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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 평론>
디카시 정립의 문학사적 의의
-정전과 위반 사이에서
김석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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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의식을 결정하고 매체가 그 인식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다카시는 하나의 운명이자, 시대가 정초한 역사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왜냐하면 디카시는 헤겔이 『역사철학』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의 운명이 하나의 사태를 필연적 결과물로 정초하게 만든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카시의 출현은 시대적 이념과 정확하게 대응되는 문화적 생산행위의 결과이다.
개인의 사소한 운동에서 사회 전체의 운동으로 급진화된다는 것은 어떤 시사적 의의를 간직한 문화운동인가? 디카시가 현재의 운동이자, 미래의 운동으로 무한 변주 가능할 때, 이는 어떤 시사적 임무를 간직한 시말운동인가? 엄밀하게 말해서 협소한 문자의 영역 안에서 새로운 예술의 형식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기존의 관행처럼 행해지는 일련의 문학예술의 장르적 범주를 벗어나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늘 동일한 형식의 감옥 안에 갇힌 채 상징의 새로운 탑을 쌓아가는 언어―형식의 실험만을 반복적으로 행할 뿐이다.
그런데 디지털시대의 이념을 고스란히 간직한 디카시만큼 극적으로 시대성과 조우하는 문예 양식은 전무후무한 것 같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디지털 기기가 점점 대중화하는 2004년은 문자의 감옥에서 탈주해 새로운 의미의 문학형식이 창조되는 신기원인데, 이는 새로운 시미학이 정립되는 전무후무한 세계사적 사건이다. 뒤샹의 샘이 미술사 전체를 전복하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듯이, 디카시는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 활소한 이미지의 상상력을 마음껏 항유할 수 있는 시의 신기원이다.
언어의 숭고함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언어의 한계지평을 가볍게 뛰어넘는 디카시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즉 이미지와 문자의 이종교배를 통해 시대의 이념과 극적으로 조우하는데, 이는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의 새로운 지평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이념의 결정적인 주체인 알고리즘의 신화, 즉 디지털 미디어는 플라톤 이래 엄격하게 구분했던 실재와 가상 사이의 한계를 모호하게 만든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가상이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만든 일종의 마나적 주술을 발휘해 가상이 메타적 실재의 역할을 하게 되는 전복을 완성시킨다.
따라서 디지털은 모든 예술적 실천이 가능한 새로운 재현양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학 전체를 지배하는 영혼의 기표이자 기의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 온 세상이 디지털에 의해 평가·실천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은 디카시가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성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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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사전에 디카―시(Dica-poem)가 명확하게 개념 규정이 되었다는 사실은 디카시운동이 일시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학을 준비하는 정전의 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문자 예술이 가지는 모든 가치 기준을 일거에 무너트리는 혁명적 사태에 다름 아니다. 디카시의 혁신성은 세상에서 가장 난해하기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이상의 「오감도」 시편의 문자적 실험성을 이미지의 역동성으로 가볍게 논파시키는데, 그 까닭은 문자가 아닌 이미지가 시말운동을 이끄는 결정적인 주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전통의 서술기법을 해체시킨 소설과 시의 실험성, 즉 의식의 흐름과 다다이즘이나 초현주의 가 여전히 문자의 범주에 구속되었다는 사실은 21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시형식인 디카시와 커다란 변별점이 존재하는데, 이는 플라톤이 이후 지배해왔던 실재와 가상 사이의 관계를 전복하는 의식의 혁명적 사태이다. 다시 말해서 디카시에 표명된 일련의 테제는 ‘이미지가 언어의 주체, 즉 문자이전의 선험적 전제이다.’
일억 화소가 넘는 초정밀 디지털카메라의 출현은 디카시의 미적 기능을 진일보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실재적으로 의식하게 만든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의 이미지의 재현기능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이미지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나타난 진실과 거짓의 관계를 표상하는 저열한 가상이 아니라, 참된 실재를 표상할 수 있거나 실재의 거짓을 가볍게 논파할 수 있는 메타성을 함의하게 된다.
