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광수 명예교수(사범대․불어교육과)
※ 다음은 지난달 31일(목) 문화관 중강당에서 열린 교수정년식에서 곽광수 명예교수(불어교육과)가 이장무 총장의 송별사에 화답해 정년교수 21명을 대표해 읽은 답사(퇴임사)입니다. 교수정년식에 참석했던 일부 교수들의 요청에 따라 곽광수 명예교수의 답사를 게재합니다.존경하는 총장 선생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내외 귀빈, 학생, 여러분! 먼저, 퇴임하는 우리들을 위해 이처럼 훌륭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데 대해 퇴임자들을 대표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저의 답사를 서울대에 대한 저의 소박한 소망을 말씀드리는 것으로써 갈음할까 합니다.
옛날 저는 어느 일간지에서 신입생들에게 주는 글 가운데, 또 그 후 『대학신문』에서는 졸업생들에게 주는 말 가운데, 청소년기의 꿈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그 꿈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한결 일반적으로 꿈이란 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생성이라고 하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추동력으로서의 기도(企圖)라는 것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기도에 해당된다고 할 야심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꿈은 훨씬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 아름다움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들 각자의 체험을 되돌아보면 됩니다: 우리들이 청소년기에 품었던 꿈을 되돌아 봅시다. 그 꿈이 가져다주던 푸근함과 넉넉함과 자랑스러움이 다시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느낌은 한마디로 행복감입니다. 바로 이 행복감이 꿈의 아름다움의 비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꿈이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서 말한 꿈과 야심과의 비교를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야심이 이기성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꿈은 이기성의 그늘에 덮여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꿈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지향하는 것의 ‘크기’에 관계되는 게 아니라 그것의 비이기적인 ‘질’에 관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꿈은 이를테면 윤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청소년기의 꿈의 행복감의 추억을 잘 간직하면,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그 행복감의 추억이 환기하는 그 꿈의 윤리성이 최소한 우리들로 하여금 비윤리적인 행위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는 않도록 하지 않겠는가 하고 소박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꿈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문 법이고, 우리 학생들이 졸업에 즈음할 때 이미 그들의 원초의 꿈이 다소간 이지러져 있는 경우가 흔할 것입니다. 꿈이 이지러져 좌절되면, 그 꿈의 윤리성이 구현될 기회는 사라져버릴 것이고, 거기에 동반된 행복감의 추억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색깔이 바래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학교에서 학생들이 그들의 꿈을 통해 아마도 그때까지 가장 강력하게 느꼈을 그들의 윤리적 감성을 의식화해줄 수 없겠는가. 즉 개념적, 추론적으로 각성시켜줄 수 없겠는가? 구체적으로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기초과정에서 전체 학생들에게 필수과목으로 실천철학을 강의하되, 동서양의 철학자에서 중요한 텍스트들을 적정 수 정선 발췌하여 학생들에게 직접 읽히면서 텍스트 설명을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저는 칸트를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만, 그의 『실천이성 비판』 결론 첫머리에 나온다는 저 유명한 말: “그것들에 전념하여 성찰하면 할수록 언제나 새롭고 더욱 더 증대하는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으니,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이다”라는 말은 어디선가 주워 읽어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는 루소의 『에밀』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은 어떻습니까? : “양심이여! 양심이여! 신적인 본능이고, 불멸하는 하늘의 목소리이며, 무지하고 편협하나 총명하고 자유로운 자의 확실한 안내인이고, 인간을 신과 닮게 하는 선악의 무류의 판단자인 양심이여! 바로 그대가 인간 본성의 탁월성과 그의 행동의 도덕성을 만드느니. 