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離相寂滅分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白佛言. 希有 世尊.
이시 수보리 문설시경 심해의취 체루비읍 이백불언 희유 세존
佛說 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 如是之經.
불설 여시심심경전 아종석래 소득혜안 미증득문 여시지경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 是人成就第一 希有功德.
세존 약부유인 득문시경 신심청정 즉생실상 당지 시인성취제일 희유공덕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세존 시실상자 즉시비상 시고 여래설명실상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세존 아금득문여시경전 신해수지 부족위난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약당래세 후오백세 기유중생 득문시경 신해수지 시인 즉위제일희유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하이고 차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소이자하 아상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즉시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시비상 하이고 이일체제상 즉명제불
佛告. 須菩提 如是如是.
불고 수보리 여시여시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 不怖 不畏 當知 是人 甚爲希有.
약부유인 득문시경 불경 불포 불외 당지 시인 심위희유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하이고 수보리 여래설제일바라밀 즉비제일바라밀 시명제일바라밀
須菩提 忍辱波羅蜜如來說 非忍辱波羅蜜.
수보리 인욕바라밀여래설 비인욕바라밀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하이고 수보리 여아석위가리왕 할절신체 아어이시 무아상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嗔恨.
하이고 아어왕석절절지해시 약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응생진한.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수보리 우념과거어오백세 작인욕선인 어이소세 무아상 무인상
無衆生相 無壽者相
무중생상 무수자상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若心有住 卽爲非住. 是故 佛說 菩薩 心不應住色布施.
약심유주 즉위비주 시고 불설 보살 심불응주색보시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無實 無虛.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무실 무허.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如人入闇 卽無所見.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여인입암 즉무소견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약보살 심불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 善男子 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 선남자 선여인 능어차경 수지독송
卽爲如來 以佛智慧 悉知是人
즉위여래 이불지혜 실지시인
悉見是人.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
실견시인 개득성취 무량무변공덕
-離相寂滅分 제 14
그때에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깊이 그 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어. 부처님께서 이렇게 심히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으로도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은 얻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을 내리니, 마땅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곧 이 상이
아님이니, 이 까닭에 여래께서 실상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알고 받아지니기는 족히 어렵지 않거니와 만약 오는 세상 후 오백세에 그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서 믿어 알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함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
자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닥이 무엇인가 하면 아상은 곧 아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이 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래지 앟고 겁내지 앟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 되느니라. 무슨까닭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님일세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가 설하되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어찌한 까
닭인가.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일 때에 나는 그 때에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일 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으며 응당 성내고 원망함을 내었으리라.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니 그때의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으며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일체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지니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낼지니라. 만약 마음에 머뭄이 있으면 곧 머뭄 아님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마땅히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의 중생이라고 설함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살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자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법인 이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서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매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눈도 있고 햇빛도 밝게 비쳐서 여러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느니라.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아서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하리라."
제십사 이상적멸분 (第十四 離相寂滅分)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납니다.
보살은 마땅히 형상에 매달리지 말고
보시를 하며 다음 세상에 능히
이 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면 곧 여래가
불지혜로 알아 보나니 많은 공덕을
성취하게 되리라
모든 "상"을 떠나 조용하다.
"상"을 떠난 그 자리가 바로 적멸의 자리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상" 즉 "세상의 욕심"을 깨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욕바라밀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욕됨을 참고 성내지 않는 마음은
자신의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들을
"부처"로 보라는 것이다.
네가지 상을 비롯하여 일체의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맑아지면 곧 실상을 깨닫게 되리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의 "상"을 여의게 되면
좋다거나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일체모든 "시비분별"이 쉽게된다.
이 세상의 욕심에 대해 잡지도
버리려 하지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고요한 적멸이 된다는 가르침이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것(시비분별)을
더 붙잡아(집착) 두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을 내것(아집)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원인은 "나"라는 아상이 있기때문이다.
내가 잘나고 최고라는 마음이 있으니
"내것"을 더 늘리고 싶고
내것을 늘리다 보니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이 일체의 괴로움의 원인이된다.
그래서 "나"라는 욕심만 버린다면
일체의 괴로움은 소멸된다는 뜻이다.
"실상을 깨닫는다" 이 말은
실상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깨닫는 뜻이 아니라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실상" 이라는 것이다.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고.
단지 방편으로 말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불성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는다면
답이 없다.
불성은 허공이나 거울과 같다고
표현해 줄 수는 있으나 어떤 모양이나
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불성이란 일체의 "상"을 버렸을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모양 없는 모양을 어찌 모양으로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실상을 깨달았을때 희유한 공덕을
성취 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도 방편일 뿐이다.
실상을 깨달아 상을 여의었다면
"공덕"이라는 것도 방편일뿐.
별도로 공덕이 있을리 없다는 것이다.
일체의 상을 여읜 마당에 어찌
공덕이라는 상을 붙힐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무량한 공덕"이라고 하지 않고
"희유한 공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는.?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라는 것이다.
왜 비교하고 분별하면서 상에 얽매이는가
이 "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적멸"이며
"부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인 말은
"마음을 비우라" 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일체 모든 "애착"과 "집착"을
비우라는 것이다.
집착이 없으면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아 자유롭게된다.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도 내것 네것을
나누는 분별도 사라진다.
집착이 없으면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상"이 생겨날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집착없음"에 있다.
즉 마음을 내되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
이것이 불교 수행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