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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처럼 발현된 시의 전언
김청미 시인《청미 처방전》중심으로
박철영 (시인, 문학평론가)
현대인들의 삶은 다양한 프리즘을 띠고 있다. 각양각색의 계층 속에서 시詩라는 문학도 다양한 색채로 유혹하며 읽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것은 인간적인 본성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묵시默示가 있다. 인간의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측면도 함께 갖고 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삶은 문학 안에서 인간의 실존이라는 긍정을 제시하지만, 그것마저 강요일 지 모른다. 김청미 시인의 첫 시집 《청미 처방전》(천년의 시작 2019)의 시 전반은 ‘삶’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 약사인 시인은 특유의 ‘처방전’이라는 시적 사유와 일상을 재밌는 해학까지 가미해 익살로 전언하고 있다. 그것은 시라는 형식의 언어에 내재된 시인만의 개성이자 독특한 경험에서 얻은 결과물임을 안다. 시인의 시선은 늘 있을 법한 삶의 부면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독자와 접면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와 내담자를 어떻게 호전시킬 것인가를 직업의식으로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쓰인 시의 공감은 우리 삶의 일상에서 자칫 식상할 수 있지만, 거부감 없이 공감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김청미 시인만의 역량이다. 그것은 시인의 일상이 사람들과 빈번하게 만나는 약사라는 직업에 있고, 그 순간을 잘 포착해낸 결과라고 본다. 시가 찰나의 영감에 의한 것으로 본다면 그 본질에서 충실한 것이다. 김청미 시인만이 찾아낼 수 있는, 시가 존재하는 공간은 소시민의 삶에서 즐거울 때보다 고통스러운 때란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인의 눈이 고통의 이면까지 거듭 꿰뚫어 볼 때 시라는 서정으로 발현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는 시인들이 갖는 시적 발화 동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미미한 차이에서 포착해낸 재치와 기교를 특유의 해학으로 재현하여 시적인 것의 모티프를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일상에서 시적 언어를 발라내는 기술을 우리는 날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시에 가장 부합한 언어라고 말해보자는 것이다. 김청미 시인은 약국을 찾아온 사람들을 접하면서 현대인들이 폐기해버린 윤리적인 ‘염치’가 아직도 그 사람들에게는 위중한 삶의 가치란 것을 확인한다. 또 한 가지 재미를 더해주는 김청미 시인의 시에는 희곡 대사 같은 요소를 다분히 깔고 있다. 그것마저도 판소리처럼 내담자와 대거리하는 장면의 퍼포먼스는 남도南道만이 갖는 정서의 질박함을 더해준다.
누가 내 속을 알 것이오 가난한 집안 큰 메느리로 들어와
핵교도 안 간 막내 시누이 새끼보담 더 신경 써 벤또 싸주
고 빤스까지 내 손으로 빨아줌서 손꾸락 까딱 안 허게 귀허
게만 대접혀 시집보냈드마 잊을만 허면 전화혀서 당신이 혀
준 것이 뭣이냐 삿대질허는 날이먼 심장이 벌렁거림서 가
심도 답답허고 참바람이 돔서 멀쩡하던 삭신이 주저앉을 거
맹키로 아프다니께 참말로 몸뚱이도 그라지만 내 맘에 숭숭
난 구멍은 세도 못할 것이여
손꾸락 뽈 힘도 안 냉기고 아등아등 해봤자 밑 빠진 독
에 물 붓기여
-<마음 다공증> 전문
어차피 시라는 것도 언어의 한 형태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평범한 언어 구조에 숨어있는 서사의 이면은 시의 세계로 유입될 수 있는 중요한 대상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화병’이고 시인의 눈에는 시의 정수精髓인 소재다.약국을 찾아오는 사람마다 가슴에 쌓인 다양한 증상은 심리적 고통을 전제로 한다. 그런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속에 은유된 동의어들은 화병을 발생시키는 긴장stress 에서 기인한다. 그 동의어는 또 다른 은유를 내포하여 시라는 구조로 다가간다. 