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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통치형태 | 정치 | 경제 | 사회・문화 |
1920년대 | 문화통치 | 보통경찰제, 문관총독임명 공약, 민족분열 정치 | 산미증식계획 회사령 철폐 | 민족신무창간 허용, 교육기회 확대 |
가 배경
민족독립운동의 활성화로 인한 무단통치에 대한 비판・반성 및 국제여론의 압력
나. 실시목적
소수의 친일분자를 민족 분열 유도하고 궁극적으로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다. 통치 방식의 변화 양상
⑴ 헌병경찰제→보통경찰제
⑵ 조선인에게 언론 통제완화 및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일부 허용 :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발행
⑶ 보통교육 기회 확대로 일본인과 동일한 교육 연한 적용
⑷ 명목상 참정권 확대(중추원 확대)
⑸ 문관 출신 총독 임명 공약
⑹ 교사 칼 불패용(不佩用)
라. 문화통치의 실상
⑴ 경찰서와 경찰 수 증가
⑵ 치안지법 시행
⑶ 신문에 대한 검열 강화로 기사 삭제 및 정간
⑷ 교육 기회 확대 약속은 초등・실업 교육에 치중
⑸ 문관 총독 임명규정(조선총독 6명 모두 육・해군대장 출신) 공약 미 이행
마. 실제 : 허구와 기만에 의한 한민족분열책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 지배정책
일본은 3·1운동에서 조선인의 항일의지를 직접 목격하고 이전과 같은 무단통치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3·1운동 이후 새로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새로운 조선지배정책으로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이라는 기만적인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나섰다. 사이토 총독은 ① 관제의 개정으로 총독무관제 철폐(문관 출신 총독의 임명 가능) 및 보도경찰제도 실시, ② 조선인 관리 임용과 대우 개선 도모, ③ 언론·집회·출판 등을 고려하여 민의의 창달 도모, ④ 교육·산업·교통·경찰·위생·사회 등의 행정을 배려하여 국민생활의 안정과 복리 도모, ⑤ 지방자치 시행 목적으로 조사연구 착수, ⑥ 조선의 문화와 관습 존중 등을 내세워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시키려 했다. 이러한 문화정치의 표방에 따라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신문의 발행이 허용되고, 단체설립도 허가되었다. 그러나 문화정치는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한 것으로 일본은 이후 1945년까지 단 1차례도 문관을 조선총독에 임명하지 않았으며, 시정상의 첫째 강령은 치안유지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위해 1920년 경찰관서의 수를 1919년의 736개소에서 2,746개소로 3.6배 증가시켰고, 경찰관은 6,387명에서 2만 134명으로 3.2배나 증가시켜 탄압과 감시를 강화했다. 이와 함께 조선에 치안유지법을 실시하여 혹독한 감시와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문화정치의 본질은 사이토 총독이 민족운동에 대한 대응책으로 새로 채택한 '정치선전의 강화', '친일세력의 육성·보호·이용', '참정권 문제와 지방제도의 개편', '계층분단에 따른 분할통치' 등 4대정책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특히 친일파의 양성은 사이토 총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① 조선인 관리를 재조사해서 일본에 절대 충성을 다하는 자로 만듦으로써 관리를 강화한다. ② 신명을 바칠 핵심적 친일인물을 골라 귀족·양반·부호·실업가·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친일단체를 만들게 한다. ③ 각종 종교단체도 중앙집권화해서 그 최고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두어 어용화시킨다. ④ 조선문제 해결의 사활은 친일인물을 많이 얻는 데 있으므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일인물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⑤ 양반·유생 가운데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주는 대가로 이들을 선전과 민정염탐에 이용한다. ⑥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쟁의·소작쟁의를 통해서 노동자·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일본자본을 도입해 연계를 맺게 하며 매판화시켜 일본측으로 끌어들인다. ⑦ 농민을 통제·조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를 만들고, 그들에게 국유림을 불하해주는 한편 입회권(수목채취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이처럼 문화정치는 반일민족운동의 앙양에 대비해 종래의 노골적인 무력지배를 철회하고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조선인 상층계급의 일부를 매수하고 동화정책을 한층 강력히 추진하며 조선 지배에 지장이 없는 약간의 출판물·결사를 허용한 것으로, 보다 교묘하고 교활한 민족분열정책의 위장에 불과했다. 이러한 기만적인 문화정치 아래 민족지도자들이 친일파로 변신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2. 산미증산계획(1920~1934)
가. 의의
일제가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1920∼1934년 실시한 농업정책으로 토지개량사업(관개개선・지목변경・개간・간척)과 농사개량사업(우량품종보급・시비증대·・종법개선)에 의한 미곡증산을 통하여 일본의 식량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려는 의도로 입안된 것으로, 시행과 중단이 반복되었다.
