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시 모음.
8월의 나무에게
최영희
한줄기
소낙비 지나고
나무가
예전에 나처럼
생각에 잠겨있다
8월의
나무야
하늘이 참 맑구나
철들지,
철들지 마라
그대로,
그대로 푸르러 있어라
내 모르겠다
매미소리는
왜, 저리도
애처롭노.
8월 한낮
홍석하·
밭두렁에 호박잎
축 늘어져 있는데
사철 맨발인 아내가
발바닥 움츠려 가며
김장밭을 맨다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애가 타서 울어대는
청개구리
강물에 담긴 산에서
시원스럽게 우는
참매미
구경하던
파아란 하늘도
하얀 구름도
강물 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8월처럼 살고 싶다네
고은영
친구여
메마른 인생에 우울한 사랑도
별 의미 없이 스쳐 지나는 길목
화염 같은 더위 속에 약동하는 푸른 생명체들
나는 초록의 숲을 응시한다네
세상은 온통 초록
이름도 없는 모든 것들이 한껏 푸른 수풀을 이루고
환희에 젖어 떨리는 가슴으로 8월의 정수리에
여름은 생명의 파장으로 흘러가고 있다네
무성한 초록의 파고, 영산홍 줄지어 피었다
친구여
나의 운명이 거지발싸개 같아도
지금은 살고 싶다네
허무를 지향하는 시간도 8월엔
사심 없는 꿈으로 피어 행복하나니
저 하늘과 땡볕에 울어 젖히는 매미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속에 나의 명패는
8월의 초록에서 한없이 펄럭인다네
사랑이 내게 상처가 되어
견고하게 닫아 건 가슴이 절로 풀리고
8월의 신록에 나는 값없이 누리는
순수와 더불어 잔잔한 위안을 얻나니
희망의 울창한 노래들은 거덜난 청춘에
어떤 고통이나 아픔의 사유도
새로운 수혈로 희망을 써 내리고 의미를 더하나니
친구여,
나는 오직 8월처럼 살고 싶다네
8월에는
최홍윤
봄날에
서늘하게 타던 농심農心이 이제
팔 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된더위 만나 허우적거리지만
기찻길 옆엔 선홍빛 옥수수
간이역에 넉넉히 핀 백일홍
모두가 꿈을 이루는 8월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또 한해의 지난날들
앳되게 보이던
저어새의 부리도 검어지는데
홀로 안간힘으로 세월이 멈추겠는가
목 백일홍 꽃이 지고
풀벌레 소리 맑아지면은 여름은 금세
빛 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고 마는 것
우리가 허겁지겁 사는 동안
오곡백과는 저마다 숨은 자리에서
이슬과 볕, 바람으로 살을 붙이고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단지, 그 은공을 모르고
비를 나무라며 바람을 탓했던 우리
그리 먼 곳보다는
살아 있음에 고마울 뿐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슴 벅찬 일인데
어디로 가고
무엇이 되고 무슨 일보다,
8월에는 심장의 차분한 박동
감사하는 마음 하나로 살아야겠다
8월의 소망
오광수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반가운 8월엔
소나기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나면 그렇게 반가운 얼굴이 되고
만나면 시원한 대화에 흠뻑 젖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면 얼마나 좋으랴?
푸름이 하늘까지 차고 넘치는 8월에
호젓이 붉은 나무 백일홍 밑에 누우면
바람이 와서 나를 간지럽게 하는가
아님 꽃잎으로 다가온 여인의 향기인가
붉은 입술의 키스는 얼마나 달콤하랴?
8월엔 꿈이어도 좋다.
아리온의 하프소리를 듣고 찾아온 돌고래같이
그리워 부르는 노래를 듣고
보고픈 그 님이 백조를 타고
먼먼 밤하늘을 가로질러 찾아왔으면,
8월이 가기 전에 /오광수
8월이 다 가기 전에
조금 남아있는 젖은 가슴으로
따가운 후회를 해야겠다.
삶에 미련이 많은 만큼 당당하지를 못해서
지나온 길 부끄러움으로 온갖 멍이 들어 있는데도
어찌하지 못하고 또 달을 넘겨야 하느냐
나의 나약함이여
나의 비굴함이여
염천 더위에 널브러진 초라한 변명이여
등에 붙은 세 치 혀는 또 물 한 바가지를 구걸하고
소리 없는 고함은 허공에서 회색 웅덩이를 만드는데
땅을 밟았다는 두 발은 흐르는 물에 밀려 길을 잃고 있구나
8월이 간다
이 8월이 다 가기 전에
빈손이지만 솔직하게 펼쳐놓고
다가올 새날에는 지친 그늘에게 물 부어주고
허공의 회색 웅덩이는 기도로 불러다 메워가고
물빛에 흔들리는 눈빛이라면 발걸음을 멈추자
머지않아 젖어있는 이 가슴이 마른다 해도
잠든 아이 콧잔등에 땀 솟을까
애쓴 마음이라도 남아있으면 너무 고맙지 않은가!
8월의 연가(戀歌) /오광수
8월에
그대는 빨간 장미가 되세요
나는 그대의 꽃잎에 머무르는 햇살이 되렵니다
그대는 초록세상에 아름다움이 되고
힘겨운 대지에는 꿈이 되리니
나는 그대를 위해 정열을 아끼지 않으렵니다
푸른 파도의 손짓도 외면하렵니다
오로지 그대를 향해
뜨거운 사랑의 눈길을 쉬임없이 보내며
빨갛게 빨갛게 그대의 색깔을 품으렵니다
매미들의 향연이 막을 내리고
저 들판 너머로 꽃가마가 나타나면은
나는 믿음직한 그대의 신랑이 되고
그대는 노란 머플러로 한껏 멋을 낸 신부가 되리니
아!
두근거리는 땅의 울림에
한줄기 소나기까지 단비가 되어
지금 그대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8월에
그대는 빨간 장미가 되세요
나는 하늘의 푸른 물 한 줌씩 집어다가
두 손으로 돌돌 말아 이슬 진주 만들어
그대의 가슴에 달아드리는
아침 햇살이 되렵니다.
8월의 바다 /김소엽
너를 마주하면
옥빛 하늘이
품 안에 있고
네 눈 속엔
쪽빛 바다가 넘친다.
우울한 날엔
네 목소리에 등 (燈)을 달고
바다로 가자
수평선도 없는
밤의 파도
멀리 등대가 된
네 목소리.
어둠을 쏘는
8월의 태양
원색이 녹아 흐르는
달빛의 해변
젊은이 수없이
밀리는 파도여
너를 마주하면
파도가 꿈틀대고
너와 난
한 밤 내 섬이 되고
온 세상
바다가 된다.
8월이 오는 소리
이효녕
사랑이 너무 뜨거워
마음 둘 곳 없는 여름
하늘에 별을 바라보며 설친 잠
별빛 따라 가는 발자국 소리
푸른 나뭇잎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몇 개의 길 위에 부는 바람 소리
파도의 하얀 꿈을 모아
소라껍질 깊이 담는 소리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별빛이 몸을 더듬는 소리
넓은 초원 풀잎에 맺힌 이슬
그리움으로 구르는 소리
가냘픈 그 숨결 소리
짓눌린 가슴 열어 놓습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뜨거운 숨결이 느낌으로 오는 여름
내 마음 연록색 잎사귀 돋아내
더위에 지친 그대의 그늘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