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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
1. 스키타이(Scythia)
가. 스키타이
스키타이족은 이란계의 기마민족으로 오늘날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 살았던 종족으로 헤로도토스(Herodot)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스콜로토이(Skolotoi)에서 유래한다. 스키타이(Scythian), 스쿠드라(Skudra), 소그디아(Sogdian), 사카(Saka), 스구디아라고도 한다.
나. 활동
⑴ 활동 시기
BC 86세기에서 AD 4세기까지
⑵ 활동 영역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6세기(기원전600년부터)경부터 동쪽 서쪽을 오가는 기마 민족으로서 동부 유럽에 건너와서 지금의 남부 러시아에 제국을 건설하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서쪽으로 도나우 강, 동쪽으로 돈 강, 북쪽으로 드네프르 강과 부그 강의 상당한 지역까지 뻗쳐 있었다. 전성기 시대에는 카스피 해 동부와 캅카스, 서시베리아 남부와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퍼져 살았다.
⑶ 전쟁술
스키타이 기마전사들은 철제무기와 훌륭한 마상궁술을 가지고 있었고 최초로 바지를 입음으로써 기동력을 높였고, 용병으로 싸우기도 하였다.
⑷ 교역
스키타이인들은 동서를 오가며 무역을 하였고 특히 그리스와 교역하고 현재의 몽골 초원을 지나 동아시아와도 교역한 초원길을 최초로 이용한 유목민족이었다.
⑸ 문화
그리스와 교역하면서 가축, 모피, 갑옷, 금속제품, 장신구, 꿀, 황금, 청동기, 견직물, 올리브유, 포도주, 직물 등 다양한 물품이 오고 갔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스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리스의 금세공 기법이 스키타이에서 더욱 발전되어 스키타이식 왕관과 금 공예품들을 제작하였다. 스키타이는 동쪽 지역에서는 사카라고도 불렸는데 지금의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쿠르간묘(Issyk kurgan)에 황금 인간(The golden man)이라고 불리우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스키타이인이 쓰는 검인 Gorytos는 경로라는 이름으로 흉노에게서 사용되었다. 스키타이는 동아시아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의 고대 공예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⑹ 정성기
BC 647년 메데 정복하고 BC 514년 Persia Darius 대왕의 70만 대군(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제압했으며 BC 4세기경 전성기를 맞이했다
⑺ 사멸
수백 년간 활약하던 스키타이는 BC 3세기경 사르마트(Sarmathis)에 패해 쇠락하기 시작했고, 이후 크림반도 등지에서 농경생활로 전환해 부족을 유지했으나 로마에 흡수되면서 기원후 4세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BC 100년경 스키티이와 파르티아(안식국. 安息國)
2. 흉노(匈奴) 가. 흉노 흉노(匈奴, 병음: Xiongnu 슝누)는 기원전 4세기부터 5세기(大夏, 혁련발발(赫連勃勃). 407~431)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이다. 고고학계와 사학계에선 흉노족은 몽골계가 아닌 튀르크계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며 일각에서는 흉노와 훈족(the Huns)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명확하게 증명된 것은 없다. 나. 활동 ⑴ 활동 시기 BC 4세기부터 AD 5세기 5호16국의 시대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운 대하(大夏. 407~431)까지 ⑵ 활동 ① 역사적 출현 흉노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BC 318년 흉노는 전국7웅 중 초(楚)를 제외한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齊)의 5개국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6국의 참패로 끝났다. ② 조(趙)의 흉노 격파 조의 효성왕(孝成王, 재위 BC 265년~BC 245년)의 시대에 장군(將軍) 이목(李牧)이 대(代)의 안문(雁門)에서 흉노를 막아 싸워서 흉노 선우(單于. 흉노족의 수장)의 군을 격파하였다. ③ 진(秦)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BC 215년 장군 몽염(蒙恬)의 30만대군을 보내 융적(戎狄)인 흉노를 토벌하여 하남의 땅(오르도스 지방)을 점령하고 흉노를 축출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아 북방 기마민족들의 침공을 막았다. ⑶ 두만선우와 묵돌선우 ① 두만 선우(頭曼單于, 터키어: Tumen, Teoman, ? ~ BC 209년, 재위: BC 220년 경 ~ BC 209년) 흉노의 선우로서 역사에 첫 등장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몽골어(聖者)나 투르크어의 투멘(만인장. 