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미움의 대상이였던 아버지께
아버지
전,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변변찮은 벌이로는 우리식구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엄마가 돈을 벌어 보탬이 없었으면 학교 다니는 것도 버거웠을겁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엔 엄마와 함께하고픈, 함께 해야 할, 함께 누리고싶은 호사(?) 는 한번도 같이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엄마는 늘 일 하는 엄마, 돈버느라 고생하는, 엄마였으니까요.
이런 엄마의 고단한 삶을 봐와서 인지 아버지에 대한 미움 의 시작이였던 듯 싶습니다.
일하는 엄마를 돕는다고 아주 어린나이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쌀을 씻는 일에 손을 담그기 시작했지요.
어렸을 때부터 시키지도 않는 일을 알아서 곧잘 하니까 엄마는 늘 나한테 모든 일을 시켰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부엌데기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죠.
아버지
지금도 초등학교 입학식 때 일이 생각납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손잡고 학교 가는데 나는 같은 또래의 자식을 둔 동네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함께 갔습니다.
엄마의 부탁이 있었던 듯싶습니다.
엄마의 부재로 인한 입학식은 기가 죽고, 쑥스럽고, 여롭고, 쭈뼛거리기 만했던 기억을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소풍을 갔는데 엄마와 함께 가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반 친구 엄마인 동네 아주머니와 함께 갔습니다.
같이 따라 오신 다른 아주머니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데 집에서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허겁지겁 욕심 사납게 많이 먹다보니 너무 배가 불렀던 듯 소풍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배변을 느끼고 큰일을 치르게 될까봐 누구에게 말 할 사람도 없고 너무 급한 나머지 또다시 동네 아주머니에게 말을 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시원하게 볼일을 본 후에 찾아온 부끄러움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버지
중고등학교 시절은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도 하고, 몰려다니며, 친구들과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워 본다든가 하는 일은 애초에 꿈도 못 꿔 봤지요. 한창 교감을 나누고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꿈을 키울 시기인데도 집안의 가사를 돕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의 추억이 별로 없어요.
아버지
저 학교 다닐 때 꿈이 뭐 였는 줄 아세요?
대학교 다니는 게 꿈 이였어요.
오빠는 장남이니 대학을 보내야 했고, 밑으로 동생들은 줄줄이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없는 형편에 저 까지 대학은 못 보내겠다는
대학을 안가면 안 되겠냐는 엄마의 한마디에 이 꿈마저 접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든지 무슨 사람이 되고 싶다든지 이런 게 아니라 그저 대학교정 한번 밟아보는게 꿈이 이었는데 말이죠.
아버지
전 이렇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걸 일찍 해 버렸는지도 몰라요.
벗어나고 싶었겠지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며 자식을 낳고 살다보니 부모에 대한 마음이 차츰 차즘 달라지더군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 미움이 어느새 희석이 되어 엷어지는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이를 먹게 됨에 따라 아버지 또한 많이 늙음으로 그 늙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면 왜그리 애처로운지요.
어느날 문득 아버지 나이를 생각하다보니 여든이 훨씬 넘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고 전광석화처럼 아버지하고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게 남지 않았다 는걸 느꼈습니다.
이제는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저 밑바닥에 깔려 있던 내 미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저 정신이 멍해지며 이상하게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전에 목욕탕에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이며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생각이라는 게 정지 되어 버린 듯 울음도 나오지 않고 허둥대지도 않고 너무나 침착하게 병원 응급실로 향하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아버지 모습을 본 순간 그 자리에서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위험한 상황은 넘겼다고 하지만 여전히 심각한 상태인건 분명해 보였습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으로 몸부림치며 고통을 호소 할 때면 양쪽 팔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수액이 출렁출렁 움직일 때마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죄스러움에 가슴을 칩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수 없이 불러 봅니다.
부모 자식 간에 생기는 천륜지정(天倫之情)은 본능적인 애정 인가 봅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혹시나 이 자리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하고 잘 못되셨다면 저는 남은 생(生)을 어떻게 살았을까요.
제 마음속에 있는 두 이성(理性)과의 눈물겨운 싸움에 몸부림치며 살았을 쭉정이 같은 못난 마음을 열어보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뜻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맺어졌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때가 지금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스럽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잘 견디고 살아 있는 모습을 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저를 세상에 나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첫댓글 '아버지, 왜 날 낳으셨나요?' 하며 몸부림으로 절규하는 아들, 딸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왜 낳았느냐고요?' 그건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지요. 사람을 낳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사람은 사람으로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사람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내가 있는 것이구요. 이것은 사람의 법도(인륜-人倫)가 아니라 천륜(天倫)이니 사람의 이성으로는 문답할 대상이 원천적으로 아닌 것이지요. 시쳇말로 부모님께는 '있을 떄 잘 해'야 함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kim youngju 씨, 아버님의 건강이 회복되시도록 기도를 보탭니다. 정성어린 글을 읽게 해 주신 kim youngju 씨게 감사드립니다.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그랬구나.그런 아픔이 있었구나.엄마없는 입학식이나 홀로 소풍을 가야하는 쓸쓸함, 추억이 없는 중,고등학교 시절,대학 진학을 포기해야하는 좌절감, 어쩌면 도피하듯 서둘러 해버렸을수도있는 이른 결혼,이 모든것이 슬퍼서가 아니고 그럼에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님의 성숙함과 바른 심성이 아름다워서입니다.아버지를 미워했음에 가슴을 치지않아도,두 이성이 눈물겹게 싸우지않아도 이젠 될듯합니다.태어나게 해주심에 감사드리고 회복된 모습 보여주셔서 감사드린다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님에게 감동이며 많은 깨닮음을 얻습니다.눈물이 멈추질 않는군요.
빗장 걸어 꼭꼭 깊숙이 깊이도 잠궜었죠. 무명 저고리 엄마같은 '하하'품에 내 안 설움 배앝았다. 후련한듯 그 맘속에 왜이리 애처러운 그리움이 가득한지.
전혀 허구없는 한편의 소설같은 어느 소녀의 아픈 시간들에 목이 메어 읽고 또 읽고 했습니다. 병환중이신 아버지 빨리 회복 되시어 당신의 고운 딸 kim youngju님의 따뜻한 마음 따스한 손 마주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