이미 시적 세계 속에서 모든 것으로 형상화된 화병은 결국 환유로 치환되지만, 치유는 쉽지 않다. 약국을 찾아온 내담자의 마음에 생긴 병도 철딱서니 없는 ‘시누이’ 때문이다. 철이 들어서도 더 악화되는 가족 관계에서 절망은 심리적 압박을 가중한다. 만약에 그 내담자가 의사가 발행한 처방전대로 약만 받아갔다면 무대는 공연되지 못할 뻔했다. 희곡적 서사의 얼개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라는 발화도 아예 성립되지 못했을 것은 당연하다. 근원이 되는 시작詩作은 ‘가난한 집안 큰 메느리’로 들어온 것부터가 문제였고, 그 어려운 집 살림에 ‘막내 시누이’까지 종종 가시 박히듯 괴롭힌다. 그토록 가족에게 헌신했던 내담자는 경제적으로 너무 가난하고 앞으로도 나아질 가망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시누이의 횡포?’ 때문 속상한 마음이 누적되어 화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물질로 된 뼈에 생긴다는 골다공증은 기어이 정신적 상처로 전이되어 ‘마음 다공증’을 유발하고 말았다. 일상이라는 삶의 주체가 곧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면 시적 주체도 평범한 삶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도 삶처럼 언어의 주체성을 확보해야 온전한 시로 형상화되기 때문이다. 부면을 넓힌 언어의 활용이 압착과 전위로 변주되었을 때 언어의 우위를 가질 수 있듯, 김청미 시인은 언어의 부림을 자유롭게 하는 변용에 있어 남다른 면을 보여준다. 깜빡깜빡 정신 줄을 놓은 할머니가 약국을 찾아오면서 벌어진 일이다. <아름다운 원망>은 그런 일상을 잘 각색한 희곡의 단막극을 보는 듯하다. 그 과정도 희곡 대사처럼 자연스러우면서 출연 배우는 둘 뿐이어서 연출과 진행까지 스스로 감당한다. 상황은 스텐바이에 의해 스타트되면서 할머니 한 분이 약국에 등장한다. 이후 일상적인 잡담을 나누다 약을 타고 거스름돈을 받아 간 이후부터 문제가 된다. 받아간 거스름돈을 어디 두었는지 할머니가 깜빡깜빡하는 증세가 시작된다. 나중에 지갑 아닌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거린 새 돈이 발견된다. 연극은 거기서 끝나지만, 불 꺼진 무대의 여운은 길게 남아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얻게 된다. 재밌는 것은 할머니도 모르는 무의식적 행동이 대사에 연거푸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본능적인 방어 자세를 나타낸다는 것과, 남은 어떤 경우에도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항상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 강하게 주장한다. 그런 습관을 나타내는 증상을 보자. “CCTV 보고도 안 받았다 하면 내가 어찌야쓰까/ 아까 본께 주머니에 돈 넣는 거 같던데/ 주머니랑 가방 다 찾아보셨어?// 지갑 놔두고 뭐덜라고 주머니에 넣겠어// 마지못해 뒤져보는 주머니// 거기 꼬깃꼬깃 접혀 있는// 요것이 어째 여기 들었댜 참말 요상 시럽네/ 에고 늙으면 죽어야 써 언능 죽어야 써/ 귀신은 뭣 허니라 나 같은 사람 안 잡아가서// 촌무지랭이처럼 우세시럽게 이런댜”라며 쏟아내는 대사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본능에서 비롯된 강박증일 것이다. 결국 시인은 세상 사람들도 할머니만큼 정직하다는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확인시킨다. 이제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정신 줄을 놓을 때마다 순간순간 “늙으면 죽어야 써 언능 죽어야 써”라면서도 대사처럼 죽음Thanatos에 대한 공포가 뇌리에 박혀 있다는 의식적 본능을 확인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사람들과 필연적으로 부대끼며 살아야만 한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에게 밀리면 죽는다는 불안감을 안고 산다. 김청미 시인은 이런 사례 시를 통해 은근한 삶의 해학과 질곡을 잘 부려 시를 형상화해낸다. 가장 좋은 시는 자신의 삶과 밀착된 가치를 내재화된 세계관으로 잘 표출해내는 데 있다. 그런 시적 형상화는 당연하게 이웃 같은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족 같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a에서 주장한 공포와 연민까지는 아니더라도 카타르시스적 공감은 김청미 시의 주조다. 