勇者))과 관련이 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蒙恬)을 보내 흉노에 대비하게 했으나 BC 210년 진시황이 죽고, 몽염도 태자 부소(嬴扶蘇. ?~BC 210) 함께 사사당하자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된다. ② 묵돌선우(冒頓單于) 흉노의 두만선우(頭曼單于)은 여러 차례 중국을 공격하다 화평을 맺었는데, 두만은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기 직전에 황하(黃河)를 넘어서 화평의 걸림돌이 되는 자신의 태자인 묵돌(冒頓)을 인질로서 서쪽의 월지국(月氏國)에 보낸후 월지를 공격하여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아들을 후게자로 묵돌을 죽이려 했으나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태자에게 주게 되어 있는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의 대장으로 삼았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이라는 뜻의 명적(鳴鏑)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의 기병을 훈련시켰고 기원전 209년 결국 사냥터에서 아버지 두만 선우를 시해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⑷ 전성기 ① 동호(東胡) 격파 BC 201년 진시황후 큰 혼란에 빠져 중국은 초한전쟁(BC 206~BC 202)이라는 내전을 치르고 있어서 진나라의 쇠퇴를 기회로 삼아 묵돌은 군사를 강화시켜 동쪽의 만주 서부지역에 위치해 있던 동호(東胡)의 부족장을 죽이면서 동호를 멸망시켰다. ②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 묵돌은 천산산맥과 감숙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몰아냈으며 남쪽으로 누란(樓蘭), 백양(白羊) 하남왕을 병합하고 몽염에게 빼앗겼던 모든 땅을 되찾아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묵돌은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야(屈射), 정령(丁零) 등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켜 몽골 초원 부족들의 추장이 된다. ③ 한과 투쟁 BC 200년 흉노는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왕 신(韓王信. 후에 흉노로 도주)은 항복하였다. 태원(太原)으로 진격, 진양(晋陽)으로 나아갔다.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친정을 한 유방은 큰 눈과 추위로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많은 병사가 추위로 곤욕을 치렀다. 묵돌이 한군을 북쪽으로 유인하고자 거짓으로 물러났고,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된 유방은 진평(陳平)의 헌책에 따라 묵돌의 알지(閼氏)를 움직여 공격이 잠시 느슨해진 사이에 가까스로 달아났다. ④ 유방의 굴욕적인 화친 전한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결과 전한과 흉노는 형제 관계를 맺었으며, 유방은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4]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BC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BC 192~BC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 전한이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무렵의 영토는 동쪽으로 동호와 예맥(濊貊), 북쪽으로 예니세이 강 상류, 서쪽으로 동 투르케스탄,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 지방과 칭하이 성(靑海省)의 북부에 이르렀다. ⑸ 실크로드 장악 BC 177년,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하남 땅을 침략해 상군(上郡)을 약탈하자 한 문제(文帝. 재위 BC 180년 ~ BC 157년)는 승상 관영(灌嬰)에게 우현왕을 치게 했는데 백등산 전투 이후 한이 흉노에 대해 처음으로 손을 쓴 사례로서 서방 공략에 주력하던 묵돌 선우는 흉노측의 책임을 인정했다. 묵돌 선우는 한과의 조약을 깬 우현왕을 시켜 돈황(敦煌) 부근에 있던 월지국을 축출하게 하는 동시에, 누란(?