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시장에서 사다 심은 개량종 홍매가
텃밭에서 꽃을 피운지도 열흘이 넘어가는데
귀동냥으로만 들었던 현충사 홍매는 그간 어찌 되었는지
궁금증을 억제하지 못해 오늘은 기어히 만사 제폐하고 길을 나섰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매화는 결백과 인내를 상징하므로
사군자에서는 고결한 선비를 의미한다
봄바람이 느긋해진 현충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눈길을 붙잡는건
가지런히 서있는 푸른 반송들과 눈앞을 어지럽히는 산수유의 노란꽃잎이었다
성웅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는
지금으로 부터 300여년전 아산의 유생들이
조정에 청원하여 사당을 세웠고
당시의 임금 숙종은 사당의 현판을 사액하여
충무공의 얼을 기리게 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절이 되기도 했으나
일제 강점기에 민족지사들과 동아일보의 모금운동으로 다시 건립되었고
1966년 같은 무관 출신인 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으로 사당을 다시 짓고 조경을 하여
유비무환의 정신을 가르치고자
학생들의 수학여행 필수 코스가 되기도 하였으나
박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문화재로서의 가치만을 지닌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무문인 큰대문을 피해 쪽문같은 옆문으로 다가선 것은
층층을 이룬 기와담장의 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경내로 들어서니 휘어진 벚나무 고목은 아직 겨울잠에서 요지부동이라
한가한 연못 주변을 배회하며 잔디밭 옆길로 비켜선다
옛집 앞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이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 괴목에게는 눈인사만 드리고!
화장실 주변의 나무들을 보니 완연한 봄기운이 넘친다
가운데로 난 소로를 따라 옛집 앞에 당도하니
발그레하게 피어있는 홍매가 눈이 부신 자태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잠시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하느라 심호흡을 하고!
가까이 다가서며 우선 사진에 담는 걸로 첫 인사를 했다
홍매에는 여러 사람들이 달라 붙어 있지만
같은 자리의 백매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검은 몸체에 양가지를 벌려 연분홍 꽃날개를 단 홍매는
수형(樹形)이 아름다워서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를 많이 먹은 고매(古梅)의 품격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오래된 고매(古梅)들이 산재해 있어
호사가(好事家)들과 사진쟁이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대표적인 매화나무는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가 600살이 넘어 가장 나이가 많고(천연 기념물 484호)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천연기념물 485호)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는 350년을 넘겼고(천연기념물 486호)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천연 기념물 488호)가 있으며
산청(山淸) 3매(三梅)로는
덕산 산천재의 남명매(450년)
남사촌의 하씨 고택에 있는 원정매
단속사지의 정당매가 있으나
정당매는 고사(枯死)하여 그 자리에 손자 나무들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또 순천(順川) 3매(三梅)로는
송광사의 송광매와
금둔사의 납월매
선암사의 선암매를 꼽는데
금둔사 납월매는 다른 곳의 매화보다 한 발 앞서 일찍 꽃을 피운다
이 밖에도 경북지역은 도산서원의 도산매와
하희 마을의 서애매도 이름있는 매화 나무이다
외람되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 고장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현충사의 이 현충매(顯忠梅)도 그 반열에 올려 놓고 싶으나
이 나무는 1966년 이 곳을 성역화 하면서 옮겨 심은 나무라
사실은 족보도 년륜도 모르니 내 생각은 언감생심일 것이다
허나 내가 고혹적인 이 홍매를 '顯忠梅'로 부른다고
누가 굳이 시비를 걸 사람도 없으리라 여겨진다
옛집 담장 안의 산수유도 흐드러졌으나
이제는 전국적인 산수유 명소가 하도 많아 사람들을 사로잡지는 못하는 것 같다
경내에는 조카인 이완과 그의 자손들의 묘가 옛집 옆에 조성돼 있으나
정작 충무공의 묘소는
음봉면의 어라산(於羅山)에 부인(상주 방씨)와 따로 합장되어 있어 의아심을 갖게 한다
묘소옆의 활터(은행나무)
활터에서 바라뵈는 고택과 재실
눈이 부신 산수유와 어우러진 백매의 자태에 이끌려 한참을 머무른다
다시 대문앞으로 나와 장군이 살았던 옛집으로 들어가 본다
지금은 비어 있지만 이 옛집에는 60여년 전만해도
종손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장군은 이 곳에서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21살에 혼인하여 서른 두살 무과에 급제하기 까지 살았으며
재실에는 그의 신위가 모셔져 있어
