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자들을 감찰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잇는지 체크해 보아야 한다. 부정한 세상을 향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살고 잇는 자신의 마음을 감찰하며 타인과 발 맞춰 나가야 할 것이다.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잇다.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믿음 조상들의 그 족보를 이야기할때, 선함은 선함을 낳고 악은 악을 낳는다고 말한다. 이 땅의 많은 불의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지켜 후대에 남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이 땅의 이단들을 대적할 그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전통은 중요하다. 오래된 굳건한 믿음 가운데 우리의 마음 밭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삶의 모토를 잡아 우리는 살아가야 할 것이다. 타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찰하신 예수님을 따라 그 속에 잇는 전통은 무엇인지 감찰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닮는다고 한다. 우리의 모습도 성품도 하나님을 닮아 잇는가
믿음에는 고난이 따른다. 과거의 큰 고난이 아닐지라도 소소한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 믿지 않는 자와의 마찰로 인해 우리는 어떠한 감뇌를 하고 잇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잇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통해 무리에게 기쁨을 주셧다. 무리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갈망이 무엇인가를 감찰하셧기에 가능하였을 거라 생각 되어진다.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삶에 들어가 공감하며 살고 잇는지 돌아 보아야 한다.
밭은 발굴할 수 잇는 곳이다. 무엇인가를 심어 키울 수 잇는 여건이 충분하다. 우리는 그곳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삶의 유동성이 잇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그곳에 잇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른 보상의 정도 또한 달라진다. 결과야 자신이 노력한 보상이니 당연할 것이다.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작은 믿음일지라도 꾸준히 가꾸어 큰 믿음으로 성장시킨 이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세상 속에 인자로 살면서 천국의 소망을 품을 때, 영향력이 드러남과 동시에 아버지 나라에 대한 소망 또한 자라날 것이다. 더불어 우리의 믿음이 후대에까지 미칠 수 잇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표적을 찾기 위한 시도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여기에서는 표적의 흔적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잇겟냐며 의문을 던진다. 그 흔적은 얼룩이 되어 몸 구석구석 숨어 잇을 것이다. 이를 찾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꾸준하게 걸어가야 한다. 푯대를 향해. 천천히 가더라도 꾸준히 노력한다면 종착지는 언제나 보일 것이다. 우리는 매일을 논쟁 속에서 살아 간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논쟁이다. 그 논쟁 속에서 우리는 승리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성경 구절구절 속에 병든 자를 고치신다. 이는 그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삶의 터전을 갈구어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도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도 타인을 위해 터전을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오직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인자인 것을 들어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성령님을 갈구하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모든 것들이 다 선하게 이루어졋고. 그 선함의 열매를 통해 나무를 안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 나가야한다. 그 속에서 희망을 가져야한다. 자신이 속한 어떠한 곳에서 무엇인가의 성취를 위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잇어 방향성을 제시해주기에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를 위해 해야 할 것은 복음을 옳바르게 전하고 가르쳐야 할 의무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끝없는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하듯,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의 삶과 생각도 극도로 변하고 있다.
우리는 편안한 삶을 원한다. 그러나 삶이 그저 편안하다면,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많은 시간과 정성과 노력, 갈급함 마저 존재한다.
삶의 터닝 포인트를 찾기 위해서 무슨 노력이 필요할까. 삶이 그저 편안하게 흘러가는 대로 나둔다면 그것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고민하여야한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고민하여야 한다.
우리는 주어진 일에 노력을 다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힘들고 지치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금 힘을 얻을 수 있다. 힘들고 지친다는 표현을 우리는 고난이라고 한다. 고난. 누구에게나 오지만, 각자가 헤쳐 나가는 방식은 여려가지다. 고난 역시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 중의 하나로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고난에서 멈춰서 낙심만 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의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과주의’적 관점이 적용되어있다. 우리의 좋지 않은 결과에서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과정이 필요하다. 과정을 거쳐 결과를 얻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과정이라는 단어를 무시할 수 없다.
고난은 더 좋은 결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다만, 그 과정이 무수히 반복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 반복으로 우리는 성숙되어진다. 우리는 과정을 잘 활용하여야 한다. 이를 활용하면 살아가는 동안 성장의 기회는 무수히 주어진다.
삶은 기회비용이 적용된다. 여러 방면에서의 기회를 어떻게 자신이 활용도를 높이느냐에 누구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우리의 고난도 성숙도 함께 찾아올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망을 하고 계신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아 화를 내고 계신 것이다.
한 설교 중,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우리는 구원을 받앗고 거기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에게 기회를 열어주시고 계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수가 잇기 마련이고 선택하여 기회비용을 만들어 살아간다.
우리는 그 비용을 교인으로의 삶으로 선택하였기에 노력하여야 한다. 모든 일에는 책임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예수님도 우리를 선택하시고 책임지시기 위해서 힘쓰고 계신 것이다.
타인의 잘못을 인정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캐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도 모른척 살면서 타인의 잘못을 정죄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가.