蘭), 오손(烏孫), 호갈(呼揭) 및 서역 26국을 흉노의 지배하에 두었다. ⑹ 환관 중항열(中行說) 묵돌선우 사후 노상선우(老上單于, 재위: 기원전 174년 ~ 기원전 161년)에게 한 문제는 화친 조약에 따라 공주를 출가시켰는데 이때 공주를 수행하는 임무를 맡게 된 환관 중항열(中行說)은 흉노의 땅에 가고 싶지 않다고 수십 번이나 고사했지만 강제로 보내지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한나라에 원한이 생긴 중항열이 흉노에 붙어 노상 선우의 상담역으로서 선우가 한을 침공하도록 부추겨 한동한 한나라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⑺ 한무제의 정벌 BC 141년에 즉위한 전 무제(武帝)는 흉노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와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BC 129년부터 위청(衛靑), 공손오(公孫敖), 공손하(公孫賀), 이광(李廣) 네장군이 각각 1만명의 기병으로 흉노땅에 갔으나 공손하(公孫賀)는 흉노군을 만나지 못했고 공손오(公孫敖)는 흉노에 패하여 군사 7000명을 잃었고 이광(李廣)은 포로가 되었다거 겨우 탈출했으나 위청(衛靑)은 흉노들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용성까지 공략하여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 잡은 것이 700에 이르는 전과를 올렸다[흉노땅에서 임목으로 둘러사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을 대림(蹛林)이라고 한다]. 그후 위천은 BC 128, 127년등 모두 7차례 출정하여 전과를 올렸고 위청의 생질 약관 20세의 곽거병(霍去病)은 전후 3회(BC 121년, 제2회 BC 121년 여름, 제3회 BC 121년 가을)에 걸쳐 대활약을 하였다. 이렇게 흉노를 공격하고 황하 서쪽 지역에 처음으로 진출해 '하서사군'(장액·주천·돈황·무위)을 설치했으며, 나아가 서역(西域 : 간쑤성 및 신장 자치구 일대)을 정벌하였다. 한군이 서역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다. 한과 흉노의 전쟁으로 전한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흉노의 피해는 더 커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⑻ 흉노의 분열 BC 60년 허려권거선우(虛閭權渠單于, 재위 BC 68~ BC 60년)가 죽자 흉노에서는 선우 자리를 놓고 수십개의 부족으로 분열되어 내전이 일어났으며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는 기원전 51년 한나라의 지원을 얻었다. 한나라의 지원을 받은 호한야에 의해 흉노는 재통일되었으며 전한과 화친을 맺었고, 이는 전한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허려권거선우(虛閭權渠單于, BC 68~ BC 60) 사망 악연구제선우(握衍胊鞮單于, BC 60~ BC 58)의 반란 자살 다섯 선우의 해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 동흉노 도기선우(屠耆單于, BC 58~ BC 56) BC 56년 도기선우가 동쪽으로가 호한야선우와 패배한후 자결 호걸선우[호걸왕(呼揭王)](BC 57~ BC 56) 선우 칭호를 버리고 거리선우 추대 도기선우의 친정군 4만 기와 싸워 패배해 서북으로 도주 호한야 선우에게 투항 거리선우[거리선우(車犁單于, ? ~ ?)우욱건왕] 자립 도기선우의 친정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도기선우의 중신 도륭기에게 패배한 오자선우와 함께 서북쪽의 호걸선우에게 도주. 호걸선우와 오자선우와 선우 칭호를 버리고 거리선우를 추대. 동쪽으로 가서 호한야선우에게 투항 오자선우(烏藉單于, (BC 57~ BC 56) 도기선우의 중신 도륭기에게 패배한 오자선우와 함께 서북쪽의 호걸선우에게 도주. 우 칭호를 버리고 거리선우 추대 호한야 선우에게 투항 이릉의 아들에게 선우로 추대되어 에게 사로잡혀 참수 흉노통일 BC 56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 흉노재분열 윤진선우(閏振單于, BC 56~BC 54)[서부] 도기선우의 종제 휴순왕이 5~6백기를 거느리고 좌대저거를 쳐 죽이고 그 세력을 빼앗아 흉노의 우편(서편)에서 자립해 윤진선우라 일컬고 호한야선우의 형 질지골도후선우를 공격하다 패사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중부] 동흉노. 질지선우에 패배하고 선우정에서 쫓겨난 호한야선우가 전한에 투항 질지골도후선우(郅支骨都侯單于, BC 56~BC 3) 서흉노. BC 54 윤진선우를 죽이고 동생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를 선우정에서 쫏겨나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투항하자 일시 흉오 통일. 동생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의 비호를 받아 세력을 회복하자 서쪽에 머물면서 세력을 확장해 호한야선우의 동흉노와 전한과 맞섰으나 전한의 서역도호기도위 감연수(甘延壽)와 부기도위 진탕(陳湯)은 서흉노가 전한에서 멀리 있지만 세력을 확장하면 오손까지도 이르고 한나라에도 해가 될 것이라 황제 원제의 명령까지 사칭해 가며 한족 병사와 이민족 병사 합쳐 4만 명을 끌고 서흉노 정벌에 나서 질지선우는 부상을 입고 전사했고, 한나라의 군후가승(軍候假丞) 두훈에게 목이 잘렸다. 