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황주리)
황주리 화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말은 ‘시나브로’다. 국어사전에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 풀이한 우리말 시나브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판매하다 사라진, 한글로 디자인한 시나브로 담배 커버가 아련히 떠오른다.
이후로 록밴드 이름, 음식점·카페·노래방 등 수많은 곳에서 시나브로는 사용돼 왔다. 중·고교 시절 문학의 밤 행사에서 "시나브로 겨울이 왔다"고 시를 낭송하면 '멜랑콜리'라는 외국어만큼이나 신비롭게 울려 퍼지던 우리말 시나브로. 왠지 우수 어린 슬픔에 관한 말처럼 느꼈던 시나브로. 그 말은 글 어디에 붙여도 대충 멋있게 들렸다. 시나브로 겨울이 왔다, 시나브로 흰 눈은 쌓이고, 시나브로 네가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글을 쓰고 읽으며 청춘이 지나갔고, 시나브로 나는 화가가 되었다.
얼마 전 본 영화 '애드 아스트라'가 떠오른다. '고난을 거쳐 먼 별까지'란 뜻이라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갖은 고난을 거쳐 도달한 우주에는 고독하고 광활한 사막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의 메시지는 먼 별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늘 이 순간의 행복을 누리고 살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꿈을 꿨다. 미래로 간 내게 누군가 말했다. "100년 뒤 화가는 골동품 같은 존재입니다. 시나브로 사라진 직업이죠. 하지만 미래에도 예술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합니다. 당신이 예술이죠. 우리 모두가 말입니다." 꿈에서 깨니 쓸쓸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시나브로 100년 뒤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오늘도 버리지 않았다.
시나브로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우리가 확실하다 믿었던 가치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화가인 나는 늘 세상보다 앞서 가는 것 같아 외로웠는데, 이제는 세상이 나보다 훨씬 앞서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그럼에도 바라건대 100년 아니 500년 뒤에도 그리운 그림과 종이책과 신문, 아름다운 우리말이 시나브로 살아남기를.
첫댓글 시나브로. 예전엔 사투리인 줄 알았습니다. 보이지 않으며 뚜렷히 드러나지 않으나
조금씩 변해가는 형상, 상황들. 참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