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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자물통을 부순 제규는 커다란 미닫이문을 열었다.
근처에도 창고처럼 보이는 허름한 건물 두 채가 있기는 했지만 사람이 상주하거나 물건을 보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소의 창고에 들어서서 문 옆에 달린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윤아와 현주가 제규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BMW, 오정태의 차다. 막상 오정태의 빈 차를 창고 내부에서 보게 되자 세 사람 모두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칸막이처럼 블록을 쌓아 콘크리트로 바른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여자가 그의 뒤를 바짝 붙어서 걸었다. 형광등 조도가 낮은데다 창문마다 칙칙한 색으로 염색된 커튼이 드리워있어서 대낮인데도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양종현 부장이 치를 떨다시피 겁에 질렸던 장소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조여든 긴장감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다. 윤아는 힘주어 현주의 손을 잡았다. 두 개의 문 중 왼쪽은 잠겨 있었다. 제규는 다시 오른쪽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렸다. 스르륵 문이 열린다.
문 옆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붉은 조명이 음산함을 더했다. 실내가 어스름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고문실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내부 벽. 제규는 눈을 의심했다. 바닥에 눕혀진 건 분명히 사람이다. 축 늘어진 팔, 몸뚱이를 덮은 건 모포인지, 겨울코트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얼른 나와 문을 닫았다. 두 여자가 너무 크게 놀랄 것 같아 그렇게 행동했는데 이미 그녀들은 눈을 부릅뜨고 두 손으로 자신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제규의 행동에서 이미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만 것이다.
“제, 제규씨!”
“…….”
“오 사장인가요? 정후씨도… 있나요?”
노랗게 질린 윤아가 그래도 들어가려 했다.
“잠깐만, 윤아야! 내가 먼저 살펴볼게.”
제규는 윤아를 제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쾌쾌하고 습한 모포를 천천히 걷었다. 두 여자가 문 옆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수북한 모포더미를 지켜보았다.
- 죽지는 않을 거야. 신체일부가 없는 게 살아가는데 큰 불편을 주지는 않아. 살면서 불편한 건 절대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 번 더 뉘우칠 기회를 주었으니….
제규는 송장처럼 축 늘어진 정태를 둘러메고 허겁지겁 창고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서는 내부곳곳을 살폈다. 그러다가 제규가 두 여자에게 그만 가자고 손짓을 한다.
- 어떻게 현주까지 왔을까.
윤아와 현주가 허둥대며 제규의 뒤를 따라나선다. 윤아가 방 내부를 힐끔 들여다보고는 나가서 문을 닫았다. 이내 급하게 발진하는 차 소리가 들렸다. 정후는 방 지붕과 건물 천정사이의 공간에 바짝 엎드려 그들을 지켜보다가 훌쩍 뛰어내렸다. 창고 밖으로 나가 그들이 떠난 걸 확인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진 도끼를 거꾸로 들고 날을 살폈다. 도끼날에서 세 사람의 마지막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들 셋 모두를 죽이려 했었다. 그랬다가 목숨만은 살려두기로 했다.
약물에 중독된 하이드Mr. Hyde가 본래 지킬박사Dr.Jekyll의 모습으로 환원될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정후는 그 미지의 수를 세 사람 남은 인생의 숙제로 삼게끔 한 것이다. 그 숙제로 인해 훨씬 큰 고통을 죽을 때까지 감내해야 하겠지만. 처음 결심했던 것과 달리 그들의 목숨만은 부지시키기로 마음을 바꾸었으므로 여기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어젯밤 남경수와 남태민을 먼저 되돌려 보냈다. 두 사람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 한적한 경찰지서 인근에 그들을 내려놓고, 지서에 전화를 걸어 그들이 쓰러져있음을 알렸다. 몇 사람의 순경들에 의해 남경수와 남태민이 실려 들어가는 걸 보고 되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정태를 태화물산으로 돌려보내려던 참이었는데 느닷없이 제규와 윤아가 나타난 것이다. 거기다 현주까지 함께 왔다.