그대 없이는 (…) 오직, 규칙 없는 오성과 원리 없는 이성의 도움으로 오류에서 오류로 헤매는 슬픈 특권밖에 가지지 못하노라.” 저는 만약 이런 구절들을 직접 읽고―이 직접 읽는다는 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원 텍스트의 표현이 갖는 문학성이 우리들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윤리적인 의식이 다르지 않을까 소박하게 믿어 봅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 학교가 지적 능력에 못지않게 윤리적 판단력과 실천력을 갖춘 인재들을 길러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나라 사회 일각에서 우리 학교에 날선 막말로 가하는 비판, ‘서울대학교가 대한민국을 말아 먹는다’는 욕을 역공할 수 있으려면, 바로 저의 이런 소망만 이루어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 우리나라 사회를 ’말아 먹’을 정도로 주도층을 이루고 있다면, 모르긴 하되 그만큼 이 사회의 비리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청소년기의 꿈의 윤리성에 관해 말씀 드렸습니다만, 엄격히 말하자면 기실 꿈 자체가 아니라 그 꿈을 품은 청소년의 세계에 대한 태도가 윤리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젠 꿈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꿈이란 물론 머릿속에서 그리는 것, 즉 상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상상이란 감각적인 체험을 다시 떠올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욱 탁월한 능력으로서 체험하지 않은 것을 그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 삶의 기도로서의 꿈이 시간적으로 미래로 떨어져 있는 자신의 발전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라면, 공간적으로, 주어진 사상(事象)의 감각되지 않거나 알려지지 않은 국면을 상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 창안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이젠 은유적으로도 사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즉 하나의 과학이론, 학문이론이 더 타당한 이론으로 대체될 때, 종래 사람들이 생각했듯이 새로운 지식들이 더 많이 쌓임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모든 지식들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재체계화됨으로써, 즉 이론의 혁명적인 변화로써 그렇게 된다는 것이 패러다임이 함축하고 있는 주장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더 타당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안하는, 즉 이론의 혁명을 일으키는 인간의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철학자들이 있습니다. 뉴튼 물리학의 더할 수 없이 확고한 것 같은 절대적인 시간 가운데서, 상대성이론의 변하는 상대적인 시간을 생각해낸다는 것은 우선 비현실적인 상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비단 패러다임만이 아닙니다. 주어진 문제를 관례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느닷없이 새롭게 떠오른 방식으로 쉽게 해결한다든가, 상대방의 꽉 짜인 주장을 뒤집어 봄으로써 그 허점을 발견한다든가, 이 모든 것이 좋은 의미로 기발하게 생각하는, 즉 친숙한 경험이 아닌 것을 그리는, 즉 상상하는 능력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학교가 학생들에게 프랑스의 어느 철학자가 말한 ‘꿈꿀 권리’를 되돌려 주고 고등학교 때 대학입시 준비로 굳어버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학생들에게 상상하는 훈련을 시켜 주었으면 합니다. 예컨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기초과정의 필수과목인 작문에서 그 훈련으로 비판적인 글쓰기를 시키는 것입니다. 더할 수 없이 타당한 주장을 하는 것 같은 텍스트를 주고, 반드시 그것을 비판하는 글을 쓰게 하는 것입니다. 즉 주어진 당연한 주장의 사안을 달리 보는, 달리 상상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지요. 아주 기발하게는 이야기 꾸미기 같은 것은 어떨까요? 프랑스의 어느 실험적인 소설가는 쓰려고 하는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임의로 정해 놓고, 그 사이를 채워 나가는 소설 쓰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에 이르면 소설 창작이 유희가 되겠습니다만, 유희도 상상력과 관계있다는 것을 주장한 어느 인류학자가 있습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예컨대 작중 인물들 및 그 대체적인 성격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주고 이야기를 꾸며 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가장 일반적인 상상력 훈련은 문학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인데, 졸업할 때까지 최소한 인문학연구소에서 선정한 고전 작품들을 모두 읽게 하고 반드시 검증을 받게 하면 어떨까요?
