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만나고 싶어요
우리 본당에서는 예비자 피정시간에 강의를 듣는 시간도 있지만 그룹으로 나누어서 토의한 것을 모조지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게 하여 따로이 발표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룹별로 발표를 하느라 벽에 붙여 놓은 포스터 중에서 유독 내 눈에 뜨인 것이 바로 위의 글이다. 어찌나 가슴에 명료하게 다가오는지, 이리도 선명하게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한 글이 있을까.
어쩌면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요' 라고 쓴 예비자의 마음은 글과는 달리 그리 절실하지 않았을른지 모른다. 피정 중에 '왜 가톨릭에 오게 되었느냐'는 주제로 그룹토의를 하다가 보니 그냥 하느님을 보고싶어서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지 몰라도 예비자들의 마음 안에 절실하게 하느님을 뵙고 싶은 소망이 왜 없었겠는가. 8개 조의 포스터 중에 유독 이 글에 내 시선을 멈추고 바라보노라니 예리한 칼에 베인 듯 가슴이 아려온다. 아니 아리다 못해 싸르르하게 금방이라도 피가 스며나올 것만 같은 상처를 감싸 안으며 다시 되뇌어본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요' 라고. 이래서 예비자들과 함께 교리를 인도하는 교리교사가 된 것을 무척 감사하게 여길 수밖에.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이번 피정 중에 내게 할당된 "기도의 삶" 이라 제목을 부친 강의를 하면서도 실상 내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기는 한건지. 부끄러운 마음뿐이었지만 이렇게 예비자들이 담백하게 자기 심정을 토로하는 나눔시간에 참여하면서 고참 신자들도 예비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알 수 없는 허전함은 어디서 왔던 걸까?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를 돌리면서도 가슴은 이리도 허전한 걸.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무얼하고 있는 걸까? 풀리지 않는 화두를 붙들고 기나긴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간 스님도 나처럼 답답하고 허전할까? 인생의 깊은 신비를 붙들고 미망에 허우적거리는 중생의 번뇌를 캐보려 애를 쓰는 스님의 면벽수행도 딱도하다.
참으로 오랫동안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멍애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온 나날이 나를 우울하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적나라하게 내 상처가 들어난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를 돌리기도 하고 조배실에 앉아 있어도 도무지 무얼 찾으려 애를 쓰는지 잊어버리고 말던 내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요' 라는 예비자의 간절한 소망에 마음이 이리도 송두리체 흔들리는가.
모년 모월 -떨어진 장미의 붉은 꽃잎에 비가 내리고 또 내린다
"..멈추어라, 너 어디로 가느냐? 하늘은 네 안에 있다./하느님을 다른 데서 찾는다면,/영원히 그분을 만나지 못하리라." "케루빔의 방랑자"에 나오는 아름다운 시를 떠올린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다음,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갈릴래아 사람 여러분, 왜 하늘을 쳐다보고 있소?" 망연하게 예수님이 사라진 하늘만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엄하게 꾸짖는 두 천사의 말을 읽다가 언뜻 안젤루스 실레시우스의 시가 생각났었다. 하늘은 다른 곳 아닌 바로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뜻이겠지. 참 오리게네스 교부의 말씀, "Coelum es et in coelum ibis - 그대가 하늘이고 그대가 하늘로 간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옮겨볼까. "Portando Deum coeli, coelum sumus - 하늘의 하느님을 모시고 있으면 우리가 하늘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하늘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영광 중의 그리스도를 보게 될 하늘길을 걷고 있다.