- 저들이 어떻게 여길 알아냈지!
잠시 의문에 잠기다가 정후는 제규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는 지금 정태를 병원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폭행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사람을 병원에 데리고 왔으니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을 거였다. 병원에서 연락 받은 경찰이 제규를 연행해 자초지종을 캐물을 것이 뻔하다.
- 그렇다면?
정후의 얼굴에 실의의 빛이 감돈다. 윤아와 현주한테까지 피해가 파급될 공산이 크다.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 해나갈 일들에 지장이 생길 것을 우려한 정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 잘 마무리된다 싶었는데….
애초 예정했던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정후는 수도꼭지에 긴 호스를 끼워 물을 최대한 세게 틀었다. 벽과 바닥에 물을 뿌렸다. 떠나기 전에 창고를 불태우려 했으나 대신 깨끗이 내부청소를 해놓기로 했다. 세 사람을 감금했던 방 내부의 굳어버린 핏자국을 바닥솔로 박박 문질렀다. 그들의 비명이 사면 벽에서 울린다.
자신에게 그토록 잔인한 내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정후는 별 자극을 받지 않았다. 자신의 본성은 카인처럼 원래 냉혹한 기질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성이 선이든, 악이든 이제 그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태생의 분석보다는 그리 길게 남지 않은 시간에 남은 삶을 제대로 마무리하고픈 생각뿐이다. 일단 어디로든 멀리 떠나려고 카센터에 승용차를 맡겼었다.
엔진오일도 교환하고 타이어유압도 점검하라고 했다. 아주 잠깐 동안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눈에 띄는 곳에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으면 그들은 창고내부를 보다 유심히 살폈을 거였다. 조금만 눈여겨 살피면 비록 천정 밑이 어둡기는 했어도 거기에 사람이 엎드려 있음을 알 수 있을 터였다.
수도꼭지에서 호스를 빼고 세찬 물줄기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물이 차갑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냈다. 옷을 갈아입은 정후는 커다란 유리병 세 개를 들여다보았다. 잘려진 다리 하나씩, 세 사람의 몸에서 절단된 다리가 핏물로 불그스레한 유리병 세 개에 담겨있다. 그 병들 중 남경수의 다리가 담긴 병뚜껑을 탁탁, 두드렸다.
처음부터 ‘칸나의 뜰’이었던 땅, 남경수의 욕심으로 수많은 노인들이 떠나야 했던 땅을 처음 그대로 윤아에게 되돌리도록 했다.
남경수는 입원 중인 조현욱 회장을 찾아가 ‘칸나의 뜰’을 팔라고 했지만 허사였다. 조 회장이 아예 그 땅을 외동딸인 윤아에게 넘겨주자 남경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보물섬을 취하려 했고, 고향후배인 정태와 사촌동생인 태민은 가장 간단하고도 빠른 방법, 납치를 그 수단으로 삼았다. 행동방침을 세운 즉시 태민은 심복 두 명을 대동하고 직접 윤아의 부친을 납치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모든 일이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계획대로 시세보다 훨씬 헐값에 땅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남경수 금융비서관은 조 회장의 재산을 그렇게 갈취했다. 정후는 경멸하듯 남경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정을 배신하는 자는 국가도 팔아먹을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야.”
조현욱 회장이 신조처럼 여겼던 말이 떠올랐다. 취할 수 있는 이익을 위해 참된 정의를 버리지 않는 일, 머리위에 열린 열매를 쉽게 따려고 나무에 징을 박아 성장을 막지 않는 일. 당장의 유혹이나 위급에 처했을 때 그렇게 처신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정의를 아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했었다.
“당신은 조건 없이 남을 도우며 사는 사람들의 속을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친구가 왜, 전혀 연관조차 없는 노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알려고 해봤나?”