우리는 신앙을 재건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활을 돌아 보아야 한다. 주님 앞에 제대로 된 태도와 마음으로 서 있는지 말이다. 각 사람은 믿음의 척도가 다르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또한 공동체 지체를 세워나가는데 안정화된 밑걸음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현 시점에서 과정을 한탄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오히려 그 과정 속에서 과거보다 나아진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현재의 삶에 감사할 것이고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목에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잘못된 생각들은 우리의 의지대로 끊어가며 살아가야한다. 감정의 폭이 넓어지면서 하루에도 수시로 드나드는 생각 땜에 오늘도 골머리를 앓는다. 그래서 옳바른 생각을 잡으려 애쓴다. 지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함께하는 하나님을 알기에 모든 과정을 감수하고서 오늘도 힘겹지만 살아간다. 수시로 생각의 전환을 해보려 애쓰며 하나님께 자문하는 나를 본다.
이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이 잇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쓰라고 공동체를 주셧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 목적을 재건해야하고 매일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의 과정 속에도 임하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감정 또한 의지대로 하나님 앞에 자유함을 누리며 기뻐할 수 잇는 것 같다. 우리의 지나온 나날들을 돌아보며 불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누릴 수 있을 때 우리의 의지는 더욱 강해지는 것 같다.
무턱대고 대학교를 들어왔다. 공부하는법도. 관계하는법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대학교를 들어왔다. 막막했다. 앞으로 더 많은 관계를 할 것이고 계획을 할 것인데.. 난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었다.
무턱대고 DFC를 찾아갔다. 그 속에서 요구하는 역량을 다해내지 못했기에 난 그 곳에 있을 당시에는 모두가 나를 하찮게 여길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내 삶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속해 있는대에서 내가 직간접적으로 배우고 얻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다.
무턱대고 사람과 접촉해야했고, 난 어떻게든 내 자신과 싸울 원동력이 필요했다.
난 부족함을 느껴서인지 학교에 상담 센터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몇차례 개인 상담과 집단 상담을 받았다.
어느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여자들에게 다가가 있었고, 내 안에 있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소수였다가 다수가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 생각과 감정 사이에서 무엇을 발판 삼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금도 난 기도한다. 지금 내 안에 함계 계신 하나님께로 향한 이 의지대로 이루어질 것을.
대학교에서 밟아온 과정을 돌이켜 봤을 때, 사회의 발판을 단단히 세우고자 많은 단계를 지나온 것만 같다.
그런 와중에도 연약한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끌어준 모두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대학 졸업 시즌 때의 일이다. 졸업을 앞둔 몇 주 전 학교 장학 복지 팀에서 전화가 왔다. 도서관에서 장애 계약직을 하나 추천해 달라고 하는데 이에 응해 줄 수 있겠냐는 제의였다.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해보겠노라고 답했다.
졸업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찰라, 일이 터졌다. 공황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학교 주변의 상가 몇 군데에서의 일이 있고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의 하루 동안을 밖을 멍하니 돌아다녔다. 그러다 경찰서를 찾아가 집을 찾아달라고 했던가.. 가족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야위였던 난, 5시간 넘게 가족들하고도 실랑이를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다음날이 졸업식이었다. 가족과 나는 경찰서에서 5시간을 실랑이를 한 터라 기진맥진해 있었지만, 졸업 사진 하나쯤을 있어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부랴부랴 또 학교로 향했다.
겨우 사전 몇 장을 찍었다. 밥을 먹으며 아빠가 병원을 가자고 나에게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도 다시 정신과를 다닐 용기가 나지 않아 뿌리쳤다. 결국 나는 내일이 면접인데, 신경을 조금 누그려 뜨리자는 말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도 약간의 세속적인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다. 정신병원을 다니면 타인의 시선이 좋지 않다는 것, 평생 병원 진료 기록에 남는다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에 병원 다니는 것을 자의적으로 끊었다. 그것 또한 정신병원에 대한 안 좋은 일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지금 나를 아는 이들은 말한다. 너의 정신력은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라 말이다.
다음날, 면접을 위해 다시 대구로 향했다. 이틀 동안의 일들로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그래도 타인과의 약속, 그러니까 붙지 않더라도 경험으로 여기기로 했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어가 면접을 보았다. 다소 지쳤지만, 들려오는 질문에 성심성의것 답변을 했다. 그렇게 40분 동안이나 압박 면접이 끝이 났다.
면접이 끝나고 내가 머물고 있던 학교 근처 고시텔로 가 짐 정리를 하고서 경주로 내려가고 있던 찰라에, 전화가 왔다. 면접에 붙었다는 것이다. 면접을 보고 나온지 불과 2시간도 되지 않았었는데, 내가 이틀 동안의 그 정신으로 어떻게 이를 넘겼나 싶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그 상태로 면접을 본 것이 대단하다고. 다른 이는 말한다. 역시 면접은 제정신으로 보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생각하든 노력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생겼다는 것에 나는 참으로 감사했다.
