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2/169일차> 2012년 3월 28일(수) 암스테르담-->파리, 자전거로 암스테르담 다니기
밤새 청년들의 요란한 소리에 뒤척뒤척하다가 새벽에야 깊은 잠에 든 다음, 7시에 일어나 숙소 밖으로 나가 보니 지난밤의 열기를 반영하듯 쓰레기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암스테르담이 물과 운하의 도시라 그런지 공기는 축축하게 젖어있는 듯하다.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차와 청소부들로 레이즈플레인 광장과 골목이 무척 부산하다. 축축하게 젖은 암스테르담을 열심히 청소하는 모습.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오늘 저녁엔 또 광란의 밤으로 쓰레기가 가득해지겠지. 그러면 내일 아침 일찍 청소부들이 다시 쓰레기를 치우고..,..” 이게 선진 도시 암스테르담의 일상이라고 생각하니 좀 씁쓸한 마음이 앞섰다.
동희와 함께 묵은 암스테르담의 숙소인 '레이즈플레인 호스텔'.
이 골목에서 밤새 청년들이 떠드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8시30분 동희와 함께 2층 홀로 내려와 아침식사를 했다. 빵과 쨈, 따뜻한 차가 전부다. 하기야 1인당 10유로짜리 숙소에 아침식사까지 포함돼 있으니 좋은 식사를 기대하긴 어렵고, 대부분의 유럽 다른 숙소들도 이 정도 식사를 제공하지만 무척 부실했다. 그럼에도 나는 식빵 6조각을 먹으며 나름 에너지를 보충했는데 동희는 2조각만 먹고는 끝이었다. “잘 먹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저렴한 숙소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하는데, 음식에 상대적으로 예민한 동희가 안쓰럽게 보였다.
10시에 체크아웃을 하면서 숙소에 배낭을 맡긴 다음, 그린 바이크(Green Bike)를 찾았다. 자전거를 빌리기 위해서였다. 1명이 1일간 빌리는데 11.5유로에 3유로의 보험료를 합해 14.5유로였으나 숙소에서 소개해준 데 따른 약간의 할인으로 1인당 13.8유로를 지불했다. 2명 빌리는 가격이 27.6유로(약 4만1400원)였다. 사실 자전거 빌리는 가격은 24시간 시내 교통카드(1인당 7유로)보다 훨씬 비싸지만 환경오염 방지에 참여하고, 특히 자전거를 타는 것 자체가 즐거우면서 건강에도 좋은 일이란 생각에 기꺼이 자전거를 빌렸다.
'그린 바이크' 대여소.
암스테르담에는 자전거 대여소가 곳곳에 있고,
모든 교통체계가 자전거와 보행자 중심으로 돼 있어 자전거 타기에 편리합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는 기차는 오후 5시16분에 출발한다.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오후 4시 정도까지는 암스테르담을 돌아다닐 시간이 있었다. 어제는 고흐 미술관과 국립박물관, 뮤지엄 파크, 숙소 주변을 걸어서 돌아다녔으므로,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부채꼴 모양의 운하로 이뤄진 암스테르담을 멀리 돌아다니기로 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암스테르담은 ‘운하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자전거의 도시이기도 했다. 모든 도로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만들어져 있었고, 교통 시스템도 자전거와 보행자 중심으로 구축돼 있었다. 사람들도 자전거를 많이 이용해 자전거가 자동차를 슬며시 밀어내는 양상이었다. 나와 동희는 오후 3시30분까지 4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자전거를 타는 암스테르담 시민들. 남녀노소 구분이 없이 모두 자전거를 애용합니다.
먼저 암스테르담의 중심에 자리잡은 담(Dam) 광장으로 갔다. 가장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암스테르담의 이정표인 곳이다. 국가적인 주요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한 담 광장과 그 주변엔 2차세계 대전 당시의 사망자들을 기리는 위령탑과 왕궁(Palace), 신교회 등 중심 유적들이 몰려 있었다. 햇살이 화창하게 내리쬐는 담 광장엔 관광객들이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었고, 거리의 악사와 신기한 차림새를 하고 관광객과 사진을 찍으려는 예술인들이 이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신교회에선 유대교 역사와 현재를 보여주는 전시회도 열리고 있었다.
담 광장 중앙에 있는 왕궁(Royal Palace).
암스테르담의 명물 중 하나인 '밀랍 인형관'.
거리의 음악 자동 연주기. 기계식으로 만들었는데, 그 기묘함이 탄성을 자아냅니다.
