필체이다. 소설에 엑스트라처럼 등장하는 기자, 보험회사원, 경찰, 변호사 등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이 사건에 대응하는 표정을 담담하게 관찰하고 있다. 사건의 진위와 관계없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의 태도 역시 규범화된 기존 질서 체계의 팩트 흐름일 뿐이다.
레지는 총소리 이후 가물가물했다. 라디오에서 아무 소리가 없자 손님들은 수근대기 시작했다.
“무슨 소린 원……끝났나?”
“총 맞았나?”
“떨어져 죽었나?”
“떨어진 소린 안 났는데…….”
그러나 조금 후면 라디오에선 다시 음악이 울려 나올 것이고 그들은 방송극 한 토막을 들은 기분으로 계속해서 살아나갈 수가 있을 것이었다.
「열외」 부분
생중계된 죽음이란 게 타자들에겐 한낱 화제 거리에 불과하지만 그 지난(至難)한 사태의 흔적이 긴 세월 상흔처럼 자리잡는 것이다. 소설 속의 범인의 선언도 살인과 자살이라는 반사회적 일탈을 감행하고 있지만 그 또한 그물망으로 얽혀진 사연들을 해결하는 능동적 선택일 수도 있다. 이게 최상규표 새로운 선언이다.
작가의 눈과 캐릭터
그의 소설은 현실적 공간을 풍경화로 그려내지 않는다. 오히려 부조리한 세계나 인간의 정신적 방황을 적극적으로 확보하여 환상적 기법을 발휘한다. 특정 상황을 그로테스크화 시키면서 그만의 스타일로 섬세하게 구체성을 보이는 게 최상규 소설 세계의 백미이다. 때로는 마치 현미경으로 확대하듯 모자이크의 한 조각이되 유전인자와도 같은 미세한 것을 포착하여 사건화한다. 도저히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배경에서 특별한 사건을 끌어당겨 독자를 잡는 것이다. 그의 비정상적 모티브와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주목하자. 그가 포착한 다양한 모티브들은 서사 내용과 범주, 기법면에서 작가적 역량의 총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주체인 주인공들이 외부 세계의 부정적 증거를 핀셋처럼 끄집어내어 자신만의 시각으로 질적 구별을 추구한다, 하여, 존재 밖으로 일탈된 본래적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통과의례를 거치게 된다. 그것이 자기 소외의 자각으로 나타나는 비극적 체험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작가의 눈’으로만 긍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처한 한계적 상황에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주인공의 사태를 규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단으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불가능하므로 돌출 행동으로 나타내게 된다.
동시에 그의 작품에는 헌신의 테두리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이는 이성에 의한 객관적 사고능력과 가치정향체제를 외면하고 당장의 행복과 평온을 위해 그것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정향의 한계를 결정짓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 중에서 세속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들은 당연히 부정적 인물로 그려지게 된다. 인간의 욕망이 외부 세계에 있는데 거기에서 욕구 충족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욕망의 교집합 부분으로 관계가 탄생되는데 그게 소외와 갈등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의 소설 속의 여성들은 남자 주인공과 대조적으로 즉자의 형태로 머무르지 못한다. 동반자의 형태로 나타나지 못하고 외부 세계의 일부분으로 부정되는 존재가 되어 최소한의 발화 기회조차 소외되어 침묵으로 폄하되는 것이다. 오히려 때로는 적대자와 공존되니 그녀들은 억압되는 상황에서 타자성의 내면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제한된 인식의 범주가 동시대 전후 세계 작가들의 한계가 되며 그 역시 포함이 된다. 이 구세대적 섹슈얼리티 인식은 따로 논할 과제가 될 것이다.
술꾼 최상규 그리고 음반 수집가
그는 마당발은 아니었으나 당연히 애주가였다. 10년 후배이자 절친 김수남 작가나 몇몇 지인을 만나면 ‘술을 사라’며 큰소리쳤으니 그 짧은 말속에 거침없는 주당(酒黨)의 기질이 보인다.
수남아, 나는 네가 사기꾼 같은 소설쟁이가 아닌 줄은 안다. 그러니 사기꾼 아닌 소설쟁이 김수남이 사기꾼 아닌 진짜 소설쟁이 김수남에게 술 사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쓸만한 놈이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그러는 거다.
- 김수남 「슬프지만 할 수 없어요. 안녕, 최상규」-
김수남은 그의 술 습관을 금주와 폭주를 시계추처럼 오르내리는 모양으로 규정했다. 일단 집필에 빠지면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했다. 그의 아내조차 ‘식사하세요.’라는 말을 하기 위해 기회를 포착해야 했고 재떨이 비우기조차 조심스러워했단다. 깨알 같은 글씨로 며칠 동안 밤낮없이 써댄 다음 원고에 마침표를 찍고서야 겨우 가족들과 줄거리를 얘기하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는 무절제하면서도 절제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 치열함은 언제나 작품과 맥락이 닿았으니 ‘금주에서 음주’로의 파계를 연달아 일으키면서도 때때로 작품을 쓰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금주의 계율에 자신을 가둘 수 있는 냉혈한 작가였다.
그렇게 날밤을 새우며 사나흘씩 써댄 다음 다시 사흘 내내 잠을 보충하는 체질이었다. 집필을 마친 원고가 마음에 들면 다시 마시기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그의 가장 비참한 종교이자 운명의 합체인 술독 속에 몰입한다. 그러다가 93년 9월 간경화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 석 달가량 금주를 했다.
