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원구식
대표시_ 풀밭에서 금지된 것들 외 4편
풀밭에서 금지된 것들
초록빛은 언제나 나를 무장 해제시킨다.
나는 애인과 함께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풀밭으로 들어선다.
아,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쾌락의 계집애들.
그 연약한 풀잎 꼭대기까지
물이 올라와 있다.
나는 기꺼이,
시간의 독재자인 물을 받아들인다.
그 속엔 풀의 독이 들어 있다.
애인은 내게 늘 엄마처럼
풀독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나는
벌거벗은 채 온몸으로
그 독을 먹고
서둘러 금지된 물질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은 말할 수 없이 단순해지고
걷잡을 수 없는 원시의 본능만이 꿈틀거린다.
물질이여, 너는 불 속에서도 뜨거워하지 않고
물속에서도 질식을 모르니
네가 바로 쾌락이로구나.
슬픔도 기쁨도 애간장을 녹이는 이별도
권력도 계급도 골 아픈 이데올로기도 없으니
내가 진정으로 당도해야 할 해방의 유물론이 바로 너로구나.
애인이여, 성스러운 바람의 매춘부여,
내게 좀 더 강한 풀독을 다오.
오늘은 원시의 본능을 타고
물질이 되고 싶구나.
만용을 부리며
나는 깊은 잠의 늪 속에 빠져든다.
지금 내가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이 여인은
일찍이 사랑의 여신이었거나
전쟁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나무 그늘 아래서
풀독을 먹은 애욕의 노예를 위해
이렇게 정성껏 귓밥을 파주며
치유의 노래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노래가
해와 달이 없던 시절 비탄의 근원이었던
태초의 상처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밤이 오고
하늘에서 별똥이 떨어져
건너편 숲의 머리가 온통 은빛으로 하얗게 빛나는 것을.
순간 시간이 정지되고, 어리석은 나는
벼락같이 깨닫는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육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물의 소중한 기호임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미 위대한 물질인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고
세상의 모든 별이 중심을 잃고
한꺼번에 내게로 쏟아진다.
아, 이제 그만!
나는 소리친다.
하루아침에 진리의 오묘함을 깨닫는 일도
이제 그만!
금지된 물질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일도
이제 그만!
경고하건대 이런 것들은 모두
풀밭에선 금지된 것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계속 소리친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그것을 매우 즐기는 구조로 되어 있다.
침대의 기원
어떤 침대는 무덤보다 오래되어서
오르페우스의 하프가 하늘로 올라가 별자리가 되기도 전에
형체도 없이 흩어져 버렸다. 다리가 짧은 난쟁이 목수들이
연장을 들고 은하수를 건너왔다.
그들은 사라진 침대의 점과 선과 면들의
정확한 위치를 연결했다.
복원이 끝나자
숙련된 시계수리공들이
때를 맞춰
침대에
4차원의 태엽을
감아 주었다.
그러자 제일 먼저 동네의 개들이
몰려나와 짖었다.
멍멍.
이것은 침대다.
그 다음, 그리스 철학자들이
틀릴까봐 매우 조심스럽게 따라 짖었다.
멍머―엉.
이것은 침―대―다.
(그리곤 신화의 시대가 끝났다)
최초의 침대는 그보다 오래 되어서
공화국에서 추방된 시인들의 후손들이 얼빠진 과장법을 익힐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대한 운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45억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지는 불덩어리로 타올랐다가, 얼음으로 뒤덮였다가,
물속에 잠겼다가, 마침내 솟구쳐 올랐다.
오, 풀이여,
나무여,
물과
화강암과
산소와
생명체여.
화석 속에
종이보다 얇게 접혀진
삼엽충이여.
암모나이트 조개여.
오, 만물의 침대인
대지여.
자명한 공간이여.
시간의 연금술사인
잠이여.
그 속에 깃든 침대의 몫이여.
죽음이여.
멸치
1
붉은 해가 수면으로 떨어지는 해변의 카페에서
애인과 함께 맥주를 마시다가
나는 발견했다,
멸치가
질량을 가졌다는 사실을.