경수가 고개를 꺾었다. 정후는 다시 세 사람을 번갈아 돌아봤다. 그리고 봉투를 꺼냈다. 이들은 협심증이 악화되고 심하게 감기몸살을 앓아 거의 기력을 상실한 조 회장을 팽개치듯 돌려보냈었다.
“이게 그분의 유서다. 네놈들이 죽인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정후는 “아무리 탐욕에 눈이 멀었어도 평생의 친구한테 그토록 험한 일을 해야만 했나?”라며 유서를 남경수의 얼굴 가까이 펼쳐보였다. 남경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도지사가 되기 위해 그 땅은 남경수에게 필수적이었다. 수년간 노른자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여 어려운 노인들을 돕고 살아왔던 익명의 독지가가 청와대 대통령실에 근무하는 비서관이다. 정부나 청와대의 도움 없이 개인소유의 재산과 순전히 사비를 털어 숨어서 선행을 해온 것이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 그런 사실이 밝혀진다. 지근에서 모시던 대통령도 전혀 알지 못했던 선행, 여론몰이에 더없는 호재가 아닐 수 없다. 도지사 공천뿐 아니라 당선은 따놓은 보증수표였고 살을 붙여 적절하게 언론플레이를 한다면 이번 지방선거는 여당의 일방적 우세나 다름없었다.
남경수의 그런 드림시나리오를 더욱 감동적으로 포장하려면 가까운 친구인 조현욱 회장의 협조가 필요했다. 공직에 있는 친구를 대행해서 자신이 표면에 나선 것일 뿐 모든 노인복지의 실제주체는 친구인 남경수 비서관이며, 전적으로 그의 개인재산으로 운영해왔음을 세상이 알게끔 하는 것. 그건 도지사에 머물지 않고 당과 정부 내에서 그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켜 향후 더 큰 정치를 할 수 있는 초석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해줄 거라고 확신했으나 조 회장은 친구의 일생일대 소망을 무시해버렸다. 남 비서관은 친구를 없애 차선의 드림시나리오라도 완성시켜야 했다.
“도지사가 된 후에도 그 땅을 노인들을 위해 운영할 생각이었나?”
그때 남경수가 그렇게 할 거라고 대답했다면 그의 다리가 저처럼 길게 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겁에 질려 단 한마디의 위증도 할 수 없게끔 되자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선거 직후, ‘칸나의 뜰’이 위치한 일대의 땅은 서부개발권의 중심지로 예정되어 있었다. 천정부지로 땅값이 치솟는 건 당연했다. 친구를 버리면서까지 그 땅을 욕심냈던 건, 선거와 이재利財,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 네놈이 쥐었던 건 호리병 속의 사탕 뭉치였어.
욕심 많은 원숭이가 사탕을 듬뿍 쥐고는 손을 펴지 않으니 어찌 병속에서 손을 뺄 수 있을쏜가. 정후는 남경수의 허황된 욕심에서 불신할 수밖에 없는 정치판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한다는 염일방일搛一放一의 교훈을 모르고 권세와 돈 모두를 취하려다가 심하게 망가진 남경수는 죽을 때까지 어느 하나도 제대로 취하지 못할 것이다.
“네놈의 검은 속을 채우려고 투자했던 태화물산주식은 모두 압수하겠다. 조 회장님의 유지를 받드는데 쓸 것이니 아깝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정후는 남경수가 드림시나리오를 현실화시키도록 오정태에게 넘긴 태화물산의 주식을 죗값으로 압류했다. 그 주식도 양종현 부장을 통해 현금화 시킬 수 있었다.
정후는 자신이 보유했던 태화물산주식과 조 회장이 생전에 건네준 현금 예치금으로 ‘제윤재단’의 초기자본을 조성해놓았었다. 거기에 남경수의 주식을 처분한 돈이 보태졌다. 악랄한 욕구를 위해 사용되었던 소품들을 이제부터는 선한 일에 쓰겠다는 정후의 말에 남경수는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절대적 힘에 굴복하는 자세를 보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처세의 전부였다.