이듬해 1월 다시 입원을 한 후 일주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금주 선언 이후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동안 『악령의 늪』 마지막 4부를 탈고했고 곧바로 다시 술을 시작했다. 어쩌면 죽음을 예감하고 폭음으로써 그 예감을 받아들일 의식을 치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새벽 두 시에 술을 마신다. 다섯 병, 여섯 병, 일곱 병.
술이, 술이 떨어졌구나. 더 사다 놓을 걸. 그러나 이거면 충분할 줄 알았지. 생각보다 내가 술이 세군.
일곱 병째의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고 최상규는 그제서야 비스듬히 누웠다. 머리 속이 어르르해왔다.
오랫만에 한번 웃어볼까? 서울에 가서 박철희(서강대 교수, 평론가), 김국태(추계예술대 교수, 소설가)나 만나면 모를까 모두지 웃을만한 일이 있어야지. 그래도 웃음의 표정 같은 거라도 만들어봐야 했던 게 아닐까?
(중략)
나 자신과 하던 싸움도 이제는 끝났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 그러나 나는 끝까지 싸움을 해냈으니까 그것으로 그만이다. 싸움도 해보니까 시시하군.
잠을 자자, 꿈을 꾸자. 악령의 늪이 함몰하는 꿈을 꾸자. 그는, 최상규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타조의 꿈을 꾸다가 떠나는 새벽 기행」 김수남
심혈을 기울인 작품 마지막 장편소설을 완성하고 세상을 마감했다. 그의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건듯 부는 바람에 살구꽃잎이 흩날린다. 눈발이 날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런데 또 참담한 겨울 이야기를 쓰고 말았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일련의 작품들이 내게 있다.
-『악령의 늪』- 작가의 말 -
운동권 청년 장리백이 웬 사내들에게 납치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지하실에서 알몸 고문으로 비몽사몽의 와중에 고문 기술자들은 의도적으로 그의 성기를 집중적으로 때려서 발기부전의 몸이 된다. 석방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기능을 상실한 성기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다가 실어증에 걸린다.
“슬픈 얼굴을 보이지 마라. 그보다는 차라리 분노한 얼굴을 보여라. 그것도 좋지 않다. 차라리 텅 빈 얼굴을 보여라.”
장리백은 마침내 성기능을 회복한다. 그러니까 정작 작품은 80년대 독재정권을 향한 이념적·반사회적 투쟁의 기록이나 회고 문학과는 초점이 다르다. 그들에게 바친 확고한 이념의 잣대 너머 파편화되고 얼룩진 사각의 그늘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예감한 최상규는 300매가 넘는 『악령의 늪』 4부 「함몰하는 늪」의 폭풍 집필을 마친 후 『문학사상』에 송고한 후 세상을 마감한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제와 카프카의 사색이 최상규의 명상과 합체되는 느낌이다. 이게 작가의 자존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음악적 관심이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음반 수집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최 작가와 지인 이동복 원장이 대전 챔버오케스트라 연주회에 참관한 뒤 지휘자와 함께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그때 최상규 작가가 지휘자에게 바이올린 세칸 파트와 금관 파트의 잘못된 어느 부분을 전문 용어로 지적하였다. 그 후 지휘자가 관심을 보여 최 작가와 오래도록 교분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최 교수는 자기의 서재 안쪽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잔뜩 덮인 라면 상자 몇 개를 꺼내더니 나에게 열어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수백 개의 카세트가 있었다. 테이프 케이스 하나마다 곡명, 연주가, 작곡자, 녹음 날짜와 녹음 상황, 곡에 대한 짧은 해석지 촘촘히 적혀있다. 이는 최 교수가 공주교대에 재직 중인 1960년대에 FM 라디오의 고전음악 프로그램을 약 10여 년 간 녹음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의 모찰트는 어디에 갔을까, 이동복(소아과 원장)
그의 음악감상 방법은 그때그때 떠오르는 감흥에 따라 아무 곡이나 작곡자나 악장에 구애받지 않고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음악 감상 후에는 방바닥에 음반 수십 장이 깔려있게 마련이다.
그는 음반 정리를 아주 질서정연하게 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트 협주곡 A장조 K622 2악장을 특히 좋아했으며 브라암스의 피아노 소나타 1번 C장조, 구스탑 말러의 교향곡 6번 A장조를 특히 좋아했다. 그는 술에 취하면 샹송 「마리자 강의 추억」 「깔로 모잘트」 등으로 취기를 다독였으니 그에 대하여 따로 기록해야 할 사항이다.
작별하면서
그의 문학은 탁월한 문체와 그만의 창작 스타일로 균형을 이루면서 빚어내는 예술성에 있다. 짧은 단문을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묘사하고, 단문과 명사문, 문장 사이의 많은 생략 등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을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끌어낸다.
또 하나, 그의 문체가 중년 이후 대폭적인 변화 단계를 거쳤음을 따로 조명해야 한다, 초기에는 야유적인 시니시즘의 냉랭함이 밑바닥에 깔려있었으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다각도에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줄기차게 시도되었다. 이러한 문체의 변화는 인간의 일반적 본성에 대한 탐구 과장에서 가능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 그의 소설은 거대한 조직의 메커니즘에 의해 말살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참다운 인간으로의 회귀를 끊임없이 열망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거침없는 문체, 개인의 존재성 탐색, 역사적 사건의 재해석 같은 문장들이 그의 단명으로 인해 조금은 빨리 정리된 게 아쉽다. 만약 그가 세상을 빨리 떠나지 않고 더 오래도록 창작 도정을 이어갔더라면 개인의 사회성에서 역사성 안목으로 진일보하는 글을 보여줬을 텐데, 그게 종시 아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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