나는 애인에게
아무 생각 없이, 그러나 매우 조심스럽게
멸치와 질량과의 관계를 유물론적으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벌새의 날개가 돋아나는 것이었다, 파랗게!
2
멸치여, 파동이여.
시간의 방부제가 첨가된
별의 찌꺼기여.
본질적으로 만만한 술안주여.
너는 약간 맛이 간
내 애인의 입술보다 짭짤하다.
심하게 녹이 슨 기타 줄을 뜯는
내 손톱보다 가늘고 길다.
한때 바다를 헤엄쳤을 부드러운 멸치여,
너는 지금 딱딱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잘게 부서져 순식간에 가루가 된다.
손바닥 위에 너를 올려놓고
후~ 하고 불어본다. 1
3
별빛이 총총히 내리는 모래밭에서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애인에게
있는 힘을 다해
멸치가 모자를 쓰지 않는 이유,
멸치가 담배를 피지 않는 이유,
멸치가 안경을 끼지 않는 이유,
멸치가 게임을 하지 않는 이유,
궁극적으로 죽은 멸치가 전화를 하지 않는 이유를
변증법적으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죽음의 키스로
내 입술을 봉인해버리는 것이었다, 파랗게!
애인이여, 모순의 질량이여.
한 잔의 맥주를 앞에 두고
나는 멸치의 기원을 생각한다.
시간 이전에 발생한 질량의 구조와
그 가속도를 생각한다. 그리고,
후~ 불면 사라질 우리의 하룻밤을 생각한다.
쾌락이여, 사랑의 이데아여.
세상의 모든 멸치들이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
은빛 별가루를
하염없이 뿌려대는 이 여름밤에
나는
황홀하게 사라진다,
질량 밖으로!
삼겹살을 뒤집는다는 것은
오늘밤도 혁명이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삼겹살을 뒤집는다.
돼지기름이 튀고,
김치가 익어가고
소주가 한 순배 돌면
불콰한 얼굴들이 돼지처럼 꿰엑꿰엑 울분을 토한다.
삼겹살의 맛은 희한하게도 뒤집는 데 있다.
정반합이 삼겹으로 쌓인 모순의 고기를
젓가락으로 뒤집는 순간
쾌락은 어느새 머리로 가 사상이 되고
열정은 가슴으로 가 젖이 되며
비애는 배로 가 울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삽겹살을 뒤집는다는 것은
세상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이 불판 위에서
정지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무나 많은 양의
이물질을 흡수한 이 고기는 불의 변형이다!
경고하건대 부디 조심하여라.
혁명의 속살과도 같은 이 고기를 뒤집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입안 가득히
불의 성질을 지닌 입자들의 흐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훼까닥 뒤집혀 버리는
도취의 순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청춘의 연금술
서정시 발명가여, 청춘의 엘도라도를 노래하자.
그곳은 가난한 시인들이
납을 먹고 황금똥을 싸는 곳.
이제 성스러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부드러운 망치로 황금똥을 두드려
돈을 만들 수 있다면
조신하지 못한 애인의 바람기도
콧노래처럼 즐거우리.
서정시 발명가여, 청춘의 엘도라도를 노래하자.
그곳은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어린 아이들이 어른보다 먼저 늙는 곳.
이제 성스러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부드러운 망치로 황금의 시간을 두드려
비단실보다 가늘고 길게 뽑을 수 있다면
철없는 서방님의 바람기도
휘파람처럼 즐거우리.
서정시 발명가여, 청춘의 성급함을 노래하자.
어린 아이들이 어른보다 먼저 늙기 전에
청춘의 성급함을 어서 노래하자.
이제 두려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청춘! 그것은 바람이 부르는 노래.
청춘! 그것은 구름이 그리는 그림.
청춘! 그것은 우리들 심장 속에서 뛰노는 이방인의 춤.
원구식 시인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함.
시집 『먼지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 외 다수.
한국시협상 수상함.
현재) 《현대시》 발행인 & 《시사사》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