이리하여 저는 우리 학교가 지적으로 독창적이고 행동 측면에서 윤리적인 인재를 키워내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제도화된 자유경쟁주의의 세계적인 추세는 모든 비효율적인 것을 타기하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실존주의 철학자는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효율성 강조를 비판하며 아이러니를 함축시켜 ‘진지한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공산주의자들이나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이나 ‘진지한 정신’인 점에서는 똑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학교가, 진정 자유가 대학의 본질적인 토대라고 할 수 있다면, 효율성의 신화에서도 자유롭기를 또 기원합니다. 그 효율성 때문에 최근 우리 학교에서 어떤 연구비리가 있었는지는 우리들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느 멋쟁이 장군이 퇴역사를 끝내면서 한 그 유명한 말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를 비틀어서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합니다: “노교수는 필경 죽고 말겠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라고.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 학교가 어떻게 발전해가는지 지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3> 서평은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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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읽기전 먼저 책을 읽는 경우 드물어
대부분 사람들은 많은 서평들이 왜곡된 설명과 명백한 실수로 가득한지 몰라”매주에 두세 개씩의 서평(reviews) 쓰는 일을 여러 해째 이어오고 있다. 이런저런 연줄로 일간지와 주간지, 월간지와 계간지 등에 서평을 기고하고, 두 군데 공중파 방송에 정기적으로 나가서 책 이야기를 하고, 서평집도 네 권이나 내놓은 바 있다. 내 지적 인식 욕망과 관심의 맥락에 따라 책을 읽고 그중에서 매체에 맞는 책을 골라 서평을 쓴다. 서평 쓰기는 메마른 작업이다. 공력은 많이 들지만 청고한 인격을 만드는 데도, 지식의 성채를 짓는 데도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건 사랑 없는 섹스는 아닐지언정 출산이 배제된 섹스와 닮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평은 정치다”라는 한 문장을, 월터 카우프만의 책을 읽다가 발견했다. 서평 쓰기에 투입되는 내 욕망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과 회의를 품어온 터라 이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친밀한 관계의 맥락을 만드는 게 정치의 한 기능이라면, “서평은 정치다”라는 말은 맞다. 읽어보니, 그 정치라는 게 지극히 “사소한 정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평가의 권위, 영향력, 글의 재미와 파급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서평은 어떤 책이 그 책값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주고, 그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서평가의 일이란 게 번역가나 편집자가 하는 일과 겹쳐지는데, 그것은 “저자와 독서 사이에서 움직이는 중개인”이란 점에서 그렇다. 매체에 실리는 서평은 뉴스거리가 될 만한 책, 어떤 학파와 연관이 되어 있는 책이 우선적으로 선택되고, 그 책이 담고 있는 시대적·문화적 가치나 함량보다는 매체나 서평가와의 개인적 인맥이 선택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어떤 책이 서평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는 저자나 독자보다도 편집자와 서평가의 결정이 우선한다는 뜻이다.
주로 기자, 교수, 학자, 비평가, 젊은 작가들이 서평을 쓴다. 서평은 “저널리즘의 한 형태”이므로 서평 쓰기는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고 순발력 있는 글쓰기를 잘 하는 기자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교수나 학자들 역시 자기 분야에 대해 높은 수준의 지식과 경륜을 쌓은 사람들이니까 해당 분야의 책에 대한 서평가로서 적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젊은 서평가”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아직 씌어진 적이 없는 위대한 책의 지고함에 기대어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다. 그들은 서평을 제 존재를 번쩍이면서, 제가 얼마나 똑똑하고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지를 알리는 기회로 삼는다. 문학 계간지에 서평을 쓰는 대다수의 “젊은 서평가”들의 글은 대체로 최신 이론들을 문장의 난삽함으로 버무려 내놓음으로써 매우 현학적이다. 대개의 서평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문화적 신뢰성에 비해 그 내용이 부실하다. 그럼에도 그 부실함이 들춰지지 않거나 추문이 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사람이 서평만 읽고 정작 그 책은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 카우프먼은 그런 현실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서평에서 알게 된 책의 대부분을 읽을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서평을 읽기 전에 먼저 책을 읽는 경우도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얼마나 많은 서평들이 왜곡된 설명과 명백한 실수로 가득 차 있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호의적인 서평이나 적대적인 서평뿐만 아니라 학술잡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카우프만, ‘인문학의 미래’)
간혹 서평 대상이 되었던 책의 저자가 서평가의 “왜곡된 설명과 명백한 실수”에 분노하면서 반론을 내놓는 경우가 있다. 가장 극적인 것은 불문학자 곽광수가 자신의 책에 대한 서평이 나온 지 십년이 지난 뒤에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이라는 번역서를 내놓으며 그 책의 한 각주 형식을 빌려 김현과 박이문의 서평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펼친 경우다. 그 각주의 분량이 수십 쪽에 이를 만큼 작정하고 쓴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많은 서평들이 진지한 학문적 정밀성을 갖고 탄생하지는 않는다.