동흉노에 흡수되고 일부로 서부로 이동 남북분열 북흉노 후한이 건국된 시점에서는 흉노는 수십개 부족으로 다시 분열된 상태였으며 그 수도 많지 않았는데 이중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되어 오르도스 및 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거주했으며,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 89년에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은 북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북흉노의 일파는 서방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서방으로 향한 북흉노를 훈족으로 보기도 한다. 북흉노의 멸망 직후 몽골 고원에는 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다른 유목 부족들이 성립되었다. 남흉노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되어 번병(番兵) 역할을 하며 오르도스 및 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거주했으며 후한은 남흉노의 군대를 용병으로 활용하였고 선비, 오환, 강(羌) 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선우에 대해서 흉노의 여러 유력자들은 많은 불만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선우와 흉노의 유력자들 간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존재하였다. 또한 후한 말기에 오면 남흉노에게도 간섭하여 선우의 직위는 크게 실추되고 위태로워졌다. 삼국 시대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의 선우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는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흉노의 소멸 후한 말기에 오면서 남흉노는 모두 남하하여 대다수가 한족과 동화되었다. 후한의 유표는 고대 흉노 모계 조상 가운데 한나라 공주 유(劉)씨가 있었기 때문에 유(劉)씨로 창성하였다. 그의 후손 서진(西晉) 말기, 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劉淵)은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산서 일대에서 한(漢, 前趙. 304~329)을 건국하고 영가의 난(307~311)을 일으켜 서진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초토화하여 지배권을 얻었다. 흉노의 일족인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319~351)에 의해서 전조는 329년 멸망하고 후조 역시 351년에 멸망하였다. 그후 흉노족의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세운 북량(北涼. 397~439)과 철불부(鐵弗部)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운 대하(大夏. 407~431)를 끝으로 흉노는 자취를 감추었다. 다. 정치제도 ⑴ 자배자 계급 흉노의 군주는 선우(單于)라고 왕비는 연지(閼氏)이며 밑에 좌도기왕(左屠耆王)[좌현왕(左賢王)]과 우도기왕(右屠耆王)우현왕(右賢王), 좌우녹려왕(左右谷蠡王),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 등의 24개 작위가 있었다. 각 작위는 1만 ~ 수천 기의 기병을 보유했으며, 천장, 백장, 십장, 비소왕, 상, 도위, 당호, 차거 등의 부하를 거느렸다. 좌・우도기왕은 그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으며, 각기 흉노의 동쪽과 서쪽에 영지를 두었다. 대개 선우의 아들이 좌도기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좌도기왕은 곧 차기 선우로서 중국의 황태자에 해당하기도 한다. ⑵ 부자상속제 흉노의 선우는 흉노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묵돌 선우 이래 부자세습제를 통해 자리를 이어갔다. 라. 신앙 흉노의 신앙 체계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單于)는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 언어 흉노어 및 흉노인들이 사용한 문자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노인울라 16호 고분을 비롯한 흉노 유적지에서 발굴된 출토품에 흉노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바. 