나. 과정
기간 | 내용 | 성과 |
1차 산미증식계획(1920~1925) | 1920년에 15년 계획으로 총공사비 1억 6800만원을 들여 43만 정보의 경지에 사업을 시행(22만 5천정보의 관개개선, 11만 2500정보의 지목변경 및 9만정보 개간)하여 900만 석을 증수하고, 이중 441만 2천석은 조선에서 소비하고 458만 8천석을 일본으로 이출(移出)하려는 것으로 수립되었으나 실적이 매우 부진하자 1926년에 계획이 수정되었다. | 1925년까지의 사업달성률이 61%(준공면적 기준)에 불과했으며, 연간 미곡생산량도 1917~19년 평균 1,390만 석에서 1923~25년 평균 1,439만 석으로 4% 증가하는 데 그쳤다. |
2차 산미증식갱신계획(1926~1934) | 1926년에 12년 계획으로 총공사비 3억 325만원을 들여 총 35만정보의 토지를 개량(18만 5천정보의 관개개선, 9만정보의 지목변경, 7만 5천정보의 개간)하여 약 822만석의 쌀을 증산하려는 계획으로 수정되었으나 1934년에 그 계획이 중단되었다. | 실적으로는 토지개량사업에 있어서 1926~37년 누계의 달성률이 51%(준공면적기준)로 여전히 저조했고 , 농사개량사업의 실적은 상대적으로 양호했다. 미곡생산량은 1932~34년 평균 1,709만 석으로 증대되었다. 이 계획의 특징은 산미증식계획에 비해 정부알선 저리자금의 공급을 늘리고 금리수준을 인하했으며, 측량・설계・자금알선・공사감독 등을 대행하는 기관(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개량부,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을 설치・운영하고 농사개량을 위한 별도의 정부알선 저리자금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
3차 조선증미계획(1940~1945) | 1940년에 수립 | 전시기의 자재난과 인력난으로 이 시기의 증산실적은 거의 없었다. |
다. 특징
⑴ 다목적의 대규모사업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⑵ 조합의 설립과 운영에 대지주층(특히 저수확지소유자)의 의향이 관철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⑶ 사업비가 고율이었다는 점이다.
⑷ 기채(起債) 규모가 커지고 이에 따라 조합비부담이 과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 중단
산미증식계획은 1934년 세계적인 대공황에 휩쓸려간 일본이 한국의 쌀을 수입하는 것은 공황을 촉진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바. 결과
⑴ 조선농민의 식량부족과 경제적 파탄 초래(유랑민 및 화전민 만주이주)
⑵ 일본은 증산량 목표는 실패했어도 수탈목표(식량난 해결, 저미가정책으로 인한 안정 유지 및 국제수지 악화방지로 자본주의 발달)는 달성
⑶ 민족세력중 신흥지주 일부를 일본편에 서게함
사. 결어
산미증식계획은 경제수탈의 일부로서 이 과정 중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이 일부 이루어졌지만 한국인들은 개인당 연간 쌀소비량이 1920년대 약 7두에서 4두로 줄었으며 일본은 1석 2두를 소비하였다. 산미중산계획으로 인해 자작농이 소작농 몰락하고 경제구조의 피행이 심회되고 1920년이후 소작쟁의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Ⅱ. 1920년대의 민족운동
1. 민족 실력양성 운동
가. 실력양성운동
⑴ 배경
문화통치와 회사령 철폐로 총독부 허용 범위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기미독립운동이후 국내 우익세력들은 일본으로부터 즉각적인 독립이 어려우므로 한말의 실력양성운동을 계승하여 일제와 타협하면서 실력을 양성하자는 부류와 일제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면서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려는 두 부류로 나뉘어 졌다.