이미지가 시말 전체를 지배하는 실재의 위치로 고양된다. 다시 말해서 디카시는 플라톤 이후 2500년 지배해왔던 고정관념, 즉 실재와 이미지의 주종관계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키는 것은 물론 이미지의 구상력(Einbildungskraft), 즉 이미지가 진실을 압박하는 실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취미(Geschmack)판단의 가능적 요건을 충족시키는 일련의 체계와 상상적 지평을 구상력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디카시의 이미지는 단순한 소재 역할을 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시말운동 전체를 지배하는 주체, 즉 상상적 지평 융합의 보고라 하겠다.
따라서 이미지는 말의 영혼이자, 기의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상옥 시인을 비조로 한 일련의 디카시운동은 이미지―정령을 통해 문학의 공간 전체를 새로운 형식으로 전환하는 것인데, 이는 모리스 블랑쇼가 정초한 문학의 공간, 즉 글쓰기 전체를 회의하게 만드는 혁신적인 운동이다. 어쩌면 디카시는 데리다가 문학의 행위라고 명명한 읽는 행위와 쓰는 행위 사이에 매개된 일련의 관계를 무화시키는 신기원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의 의식에 포착된 이미지는 전통적인 의미의 쓰기를 거부하는 사진을 찍는 행위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디카시의 시사적 의의는 전통적인 읽기와 쓰기 관계를 보기(Seeing)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이끌어 문학 행위 전체를 전복하는 데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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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가 새로운 시말길을 찾는다는 것은 신기에 가까운 마법을 부리거나 불가능한 운명의 서사를 만날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시가 점점 난해해진다. 읽히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시인의 내밀한 의식을 통로를 따라 아주 협소한 언어의 길을 내어놓는다. 시가 독자를 잃고 아카이브에만 쌓인 채 먼지만 풀풀 날린다. 아니 현대의 시들은 운명적으로 내밀한 언어의 길을 따라가다가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정전에의 의지가 만든 참극이다. 대저 정전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전당에 한 획을 그은 시말들은 대저 어떤 시의 위의를 간직한 숙명의 전언인가? 첫째도 새로움이고, 둘째도 새로움이다. 시대의 운명을 새로움으로 포장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인 운동, 바로 그것이 시의 전당에 놓인 숙명이 테제이다.
더 나아가 수천 년 동안 이루어진 읽고 쓰기의 문학의 행위는 새로움에 또 다른 새로움을 더해 기표와 기의를 전혀 다른 형질의 체제로 구축했는데, 그것이 위반과 정전 사이에 위치한 새로움의 의미이다. 이미 관행처럼 굳어진 정전의 패러다임에 저항하며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 만들어진 새로움은 이내 클리셰가 되어 정전에 위치하고, 다시 그 정전에 저항하는 위반의 행위들이 시의 역사로 구축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더 이상 시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된다. 정전을 지향하는 새로움은 점점 난해함을 무기로 자신만의 고유한 시말길을 내어놓지만, 더는 대중 독자에게 사랑받는 시가 되지 못한 채 전혀 읽히지 않는 의미의 기호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어쩌면 디카시가 추구한 일련의 새로움도 현대시의 난독현상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디카시는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미지가 가진 양력과 부력을 통해서 문자중심적으로 확고했던 정전의 길을 위반하면서,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전혀 다른 형식의 예술 양식이기 때문이다.
시의 죽음이 선언된 시대에 디카시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은 그나마 고무적이다. 아니 역으로 디카시는 시의 부활을 알리는 21세기의 참신한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디카시가 창작된 목적이 대중과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지향하면서 창작된 새로운 형식이기 때문이다.