바로 며칠 전 내가 맡은 기도회 사도행전 읽기에서 예수님 승천 대목에서 내가 장황하게 설명한 이야기다. 내가 잘났다고 온갖 자료를 뒤적여 찾아내 강의랍시고 부산을 떨었던 것이 이렇다. 이렇게 유식을 떨었지만 실상은 가슴에 담아질 턱이 없다. 꼭 무언가 남에게 가르쳐 줘야지 하는 교만이 내 속에 똘똘 뭉쳐 있으니 진리를 빌려다가 말하고 있어도 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거였어. 머리로 알아낸 것은 사실 제대로 깨달은 게 아닌 게야. 이번에서야 아~ 그래 이거 였어 하고 깨닫는 게 아니겠어. 8개 팀이 순서대로 입교의 변과 인생사, 새로이 출발하는 각오를 털어놓느라 진지한 분위기의 피정장소에서 나 홀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요' 포스터만 내내 보고 있었다.
내가 하늘이라는데 어찌 먼 곳을 맴돌고 헤매었던가. 진리는 늘 가까이 있는데 말이야.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샘 솟듯이 솟아오르는 마음을 주체 못하고 일어선다. 조배실 문을 열고 좌정한다. 깊은 정적 속에 홀로 그분을 바라본다. 한참을 머물러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길게 그리고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 쉬고 내 쉬어본다. 아무래도 기도의 시작은 호흡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차츰 마음이 가라앉고 지그시 바라보는 성광 속의 주님이 명료하게 다가온다.
늘 이랬다. 성령께 내 몸과 마음을 맡기고 그 사랑 안에 잠겨야 하는 걸. 머리로 애를 쓰니 제대로 기도가 될 턱이 있던가. 기도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진데. 내가 이태껏 드린 것은 기도가 아니라 정리라는 생각이 든다. 정리는 기도가 아니겠지. 정리하는 것을 멈추고 내면에 있는 하느님, 가슴속의 하느님을 찾는 것이 진정한 기도인 것일테니. 그렇기에 세례자 요한도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하였겠지.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바로 생각하기를 멈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커져야 한다는 것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일게다. 나는 늘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빈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버려야 하는 걸 깨닫지 못했으니. 머리로 생각을 하면서 빈 마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을. 이렇듯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가슴이 커지게 될 때 나는 빈 마음을 가지게 되겠지. 이 때 내 내면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갑자기 내 마음이 환해지고 알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온다. 참말씀이란 이렇게 간단하고 명료한 걸 머리로 알아내려고 애를 쓰고 온갖 책을 뒤적이며 공리공론에 마음을 빼앗겼던 내 모습이 갑자기 우수깡스럽기 짝이 없다. 가슴으로 다가가는 나를 그분께서 무척 좋아하실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누가 예비자 피정에 종일 뒷자리에 앉아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큰 깨닳음을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해야지.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요" 이 말보다 절실한 기도가 어디 있을까?
주일 저녁 8시, 파견미사와 더불어 예비자 피정이 끝났다. 토요일 오후 4시부터 시작한 피정이라 무척 피로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껏 아파트 사이로 난 소로지만 성당에 오고갈 때마다 묵주기도를 하는 내게는 그 어느 경치 좋은 길 보다 정이 들고 아끼는 길이다. 비가 그친 담장에 장미가 사열하듯 꽃잎을 저녁 바람에 나붓기고 있다. 내밀한 화원, 내 은밀한 세계다. 어제 오늘 내린 비에 붉은 꽃잎이 정갈한 길 위에 어지러이 떨어져 있다. 세상 그 어느 빛깔에 비할 바 없는 선홍의 장미가 스며들어 도로마저 붉게 선홍의 꽃물에 물들어가는 이 아름다움, 성모님을 떼고 생각할 수 없는 장미에 대한 추억으로 가슴까지 아리다.
하느님이 어디 숨었느냐는 질문에 하시딤의 설화는 "사람 마음 속에" 라고 대답한다. 사람 마음 속에 하느님이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이 계신 그곳이 바로 하늘이다. 산들 불어오는 상쾌한 초여름의 바람 속에서 내가 지금 하늘길을 걷고 있는 걸까?
하느님 오른 편에 내가, 내 아내는 하느님 왼손을 잡고 산책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겠나. 피곤에 축 처져 있던 내 마음 깊이서 올라오는 상큼한 향기를 맡은 듯 해서 참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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