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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내일이 온 다
류 재순
한껏 너부러져 게으름을 피우던 여름날의 하우는 유령처럼 깔려드는 어둠속에서 맥 빠진 햇살의 잔여를 앎둑앎둑 갉아 먹는다.
여자는 영혼이 떠나간 사체마냥 미동 없이 누워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본다. 도대체 어둠을 잠재우고 여명이 찾아오며 노을이 비끼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순서인가 아니면 태양이 넘어가고 핏빛 노을이 넘치다 땅거미가 기어들어 캄캄한 밤이 도래되는 것이 순서인가? 어느 것이 오늘을 맞이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내일을 맞이하는 것인가? 언제부터 켜져 있는 텔레비전은 완전 소음이 된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빛과 화면을 바꾸며 죽음 같은 정적 속에서도 그 존재의 가치를 확인시키느라 나름대로 분주하다.
또다시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찔리는 듯 아프기 시작한다. 그 깊은 곳엔 아픔을 유발하는 핵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땅땅한 응어리로 뭉쳐진 그 핵은 완고하게 자리를 잡고 시간이 갈수록 그 괴로움의 바이러스를 전신에 퍼뜨리며 궁극엔 머리까지 올라와 여자의 머릿속을 쑥대밭으로 뭉개어 놓는다.
20년, 그래 인생에서의 그 긴 20여년이란 시간을 그 남자와 같이 왔다…
그때였지, 풍년든 늦가을의 논벌, 줄지어 쌓여진 벼 낟가리엔 탱글탱글한 벼 이삭들이 무거운 머리를 주체 못하며 주인들이 빨리 탈곡장으로 실어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평화로운 논벌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은 삽시간에 특대 센세이션이 되어 온 현성을 뒤흔들어 놓았다. 상습적으로 볏단을 훔치러 다니던 밭농사밖에 할 줄 몰랐던 중국인(한족) 마을의 한패와 끝내 분을 참지 못하고 볏단을 사수하려 숨어서 지키고 있던 다른 한 조선족 마을의 패들과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에라, 이 도적놈들, 오늘 잘 붙들었다 .때려라 때려! 몽땅 잡아라!
두 패는 마구 뒤엉켜 패고치고 덮치고…캄캄칠야 속에서 싸움판에서 오고가는 연장들이 번득번득 살기를 내 뿜었다. 갑자기“퍽”하는 소리가 났다. 크지는 않았지만 이 심상치 않은 소리는 순식간에 비상 명령마냥 찰나의 휴전을 가져왔다. 멍해진 사람들의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한 중국젊은이의 괴성이 터졌다.
아야마야, 워더 로빠야 니 자디라?! (에구머니 아버지 왜 이러세요?)
꼼짝 않고 누워 있는 60대 영감을 끌어안고 통곡이 시작됐다.
큰일 났다 튀어!
드디어 낌새를 알아차린 이쪽 조선족 마을 패들은 줄행랑을 놓고 달아났다.
수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치명의“한방”을 승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썼던 연장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숨 막히는 나날에 한 사람이 나섰다. 자기의 소행이었다고 자백하였다. 조선족 생산대의 당서기―웅걸, 그 남자였다.
사실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날 “벼 도적”을 잡으러 논에 숨어 있다는 남편을 찾아 나왔었다. 논두렁에서 무리 싸움이 붙은걸 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바로 그 당서기가 왔었다. 그때는 벌써 “퍽”소리가 난 뒤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어찌 살인 장본인이란 말인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여자의 남편은 부들부들 떨면서 밤새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 못 이루고 있었다.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수사에 지칠 데로 지친 법정에서는 일단 이 “자수 범”을 감옥에 가두었다.
왜 그랬어요? 어딘지 짐작이 가는 여자는 면회를 가서 당 서기에게 물었다.
뭘? 내가 친 거 맞아요. 명숙 씨는 빨리 집에나 돌아가라니까요. 당서기 라는 게 이런 큰 일 하나 누르지 못 했으니…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모시고 찌든 가난 속에서 동생들 키우며 왕복 20 리 통학 길로 근근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마을의 농사일에 정착을 한 나 젊은 당 서기였다. 남 다른 리더 심과 포옹력으로 무슨 일에서나 마을 사람들을 위해 앞장서 뛰었고 앞장서 책임을 맡아가는 촌민들의 믿음직한 희망이었다.
