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책을 읽으면 스트레스 받을 때 나오는 코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반해,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이 솟아난다고 합니다. 저는 후자의 책은 좀 지양하는 편입니다. 다 읽고 나면 건질 것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얄팍하고 계산적인 데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튼 요즘 의무감으로 읽어야 할 책들을 시간을 쪼개 조금씩 읽는 중인데, 코티솔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힘든 시간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다 완행 서금희 누님에게 받았다가 잃어버려 송구스럽게도 다시 받은 책, ‘무궁화 꽃을 피웠습니다’를 뒤늦게 읽었습니다.
이 ‘무궁화...’ 책을 끝까지 다 읽는 동안에는 다른 책들을 읽지 못했습니다. 아드레날린이 코티솔로 바뀌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책은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남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30년에 걸친 현장 경험 속에서 찾아 낸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인간의 민낯들, 역사와 제도의 진보가 인간에게 부여한 숙제들, 진정한 리더십의 모습들, 찰진 감수성으로 발견한 삶의 아름다운 모습들입니다.
완행 누님의 첫 번째 감성 수사는 험악한 건설 관련 분쟁이자 업무집행 방해 사건이었는데 이 낯익은 분쟁을 슬기롭게 수사하여 처리한 과정도 물론 재미있지만,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지방분권적 국가로 바뀌는 대한민국의 역사 변화의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상대방의 속임수와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기꺼이 선택한 김병수(꽃뱀 편)의 모습에서는 고대 소설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스의 분노가 떠올랐습니다. 그 분노는 자신이 손해 볼 것을 무릅쓰고 공정하지 못한 상대방을 처벌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로서 진화 심리학이나 행동 경제학에서 연구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옷 입기와 화장실 청소, 낙오 없는 즐거운 산행을 만들기 위한 노력들은 이론적인 리더십 교육이나 책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훌륭한 리더십 안내서였습니다. 유명 베이커리에서의 갑질 체험은 누님답지 않은 유머러스한 장면이라서 재미있었지만, 경찰서 내부 자리 배치를 통해 행정 개선으로 연결시킨 그 노력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꼰대는 흉내 내기 어려운 완행 누님의 프로 의식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경영학 교수님들이 관리자의 역할 개선이나 기업 문화 개선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좋은 연구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경찰 행정에 청소년 봉사활동을 포함시킨 노력이나 손 편지로 교내 갈등을 해결한 모습 역시 훌륭한 처방이었지만,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현대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생활 민주주의의 훌륭한 표본이라 생각되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최근에 경찰 수사에 도입된 프로파일러를 통한 심리 수사라는 것도 이미 완행 누님이 피의자에게 좋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차분하게 문제를 풀어나가려 했던 따뜻한 시도의 부분적 모방에 불과하다는 느낌입니다. 105등 콤플렉스가 훌륭한 경찰 생활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부분, 폭우로 경찰관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에서 꿋꿋이 버티고 있는 야생화를 발견한 부분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상업적으로 써진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궁화 꽃을 피웠습니다’라는 제목은 무궁화 계급장을 단 경찰관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멋진 인생을 살았다는 의미였겠지만 이 책을 좋아할 만한 사람들에게는, 극우 소설가 김진명의 소설 제목이 떠오르는, 약간 거부감이 있는 제목입니다.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출판 관계자가 거의 양념을 치지 않았다는 느낌도 듭니다. 글 속에 타인을 의식하는 겉멋과 화장 빨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솔직한 서술이 참 좋았고 본 받아야 할 글쓰기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공적 기관에서 우수 도서로 선정해 많은 사람이 읽도록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드니까 약간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생생한 현장 경험에 대한 전달과 자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결합됨으로써 어느 기준으로 책을 분류하고 소개할지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많은 의사나 변호사들은 사전적 건강 관리나 예방보다는 사후 처방이나 문제 해결에 관심을 더 많이 둡니다.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은 경찰들이 많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앞으로 검찰로부터 권력을 가져 온다면 - 물론 그래야 하고요 - 걱정되는 부분이 조금 있습니다. 사전 예방보다는 사후 해결과 처벌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것이 승진과 권력 획득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아마추어로 봉사하지 마라. 프로답게 헌신하라.”는 자세로 살아 온 어느 경찰관의 진실된 삶에 뒤늦은 박수를 보냅니다. 이 책이 더 많은 시민과 경찰관들에게 읽혀지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들 앞에서 오십이 넘어 피아노를 배운 완행 누님의 피아노 실력 - 낮은 자세에서 우뚝 서는 거인의 모습 - 을 보여주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추신) 책에서 인용하신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숲 속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개척하는 삶이 귀쫑에서도 계속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고주백님 감사합니다
저의 책을 정성스레 읽고
장문의 글을 올려주시다니요
감동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