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어지는 달
8월의 열대야
창틈으로 새 들어온
달빛에 잠이 깨어
어둠을 만지다가
밝으면 더 더울 것 같아
전등도 끈 채
눈 감고 있다.
사람이 너무 밝아
어두워진 세상
눈부신
손가락에 가려
달이
저만큼
멀어지고 있다.
# 어쩔 수가 없다
얼마나 지워야
이 굴레를 벗어나나
바람 불고 비 내리면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삼월에
때 아닌 눈이 내린다.
질퍽한 눈길을
밤을 새며 걸어도
가슴에 들지 못하고
언저리를 서성이는
희망이라는 화두話頭
오를수록 가파른 언덕
젖은 등
쓰러지지 않을 만큼
적당히 바람에 편승하고
주름과 함께 웃음도
섞어주면 좋으련만
고개를 들면
머리에 피가 몰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요즘 풍경
산뜻하게 씻긴 산색이
중후한 모습으로 다가서고,
한풀 기가 꺾인 소나무 점잖은 보색이
청신한 기운을 더해가는 계절에
지각한 폭설이 내렸다.
세상이 흐려질 때마다
잃어버린 어머니의 노래를
숲에서 찾곤 했는데
때 아닌 폭설에
노래가 묻혀 버렸다.
답답한 도시
숨통처럼 비어 있던 여백에
짐승 같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아침을 불러주던 새마저
날아가 버려 아득한데
어쩌자고 계절이 이리 횡설수설인지
누가 닮을까 두렵다.
# 산사의 밤
침묵조차 침묵할 것처럼
조용한 산사
잎사귀를 울리는
빗소리가
소음을 삼켜
숲이 더 고요하다.
아득한 어둠 속
별 이야기
묻어 있는 바람이
살며시 다가와서
낯익은 얼굴로
그리움을 쏟아 놓는다.
천지가 어둠 속에
숨죽인 이 밤
그리운 이름
때 묻지 않은
소리를 보는
안경 하나 갖고 싶다.
# 시골학교 동창회
시골학교 동창회
땀에 전 일상 잠시 벗어 두고
억지로라도 여유로운 하루
북, 꽹과리, 징소리에 어우러져
흥겨운 춤사위가 펼쳐지고
구석구석 차일치고
솥 걸고 엉겨 앉아
정겨운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다.
서울에서 온 사장도
대구에서 온 회장도
이 마당에선
한낱 허울이다.
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은 그 이야기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
구수한 사투리에 하루해가 짧다.
# 비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서
여름내 내 근처에 머물던
먼지가 젖고
더운 일상의 늪 속에
숨죽여온 영혼이
깨어나고 있다.
보이지 않던
산이 산으로 보이고
강이 강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모처럼 자각 속에서 듣는
소낙비 소리에
막혀 있던
견고한 고막이 열려
구구구 울음 우는
새 소리가 들린다.
사람 소리가 들린다.
# 어느 오후
부시게 빛나지도
그렇다고 아주 흐리지도 않게
일상이 그윽하게 내려앉은
하오
낡은 리어카에
폐지를 가득 싣고
힘겹게 비탈을 오르시는
등 굽은 할아버지와
무거운 가방으로
어깨가 처진
하교 길
학생들의 군상
더운 창을 통해
한참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멀리
테니스장에서
공을 치는 모습이
딴 세상 그림 같다.
# 그곳에 가고 싶다
긴 여름
잡목 속에 묻혀 있던
정정한 소나무가
향을 피우는
만추의 산곡
저기 저 구릉 어디쯤에
살진 노루가
마른 풀 냄새를
맡고 있을 것 같다
시끄러운 세상 벗어두고
잠시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
# 누가 감히 흉내 낼 수 있으랴
인간이 대단ㅎ다 하지만
때 되면 잎 피고 꽃 피는 이치 하나도
어림없다.
작은 연록색의 잎 하나
피워내지 못한다.
바람 불어도
남의 옷 입지 않고
제 가락으로 빛나는 자랑
누가 감히 흉내 낼 수 있으랴,
꾀 모르는
순연한 자연이
내 무딘 감성을
숨 막히게 한다
# 여물어가는 가을
금오산 정상을 바라보니
가을이 여물어 있다.
다갈색 높은 산봉 위로
파아란 하늘이 열려 있는 게
이종무의 가을 유화를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서릿바람에 흔들리는
산비알 밭둑의 억새가
늦가을의 눈目인 양
반짝반짝 빛나는 위로
푸드덕 산꿩이 난다.
# 초겨울 풍경
바람 한 점 없는 초겨울 아침
앙상하게 벗어버린 나무들이
꼿꼿하게 얼어붙었다.
빈손이라도 흔들어 보여야 사는 세상에서
그림처럼 숨죽이고 있는 정경이
묘지처럼 적막하다
얼음장 같은 하늘도
화사하던 햇살도
오늘은 묵묵부답 입이 붙어버렸다.
아득해서 밖에 나서니
굳은 포도 위로 촉촉이 젖은 염원이
발길에 챈다
(1993. 11.30)
# 산촌 풍경
메밀밭에 우묵우묵 돋아난 잡풀에 묻혀
메밀이 안 보인다
간혹 보이는 것도 키만 자란 야윈 놈뿐
대궁이 붉은 야무진 놈은
추억 속에나 있는가
달밤에 소금을 뿌린 듯한
가산可山의 정취가 아슴아슴 멀고
자가용 크락션 소리에 놀란 개구리가
세월보다 높은 둑을 넘는다.