일을 시작하고 일을 배우는 찰라에도 나는 미친 듯이 최선을 다해 목표를 향해 일만 했다. 쉴 줄 모르고 일만하는 나에게 회사 사람들은 좀 쉬는 것도 필요하다며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누구나가 살아갈 때에 잘못을 범한다. 그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필요한데, 이것을 ‘회개’라 한다. 주어진 일상에서의 회개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진정한 연결고리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믿음->깨달음->회개->용서->죄사함》의 스팩큘럼이라고 정리한다면 어떨까싶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 통로인 샘이니까 말이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갈수록 깊어질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옳은 길을 선택하여 살아간다. 그러한 것처럼 회개는 우리에게 선택의 기로를 주게 되고 그 기로에 선 우리는 하나님과 걸맞는 인생길로 여행을 떠난다.
살아가는 데에 우리는 ‘책임감’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 그 책임감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다. 책임감의 무게가 클수록 책임감의 지속성 또한 커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주어진다. 그 기회를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가 책임감의 무게를 실어주기도 한다. 서로의 상황이나 여건 속에서 다르게 책임감은 다르게 적용되지만, 그것이 지속되어지는 만큼 우리가 성장하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인생을 훈련하며 삶을 살아낸다. 그 발판이 우리에게는 터닝 포인트로 작용 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끝없는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하듯,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의 삶과 생각도 극도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며 마음을 지키도록 극도로 신경을 써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있는 것이 기도이고 말씀이다. 멀리 있는 것 같지만, 항상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우리가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선택 사항을 내비치고 있다. 그 선택 사항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감싸고 돌고 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방향성을 비취고 있다.
나는 찬양을 좋아한다. 우리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마음의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변화 발판은 처음에는 노래였다. 그래서 찬양을 좋아했고, 찬양을 통해 주님을 만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나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나의 갬성을 담아 찬양하는 것 뿐이라고..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대로라면 타락이 항상 뒤따른다. 부지런함을 따라 습관을 세우고 자신의 인성을 키워나간다면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모든 생활은 자신이 깃들어 놓은 습관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매일 나아가는 습관을 들이고 자신의 무력함 속에 하나님을 찾는 것을 마음 속에 깃들여 놓아야 한다.
목표와 방향성을 찾아 방황을 한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목표와 방향성은 중요했다. 나는 항상 마음 속에 희망을 품고 살았다. 내가 크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기에 그때의 내 모습은 어떠한 인재상을 닮아가고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산책을 좋아했고, 노력을 품고 살았다.
산책은 나에게 생각의 마인드를 제공해주었다. 독서를 좋아했던 나는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색이라는 것이 요즘 들어서는 인색하다싶을 정도로 쓰이지 않지만, 나는 그 사색을 통해 나의 발전 가능성을 볼 수 있었고, 수많은 가짓수를 만들어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았다. 그래서 그 선택한 것에 기회비용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있었다. 그 선택은 나를 발전 시켰다. 책임감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 책임감 속에서 어떠한 것에 대한 노력은 항상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친구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서 뜻을 다 이루시고 돌아가십니다. 누군가에 의해 타의적으로 만들어지는 자는 순종하기에 힘이 들지만, 자의적으로 이루려고 행하는 자는 힘이 덜 들고 그 일의 의미 또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를 '소명'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상하게도 오늘 아침에 머리가 무겁길래 왜그러지 했는데, 어제 무리하게 뛰어다녀서 열이 나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각자가 다르지만, 그곳에서 주님을 향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소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Calling'은 부르는 중이라고 해석해본다. 우리는 계속 부르심을 받고 있는 중인 것인가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이 나온다. 신앙이 깊어지기 전에 그 장면이 떠오르지가 않아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 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거 마냥. 하지만 이제 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신 것을..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된 자로써 사역에 동참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바라봄의 능력'이라는 책에서는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사항이 존재한다고. 우리에게는 거룩의 잠재력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를 단련시키시고 거룩한 길로 가기까지를 함께하신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참으로 놀랍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우리가 걸어온 길이 놀랍게 느껴진다.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도전과 꿈을 심어주고 계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해 그것이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가서에 대한 내용을 오늘 읽으며 묵상했다. 우리는 사랑을 할 적에 쌍방향적으로 한다. 한쪽에서만 주는 사랑에 쉽게 지치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편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사랑은 그 사람에게 부담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달랐다. 쌍방향이 아닐지라도, 한없이 부어주시는 사랑 덕에 우리는 이 세상을 오늘도 살아간다.
처음에는 그저 부담스러웠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신다고 하니 그저 난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제야 전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 가르쳐주신 사랑을 이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안다.
비인격화된 세상의 진리 속에서 하나님의 인격화된 만남의 진리 속에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전에도 그래왔고 오늘도 그러해야 하고 앞으로도 그러 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2. 사람들을 대할 때 상황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3.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와 인내, 절제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 내가 이만큼 성장 할 수 있는 발판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인내와 절제력, 의지력을 끊임없이 부어주셔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각자에게 은사와 사명이 있다고 하였는데, 한동안은 그것을 갈망하고 생각만 하였는데, 이제는 망설임 없이 말 할 수 있을것 같아요. 의지와 절제력, 인내력이 있어 성장할 수 있었고, 그 성장이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회사에서의 업무로 사명감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