⑵ 민족개조론과 자치론
실력양성론자들은 우리 민족의 좋지 않은 민족성을 개조하여 민족사업을 키우고 근대 ntjrn적인 시민으로 다시 캐터날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지방행정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⑶ 활동
최남선(崔南善)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참여.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1925, 1927). 역사를 통하여 본 조선인(1928), |
이광수(李光洙) | 민족개존론(1922), 민족적 경륜(1924), |
김성수(金性洙) | 경성방직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 1919. 10) 설립하여 취체역(取締役). 1920년 4월 동아일보(東亞日報) 창간 |
나. 전개
⑴ 1923년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
① 배경
제1차 세계대전동안 일본의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미츠이, 미츠비시 등 일본의 대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한일간 무역관세의 철폐 움직임이 있었고 국내기업은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② 전개
물산장려운동은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상통하는 것으로 1920년 조만식이 평양에서 조직한 평양물산장려회를 비롯하여 1923년 1월 21일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조직되어 자급자족, 국산품애용, 소비절약, 금주・금연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③ 활동
물산장려회는 “입자! 조선인이 짠 것을, 먹자! 조선인이 만든 것을. 쓰자! 조선인의 손으로 된 것을”이라는 구호아래 일제를 배격하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운동을 평양・서울에서 시작하여 전국 각지로 번져 갔다. 자작지급회(자작회, 학생계), 청년회, 부인회, 토산애용부인회(토산장려회), 소년단 등이 호응하여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④ 결과
물산장려운동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주지 못했다.
⑤ 한계
수요증대를 해소할 생산시설의 확충이 미흡했고 국산품 가격의 상승으로 상인・자본가・지주 들에게 이윤이 돌아간다고 비판과 사회주의(급진주의)계열의 반대가 있었다.
⑵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
① 배경
기미독립운동이후 교육열이 높아져 교육 확대 및 보통교육이나 기술교육이 아닌 고등교육의 필요성이 인식되었다.
② 전개
1920년 조선교육회를 중심으로 1922년 11월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고 이승훈(李昇薰), 조만식(曺晩植), 김성수, 윤치호, 한규설, 이상설, 백남운, 한용운, 허헌, 유진태(兪鎭泰)등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결성하고 1923년 3월 30일에는 한규설(韓圭卨), 이상재(李商在) 등 91명이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결성과 함께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아래 민립대학설립을 위한모금운동을 전개했다.
③ 일제의 감시와 탄압, 전국적인 가뭄(旱魃) 및 수해 등으로 모금 활동이 저조했고 일본이 대학설입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1924년 서울에 관립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여 극소수의 한국인을 입학시킴으로써 고등교육열을 무마하여 실패했다.
⑶ 문명퇴치 운동
① 배경
일제의 우민화정책으로 한국인의 문맹률(文盲率, illiteracy rate)이 증가하자 기미독립운동 이후 언론계를 중심으로 문맹퇴치(文盲 退治)와 농촌계몽(農村啓蒙) 운동을 병행하여 전개되었다.
② 전개
⒜ 야학운동
1920년대 전반에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우리말 교육으로 민족・항일의식을 고취했으며 일제는 1면1교주의(一面一敎主義)를 표방하여 야학을 철폐했다.
⒝ 문자보급운동
조선일보는 1929~1934년까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표어를 내걸고 전개햇으며 한글교재를 배부했다.
⒞ 브나로드(V narod, 민중속으로) 운동
동아일보는 1931년 7월부터 1935년 6월 일제 조선총독부의 금압조치로 중단될 때까지 브나로드(V narod, 민중속으로) 운동을 전개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미신 타파, 구습 제거, 근검・절약 등을 추구하는 농촌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다.
⑷ 민족기업의 성장
1920년 회사령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되자 경성방직회사(1919년 김성수), 부산 백산상회(안제), 평양메리야스공장, 평양고무신공장 공신양말(이진순), 삼공양말(손창윤), 평양 정창고무공업사(최규봉) 등 민족기업이 등장하였다. 정창고무공업사 공장장 이병두(李丙斗)는 고무신을 개발하여 환영받았다.