암스테르담 구교회. 유대교와 관련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암스테르담 거리. 유명한 감자튀김을 파는 집들도 많아 우리도 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담 광장에 이어 안네 프랑크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진주를 피해 숨어 지내며 전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린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 하우스와 렘브란트 광장(Rembrandt Plein), 구교회, 도크, 운하 등 구석구석을 신나게 돌아다녔다. 특히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가장 인기를 끌고 있던 곳으로,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관람객들이 건물을 한 바퀴 돌 정도로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도 줄 뒤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입장해 천천히 살펴보았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 바로 이곳이 안네 가족이 숨어지내던 곳입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안네 가족이 숨어 지내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일기의 관련 대목들을 발췌해 전시해 놓고 있었다. 당시의 긴장감과 그곳에서 매일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며 저널리스트(언론인)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하지만 나치의 검열이 심해지고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안네 가족의 비밀장소가 발각돼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다 가족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대목은 더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전쟁의 참혹함과 인간 존엄에 대한 이보다 생생한 교육장은 없을 것 같았다. 동희도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전시물과 발췌된 안네의 일기를 일일이 확인해 가며 구경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철 구조물로 외부를 차단해 놓아
밖에서 보면 2차세계대전 당시의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에는 벽장과 비밀통로 등을 모두 복원, 당시의 긴박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을 질주하는 것이 처음에는 만만치 않았다. 아무래도 차와 트램, 행인들로 복잡한 시내를 자전거로 다니는 것이 어색했고, 더구나 자전거 주행과 관련한 규정(룰)을 잘 몰라 조심조심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희는 그런 규정보다는 차량이 있는지 없는지 상황을 파악하고는 교차로에 진입하고 도로를 쌩쌩 달렸다. 나는 교통상황이나 일방통행 여부 등을 파악하기 위해 교차로에서 도로 표지판을 보면서 한참 서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행동이 굼떠지면서 동희보다 뒤처지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동희는 “뭐 해. 빨리 와. 건너도 돼”라고 보채고, 나는 “잠시만! 여기 일방통행 구간 아니야?”하면서 늦장을 부리는 등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면서 현지 교통과 도로 사정을 파악하고 보니 자전거 주행이 아주 편리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한참 자전거를 탄 이후부터는 망설임 없이 신나게 도로를 질주할 수 있었고, 동희의 보챔도 사라졌다.
이처럼 자전거가 대세가 된 것은 자동차가 모든 도로의 주인인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암스테르담에서도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또 그 변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 긍정적인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이 처음에는 불편할 수도 있다. 자동차 키 대신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는 대신 자전거 페달을 밟는 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처음의 불편을 감수하고 나면, 새로운 상황에 익숙해지고 더 편안해지는 법이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사회, 국가가 미래를 먼저 열어가는 것이다. 암스테르담은 그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렘브란트 광장. 광장 가운데 조각상이 바로 렘브란트 동상입니다.
도크식 운하.
운하의 수량 변화에 관계 없이 배들이 왕래할 수 있도록 만든 도크.
다시 들썩이기 시작하는 레이즈플레인 광장.
오후가 되면서 젊은이들과 거리의 음악가들이 몰려들면서 다시 들썩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암스테르담을 신나게 돌아다닌 다음 오후 5시16분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네덜란드의 들판과 브뤼셀, 프랑스의 동부 평원을 신나게 달려 예정대로 저녁 8시35분 프랑스 파리 북역(Gare du Nord)에 도착했다. 역시 국토의 상당부분이 간척으로 이뤄진 네덜란드는 물길이 이곳저곳으로 흘러 축축하게 젖은 모습이었고, 브뤼셀은 현대적인 빌딩들로 뒤덮여 유럽에서도 색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암스테르담 센트럴역.
네덜란드는 물론 독일, 프랑스 등으로 떠나는 국제열차들로 붐비는 역입니다.
파리로 기차를 타고 달리는 도중에 동희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서 영어책을 펼쳐들고 공부를 하기도 하고, 뭔가 글을 끄적거리는 등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차를 타고 오면서 MP3에 저장했던 판타지 소설을 모두 삭제했다고 한다. 그 소설은, 그것 때문에 공부에 방해가 될 정도로, 동희가 가장 좋아하고 탐닉하는 것이었다. 그 소중한 걸 지우다니, 동희가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역시 적절한 환경이 필요하다. 동희에게 그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 것이고, 이번 여행이 그것을 제공한 것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동희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했다. 부모의 기대에 따라 아이를 보채고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것이다. 이번 여행이 동희에게 자신의 삶과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계기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의 내면에서 모종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아내는 동희에게 생각의 ‘꺼리’들을 만들어주면서 그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파리 북역에 도착하니 아내와 창희가 미리 도착해 플랫폼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너무 반가웠다. 불과 이틀 전 헤어졌는데도, 한참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아마 해외에서의 만남이라는 특수성이 작용한 때문도 있겠지만, 오랫동안 여행을 하면서 고운정 미운정이 많이 든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성과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가족 사이의 애정과 신뢰라고 할 정도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달라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살아 있었다.
파리 북역에서 다시 만난 가족.
불과 이틀 떨어져 있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역을 나와 전철을 타고 창희가 예약해 놓은 파리 민박집(파리가자)으로 가 여장을 풀었다. 이제 전철 표를 끊고, 숙소를 찾아가고 하는 일들을 모두 창희와 동희가 처리해 전철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르게 됐다. 언제부터인가 나와 아내는 창희와 동희를 따라다니는 처지로 바뀌었다. 나중에 확인하니 파리 전철을 1회 이용할 때에는 1.7유로가 들었지만, 10회 이용권은 12.7유로로 저렴했다. 창희와 동희는 이걸 미리 확인하고 10회권을 구입했다.
밤 10시, 민박집에서 밥과 김치, 육개장, 돼지고개 불백 등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각자 방에 들었다. 모처럼 먹는 한국 음식이 이토록 맛있을 수가 없었다. 창희와 동희는 몇 그릇을 먹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동안 외국인들과 호스텔의 도미토리에서만 묵다가 파리 외곽의 주택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지내니 뭔가 색다른 느낌이다. 벌써 외국 호스텔과 게스트하우스에 익숙해지고 한국인과 한국말을 하면서 한국음식을 먹는 것이 어색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