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외 1편)
황 중 하
캐나다에서 건너온 블루문 맥주. 새하얀 피부에 파란 눈의 맥주는 홍대클럽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했어. 맥주의 목소리에선 부드러운 하얀 거품이 흘러나왔지. 찬란한 조명을 등에 진 블루문 맥주가 신기루처럼 내게로 오던 날, 1860밀리 미터의 거품이 내게로 왔어. 맥주는 유 아 소 큐트!를 외쳐대며 유리잔 속에 거품을 흘려댔지. 안개에 홀리듯 달콤한 거품에 취해 길을 걷는 밤. 밤하늘엔 부드러운 달빛이 흘러나오고 난 거품 흘리는 달을 처음 바라보았어. 노란 달 속의 거품을 퍼내어 내 어깨에 덮어주던 블루문 맥주. 내 가슴에도 거품 꽃이 피어오르던 찰나, 맥주는 내게 입을 맞추었어. 노노를 외쳐보지만 왓츠 더 프라블럼? 유 아 낫 식스틴 이어스 올드라고 말하는 맥주. 맥주가 머리를 흔들었어.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울상을 지으며 마지막 노를 외친 후에야 아 유 어 버진? 이라고 물어. 잇츠 테러블을 연발하는 맥주. 맥주의 거품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1860밀리미터의 거품도 사그라들어. 달을 한 가득 채우던 거품과 내 안에 막 차오르기 시작하던 거품. 세계의 거품이 사그라들어. 거품 빠진 맥주를 먹어봤니? 그날 밤, 난 거품 빠진 맥주가 되어 도심의 달 속을 하염없이 걸었어. 하늘의 달이 거품을 닦으며 안녕이라고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있었어.
왁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왁스 뚜껑을 열어요. 회색의 끈적한 왁스는 서해바다의 질척이는 펄 같아요. 한발 내딛으면 푹 꺼져버리는.
왁스를 머리에 바를 수 없던 내 사춘기는
갯벌의 나날이었죠.
햇살이 쨍쨍한 점심시간, 나는 학교건물 뒤편에 있었고 계단에 모여 앉은 여자애들을 바라봤죠. 짧은 교복치마의 여자아이. 여자애는 나를 바라보았고 내게 불씨를 집어 던졌어요. 난 온몸이 뜨거워져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죠.
맨 다리의 여자애가 걸어왔어요. 짧은 머리의 그 여자애. 난 엊그제 전학을 왔을 뿐인데 선배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여자애는 힘껏 내 정강이뼈를 걷어찼죠. 발길질할 때마다 나는 갯벌 속으로 푹푹 꺼져 들어갔어요. 키가 점점 작아져 갔어요.
걸음을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죠. 육지와 바다 사이. 갈매기가 내 머리 위를 날고 있었고 나는 하얀 깃털의 꿈을 꾸었어요.
거울 속엔 펄 같은 왁스를 머리에 바르는 내가 있어요. 절대 꺼지지 않는 초강력 왁스. 난 왁스를 바르며 머리털을 곤두세우죠.
한층 자라난 키가 보이지 않나요?
길어진 손톱 발톱은 내 머리끝에 있어요.
-시인정신 2014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