2. 학생운동
가. 6.10 만세운동
사회주의 계열은 순종(李坧)이 사망하자 1926년 6월 10일 순종 인산일(因山日)에 만세시위 재현하고자 했다. 학생들과 사회주의 운동 계열이 각각 3·1 운동 때와 같은 거족적 시위를 준비하였으나 사회주의계열의 기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학생운동단체가 주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운동은 대체로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첫째 계열은 노총계(勞總系)로, 사회주의자 권오설(權五卨)을 중심으로 추진되다가 중국지폐위조사건(中國紙幣僞造事件)과 개벽지압수사건(開闢誌押收事件) 등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연류자가 붙잡힘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둘째 계열은 전문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社稷洞系)이다. 1926년 4월 26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이 세검정(洗劍亭)으로 춘계야유회를 가던 중, 순종 승하의 비보를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5월 20일 40여 명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 박하균(朴河鈞)의 하숙집에 모여 순종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먼저 준비책임자로 이병립(李炳立)·이병호(李炳鎬)·이천진(李天鎭)·박두종(朴斗鍾) 등을 선출하고, 자금은 박하균·박두종 등이 맡도록 하였다. 6월 8일 이선호(李先鎬)·이병립·박두종·박하균 등이 서대문 솔밭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 30매를 만들고, 다음날 김종찬(金鍾讚) 하숙방에서 이병립이 “2천만동포의 원수를 구축(驅逐)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하였다.셋째 계열은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通洞系)이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이 순종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5월 29일 통동의 김재문 하숙방에서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민족대표 김성수(金性洙)·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였다.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박두종 외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독립만세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6.10 만세운동에서도 좌우협동이 이루어져 민족협동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나. 광주학생운동
1929년 11월 3일부터 전개된 학생운동으로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광주중학생 3학년 후쿠다 슈조(福田修三)・다나카 히데노리(田中秀憲)・스에요시 카츠미(末吉克己) 등이 광주여고보 3학년 여학생 박기옥(朴己玉), 이금자, 이광춘등을 희롱하자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朴準埰)가 일본인 학생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어 일본인 학생을 혼내준 사건에서 비롯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만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했고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에서 경찰, 학교, 언론 등이 편파적 태도를 취하자 학생들의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식민교육 반대하는 운동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신간회가 후원(변호사 파견 등)했으며 전국 각 학교 동맹휴학하거나 지원금 모금하고 지원단을 파견했다. 신간 광주학생운동의 홍보를 위해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일제는 '민중대회'를 빌미로 신간회 간부중 좌파측 인사들을 검거됐다(민중대회사건). 항일 학생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 날은 원래 학생의 날로 불렸지만 지난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했다.
왼쪽 이광춘 오른쪽 박기옥 박준채
3. 사회운동
가. 신간회
⑴ 성립 및 구성1927년 2월 15일 언론계대표 신석우, 안재홍, 이상재, 천도교대표 권동진, 불교대표 한용운, 공산당대표 한위건 등 비타협주의적 우익대표와 사회주의대표 등 28명이 이상재를 회장, 홍명희를 부회장으로 하여 결성
⑵성격
1920년대 후반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성한 반일통일전선조직으로 중앙조직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우세했고 비회조직에서는 사회주의세력이 우세한 조선총독부가 묵인한 합법운동단체
⑶ 창립시 강령(1927년 1월 19일)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⑷ 복대표대회(復代表大會)와 지도부의 개편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정기대회를 개최할 수 없자 인접지회가 합동으로 대표를 선출하여 정기대회를 대신하는 복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신간회강령및 규약을 채택했다(1929년 6월). 지회에서는 ① 회장제의 중앙집행위원장제로의 개편, ② 지방연합기관 설치, ③ 행동강령 제정, ④ 기관지 발행, ⑤ 단체가입제의 실현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고, 그결과 1929년 6월 28일 각 지역에서 선발된 34명 가운데 27명의 복대표가 참가한 복대표대회가 개최되어 ①항의 요구를 승인하여 허헌(許憲)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으며, 이전과 달리 사회주의자들이 본부 임원에 대거 진출했다. 또한 ②항의 요구도 관철되어 1929년 8월 25일 함경북도연합회, 11월 30일 평안남도연합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다른 도(道)에서도 연합기관 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일제의 집회 금지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허헌 집행부는 당시 일어난 '갑산 화전민사건', '광주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여론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대대적인 반일시위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대회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허헌 집행부의 다수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⑸ 활동