한민족(신라)와의관계 신라의 일부 금석문에는 흉노 출신의 김일제(金日磾)가 신라 김씨 왕실의 조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재야사학자 및 소수의 역사학자들은 신라 왕실이 흉노의 후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은 고대 신라인들이 왕가의 혈통을 미화하기 위해 중국 역사 속의 위인을 시조로 꾸며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 훈족(the Huns)의 관계 4세기부터 6세기까지 훈족(the Huns)으로 서진(西進)으로 서고트 족이 로마 영내로 침입한 후 여러 민족이 잇따라 각지로 이동하여 부족 국가를 세우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가져온 훈족을 때로 같은 민족으로 간주되기도 하나 명확하게 밝혀진 적은 없다. 3. 한반도와 일본의 초기국가 가. 한반도 ⑴ 고조선(古朝鮮)의 등장 ① 고조선(古朝鮮) 사회의 성장 ㉮ 단군신화 (檀君神話) - 위서(魏書)에 실린 단군신화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하늘 아래에 내려가 다스리기를 원해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3개를 주며 하늘 아래에 내려가 홍익인간(弘益人間,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함)하라고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妙香山이 아닌 白頭山) 마루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그곳에는 범과 곰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사람이 되기를 원해 三. 七기도(21일 동안)를 하니 환웅은 곰과 범에게 100일동안 굴속에서 햇빛을 보지 말고 마늘과 쑥만 먹고 지내라 했는데 성질이 급한 범은 뛰쳐나오고 무사히 견딘 곰은 사람이 되었으니 바로 환웅과 결혼한 웅녀(熊女)였다. 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난 단군(檀君)은 즉위하여 평양성(王儉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이라 하고 1500년간 다스리다가 기자(箕子)가 와서 왕이 되자 장당경(藏唐京)으로 도읍을 옮겨갔다가 다시 아사달(阿斯達)로 돌아가서 숨어 살다가 산신(山神)이 되어 1908세가 되었다. <2000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아사달에 도읍하여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고(高, 중국의 요나라)때 일이였다> - 단국신화(檀君神話)의 고조선(古朝鮮) 건국 기록 단국신화(檀君神話)가 나와 있는 책은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년 일연(一然, 普覺國師), 제왕운기(帝王韻紀, 1287년 이승휴(李承休)),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 1454년), 응제시주(應製詩駐, 1462년 권람((權擥)),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1476년 신숙주, 노사신등),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1년 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서거정(徐居正) 등), 신동국여지승람(1531년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신공제(申公濟) 등), 동국통감(東國通鑑, 1485년. 서거정(徐居正)등),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1615년 한백겸(韓百謙)), 동사(東事, 1667 허목(許穆. 남인))¹,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1672년 홍여하((洪汝河, 남인)), 동사강목(東史綱目, 1778년 안정복(安鼎福)), 동사(東史, 1803년 이종휘((李種徽 소론))², 아시조선(兒時朝鮮, 1927년 최남선(崔南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48년 신채호) 등이 있다. 나. 고조선의 발전 ⑴ 고조선의 성립 고조선은 아사달(阿斯達, 王儉城, 왕검성)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청동기를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고기(古記)에는 단군은 백성들에게 개수(盖首, 상투)와 변발(編髮)을 가르쳐 주었으며 단군 아들 부루(夫婁)는 중국 도산(塗山)에 가서 하나라 우(禹) 임금과 여러 제후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 고조선의 성장 고조선은 BC 3세기경 부왕(否王, 기부(箕否))과 준왕(準王, 기준(箕準)) 등이 왕위 세습이 나오고 왕 밑에 상(相), 경(卿), 대부(大夫), 대신(大臣), 장군(將軍), 박사(博士)와 같은 관직의 분화를 알 수 있으며 중국의 전국 7웅 연(燕)과 대치하였으며 고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 요하를 넘어서 난하(灤河) 또는 대능하9大凌河)를 경계로 연나라와 접했다. BC 284년경 연나라 진개(秦開)가 침입하여 요동군(遼東郡) 설치하기도 하였고 철기(명도전, 반량전, 오수전)가 유입되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 고조선 유이민 유입되어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장하였다. ② 위만조선(衛滿朝鮮) - 위만의 집권 한은 노관(盧綰)을 옛 연의 땅에 연왕(燕王)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한에 반하여 북쪽 흉노(흉노)로 망명해 버렸다(후에 살해됨). 