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들레(이효사)님의 교우 단상 : 추수감사절의 의미 ◈
농부들의 정성 어린 손길로 얻은 결과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감사절이 다가왔다. 올해도 들꽃제단이 각종 과일과 채소와 곡식 등으로 풍성함을 그리며, 그동안 하나님의 보살핌 덕에 잘 지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다음 추수감사절까지 최선을 다해 살게 되기를 기도한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문득 과거 조상님들에게 추수감사절은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밀려와 짬을 내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한국의 추수감사절은 미국 개신교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우리 땅에 들어왔지만, 선교 초기부터 추수감사절을 지낸 것은 아니었고, 1900년대 초반을 넘겨 개신교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뒤에야 나름 규모있게 추수감사절을 지내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혹자는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지키기로 한 날이 1904년 조선장로교총회에서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1902년 『신학월보』 11월호 기록에 의하면, 첫 추수감사절은 1902년 10월 5일, 여주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이천 지방의 여러 교회가 모여 첫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한국교회는 미국 추수감사절 절기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추석과 연결하여 감사 예배를 드렸고, 여러 교회가 연합예배 형태로 추수 감사 예배를 드렸다. 물론 짧은 기사만으로 모든 걸 알 순 없지만, 추수감사절을 조선의 명절인 추석과 연결시키려 했다는 건 매우 의미가 깊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 추수감사절이 단순히 한 해의 소출을 거두고 그 작물의 풍요로움에 대한 감사가 전부였다고만 할 수 있을까?
1910년대 『신한민보』의 해외 한인들의 추수감사절 기사에 의하면, 추수감사절이 가지는 의미가 지금의 물질적 풍요나 소출 획득에 관한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신한민보』의 「감사일 한인의 정성, 천심인애를 녹임...」이란 제목의 기사를 살펴보면, 추수감사절은 한인들의 나눔과 공감이 담긴 축제였음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에서 동포끼리 모여 서로 소통하고, 한해의 소출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는 감사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겼음을 느끼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들에게 있어서 추수감사절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손톱을 파고드는 고통을 견디며 받은 댓가로, 부둣가 노동자들의 비린내의 댓가로, 가정부 등으로 지내며 겪은 인종차별과 고통의 삶을 이겨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의식이자 고백이었으며, 또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길 바라는 희망과 소망, 그리고 감사의 의미가 담긴 삶 그 자체였다.
1915년 총독부의 <포교 규칙>으로 인한 종교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감사제는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각 지방 교회별로 평범한 추수감사제도 많았지만, 복합적인 성격의 예배를 통해 민족적 단결을 꾀하는 역할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믿지 않는 이들의 향한 포교 성향의 전도 집회를 겸하기도 했으며, 유명한 음악가나 무도가 등이 나와 공연을 하는 문화행사의 역할도 감당했다.
과거의 추수감사절은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짤막한 신문 기사가 모든 걸 대변할 순 없지만, 과거 조상들의 추수감사절은 의례적인 기독교 절기로 여기는 현재 교회의 추수감사절과는 확연히 다름은 물론 심각성마저 제기한다.
해외 한인들이 ‘천심인애(天心仁愛)’를 녹여 드렸던 추수감사제, 그리고 포용과 축제의 장으로 즐겼던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들의 추수감사절을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몇 자 적으며, 난생처음 교우들과 추수감사제를 함께하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마음은 들꽃에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