문학사적 지평, 즉 문자의 감옥 안에 갇힌 채 난독증에 빠진 정전적 의지를 저항과 위반의 원칙으로 고양시키면서, 디카시는 21세기를 대표하는 시양식으로 점점 자리잡아가고 있다. 아마 전도유망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예상된다. 왜냐하면 디지털 미디어가 온 세상을 지배한 알고리즘의 신화와 함께 디카시는 그 역량을 증폭시켜 현재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급진화해 가는 것은 물론 새로운 정전의 위치를 확고하게 구축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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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고성가도 어디쯤을 떠올려본다. 우연이었다. 순간 새로운 발상이 떠오른다. 아마 이상옥 시인은 무릎을 딱 치며 스스로가 새로운 시 장르의 비조가 될 수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온 세상이 디지털, 즉 SNS 세상으로 변했고, 또 그와 정반대로 현대의 시들은 자기만의 고집스러운 방식을 고수하며 점점 읽히지 않는 문자로 점점 전락해가는 것은 물론 독자로부터 외면 받게 된다. 시의 독자는 시인이지, 대중이 아니다.
디지털 문명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현대의 시는 읽힐 수 없는 비문이자, 수많은 암호로 무장한 거대한 난수표와 같다. 독자로부터 멀어진다. 현대의 시가 운명적으로 독자를 잃고 자기만족에 빠진 채 내밀한 황홀경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왜냐하면 정전적 가치를 지향하는 시의 새로움은 이해의 한계 저 너머에 생성되는 미지의 기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바로 그것이 때문이다. 이해되지도 않고 읽히지도 않는다. 따라서 새로움을 절대적인 신념으로 생각하는 현대의 시들은 독해가 가능하지 않은 무수한 암호로 자신의 성을 구축한 이해 불가능한 언어의 제의로 몰락하게 된다.
그러한 시점에 디카시는 소통을 목적으로 이미지와 시말이 결합한 새로운 시 형식을 구축해 대중과 적극적으로 SNS상에서 상호 의식을 공유함을 물론 잃어버린 독자를 시창작자로 이끌어 대중과 함께 하는 시 장르로 그 위치를 공공이 하게 된다. 따라서 디카시의 혁신성은 기존의 시들이 매너리즘에 빠진 채 말장난에 가까운 언어유희를 감행하는 것과 달리 이미지의 진실을 추적하면서, 참된 인간학을 정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디카시는 이미지의 언어를 통해서 현대의 시들이 지향하는 정전적 가치를 허위의 운동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미지―말을 진지하게 실사구시하는 디카시의 문학 행위는 삶을 반성하는 행위이자, 너무도 거짓 조작에 익숙한 현대의 시들을 참된 언어의식으로 재무장하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진실은 이 세계의 진실을 압박·지시하는 존재의 언어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총합은 이 세계의 진실을 지시하는 사태의 총합이다. 읽기에 앞서 디카시를 보는 행위는 이 세계의 의미에 참여하는 존재의 행위이자, 그리고 봄(Seeing) 그 자체는 너와 내가 상호 공명할 수 있는 공감의 행위이다. 어쩌면 디카시의 시문학사적 잠재력은 무궁무진할지도 모른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읽기에 선행하는 보기(Seeing)의 심미적 가치는 문자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생성된 미적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초하는 숭고한 행위이다. 시는 보는 행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카오스를 헤매는 무의 공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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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가 이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덧 햇수로 20년이 되어간다. 2016년 부로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사전에 디카시의 정의가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상옥 시인을 필두로 초기 디카시 정착에 공헌한 김종회, 박우담, 최광임, 김륭, 이태관 시인 등의 노력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정전의 위치로 고양된 디카시는 이제 막 위반의 원칙에 직면한 것 같다. 장르로서의 디카시가 내적 분화를 통해서 새로운 실험을 준비하는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디지털 미디어의 환경이 급진적으로 변해가는 21세기에 디카시는 위반의 원칙으로 중무장하고 새로운 혁신을 이룩해갈 것이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에 든 청년 디카시에게 새로운 도전적 실험이 요구되는 시기에 돌입한 것 같다. 잘 준비해 21세기 전체를 공명하는 시양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물론 정전으로 우뚝 서 디카시 이후 시문학사 전체가 새롭게 해석되는 신기원이 이룩되기를 염원해 본다.
김석준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 등단
시집 『기침소리』,
평론집 『비평의 예술적 지평』 ,
『현대성과 시』 『감히 시인에게 말을 걸다』,
『무덤 속의 시말』 『의미의 곡면』,
『공감, 실재에 이르는 길』 .
2011년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