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붉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
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
영원한 이별을 베꼈다
오늘 아침 국 속의 붉은 혁명의 역사는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든 고요를 베낀 밤하늘
밤하늘을 베낀
<허수경의 ‘베낀’ 전문>
‘베끼다’의 사전적 의미는 ‘그대로 옮겨 쓰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문학 비평 용어로 미메시스(mimesis)가 모방 혹은 현실의 재현을 의미한다고 할 때,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것은 바로 무엇인가를 ‘베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변의 사물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서로가 베낀 결과물로 현존하고 있다고 인식한 것이리라.
시인의 인식은 급기야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고 진술하면서, 누군가와의 이별까지도 역시 베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날밤의 과음으로 인한 숙취를 해결하기 위해 끓인 듯한 ‘오늘 아침 국 속에서 붉은 혁명의 역사는 /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자연의 사물들은 서로 베끼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왜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급기야 꿈을 베끼는 것을 통해서, ‘너를 베끼던 사랑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내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을 토로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어찌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문학 특히 시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해석을 담아내고 있다고 여겨진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