김청미 시인은 자신과 은연중 맺고 있는 사회 관계론적 사유 안에 드는 사람들의 일상 의식을 시로 잘 발현해낸다. 재료를 고차원적으로 가공하는 연금술사가 있다면 그에 못지않게 언어를 잘 부리는 사람이 김청미 시인이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에 머무르지 않고 말에 내포한 의미를 서정 안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자인 셈이다. 평범한 말을 잘 골라 시로 문장화하는 한편 소리 없는 무언극無言劇처럼 독자라는 청중에게 능청스러운 해학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있다. <겨울 처방전>을 들고 약국을 찾아오는 ‘금당댁 할머니’는 사는 것도 여의치 않다. 거기에다 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집 나간 아들 걱정”이 한 몫을 더했다. 어쩌다 노후까지 힘들게 하는 그 화병이 도지더니 아예 지병持病을 달고 산다. 지독할 때는 “지침이 많이 나 머리도 톱질하는 것맹키로 아프고 온 삭신이 절구가 내리치는 것 같당께 잘 지줘 한 방에 낫게”해달라며 간곡한 할머니의 말을 받아 적은 시가 절묘한 울림으로 다가와 정서적 동질감을 불러온다. 어차피 시는 누군가의 답답한 가슴을 풀어주는 무당의 무언巫言과 다르지 않다. 세상사를 초월할 수 없는 인간적인 관계가 해체된 순간 크레바스로 추락한 절망을 건져낸 것을 시詩라고 하자. 그 시는 관계론적 사유에서 수확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또다시 <지독히 쓸쓸한 말을 위해> 무대를 올린다.
넘들은 갱년기가 힘들다는 디 나는 겁나게 좋아야. 친구
마누라가 갱년기 우울증이었는디 치료했는디도 고만 아파
트에서 뛰어내려 부럿다 안 하냐. 그 뒤로 우리 꼰대 갱년기
말만 나오면 어디 친구 집 놀러 갔다 오라는 둥 가고 자븐데
있으면 언능 댕겨오락 함서 현관문을 활짝 열어부러야. 평
생 꽁꽁 걸어 잠그고 시간 시간 체크를 해대드니 방문만 씨
게 닫아도 놀래가꼬 뭔 일 있냐고 물어봐 준께야. 메갑시 어
디 가고 자브먼 갱년기 때문인가 어깨도 쑤시고 잠도 안 온
닥 하면 대통령 통과하디끼 무사통과란 말이다. 이라고 좋
은 것이 으째 늙어야 온다냐 잔 일찍 오제야.
-<지독히 쓸쓸한 말을 위해> 부분
의도된 연출이 아닌 희곡의 대사에서 보여주는 표정 심리를 잘 연기하듯 시인의 시적 스케치는 매우 섬세하다. 그렇게 추수한 해학의 궁극은 정신적인 압박을 일거에 순화시키는 기능까지 감안해야 한다면 억지일까. 사람은 자신에 대한 지독한 에고ego 속에 살아간다. 그 속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살다 어느 순간 바깥의 또 다른 의식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 바깥의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존재자임을 잊고 있던 것이다.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존재를 긍정해 갈 때 실존의 문제를 긍정할 수 있다. 시인은 그 실존의 근원인 사회 관계론적 사유를 다시 말하려 한다. 누군가와 더불어 사람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지독하게 관습 된 자아 속 자신만을 사랑하다 죽어간다. 그 닫힌 사랑은 겨우 한 이성을 옭아매는 수단으로 항용恒用되다 그마저 어느 순간 상대방을 동일체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 오류의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소유하려는 자본의 욕망을 충족하려 그 범주에 자신의 배우자까지 욕망의 개체로 환산해버린다는 것이다. 마침 이 시의 대상인 사람은 운 좋게도 심연을 통과하기 직전 벗어나는 행운을 얻었다. 김청미 시인은 또 다른 시적 화자를 통해 우리가 범하기 쉬운 인간적인 관계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과잉이 주는 폐해가 인간의 소중한 생명까지 앗아가는 치명적인 것임을 패러독스로 보여준다. 시적인 것의 최후가 꼭 문학적으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불안을 외부로 발산하거나, 비극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 상황은 달라진다. 