# 시골 막차
다 떠나가고
술 취한 사람만 남아
간신히 시간 추스려 탄
시골 길 막차
차창 밖으로 몰려드는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
저만큼 아득히
산 아래 외딴집
불빛이
가물가물 졸고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낯선 바람이 스쳐간다
# 산이 좋다
겨울이 겨울 같지 않다고 웃던 사람들
오늘은 그 웃음만큼 겨울을 앓고 있다
계절을 잊고 살던 나무는
실없이 더운 도시보다 산이 좋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을 입고
비 내리면 내리는 대로 비에 젖는 자유
그 속에서 키가 크는
산의 마음 산의 얼굴
하산한 그 때 그 산 소년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 초등학교 동창회
불혹의 능선에서
다시 잡아보는 손이 낯설지 않았다.
순결한 우정 앞에서
부시던 돈이, 자리가 숨을 죽이고
흙 묻은 사투리와 검정 운동화가
뜨겁게 부활했다.
우정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내가 나에 취하여 나를 잊었다
아, 그리운 그 시절
그리운 사람
무거운 껍데기 벗고
그 목소리 그 얼굴로 다시 앉고 싶다.
# 강나루
밝은 햇살 아래
흰 구름 떠가고
연초록 물드는 강둑 따라
근심 없는 미루나무
하늘에 닿아 있는
강정나루
수많은 사연들과
구수한 인정
실어 나르던 나룻배
술 익는 강마을 밀밭
노고지리 우짖던 갈 숲은
목월木月 따라 가버렸는가
목매기송아지가
봄을 부르던
둑길 위로
무성한 잡풀이 남아
할아버지의 붉은 흙을
지키고 있다
# 아들만 보이는 어머니 눈
비 오는 버스 정류장에서
우산을 두고 학교 간 아들 오길 기다리네
자신 몸 비 맞는 줄 모르고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네
학생들이 무더기로 오고 가지만
어머니 눈엔 보일 리 없네
자가용도 버스도 보일 리 없네
오지 않는 아들만 있네
(1996)
# 안경이 문제다
내가 할아버지 안경 쓰면 내가 어둡고
할아버지가 내 안경 쓰면 할아버지가 어둡다
세상이 본시 다른 게 아니건만
안경에 따라 이리 밝고 어둡나니
세상의 밝고 어둔 게 다 안경 탓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두워 보이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당신의 안경이
문제다.
# 시대의 역설
이곳에 오니 산비알에 붉은 흙이 흘러내리고 물풀 우거진 봇도랑에 참붕어와 버들붕어가 살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외딴집 초가 굴뚝에서 몽실몽실 연기도 피어나고 희미한 고가선 위로 강남 제비도 날고 있다.
욕망이 질주하는 시대에 살아 있는 역설이다.
# 어머니, 돌아가고 싶어요
어머니
돌아가고 싶어요
떠나온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곳에는 포근한 인정이 산다더니
낯선 바람만 불어요
이곳까지 올 힘은 있었지만
이곳을 다시 떠나갈 힘은 없다하시는 아버지
골 깊은 주름살 위로
더 마른 태풍이 몰아치기 전에
어머니
떠나온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옛정에 발목 잡혀 못 떠나신다면
혼자라도 그 길로 돌아가고 싶어요
지금 그곳에도 바람 불지만
입술 타는 바람 아니라 젖은 바람이어요
같은 바람이라도 젖은 바람이 편해요
어머니
마른 바람을 벗어나고 싶어요
*
# 모를 때가 좋다
모를 때가 아름답다
알고 보면 눈 감고 싶다
그렇다고 눈을 감아버리면
한 발짝도 나설 수가 없으니
비라도 내리면 그걸 핑계 삼아
하루 종일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면서
꿈속에서나마 한 사십 년 거슬러 올라가
미루나무 푸른 강마을
첨벙첨벙 물장구치며 벌거숭이로 멱 감고 싶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주제도 모르고 벗어버리고 싶다니
너무 많은 부끄러움에
부끄러움마저 무디어져버린 걸까
한갓 무화과 잎새로 부끄러움을 가려버린
아담과 이브가 부럽다.
(1992. 3)
# 일요일이 좋다
일요일엔 옷을 벗을 수 있어서 좋다
무엇에서고 벗어나는 일은 즐겁다
주일 내내 묶여 있다가 훌훌 벗고 지낼 수 있다는 건
이 시대의 축복이다
텁텁한 땀 냄새와 끈적이는 눈치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
모르는 아내는 어른의 체통을 말하지만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벗어나고 싶다
답답한 정장 벗어버리고
간소복 차림이고 싶다
# 이유가 있다.
희망이 없을 것 같은데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은데
머리를 숙이고
황금을 캐려는 사람들
살아 있는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 절이라도 하고 싶다
달리기라면 꼴찌만 하던 딸애가 가을 운동회 손님 찾기경주에서 손 잡아 달려 준 아즘마 덕분에 3등을 했다고 자랑이다. 손목에다 찍어 준 3이라는 스탬프印을 지워지지 않게 테이프로 붙여두고 싶단다. 얼굴도 모르는 그 아즘마를 찾아 절이라도 하고 싶단다.
직장에 출근하느라 가서 응원도 못했는데 다 잊고 저리 좋아하는 걸 보니
오늘은 내가 딸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다
(1991. 1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