당 서기님, 미안해요!
여자는 속으로 울었다.
90년대, 난데없는 한국 친척 찾는 바람이 이 시골에도 불어왔다. 그것은 민족의 뿌리와 줄기를 찾아 소리쳐 부르는 메아리 같은 것이었고 부를 찾아 헤매는 메마른 가슴에 불어 닥친 봄 바람 이였으며 봄비 같은 것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이 남자―웅걸은 연노하신 어머니를 통해 한국 친척과 연계가 되었다. 소문이 퍼지며 이 늦깎이 면직 당한 당 서기 총각은 금방 장가를 들었다. 그때는 이미 남방으로 도망가 은둔 생활을 하던 명숙의 남편이 당지 경찰에 붙들려 도망을 치다 목숨을 버린 교통사고가 난 뒤였다.
친척방문으로 한번 한국에 갔다 온 남자는 친인척 초청장을 두 장이나 띠여 왔다. 한 장은 친척 중에서 제일 못사는 고모네 집에 주고 다른 한 장은 명숙에게 주었다. 웅걸이보다 대여섯 살 많은 명숙 이는 웅걸이 선배로 같이 먼 통학 길로 고등학업을 마치고 마을에서 시집을 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사고를 치고 사망까지 하였지만 늙은 시부모를 차마 버리고 떠날 수가 없어 끝가지 모시고 있는 터였다.
웅걸의 아내와 처갓집 식구들은 펄펄 뛰었다. 지금 한국 초청장 한 장에 돈이 얼만데 무료로 그저 주다니! 그때 벌써 한국 돈으로 천 만 원이 오고 가는 때가 아닌가? 참 당서기직에서 해직 된지도 언젠데 아직도 뭐 자신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구세주 노릇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나?
영원히 이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웅걸 씨를 위해선 뭐나 다 할 거예요. 한국으로 떠나는 명숙은 가슴이 아프도록 감격하였다.
밖에서 저녁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저 후덕 지근한 바람일 뿐이다. 마음과 머리를 식혀 줄 바람은 없다. 산 너머로 지는 빨간 노을이 꼴깍 금방 자취를 감출 태세다. 집안의 정적은 시간을 모르는 듯하다. 누워 있는 여자는 이 세상의 종말은 어떤 것일까 눈을 감고 상상 해본다.
서울의 하늘은 낯설기만 하였다. 글자는 알아도 뜻을 알 수 없는 서울의 간판들, 일터에서의 한국말 아닌 한국식 전문 용어들, 어디서 갑자기 조상의 뿌리를 찾는다고 이역만리에서 “거지 떼”처럼 몰려 온 이 시골 떼기 들을 바라보는 일부 원주민들의 싸늘한 눈길은 항상 그들의 이마에 치욕과 고충의 낙인을 찍어 놓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장시간의 제일 고된 노동과 궂은 노동을 골라가며 한 푼이라도 더 차곡차곡 모아 고향의 집으로 보내는 것보다 더 큰 쾌락이 없었다. 하루 둬 번 쉬는 날이면 턱 밑까지 쌓여진 마음의 무게를 풀려고 가끔은 포장마차에 마주앉아 둘이서 같이 찬술을 기울였다. 그들은 고등학업을 마치고도 대학에 갈 수 없었던 학창시절의 아픔을 얘기하였고 숙박비 때문에 볼을 도려내는 것 같은 중국 대 동북의 맵짠 눈보라 속에서의 머나먼 통학 길을 얘기 했으며 헐떡이던 가난을 얘기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가을 논벌의 참사를 얘기했다.
웅걸 씨같이 좋은 사람 세상에 드문 것 같아요.
명숙은 눈앞의 이 남자를 바라보며 진심을 말했다. 작은 키, 작은 얼굴, 작은 눈, 어느 하나 눈에 번듯하게 안겨 오는 것이 없는 이 남자, 그 큰 체통과 넓은 흉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언제나 얼굴에 가득 담긴 사람 좋은 웃음은 얼마나 옆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가. 오직 저 남자가 원한다면 여자는 무엇이던 기꺼이 하리라 혼자 생각 하고 또 하였다.