“서평을 많이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적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들 대부분이 취하는 공통 전략은 자신의 견해를 진척시킬 수 있는 기회로 서평을 이용하면서, 그 책의 주제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쓰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자신도 그다지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책 한두 권에 대한 약간의 언급을 끼워 넣는 것이다.”(카우프만, 앞의 책)
제 정신을 가진 학자라면 제 책에 대한 서평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서평가들이 제 서평에 진정성, 즉 자기 패를 다 거는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제 “오도(悟道)의 경지(境地)”를 눈꼽만큼이라도 드러내는 것을 아까워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이런 사정을 안다면, 곽광수 교수가 제 책의 서평에 대해 저토록 진지하고 정밀한 반론을 펼쳤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칭찬의 관용구를 남발하는 서평가보다는 까칠한 태도로 저자를 신랄하게 꼬집고 괴롭히는 서평가의 글을 읽을 때, 훨씬 더 즐겁다. 그런 맥락에서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은 서평의 가장 훌륭한 범례로 꼽을 만한 서평집이다. 저자를 압도하는 박람강기와 유연한 사유체계, 날카로운 통찰력, 신랄함, 번득이는 유머, 그리고 그것을 좋은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을 두루 갖춘 서평가의 서평집이라는 뜻이다.
지제크와 라캉에 대해 쓸 때, 탈식민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쓸 때, 테리 이글턴은 모호하지 않고 대책 없이 명료하다. 그가 데이비드 하비의 책에 관한 서평을 쓰면서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까지, 시간은 풍요로운 개념이었고 공간은 황폐한 개념이었다. (중략) 오늘날 공간은 시간을 그저 따라잡는 것을 넘어 오히려 앞장서서 끌어당기고 있다. 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너무 독특해서 이론화할 수 없는, 장소라는 형태를 띤 공간이, 개념의 트럼프 패에서 조커가 되어 추상을 거부하고 모든 거대 담론을 붕괴시킨다고 본다. 이제는 시간이 지루하게 균질적인 것, 매번 똑같은 지겨운 것이 되고, 속이 찬 자궁이라는 공간성에 대조되는, 남근적인 탄도가 된다. 그리고 공간이 시간에 그동안의 복수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 자연은 인간 역사에 자연의 권리를 행사해 왔는데, 비관적 생태학자들은 그것을 이제 세상이라는 육신에서 종양이 자라는 이미지로 본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라고 쓸 때도 그 명료함은 통찰력이라는 아우라를 두르고 빛을 뿌린다.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쓴 책에 관해 서평을 쓸 때 “데이비드 베컴이 과연 이 책을 직접 썼을지 궁금하다고? 차라리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직접 지었을지를 궁금해하시라.”(테리 이글턴, 앞의책)고 넉살을 떤다. 그는 독자에게 재미와 지식, 쾌락과 통찰력을 함께 쥐어준다. 우리나라에서 테리 이글턴 같은 서평가를 만날 가능성은 한밤중에 38번 국도를 운전하며 가다가 귀신을 만날 가능성만큼이나 낮다.
우리 서평가들은 점잖거나 무던하다. 그들에게 책과 저자의 허접함과 뻔뻔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요청하더라도 그들이 진실을 말해줄 가능성은 없다. 서평가의 내면에는 통찰가와 소크라테스적 인물과 사나운 본성을 가진 개가 공존한다. 하는 바를 보면 그들은 때로는 지나치게 날카롭고, 때로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며, 때로는 지나치게 으르렁대고 물어뜯는 강퍅한 본성의 존재들이다.
나는 서평집들을 즐겨 읽는다. 예전에는 김현, 김훈, 고종석이 쓴 서평들을 읽으며 지적 충만감과 기쁨을 느꼈던 적이 여러 번이다. 내 서평도 그렇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욕망일 뿐 실현이 불가능한 꿈이다. 최근에도 건축가 서현의 ‘또 한 권의 벽돌’, 정신분석의 김종주의 ‘이청준과 라깡’,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이현우의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헌책방 운영자인 윤성근의 ‘심야책방’ 등등을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이현우가 내놓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지제크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 관한 꽤나 긴 서평이다. 드물게 한 권의 책으로 엮인 이현우의 서평을 읽으며 그 거울에 비친 내 적나라한 욕망을 보았다! 내 존재 안에 있는 이 낯선 것, 나 자신보다 더 나 자신인 것! 쇼펜하우어가 자기 안의 낯선 괴물이라고 한 의지, 프로이트가 욕망으로 바꿔 이해한 그것, 이글턴이 지제크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풀어서 쓰고, 이현우가 다시 지제크의 책에 대해 말하며 인용한 그것!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테리 이글턴, 앞의 책)
이현우가 인용하지 않은 그 다음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테리 이글턴, 앞의책)
그것이 쇼펜하우어-프로이트-이글턴-지제크-이현우-장석주 사이를 잇는다. 욕망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평과 서평 사이에서 강제적 매개의 힘으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