시적 처방은 인간의 시야를 넓혀 줄 수 있는 통찰력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독히 쓸쓸한 말’의 결말을 미리 비극적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인간적인 관계가 와해되었다 해도, 관계론적 사유를 존중하는 사회관계로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의 고도화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데 반해 인간의 사유에 의한 시의 변화는 느릴 수밖에 없다. 그랬을 때 폐기 처분된 공유지라고 아무 쓸모없다고 생각 해선 안 된다. 버려진 공유지가 새롭게 용도 변경되어 훌륭히 활용된 사례는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실존적인 존재 의미를 쉽게 폐기하려 한다. <젤로 좋은 때는, 숨>은 “소중헌 줄 모를 때가 질로 좋은 때여라/ 그때 챙기고 생각허고 애껴줘야제/ 한번 상하먼 돌리기가 만만치 않는 걸/ 넘치고 썽썽할 땐 모다 모른단 말이요// 요로케 되고 본께/ 숨 한번 지대로 쉬는 것이/ 시상에 질로 가볍고 무거운 것이여”라며 약국을 찾은 내담자는 자신을 아프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가슴속 말을 풀어내며 깨닫게 된다. 그런 일반적인 현상을 소재로 한 희곡 연출은 매번 다르지만 김청미 시인은 끊임없이 연중 기획된다. 어찌 보면 인간이 혼자 살지 못해 사회라는 관계로 편입된 순간부터 있던 일일 것이다. 그렇게 약사인 시인과 내담자 간 대화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 대화를 통해 자신이 안고 있는 무의식 속 내재된 결점을 찾아가는 관객도 어느 순간 역할극을 수행하며 무대의 주체란 것을 확인한다. 잠재된 무의식을 통해 상담자를 치유해가는 모습이 프로이트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심리 상담 기법처럼 상담은 누가 담당해야 하는가.
<청미 처방전>은 아이러니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프로이트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낯섦에 대한 회의懷疑를 반복하며 해답을 찾아가듯 그것을 극복해내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지금껏 지켜온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는 것임을 알게 된다. 집안일은 바깥으로 절대 내돌리지 않는다는 사회적 금기였던, “시누이 시어머니 몽니에 속 끓이는 사정/ 민망스러워 입 밖으로 내지 않더니/ 말로 풀어야 없어지는 가슴앓이/ 봇물처럼 쏟아 내던 날” 죽을 것처럼 답답했던 막힌 가슴 안 물꼬가 뻥 뚫렸다는 내담자다. 결국은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해 고통이 되었듯이 시인은 언더라운드의 언어를 경청해주고 그 사람의 자아에 불 심지를 붙여주었다. ‘청미처방전’에서 보여주듯 시인의 시는 우리 삶과 밀접한 일상을 투시하고 천착한 결과다. 그 생생한 담화가 때로는 희곡처럼, 때로는 상황을 중계하는 내레이터처럼 다양하고 독특한 시로 형상화를 이뤄낸다. 그렇게 가능한 것은 이미 성장기에 체험한 <결핍>이 주는 욕망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아찔한 어린 마음으로 감서리를 했던 추억 속 무의식은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나는 거리의 감을 자꾸 사들인다// 냉장고 가득 감이 쌓여도/ 종일 감나무 앞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림자/ 아직도 그 골목에 남아 있다”는 시인의 추억도 따지고 보면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 욕망은 충족이 이뤄져야 끝난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삶에서 시인에게 포착된 일상은 시적 세계에서 대상으로 재구再構된다. 끊임없이 욕망한 것들을 해소해가는 순간순간에 재 발견되는 삶의 주체들을 만난다. 그 사람들이 연민을 잊지 않듯 우리는 시를 통해 새로운 자기 발견을 통해 주체라는 시선을 만난다. 시적 대상이 곧 우리라고 본다면 거의 동일한 시, 공간에서 만나는 또 다른 삶의 주체를 인정해야 한다. 시가 갖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답게 존중하며 살아가자는 데 있다. 하지만, 그토록 꿈꾸는 세상은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욕망한다. 욕망도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어서 진리에 대한 회의懷疑처럼 끝없이 반복된다.