그날도 그들 둘은 오랜만에 또다시 포장마차에 마주 앉았다. 술이 좀 거나해진 명숙은 그날따라 마음이 한껏 울적해 졌다. 죽은 남편의 일이 생각났고 방법 없이 자기의 뒷다리를 붙잡고 있는 불쌍한 시 부모님들이 생각났으며 하루 열두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매일 무거운 다리를 겨우 끌고 집으로 돌아와도 옆에 따뜻한 말 한마디 같이 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잠자리에 쓰러져야 하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독한 인생이 슬펐다. 말없이 명숙을 마주한 웅걸은 어떻게 하면 명숙의 기분을 풀어 줄까 눈 섶 관골 깊이 들어 간 작은 눈을 쪼프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마침 깍두기가 상에 올라왔다. 큼직큼직한 깍두기를 입에 한 입 넣고 씹던 웅걸이 말을 걸었다.
한국에 무 타령 이라는 게 있는데 기가 차게 잘 엮었거든.
어떻게요?
들어봐―
처녀에는 총각무/부끄럽다 홍당무/여덟 아홉 열무/입 맞췄나 쪽 무/이쪽저쪽 양다리 무/방귀 뀌여 뽕밭 무…
아유, 그만해요. 뭐요 방귀 뀌여 뽕밭 무? 와, 한국 사람들 언어 수완 정말 대단해요
명숙은 드디어 마음을 풀며 싱긋 웃었다. 유머와 위트에 능한 웅걸이 좋았다. 그들은 예의 있고 아름다운 한국어와 세종대왕에 대해 얘기했다. 한참 얘기에 열을 올리던 웅걸이 오랫동안 어머님께 전화를 안했다며 전화카드를 꺼내더니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웅걸아 이제 그만 며늘께 돈 부쳐라 다 가지고 떠났다 그 왜 처녀 때 좋아 했다던…
띄염띄염 들려오는 늙은 어머님의 목소리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며 지금 여자는 물끄러미 천장에 동공을 고정 시켰다. 어느 창문 틈사이로 끼어 들어온 잔광이 천장의 한 귀퉁이에 희미한 빛의 그림자를 만들어 놓는다.
그때 그 전화를 받은 후 급히 수속을 밟고 경황없이 집에 갔다 온 웅걸의 얼굴, 그때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푹 꺾어져 있는 머리의 작은 얼굴은 더 조막만 해졌고 맥없이 받혀진 두 다리는 밀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벼단 도적잡기 사고로 당 서기를 해직 당하고 감옥에 수감 되었다 나왔을 때도 얼굴이 이렇게 까지 죽어있진 않았었다.
명숙은 집에 술상을 차려놓고 웅걸을 불렀다. 두 잔도 못 마셨는데 웅걸은 쓰러졌다. 그리고 어린애 마냥 울었다. 체구는 작아도 언제나 마을사람들에게 든든한 기둥같이 보였던 남자가 마누라의 배신이란 큰 산을 넘어오지 못해 절망하고 있었다. 명숙은 베개를 내리려다 웅걸의 머리와 몸을 당겨 검은 색인지 붉은 색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을 자기 무릎에 눕혔다. 웅걸은 에미 품에 안긴 순한 양 마냥 그의 무릎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눈가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명숙은 가슴이 뜨거워 나고 목구멍이 뜨거워 났다. 여자는 뭉글뭉글한 따뜻한 가슴으로 남자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뜨거운 입술을 그에 볼에 대였다. 그리고 같이 울었다.
당신이 말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의 아픔도 내가 다 안아 줄게요!