다시 오정태의 다리가 담긴 병에 눈길을 던졌다. 조현욱 회장님을 납치하고 ‘칸나의 뜰’을 빼앗아 두 번 돌아가시게 한 죄, 현주를 끼고 고모의 인생을 무참히 짓밟은 죄, 그래서 윤아의 가정을 난도질한 죄, 거기다 내 주식을 이용해 주주총회를 농락하고 회사를 삼킨 죄, 그 죄의 대가로 오정태는 왼쪽다리 하나가 잘려나갔고 오른팔 관절이 파열되었다.
그러나 아직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큰 중죄가 남았다. 자신의 허물을 덮기 위해 살인을 청부한 죄. 그건 절대 간과할 수 없다.
- 비록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무자비하게 덤프트럭을 몰아 사람이 탄 차를 종잇조각처럼 구겨놓은 건 다리하나 정도로 넘어갈 수가 없어.
최후의 심판을 앞둔 사흘간의 외출 중에 수혜를 통해 윤아에게 약혼목걸이를 넘겨주고 대천의 호텔에서 수혜와 마지막 밤을 보낸 정후는 창고로 돌아와 거칠게 철문을 열었다.
“모두 똑바로 앉아라.”
방에 들어서서 거의 혼이 빠져버린 세 명의 악귀들에게 자세를 고쳐 잡도록 했다.
“네놈들이 품고 있는 의문, 저승에 보내기 전에 그 의문을 풀어주마.”
정후는 그동안 눌러썼던 긴 챙의 모자를 벗으며 느릿하게 읊조렸다.
“흐흐흐! 죽어가면서도 내가 누군지 궁금했겠지.”
다시 얼굴에 들러붙은 인조가면을 뜯어냈다.
“네놈들을 심판하지 않고는 죽을 수가 없었거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정후가 세 사람의 어깨와 가슴 등을 툭툭 치면서 방을 돌았다. 특히 놀란 정태는 입을 다물지 못하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덤프트럭에 깔려 죽은 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던 자가 지금까지 자신들을 죽음직전까지 몰고 왔다. 하데스, 지옥의 신이 되어. 태민은 정후와 눈이 마주치자 아예 감아버리고 말았다.
자르고, 지혈제를 쏟아 붓고, 바느질하듯 자신들의 잘린 부위를 꿰맨 자의 얼굴을 보란 듯 드러내면서 정후는 절정의 쾌감을 느꼈다.
“오정태! 그 차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 알려줄까?”
정후가 정태의 턱을 단도로 밀어 올리자 간신히 고개를 쳐든 정태는 초점 잃은 눈을 껌벅거렸다.
“네가 조강지처를 버리면서 같이 살려고 했던 김현주가 그 차에 있었단 말이다.”
얼굴을 들이대고 속삭이듯 나직하게 던진 정후의 말이 정태의 귀에 송곳처럼 꽂혔다. 정태는 남태민을 힐끔 쳐다보더니 간신히 지탱하던 몸뚱이를 모로 쓰러뜨리고 말았다.
“내가 왜 네놈들의 왼쪽다리에 집착했을까.”
그러나 정후는 현주가 왼쪽다리를 잃고 불구로 살게 되었다는 말은 입안으로 삼켜버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런 심정으로 그들의 다리를 분리시켰지만 현주의 잃어버린 다리가 놈들의 잘려나간 다리와 비견되는 것이 싫었다.
하반신이 전부 없는 사람들도 웃으며 잘 살더라는 현주의 말이 생생했다. 자기는 겨우 다리 하나가 없을 뿐이라며 되레 위안을 하던 현주였다. 그런 현주가 고향으로 내려가 행복하게 살기만을 빌며 세상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다 잊고, 다 외면하고 새 삶을 만들려고도 했었다.