<손>을 보며 시선을 쉽게 놓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혈연인 아버지의 ‘손’이기 때문이다. 생과 죽음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과정은 같을 수 없다. 아버지와 생전 마지막 해서는 안 될 말 “차라리 편하게 가세요”라고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죽음에 이른 아버지의 고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 던진 말은 사실, “제 손을 놓치지 말고 돌아와요/ 입속에 맴돌았지만, 쑥쓰러워 차마 못 했던/ 감사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놓을 수 없어서 하나인 양 포개본/ 꺼져가는 아버지의 세상”을 애통해하게도 더 간절하게 붙들지 못해 연민이 되었다. 시적 타자로 등장하는 대다수 사람이 ‘우리’라고 하자. 김청미 시인처럼 연민으로 아버지의 손을 놓아버린 것처럼, 또 다른 타자들을 연민으로 바라볼 때 체증처럼 쌓인 인간적인 증오나 갈등은 안타까운 것이다. 지금껏 무대에 올려진 시집 속 서사는 남의 일이 아닌 우리 일이고 나의 일상과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시인도 가슴 깊숙이 화인처럼 박힌 아픔을 꺼내 보이며 세상 사람들은 다 같다고 말한다. 그 멍에도 결국은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 가슴에도 <문>이 있을까, 만약에 문이 있다면 그 문을 열고 싶어 한다. 토라져 누운 아이에게 “선인장 가시처럼 따가운 눈총”을 쏟아 꽂는 시인은 지금 딸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신경전의 승자는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듯 딸의 승리는 불을 보듯 뻔하다. “꿈꾸는 세상은 문 밖에 있는걸/ 그 굴레를 하나씩 거둬들이는 일이/ 짊어져야 하는 또 하나의 짐이라는 걸” 익히 시인은 알고 있다. 그 딸이 가려는 길은 부모가 막을 수 없는 길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어차피 인생이라는 길은 딸만의 삶이다. 그 딸도 먼 훗날 나이 들어 자신을 되돌아볼 때엔 세상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가족이 갖는 핏줄의 의미를 들추는 것을 보면 시인도 나이가 들었다. 세상이 보일 때에서야 산 능선에 풀 섶처럼 넙죽 엎드린 산 그림자도 그냥 그랬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불쑥불쑥 어스름처럼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모습을 희미하게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새 생은 저만큼>에서 낙지잡이 하는 ‘샘돌 언니’의 오래된 시간의 서사를 담고 있다. 지금껏 살면서 하는 고생은 당연하다는 듯 알고 사는 언니다. 자신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듯 제 손으로 평생 옷 한 벌 사 입지 않던 그 언니 “오일장 옷 가게 기웃거리더니/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왔다”는 지문地文은 살아야 할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음을 행동으로 표정 한다. 죽음이란 것을 상상하며 마지막 걸칠 수의壽衣마저도 그리 섬뜩하지 않게 보인다. 멀리 있는 것을 보았다는 시인의 시선은 더 넓고 깊은 곳의 속살을 감싼 겉을 굳이 들추지 않아도 다 안다. 인생사와 무관할 것 같은 <섬진강> 가에서 세월의 이력을 더듬어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윤슬보다 더 빛났던 시인의 과거처럼 마른땅처럼 고통스럽던 시절을 향해 강물은 흘러간다. 그렇지만 옛날의 그 강물이 아니다. 강물의 근원이 된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강으로 흘러들었지만, 그 무게는 가볍지 않다. 강줄기로 만나 “흐르고 흘러도 버릴 수 없는/ 마음의 굳은 뼈”처럼 무장한 세월은 사라지고 형해만 흉물스럽게 남았다. 굳이 경계를 나누지 않듯 강이 흘러 언젠가는 닿을 바다, 그러다 또 흘러 돌다가 노을 따라 넘어온 <화양리의 봄>이 시인을 만났다. “그물에 걸린 달빛 마을/ 한 뼘 돌밭이라도 새로이 일구고/ 길이 끝나는 바다에도 길을 여는 곳/ 보돌 바다 배 위에서 만선 꿈꾸는 매듭 긁은 손들/ 산비탈 봄 햇살에 파랗게 일어서고 있다”는 바다가 주춤한 화양리는 기어이 뭍에 딸린 여수旅愁가 되었다. 바다로 나설 채비 전 옷매무새부터 매만지는 삶의 진정함을 다독이며 애를 파도에 삭힌다. 그 손길에서 빠져나온 집들은 “돌 담 키를 맞춘 앉은뱅이 지붕에/ 소소리 바람 뒹”구는 조개비 등 껍데기만 한 마당에서 묵은 김치에 막걸리 몇 잔에도 남도 육자배기 장단에 흥이 절로 난다는 어부들이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힘겨운 삶의 고통을 해소하고픈 춤사위임을 모른 체할 뿐이다. 