매년 음력 11월 19일에는 종손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따스해진 햇볕을 안고 대문을 나서자
홍매 앞에 대포카메라를 장착한 사진사들이
열심히 앵글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일부는 벌써 퇴각을 한 상태지만 새로운 진사들이 또 들이닥쳐
자신만의 뷰를 잡느라 애를 쓰는 중이다
나도 한 컷 더 담은 후 사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반대편의 담장과 옛집의 모습
조경수로 심은 배롱나무와 사당 건물은
배롱꽃이 피는 시기에 오면 멋진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닫집 안에 봉안된 이순신 장군의 영정
영정은 친일논란이 있는 김은호 화백이 그렸으며
현판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한글 서체이다
* 닫집은 천상세계를 뜻한다
사당에서 바라보는 눈앞의 산들은
왼쪽부터 태화산, 배방산, 망경산, 광덕산, 설화산으로
아산의 다섯개 산을 가슴에 품고 있다
충의문 계단옆에 놓인 자연석 바위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전도가 아로새겨져 있는데
대개의 사람들이 무심히 오르내릴뿐 이를 눈여겨 보는 사람들은 드물다
낙랑장송이 우거진 홍살문을 지나
키 큰 반송이 우아하게 길목을 지키는 삼거리에 이르면
오른편 양지쪽에 칙칙한 겨울숲을 밀어내는
산수유 꽃가지가 자꾸 발길을 붙잡는다
모과 나무도 새얼굴을 준비중이고!
구 현충사
구 현충사(舊 顯忠祠)
구 현충사는 숙종 32년(1706년)에 아산 유생들의 청원으로
그가 살았던 백암리(뱀밭)에 지어졌으며
현판은 1707년에 숙종이 顯忠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고종 5년(1868년)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고
1931년에 이르러서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가의 채무로
이충무공 묘소의 위토가 경매에 부쳐지자
정인보, 송진우, 김병로 등 민족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결성하고 채무 변제를 위하여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성금 모금운동을 펼쳤고
온 국민의 호응을 얻어 채무를 변제하게 되었다
채무를 변제하고 남은 돈으로 1868년 헐렸던 현충사를
1932년에 다시 짓고 종손이 보존하고 있던 사액 현판을 달았다
1966년부터 1974년 까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현충사 성역화 사업으로 사당을 다시 지으면서
이 건물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위토 :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농지
사액 :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
구 현충사 앞의 진달래
목련은 좀 더 기다려야 할 듯...!
느티나무 괴목을 한 번 더 쓰다듬고
정려 옆의 꼬부라진 매화나무를 찾았으나
그루터기만 남은채 몸체는 사라져 버렸더라!
정려(旌閭)
조선 시대에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내린 현판을
그 고을의 입구에 걸어두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본받게 한 정문을 말한다
이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하여
강민공 이완, 충숙공 이홍무, 충민공 이봉상, 효자 이제빈의 현판이 걸려 있다
현충사에는 늠름하고 미려한 반송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고있다
나올 때는 정문을 통해서 당당히 나왔다 ㅎ
개인적으로 무덤같아 보여 마땅찮은 '이순신 기념관'
담옆에 세워진 타루비(墮淚碑)
이 석비는 조선 중기의 명장인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막하 군인들이 세운 것으로 장군이 세상을 떠난지 6년 후인
선조36년(1630년)에 세워졌다
석비의 형태는화문대석위에 연화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운문과 연 봉오리 형으로 이루어진 개석을 얹었으며
비문에는 비의 명칭에 대한 유래와 건립에 대한 내용이 써있는데
<<영하수졸우통지사이순신입단왈타루개취양양인사호이방가비즉루필타자야민역삼일년추립>>
즉 내용은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무라 중국 양양사람들은 양호를 생각면서그비를 바라 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니라
1603년 가을에 세우다
이 비는 보물 제 1288호로 여기에 세운 것은 복제품이다
옛 출입로였던 언덕바지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 목련 가까이로 다가서 보고!
현충사 주변의 탐방 안내판
장군과 관련된 백의 종군 길도 마련되어 있다
아직 초목의 움직임이 활발하지 못하여
홍매와 산수유, 진달래외에는 다른 꽃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미인송과 예술송, 반송들이 줄비하고
갖가지 화목(花木)들이 화원을 이루는 현충사는
어떤 수목원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경관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