그렇지만 같은 세상에서 악마와 함께 숨을 쉬며 망각의 삶을 꾸려간다는 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후는 허리를 더 굽혀 단도로 정태의 끊어진 다리를 두드렸다.
“윤아와 내가 결혼한다는 게 너한테는 몹쓸 현실로 받아들여졌겠지.”
정태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윤아와의 결혼으로 태화물산의 승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을 것이다. ‘칸나의 뜰’을 손에 넣기도 더욱 어려워질 걸로 판단했을 것이다. 모든 장애물을 일시에 제거하고 보다 쉽게 회사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이 살인청부였다.
- 죽일 놈, 죽어 마땅한 놈.
정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토록 사악한 짓을 하면서 넌 많은 걸 간과했어. 네 탐욕의 일부만큼이라도 네 주변에 진심으로 배려했어야만 했어. 세상을 이해타산만으로 살아온 탓에 진솔한 마음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건지 알지도 못했겠지만.”
정후는 꾸역꾸역 말을 내뱉는 것조차 역겨워졌다. 점점 힘이 빠지고 지치기 시작했다. 중도에 지쳐서 그만 서두를 뻔했다. 끝까지 인내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후가 다시 남태민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자 그는 숙인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다지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같지는 않군.”
“아닙니다, 모든 게 잘못되었습니다.”
남태민에게서 반성의 모습을 본 정후는 허리춤까지 오는 커다란 도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남경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가. 아직도 나라와 대통령을 걱정하는가?”
“…….”
잘려나간 다리가 아파서인지 수치스러워서인지 그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나왔다. 여호와 하나님은 먼저 뱀에게 이르셨다. 너는 모든 육축과 들의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게 될 것이다. 또 하와에게 이르시되,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너는 아이를 낳으며 겨워할 것이다.
다시 아담에게 이르셨다. 내가 먹지 말라고 했음에도 네 아내의 말만 듣고 선악과를 먹었은즉 너는 종신토록 땀을 흘려야만 식물을 먹을 수 있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은 명을 어긴 뱀과 하와와 아담을 모두 심판하였다.
- 원죄를 사함받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매달리셨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정후는 그들을 응징함으로써 모든 세상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정후는 손에 쥐었던 도끼를 세워들고 빠르게 선고했다.
“세 사람 모두를 사형에 처한다. 집행방법은 단두로 하며 그 시기는 내일오전으로 한다.”
단두斷頭, 목을 자른다고 하자 정태의 목이 툭 꺾였고, 경수의 바짓가랑이에서 노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태민은 실눈을 떴다 감기를 반복하며 벌어지는 광경에 멍한 눈을 내맡겼다.
“나를… 날, 지금 죽여줘. 내가 죽일 놈이었어.”
정태는 그대로 엎드려 한동안 통곡을 했다. 그가 엎드린 바닥이 흥건히 젖었다. 중죄를 지었으면 그만큼 큰 고통이 안겨지는 법, 이승의 마지막 흑암 속에서 하루 더 죽음을 기다리는 고통을 수반한 후에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정후는 불을 끄고 철문을 닫았다.
정후는 정태가 솔직해지기를 바랐지만 막상 시인을 하고나니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막바지에 가서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쳤다. 끝까지 지은 죄를 부인하면서 목숨을 아까워했다면 갈고 또 갈아서 서슬이 시퍼런 도끼로 그의 목을 내리쳤을 것이다. 막상 모든 죄를 시인하고 죽여 달라고 하자 허탈감이 몰려왔다.
- 여기가 바로 지옥 아니던가. 이미 죽은 놈들이거늘.
다음 날, 도끼대신 쇠망치를 들고 세 사람의 오른쪽 성한 무릎을 파열시키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응징을 끝냈다. 철철 넘쳐 가누기 힘들 정도의 분노가 사라졌다. 사무치고 또 사무쳐서 시도 때도 없이 식도를 타고 오르던 끈적끈적한 한이 사라졌다.
- 너희들은 살아서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받겠지.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