명숙은 웅걸의 엄마도 되어주고 싶었고 누님도 되어 주고 싶었으며 그리고 또…
질척질척 늦은 봄비가 정원을 적시는데 울안에 갇혀 있던 오월의 빨간 장미가 담장 너머로 덩굴을 타고 넘으며 방긋방긋 선을 보이고 있었다. 숨겨진 정열과 아름다움을 귀 띰 해주는 것일까
연말의 어느 날, 두 집은 조촐한 살림을 한데 모았다. 남달리 부지런하고 억척스레 돈을 모았던 그들은 두 사람의 돈을 합쳐 일억이라는 전셋집까지 얻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에서 잔뼈를 굵혀 온 그들은 하나는 현장에서 최고의 보수로, 하나는 식당일에서 최고의 보수를 받으며 차츰차츰 정들어 가는 서울 생활을 반짝반짝 윤택이 돌게 하였다. 웅걸은 친척의 도움으로 한국 국민이 되였고 명숙도 영주권을 가지게 되었다. 늦었어도 알뜰살뜰 다시 한 번 잘 살아보려는 정열과 웅심은 옆 사람들을 무색케 하였다. 그때 밖에서는 한창 2012년 12월이 이지구의 최악의 날 이라는, 소행선과 지구가 충돌 한다는 공포의 소식이 사람들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성경“요한계시록”, 이집터의“마야” 달력이야기, “검은 사슴”의 예언. 중국의 주역 “역술”에서도 이 시각을 제시 했었단다.
당신 안 무서워?
같이 죽을 사람이 있는데 뭘요.
세상이 뒤집어 진데도 두려울게 없을 것 같았다.
행복이여,/ 그대를 위하여 칼날 위를 걷는 자 그 얼마인가
눈에 보이는 그대는/ 깜박이는 불꽃, 발밑에 눌리어 깨여지는 얼음이여라…
누구의 시가 이 시간에 갑자기 생각이 나지?
천장에 비췄던 잔광이 점점 몸체를 줄인다. 텔레비전의 뉴스에선 아까부터 무엇인가 대단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듯싶은데 소음 상태라 소리도 없거니와 형광 막에 나오는 자막의 글들에 눈길을 주기도 싫다.
그때, 그때 왜 그랬을까? 왜왜?
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어느 날 이었다. 여름 우기를 맞으며 며칠째 일을 못나가고 있던 웅걸이가 명숙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고등학교 때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선릉에 좋은 행사 하나가 있다는데 같이 가보자는 것이었다. 마침 주말이라 명숙은 웅걸을 따라 나섰다.
강단에 열기 띤 사람의 강연, 강연 실을 꽉 채운 호기심에 들 떤 사람들, 세상엔 그렇게 땀 흘리며 고달픈 노동을 안 해도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성 있는 열망들, 이상한 패러다임에 회의장은 들끓고 있었다. 명실은 어쩐지 현기증이 나려 하였다. 그녀는 웅걸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러나 웅걸의 발은 뿌리 내린 듯 움직일 염을 안했다.
그 친구는 벌써 통장에 엄청 돈이 들어 왔던데.
말을 하고 있는 웅걸의 눈빛은 반짝반짝하고 있었다. 그런가? 명숙은 역시 웅걸을 믿고 싶었다.
어느 날 명숙은 현장 일을 그만 둔 웅걸이가 몸담고 있다는 사무 청사에 들렸다. 수많은 운동 의료기기가 있었고 매장 운영에 들어가려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탁 마케팅에 계약을 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돈이 이 한곳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고 믿고 있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명숙은 방금 지하철에서 만난 고향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웅길 씨 하던 일 그만두고 무슨 사업 한다 메? 전번에 선릉역에서 봤는데 양복에 넥타이, 가죽 손가방, 그런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딱 그런 부류 사람들 같았어. 설마 아니겠지? 우리 그 옛 당 서기야 얼마나 식견 있고 똑똑한 사람인데.
명숙은 그 친구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의 의미가 온 머리를 내려쳤다. 설마 설마하며 지금까지 방관하고 있었는데 이게 정말인가?
그만둬요. 빨리 집에 가요!
