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이란 부제의 이 책은 한자(漢字)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세상의 물건들을 본따서 그림을 그리듯이 만들어 사용했다는 상형문자(象形文字)로서 한자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다. 그에 기초해서 사물을 추상적으로 묘사하고 이미 있는 글자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 것이 바로 한자의 역사이고, 또한 한자의 성립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처럼 자모의 결합으로 문자를 완성하는 표음문자(表音文字)와는 달리, 한자는 글자마다 각각의 의미를 담아내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인 것이다. 물론 현대 중국어는 한자에 기초해 있지만, 그것을 간략한 형태로 축약한 이른바 ‘간체자(簡體字)’로 바뀌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발행되는 신문과 책들은 대부분 한자와 한글이 섞여있었다. 당시에는 한자와 한문을 익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그러한 형식의 출판물에 대해서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당시 학생들에게 신문의 사설을 베끼는 일이 문장 공부와 한자를 익히는데 도움이 된다고 적극 권장되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1980년대 후반에 새롭게 창간된 신문이 ‘한글 전용’을 내세우고 발간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없이,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는 것을 당연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지금은 전공 관련 일부의 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출판물이 한글을 전용으로 발행되고 있다. 그렇게 일상에서 멀어진 한자는 지식과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한자를 얼마나 많이 아는가를 측정하여 급수를 정하는 시험제도가 시행되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말에는 한자로 조합된 ‘한자어’의 비중이 높은 편이며, 비록 한글로 표기되었더라도 한자를 알면 해당 단어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한자를 많이 알면 어휘력과 문장 이해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그렇기에 한자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나 자신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국문과와 국어교육과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한문 공부를 권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외국어처럼 한자 역시 각자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여 공부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자에 대해 관심이 있고, 상형문자로 시작된 한자의 형성 과정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전하는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원시 한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문자로 정착되고, 각각의 글자에 담긴 의미를 통해 그것을 활용했던 이들의 세계관은 물론 당대의 생활상도 추론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문자의 형성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시 한자의 탄생’을 다룬 1부에서는 ‘바위와 도기에 새긴 글자’라는 제목을 통해서, 원시 한자의 출현과 탄생 배경 그리고 찬생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흔히 한자의 출현을 창힐이라는 인물이 새의 발자국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도상이 상형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그림으로부터 그것을 단순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 현전하는 자료들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자의 어원에는 사건이나 사물의 핵심을 포악한 정적인 풍경’이 내재해있다는 전제에서, 저자는 원시 상형문자로부터 시작된 한자의 형상과 의미를 꼼꼼하게 따지고 있다. 종이가 없던 시절 그림이나 글자를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은 돌이나 동물의 뼈 혹은 거북의 등껍질에 세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물의 뼈나 거북 등껍질에 새겨진 글자를 갑골문이라고 하면서, 2부에서는 ‘뼈에 새긴 글자 ?한자의 완성 갑골문’이라는 제목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갑골문을 소개하고 있다. 갑골문은 소수의 지배계급들에게 소용되던 기록 수단이었으며, 그로부터 형성된 문자를 통해 당시의 사회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중국 고대의 하나라 유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갑골문을 통하여 그것을 이은 상나라의 역사를 어느 정도 재구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청동기 역시 당대 지배계급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거대한 청동기를 만들어 그 속에 지배계급의 기록을 새긴 것이 바로 금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동기에 새긴 글자 ?고대 국가의 한자 금문’이라는 제목의 3부에서는, 상나라를 이은 주나라가 등장하면서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던 세계관이 변화앴다고 주장한다. 이전까지 모든 자연 현상을 해석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주나라에 들어서 ‘인격신으로서의 하늘(天)’의 의미를 정립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이로써 문자를 통한 ‘중국의 정체성이 시작’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주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할거하던 군웅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춘추(春秋)시대가 막을 열었고, 유가(儒家)의 비조인 공자로 상징되는 권력자 이외의 ‘문자를 사용하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춘추시대가 지나고 약육강식의 혼란상이 지배하던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문자의 사용이나 의미도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통일제국이었던 진나라의 등장은 문자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제국의 한자 ?전서와 예서’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잇다. 문자보다는 그림에 가까웠던 갑골문과 금문은 이제 보다 간략화된 기호의 형태로 정리되어 전서와 예서가 차례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보다 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글씨를 쓰는 일이 예술로 승화되면서 ‘서예(書藝)’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돌과 바위’에서 대나무에 새긴 ‘죽간(竹簡)’이나 비단에 쓰는 ‘백서(帛書)’를 거쳐 마침내 종이가 발명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글을 쓸 수 있는 매체가 새롭게 출현하면서 기록의 방식이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엮어 책으로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문자의 역사에서 가장 늦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단어나 글자의 의미를 설명하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후한 시대 허신에 의해 만들어진 <설문해자>가 바로 ‘최초의 한자 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6부에서는 사전이 등장할 정도로 이제 지식인들에게 보편화된 한자의 사용이 <설문해자>의 편찬으로 이어졌음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자의 출현과 보편화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자가 지닌 원리들에 대해서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차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