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참나무 한 잎의 생애
겨울 한철은 빙판길을 빌미로 칩거에 들기 좋다.눈이 내려도 개집과 대문 쪽으로만 넉가래로 길을 빠끔하게 내놓고 보면 천지가 눈밭이다.가끔 서재로 책을 찾으러 올라갈 때면 눈 위에 찍혀 있는 내 발자국 위로 때 묻은 먼지가 내려앉았거나, 산에서 굴러온 갈참나무 잎사귀가 얼어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잎맥이 갈비뼈처럼 도드라진 갈참나무 잎사귀에서 존재의 가벼움을 본다.생을 놓아버린 것들은 하나 같이 가벼웁다.마른 풀들도 가볍고,일찌기 잔고 없이 결산을 끝낸 은행나무와 자작나무 가지들은 가벼움으로 빛난다.
굳게 닫혀 있는 문에 열쇠를 꽂자 방안에 고여 있던 정적과 차가운 공기가 소름이 돋도록 달려든다.갑자기 전신으로 파고드는 한기에 온 몸을 떨면서 서둘러 책을 골라들고 방문을 걸어 잠근다.서재 ‘청향당’은 겨울 내내 저렇게 찬 공기와 깊은 침묵을 가두고 봄을 기다릴 것이다.
다시 갈참나무 잎사귀에 시선을 꽂는다.갈참나무 잎사귀가 저토록 자신을 가볍게 비우고 차디찬 땅바닥에 저를 내려 놓기까지 나뭇잎들이 견디어온 그 견딤의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나뭇잎이 처음 나뭇가지에서 태어 날 때는 갓난아기가 어미의 폭 좁은 산도를 밀고 나올 때와 같이 딱딱한 목피를 뚫을 때의 팽압은 초월적이었을 것이다.태어난 후에는 폭우에 온몸이 멍들도록 얻어맞기도 했을 것이다.태풍이 몰아치던 밤엔 어둠 속에서 옆의 가지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러져나갈 적엔 두려움에 질려 울음도 터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꿈결 같은 날들도 있었으리라.막 허물을 벗은 말매미가 자신의 발밑으로 날아와 답삭 몸을 밀착시키고 무조의 가락으로 러브 송을 부르던 날은, 저도 덩달아 피가 끓어오르는 전율도 경험했을 터이다.마침내 매미가 짝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며칠 후엔 속절없이 나뭇가지에 떨어져 나가던 그 허망한 죽음을 목도하던 날의 우울함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갈참나무 몸체는 갈참나무잎사귀가 태어난 조국이다.어느 한쪽만 없어도 존재할 수 없는 필연의 관계다.나무의 나라에도 각 부서가 나누어져 있다.주로 큰 가지와 작은 가지들이 각부서의 대표들이지만, 항상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의견을 수렴할 줄도 알고,발효에 필요한 시간을 기다릴 줄도 안다.따라서 몸통인 상부의 전달을 착실하게 이행하고 어린가지와 잎들이 평화롭게 수액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뿌리에서 물관부를 통해 올라오는 자금을 부정부패 없이 고르게 배정한다. 나는 나무들의 이러한 정치패턴을 무척이나 부러워한다.
나무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뿌리는 자신의 실체를 한 번도 밖으로 들어내지 않는다.장력을 이용하여 땅 속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리는 수액으로 굴참나무를 30년 넘게 키웠고 앞으로도 키워나갈 것이다. 나무는 뿌리의 힘으로 중심의 축이 흔들리지 않았고,어린잎들은 신바람 나게 광합성으로 온몸을 푸른빛으로 빛나게 했던 것이다.
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봄은 언제나 눈 위에 찍혀 있는 먼지 낀 내 발자국을 지우면서 온다.육신의 형태가 반은 부스러진 말매미의 유체(遺體)와,잎맥이 갈비뼈처럼 드러난 갈참나무 잎이 한줌 흙으로 스러져갈 쯤에는 갈참나무잎눈에서도 순록의 풀처럼 고운 새싹이 여릿여릿 피어날 것이다.이 어여쁜 새싹 앞에서 삼투압이 어쩌느니 팽압이 어쩌느니 과학적이거나 물리학적 용어를 들이댄다는 것은 새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우리는 오로지 눈으로 들어오는 모습들을 맑은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플러스 원이 될 것이다.
첫댓글 작자의 농촌삶이 활짝 펼쳐집니다.
어찌 갈참나무 뿐이겠습니까.
뿌리에서 끌어올린 수액을 골고루 분배하는
나무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네요.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갈참나무가 되어보았습니다.
전 왜 노래가 나오지요?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들고 홀로 울리라"
한 생을 마친 갈참나무잎은 쌓인 눈 위에 떨어져
작가의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겨울 산천은 그렇게 저물어 가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