아 참,이 반년동안 내 통장에 연 수입 30~40%씩 꼭꼭 들어오는 거 봤잖아. 나도 이제 저 기기들을 사서 가계 하나 꾸려야겠어. 사람이 인생에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평등하게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잖아 어떤 사람은 아쉬운 데로 옆에 지나가는 기회를 모르고 잡지 않는 거라오! 명숙인 아무 걱정 말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자기가 그처럼 믿는 남자였건만 명숙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녀는 또다시 웅걸이가 현장 일을 그만두기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현장 안전선반 대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웅걸은 이십여 매트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아주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허리를 다쳐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고 별 영향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태로 회복이 되었는데도 퇴원 전에 산재 보험으로 보상금 천만 원이 나왔다. 중국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한국의 우월한 노동제도에 그들은 감격하였다. 산재보험료가 통장으로 들어오던 날, 명숙이가 웅걸을 보려 병원에 갔을 때 남자는 병원 외곽 복도에 쭈크리고 앉아 누군가와 신나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돈은 곧바로 그의 “사업” 투자 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당시에 명숙은 화가 났지만 당신이 “생명 위험”과 바꿔 온 돈인데 자기가 간섭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말았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선엔 지금까지 찜찜한 그 무엇이 계속 막연한 딜레마 속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창살로 끼어들어 천장 한 조박을 밝히고 있던 희미한 빛은 완전 사라지고 컴컴한 방안엔 텔레비전이 아직도 번득번득 빛을 뿌리며 소리를 입에 문 벙어리 손시늉 마냥 화면을 언듯언듯 바꾸고 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이 플레이어 되고 있는 것일까? 억지로 일어나 불을 켜고 텔레비전을 꺼야겠다고 생각 했지만 가라앉는 기운은 손 까딱 할 힘조차 주지 않았다.
바로 몇 달 전이였다. 고향에 일이 생겨 명숙이 중국에 갔다 오던 날이었다. 공항에 마중 나왔던 웅걸은 공항버스에서 같이 내려 엉뚱한 방향의 집으로 안내를 하였다. 어리둥절해 자신을 쳐다보는 명숙 이를 마주하고 남자는 시물시물 웃기만 했다. 그리곤 천연스레 해석 이란 걸 하였다.
청천벽력 이었다. 전세 값 일억 원을 빼내어 늘 외우던 운동의료기기 가계를 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제야 명숙은 전셋집 계약을 할 때 명숙이가 근무중이여서 웅걸이 혼자 명의로 계약을 해도 된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남자는 혼자서도 계약금을 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그만 한 월세 집에 들었다. 여자는 무릎이 폴싹 내려앉는 감을 느끼며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어쩌면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쩌면 이럴 수가! 당신 웅걸 씨 맞아요?!
하늘같이 믿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용납하리라 다짐했던 마음속에는 억누를 길 없는 반란이 꿈틀거렸다. 여자는 짐을 쌀까 생각하였다. 그러면 투자한 돈은? 그리고 또, 그 옛날 남편대신 죄명을 쓰고 감옥에 가고 천만 원어치의 초청장도 무료로 해 준일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여자는 머리 뚜껑을 열고 밖으로 치솟는 불길을 이를 악물며 억누르고 있었다.
웅걸이 말처럼 그 찬란한 내일이 정말 올 수도 있는지? 그렇게 불길을 삭인 후 여자는 모든 것을 꾹꾹 누르고 남자와 함께 열심히 가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뜻밖에 투자한 돈이 꼬박꼬박 고금리로 나왔다. 그들은 통장의 모든 돈을 위탁하였다. 의료운동기기를 이용하는 고객들도 발길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래, 내일은 올 것이다.
그런지 겨우 몇 달이 지났다. 만물의 생령이 부활하는 4월의 어느 날, 그들은 죽음과도 같은 청천벽력의 소식을 들었다.
캄캄한 방안엔 9시 뉴스가 한창이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얼마 전부터 이미 익숙해진 몇 글자들이 초점 잃은 그의 시야를 파고든다.
해피글로벌, 8조원 피해액, 24만4000여건의 피해사건…
…아아, 날아가는 고무풍선
그 때문에 울부짖는 어린이의 마음을
아무도 달래지 못 하네…
아까 머릿속에 떠 올랐 던 시 구절의 마지막 부분이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핏방울이 되어 그의 가슴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난했던 고향, 늙은 부모님들의 송장 같은 얼굴이 자꾸 텔레비전의 화면을 덮치고 있다.
2017, 5월 15일
서울에서
첫댓글 아침일찍 카페에 들려서 제일 먼저 읽은 글,
우리 조선족들의 일각을 선명하게 그려놓은듯한 화면을 보는 듯 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동녘에서 해가 뜨는 내일이 와야 하는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