①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간 철폐
② 일본인의 조선이민 반대
③ 타협적 정치운동 배격
④ 조선인본위의 교육제도 실시
⑤ 사회과학과 사상연구의 자유보장
⑥ 식민지교육정책의 반대
⑦ 광주학생운도사건에 조사단 파견
⑹ 해소
1931년 5월 15일 두 번째 전체회의에서 해소론이 표결에 붙여져 찬성 40, 반대 3, 기권 30으로 해소안 가결
나. 농민의 소작쟁의(小作爭議)
1921~1935년간에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소작권 박탈 위협, 지조(地租) 및 수리조합비의 부담구 등도 원인이 되어 농민들은 대지주를 상대로 50% 이상인 고율 소작료 인하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소작인조합, 농민조합, 농우회 등의 소작쟁의가 조직되면서 더 활발해졌고 1922년 22건에서 1930년에는 726건에 참가인원이 13,012명이었다. 규모가 큰 소작쟁의는 소작료가 80%인 1923.8~1924.9 무안 암태도(巖泰島)(현 신안군 암태면) 소작쟁의, 김제 다목농장 소작쟁의, 특히 1924~!925년 황해도 재령 동양척주식회사 북률농장(北栗農場), 1924~1925년 함남 고원(高原)의 동척농장(東拓農場) 소작쟁의, 1923~1931년 평북 용천(龍泉)의 불이흥업주식회사 서선농장(不二興業株式會社 西鮮農場)의 소작쟁의는 단순한 경제투쟁만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반항 색채도 띠게 되었다.
다. 노동자의 노동쟁의
노동자들은 근로조건의 개선을 주장하며 파업과 노동쟁의를 전개했다. 1928~1929년 원산총파업, 부산부두노동총파업이 유명하다.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shehddd이 항일적 성격을 띤 좋은 본보기였다.
라. 여성, 형평, 소년 운동
여성운동은 여성들이 자신d들의 사회적 지위를 인식하면서 신간회 자매기관이 근우회가 출범했다. 형평운동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을 철폐하고자 했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가 조직되었다. 소년운동은 천도교 소년회가 조직되어 어린이날을 제정학기관지 어린이를 발간했다.
⑶ 사회주의 사상 유입
⑷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발표후 우익진영의 타협주의세력과 비타협주의세력의 양분
⑸ 민족통일운동건설 선도 : 서울청년회계게의 사회주의자들과 조선물산장려회계의 민족주의자들의 제휴, 종교계와 교육계 및 해외귀국민족주의지들의 조선민흥회 건설
Ⅲ. 1920년대의 의열항쟁과 무장독립전쟁
1. 의열단 활동
가. 의열 항쟁의 방법
소수 인원으로 식민통치기관 파괴 및 일본고관・친일 부호 처단을 시도하고 의열 활동을 통해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鼓吹)하여 민중목동을 촉발하고자 했다.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수뇌 ·타이완총독 ·매국노 ·친일파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적하였다.
나. 의열단 활동
⑴ 결성
1919년 11월 9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서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 ·황상규(黃尙圭)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⑵ 행동강령 : ‘공약 10조’
공약 10조는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⑶ 조선혁명선언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申采浩)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文化主義) ·외교론(外交論) ·준비론(準備論)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다. 신채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民衆革命)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⑷ 초기 의거활동
① 1920년 3월 곽재기 밀양・ 1920년 5월 이성우 진영폭탄반입사건 만주로부터 폭탄을 반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재판으로 8년형을 선고받음
② 1920년 9월 박재혁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3명이 즉사하여 투옥 후 단식 투쟁을 벌이다 사망
③ 1920년 12월 최수봉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밀양경찰서에 이종암, 김상윤이 제공한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고 현장에서 검거되었음.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음.
④ 1921년 9월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전기수리공으로 잠입하여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여 인명 살상은 못 하였으나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후 용산-평양-신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함.
⑤ 1922년 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 상하이 황포탄 의거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田中)를 저격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여 이종암은 초기 도주에 성공하고 오성륜은 일본 경찰에 검거 투옥하였으나 탈옥하였다. 김익상은 역시 일본 경찰에 검거 투옥 후 사형선고 후 20년형으로 감형되고 투옥되었다가 출옥후 일본 경찰에 끌려가 암살당함.