정국이 바뀌는 동안 중국으로부터 동쪽으로 망명하여 오는 자가 더욱 많아졌는데 위만(衛滿)이 1000여명을 이끌고 망명하여 국경수비 임무를 맡다가 준왕(準王)을 내좆고 왕이 되었다(BC 194~180). 준왕(準王)은 남쪽 진국(辰國)으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다고 하고 위만조선은 진번, 임둔 등을 복속하였다. - 한나라와의 충돌 한은 흉노가 위만조선과 연결하는 경우에 받을 위협에 두려워 하였고 BC 128년 예군(濊君) 남려(南呂)가 28만 주민을 이끌고 한에 내속하자 예(濊, 압록강 중류와 동가강(佟佳江) 유역 일대)의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위만조선에 입력을 가하려 하였지만 예인의 반항으로 수년만에 중단되었다. 위만조선이 남방의 진국과 한나라의 중계무역 이익을 독점하고 위만조선과의 한과의 창해군 복립에 대한 정치적 교섭이 실패하자 조선 장수(裨王 長)를 살해하고 달아난 요동군 동부도위 섭하(涉何)를 조선군이 보복 살해하자 한무제(漢武帝, BC 141~87)가 침공하여 1년만에 왕검성 함락(BC 108)되어 우거왕(右渠王)은 살해되고 끝까지 저항하는 성기(成己)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한나라 칩입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 5만,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 왕검성 공격 공손수 전권부여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 누선장군 체포, 군대병합하여 좌장군과 조선 공격 우거(右渠王) 항복 거부 조선상 노인(路人), 상 한음(相 韓陰)(韓陶), 이계상 참(尼谿相 參), 장군 왕겹(王唊) 항복 권유, 우거 거부, 노인(路人. 도중 사망), 한도(韓陶), 왕겹 도주 항복 우거왕 살해 이계 상 참(參)이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했으니 왕검성에서 대신 성기(成己) 항거 성기 살해와 멸망 좌장군 순체가 우거 아들 장(長)과 노인 아들 최(最)을 시켜 성기 모살 교사. 조선 항복. 한사군 설치 ③ 한의 군현 -. 한사군 :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BC 108년) 현도군(玄菟郡, BC 107년) -. 진번군, 임둔군을 폐하고 낙랑군(진번 15현중 7현), 현도군(+임둔군) 관할에 둠(BC 82년) - 현도군 만주 흥경(興京) 방면으로 이동(BC 75년) - 요동 땅에서 독립된 세력을 펼치고 있던 공손씨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옛 진번땅에 대방군(帶方郡) 설치(AD 204년경) - AD 313년 고구려 15대왕 미천왕(美川王) 낙랑 축출, 백제 13대왕 근초고왕(近肖古王) 대방군 314년 축출 - 신과 후한 교체기에 낙랑 토호 왕조(王調)가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반기를 들어 6년간 자치를 쟁취했으나 새로 파견된 낙랑태수 왕준(王遵)에 의하여 평정되었다(BC 36년). 최리(崔理)는 스스로 낙랑국왕이라 칭하면서 백성을 다스렸다. ④ 고조선사회 - 8조금법에 나타난 고조선 사회 한서 지리지 연조(漢書 地理志 燕條)에 3조가 나와 있다. ㉮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 의미 ㉮ 사람의 생명과 사유재산보호 ㉯ 노비제 옹호 및 노비의 순장제도(旬葬制度M 8C 강상무덤에서 100여명 매장) ㉰ 범죄를 수치로 여김 ㉰ 가부장적 사회(霍里子高의 箜篌引, 公無渡河歌) ㉱ 여성의 정절 중요시 ㉲ 화폐사용 ㉳ 고조선사회의 변화 한사군 설치이후 법조항이 60여개로 증가하여 풍속이 각박(刻薄)해졌다. ⑵ 성읍국가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삼한(마한.진한. 변한)의 성읍국가가 있었다. 나. 일본 역사의 시작 ⑴ 구석기 시대 ⑵ 조몬시대(繩文時代) 조몬 문화(繩文文化)는 일본의 신석기시대 중 기원전 1만40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해진 현상(海進現像)이 계속되어, 일본 열도는 현재의 혼슈, 시코쿠, 규슈, 홋카이도의 네 개의 큰 섬과 수많은 작은 섬으로 분리되었다 줄무늬 토기(繩文土器)가 출현하고 수혈주거(땅을 파고 그 위에 움집을 짓는 양식)이 보급, 패총이 형성되었다. ⑶ 야요이 시대(弥生時代) 조몬시대에 후에 이어지며, 고훈시대의 전에 해당하는 약 기원전 3세기 부터 3세기 중반까지에 해당하는 시대로 특히 유래지에서 가까운 규슈 지역에 씨족 단위의 촌락을 형성하고 중국을 비롯한 대륙 지역의 문화를 일본으로 전래시켰다. 야요이 문화는 금속기의 병용(倂用)과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특징으로 하며, 곡물 축적과 관개용수 통제 등이 원인이 되어 계급이 분화하고, 각지에 사제자(司祭者)를 왕으로 한 소국가(小國家)가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