한적한 화양리 바닷가에서 그들만의 흥을 다독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시인은 하루의 위로를 생각한다. “선착장 게으름 피우던 바닷새”마저 소중한 풍경으로 들어앉은 화양리 바닷가다. 시인은 약국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밀려왔다 밀려가는 풍경 속에서 더 밀려날 수 없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것을 내색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사는 곳이 화양리다. 그 자체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어부들의 노고처럼, 매번 좌절하지 않는 그들이다. 더는 죽기 싫어 “악다구니로 날이 새는 화양리/ 붉어진 눈두덩으로 파도가 밀”려 오는 것을 보며 또 하루의 무대를 마감한다. 삶의 풍파처럼 거칠게 뒤집히던 바다가 어느새 잔잔해져 푸른 바다가 되듯 우리가 안고 가야 할 현실도 숙명일 뿐이다. 돌고 도는 것이 인생처럼 바다도 흘러 돈다. 그 바다가 가쁜 숨을 고르는 곳이 순천만이다.
<봄, 순천만>은 아등바등 대며 “산 것과 죽은 것이 하나 되는/ 합삭合朔의 시간/ 썩은 살을 버리고/ 투명한 날개 파닥이는 강물이 빛난다”는 그곳은 사람과는 별개의 바다가 닿는 곳이다. 순천順天치 못한 것들은 그마저 절대 들지 못한다는 바다의 유일한 안식처다. 거친 바다의 파도 다독여 안기는 것처럼 인간도 결국은 모든 것을 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내려놓은 순간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생명체로 전락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추락하여 자연의 순환계에 편입된 순간 무대는 이내 닫히고 만다. 그렇게 긴 희곡이 상영되던 무대의 조명도 어둠 안으로 사라진다. <길은 발밑부터 시작이다>라는 시제는 언뜻 우리가 귀담아 새겨야 할 아포리즘이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삶의 위중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어쩌면 “나의 길은 세상의 하류에 멈춰 서있다”라는 결구는 또 다른 삶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는 역설로 들린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시인은 지금껏 자신만의 삶에서 즐기는 관객도 되지 못했고, 일방적 청중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시인 스스로 다양한 욕망을 억압하며 살아왔다는 자조일 것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멈춰 선 길”에서 신중하게 방향을 가늠해봐야 할 것이다. 그 길을 찾기 위해 시인은 평생을 무대 위 배우처럼 살아온 것이다. 사는 동안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가슴 아픈 현실을 보며 시인은 인간의 사회관계적 사유라는 틀에서 갈등의 해소를 통해 아름다운 삶의 복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경계>에 설 때는 스스로 경계심을 풀어야 긴장이 해소된다. 남과 나, 내 것과 네 것으로 구분하지 않아야 아픔도 사라질 수 있다. “사소한 이견의 틈으로/ 내 것, 네 것의 모호한 경계가 생겨나고/ 말하고 싶지 않은 날이 쌓이고 쌓여/ 서로 마음 들여다볼 수 없을 때/ 생겨나기 시작한 선”을 넘나들며 때론 세상을 조롱하듯 해학과 유머로 희화화하기도 했었고, 아이러니한 욕망에도 불온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위했을 것이다. 시인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소중히 경청하며 살아왔다. 상처 받아 마음 아픈 사람들의 가슴을 위로하듯 그 사람들의 말을 내치지 않고 잘 부려내 언어가 갖는 본질에 소홀하지 않았다면 시인으로서 의무는 다 한 셈이다. 시를 통해 미학적 담론으로 끝내지 않고 언어의 진정성을 위한 해명을 통해 더 리얼한 시적 세계를 희곡 무대처럼 연출해냈다. 시인은 삶이 갖는 의미를 되새김하며 매번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된 문제를 풀어가는 처방전으로 교감하는 시의 언표에 충실했다. 그 처방전은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에게 유용한 것이고, 언어가 지속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민중의 언어임을 확인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