⑥ 1923년 1월 김성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 ·효제동 의거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를 실행하였으나 폭탄의 불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 다만, 이후 남산 인근인 삼판통(현 후암동)과 금호동에서 여러 차례 총격전을 벌인 후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마지막 남은 총탄을 쏘아 자결하였음.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
⑧ 1924년 1월 김지섭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폭탄투척 사건
일본 천왕이 사는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음.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병사.
⑨ 1926년 12월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직원과 경찰 등 다수를 사살하고 자결.
대구부호암살계획,·북경밀정암살사건, 이종암사건 등 다수의 의거.
⑸ 급진좌파 변신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김창숙(金昌淑) ·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의열단은 사회주의 이론을 1926년부터 점차 수용했고 이는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창단 9주년기념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12월 베이징(北京)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갔다.
2. 무장독립전쟁
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20.6.7)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와 대한신민당의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야스카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투격대대를 쳐부수고 전과(일본 157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부상자, 아군 장교 1명, 병종 3명 및 소수의 부상)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와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야스카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투격대대를 쳐부수고 전과(일본 157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부상자, 아군 장교 1명, 병종 3명 및 소수의 부상)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 김시진・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투격대대 |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 ||
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의 국무도독부(軍武都督府) | ||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 혼춘현지부(琿春縣支部) 사령관 한경세(韓景世) | |
왕청현지부(汪淸縣支部) 사령관 /참모장으로 박승길(朴昇吉) |
나.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안개전투, 1920. 10.21~23)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이 일본군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으로 유인하여 대파한 전투.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서일(徐一) 총재 김좌진(金佐鎭) 독립군사령관 鐵驥 이범석(李範奭) 교관(서로군정서) | 일본군 제13,14사단과 혼합부대 20만 |
김시진・홍범도(洪範圖)의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
북로군정서
1911년 중광단(重光團) : 만주에서 서일(徐一) 등 대종교 신도들에 의해 조직
1919년 4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 중광단(重光團)과 유교(儒敎)신도들인 공교회(孔敎會)와 합작(合作)
1919년 8월(음력 7월)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 :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산하에 독립군 무장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 조직
1919년 8월 김좌진 군정회 책임 : 김좌진 등이 대한정의단의 군정회를 맡게 되고, 모집한 장정들의 군사훈련과 독립군편성의 과제를 수행
공교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 반발 탈퇴 :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신민회 계통의 무관들과 합작으로 공화주의단체로 되자 복군주의자들인 공교회 지도자들은 반발하여 이규(李珪), 김성극(金星極), 강수희(姜受禧) 등이 이탈,
김성극등은 복군파의 독립군단체로 대한광복단을 새로 조직,
이규, 강수희 등의 대한정의군정사를 새로 조직.
그 결과 대한정의단과 그 산하단체인 대한군정회는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신민회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한 순연한 공화주의 독립단체가 된 것이었다.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 北路軍政署)로의 명칭 변경 : 임시정부(臨時政府)는 1919년 12월에 국무원(國務院) 제205호로서, 명칭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에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를 승낙. 북간도(北間島)의 대한군정서에 대해서는 이에 대비하여 ‘대한군정서’라는 공식 명칭보다는 ‘北路軍政署’라는 별명이 더 널리 애용되고 더 유명
서일(徐一) 총재
현천묵(玄天黙) 부총재
김좌진 사령부사령관(신민회계통)
다. 간도참변(間島慘變, 庚申慘變, 1920.10.9~11.5)과 대한독립군단
간도 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 참변(庚申慘變)은 1920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청산리에서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에게 패한 일본제국군이 간도 일대에서 조선인을 학살, 겁탈, 살해한 사건이다. 조선인 1만여 명을 학살하였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채가 불태워졌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 까지 27일 동안에만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이 3,469명으로 집계되었다,
독립군부대들은 재정비목적에서 밀산부로 이동했다. 밀산부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었다.
대한독립군단
1. 북로군정서(서일, 김좌진)
2. 대한독립단(이청천)
3. 대한독립군(홍범도)
4. 간도국민회(구초선)
5. 대한신민회(김성배)
6. 의금부(이범윤)
7. 광복단(이범윤)
8. 혈성단(김국초)
9. 도독부(최명록)
10. 야단(野團) 김소래
11.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이규
12. 군비단 김홍일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관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이청천(지청천)
병력은 약 3500명
라.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흑하사변(黑河事變), 1921.6.27)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Vladimir Lenin의 적군(赤軍)의 공격으로 독립군이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청산리노령 자유시 사건. 1920년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로 대패한 일본군이 만주의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하자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露領)으로 이동하여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국경지대에 모인 독립군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병력은 약 3500명)이 탄생하여 독립군의 중진들이 총망라되어 행동통일을 결의하였다. 1921년 2월 대한독립군단은 동부시베리아 스보보드니 흑해 연안의 알렉셰프스크(자유시)일대에 주둔, 치타에 있는 레닌정권의 완충정부와 공동작전 및 상호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의 원조를 받아 장비를 보강하여 본부를 이르쿠츠크로 이동·주둔하고 지청천(池靑天)을 교장으로 하는 고려군관학교(高麗軍官學校)를 개설하여 사관을 양성하기도 하였으나 일본과 소련은 베이징(北京)에서 캄차카반도연안의 어업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일본측은 소련 영토내의 한인혁명단체 육성에 위협을 느껴 이의 취소를 요구했다. 혁명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취소를 약속하고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를 내렸으며 이에 완강히 반대하는 독립군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이 날 참변으로 전사한 독립군의 수는 자료마다 다른데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 3부의 형성
자유시 참변이후 독립군의 재정비가 이루어 졌는데 민정조직과 군정조직을 갖춘 첨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성립했다.
남만주 | 참의부(參議府) | 1923년 8월 집안현(集安縣)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鴨綠江) 연안. 만주의 지안(輯安)·푸쑹(撫松)·안투(安圖)·퉁화(通化)·류화(柳化)·창바이(長白) 지역을 관할로 하여 새로운 군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 |
정의부(正義府) | 1924년 11월 지린(吉林)에서 개최된 양기탁(梁起鐸)·지청천(池靑天)·오동진(吳東振) 등 혁명거두회의에서 길림민회·서로군정서·의성단·독립군단 등 12개 독립군단체를 통합한 것으로, 주로 통의부(統義府)를 토대로 조직된 것으로 길림성(吉林省)과 봉천성(奉天省) 중심 | |
북만주 | 신민부(新民府) | 1925년 3월 10일 자유시사변(1921년)이후 러시아로부터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닝안(寧安, 영안)에서 김좌진(金佐鎭)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 등이 주축이 되어 여러 독립군 통합 |
바. 미쓰야 협정(三矢宮松) 협정(1925.6.11)
일본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을 보내어 1925년 6월 11일 봉천성(奉天省) 정부 경무처장 우진(于珍)을 매수하여 만주 군벌 동삼성순열사(東三省巡閱使) 장쭤린(張作林)과 사이에 독립군 탄압에 대한 한인(韓人) 취체(取締ㆍ단속)에 대한 쌍방협정이 맺어져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었다.
사. 1928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국민부와 혁신의회로의 개편
1925년 미쓰야 협정이후 1920년대 후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는 통합은 전개한 결과 928년 혁신의회와 1929년 국민부로 재편되었다.
⑴ 국민부 : 북민청년총동맹, 남만청년총동맹, 재만농민동맹 등을 중심으로 한 전만족유일당조직촉성회와 정의부, 다물단, 북만조선인청년총동맹, 남만청년연맹 등이 참가하고 참의부와 신민부가 동의한 전민족유일당조직위원회가 성립하고 다시 중심세력인 정의부를 중심으로 참의부와 신민부의 일부세렧이 합하여 국민부 구성
→현일철 중심의 조선혁명당 총사령관 양서봉은 일민연합군과 교전→양서봉 전사후 고이허가 조선혁명군정부를 조직하고 한중항일동맹회결성하여 1936년까지 뢀동
⑵ 혁신의회 : 신민부의 군정파를 중심으로 성립→1930년 김좌진 중심 한족총연합→김좌진 암살후 홍진, 이청천중심의 한국독립당
참의부(1923.8) |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1928) | 조선혁명당 | |
국민부(1929) | |||
정의부(1924.11) | 조선혁명군 | ||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1928) | 한국독립당 | ||
신민부(1925.3) | 혁신의회(1928) | ||
한국독립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