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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삼위일체 하나님 2 (요14:20)
이 삼위일체 하나님 2는 요한복음강해 74강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 한절만 보겠습니다. 우리 함께 봉독하시죠.
(요한복음 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그 승기 뒤에 이루어질, 성령강림 사건이 갖는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 아주 심도 있게 공부를 했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위해서, 내가 다시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을 하셨던 그 예수님의 약속이, 성령강림으로 성취가 되고,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승계하기 위함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죠? 다 기억나세요?
그러니까 성령하나님은, 예수님의 ‘제2의 자아(自我)’인 거예요. 그걸 ‘알터 에고(alter ego)’라고 하는데, 아,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사역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의, 다른 자아라고 표현하는 거지, 제가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면에서의 다른 자아라고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잘못하면은, 그게 양태론적 개념으로 받아드릴 수 있어요. 다른 자아라고 그냥 무작정 이야기를 하면! 그건 이단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삼위일체론에 입각한, ‘제2의 자아, 알터 에고(alter ego)’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주님께서 그날에는, 그러니까 주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시는 날에는’이라는 뜻이겠죠.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게 된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아울러 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도 하세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에요.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 안에는, 예수님이 계세요.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계세요. 따라서 우리 안에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거고, 그 삼위의 하나님 안에, 우리가 거하게 된 거예요. 그게 14장 1절부터 전개되고 있는 처소의 이야기예요.
지금 그 처소의 이야기가, 아주 이제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여러분 잘 이해가 되세요? 저는 이 구절을 갖고요. 정말 십 수 년을 고민했던 거 같아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정말 제대로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시며,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있고,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말이에요?
오늘은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냥 대충 대충 알고 넘어가지 말란 말이에요. 간단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 주까지 제가 연결을 해서 설명을 해 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설교가 다소 어정쩡하게 끝나는 것 같아도, 조금 참으시고, 다음 주 설교까지 연결해서 잘 들으셔야 돼요. 제가 이번 주와 다음 주 설교 원고를, 잘 정리를 해서, 한꺼번에 나눠 드릴 테니까, 집에서 열심히 읽어두세요.
오늘 설교의 내용은, 강해의 성격을 띤, 조직신학 강의가 될 거 같아요. 조금 딱딱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과 복음을,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숙지해 두어야 할 부분이므로, 여러분이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재미없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여러분 오랜만에, 조직신학 강해를 듣는다고 생각하시고, 한번 잘 들어보세요.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신 분들은, 앞으로 삼위일체라든지, 그리스도와의 연합! 유니온 크라이스트(Union Christ) 같은 그런 교리에 관한 성경적 이해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바와 같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강림은, 우리를 사랑한 자로 만들어 내셨고, 계명을 다 지킨 자로 만들어 내셨어요. 여기까지 이해가시죠? 그리고는 그 구속의 사건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보혜사 성령의 역할이었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죽으시기까지 지켜내시고, 그 계명지킴의 사건을,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줬어요.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를, 목숨 걸고 사랑하셔서, 그 사랑 또한,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켜주셨어요. 그래서 ‘계명지킴’과 ‘하나님을 사랑함’이, 우리 것이 됐어요. 맞습니까?
그래서 지난시간 본문에 나왔던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신 후에, 그 분의 십자가 지심이 등장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계명을 다 지키셨고, 그 계명지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발로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내신 거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계명지킴이, 둘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 안에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신 자신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암시하시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어차피 그거 우리가 안 되는 거 아세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해 놓으시고, ‘내가 지키고, 내가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우리 것이 된 거고, 그게 우리 것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한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애써 분투해 삶을 조금씩, 조금씩이나마, 살게 된다는 것이죠. 만족할 순 없지만!
그렇게 완성이 된 성도의 구속사건이, 성령의 더 큰 일! 기억나시죠? 더 큰 일이 뭔지? 더 큰일 사역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은혜로, 공짜로, 아니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지고, 적용이 된 거예요. 그게 구원이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에서는요, 그 성령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의 요청! 성자 하나님의 중보에 의해,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오는 거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지금부터 본론이에요. 14장 16절 보세요.
(요한복음 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보혜사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15장과 16장에서는, 예수님이 보혜사를 보내시는 것으로 표현이 되어 있어요. 15장 26절 보세요.
(요한복음 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16장 7절 보세요.
(요한복음 16:7)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렇죠? 정확하게 누가 보내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내시는 거예요? 아니면 예수님이 보내시는 거예요? 이렇게 요한복음에는, 성령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자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의 사자!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자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동방교회 즉 그리스 정교와 러시아 정교! 그리스 정교와 러시아 정교! 그리고 서방교회의 분열이, 바로 여기에서 왔다는 거 아세요? 여러분, 동방교회는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했고, 서방교회, 서방교회는 로만 가톨릭하고 개혁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서방교회는, 성령이 하나님에게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에게서도 나온다고 주장을 했어요.
결론은, 서방교회가 옳았죠?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을요,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얘기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영이라고도 이야기 한다, 말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보세요.
(로마서 8:9)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보세요.)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보세요. 바울이 한 문장 안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불러요.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을 아예 아들의 영이라고도 불러요. 갈라디아서 4장 6절 보세요.
(갈라디아서 4:6)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성부 하나님의 영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시는 분이시기도 하면서, 아들이 보내시기도 하시는 분이에요. 다른 말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기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유물론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면, 절대 이해가 안 돼요. 이런 건 완전한 모순(矛盾)이잖아요?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것처럼, 분명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는, 성령 하나님이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셨는데,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고 이야기하세요. 20절 보세요.
(마태복음 28:20)
20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하고 계신 분이 누구예요?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 거예요? 예수님이 계신 거예요?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이야기들의 해결책으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인 거예요.
제가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라는 책에서, 여기에 대해서 한번 설교를 했는데, 이 구역장 성경공부를 하다보니까, 아직도 제대로 이해가 안 되어있는 거 같아요. 그게 하급반이었다면, 오늘은 중·상급반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보세요.
사실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단어는요. 성경 어디에도 없어요. 그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 라틴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터툴리안입니다. 이름은 들어보셨죠? 터툴리안! 160년에 태어난 사람이에요. 터툴리안은,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태어난, 그리고 거기서 활동한,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이며 교부였어요.
그 분이 ‘파락세아스를 반대하며(against paraxeas)’라는 책에서, 삼위 하나님의 한 본질(本質)과 세 위격(位格)을 처음으로 주장을 했어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정리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처음으로 그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그런데 조금 부족해요.
그 이론은 후에,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그런데 사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로는, 조금 문제가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터툴리안은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할 때, 한 본체(本體)! 라틴어로 수스탄티아(substantia) 한 본체! 그리고 세 인격(人格), 페르소나(persona)로 표현을 했어요. 당시에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개체성을 가진 한 인격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무대에서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어요. 즉 어떤 배우가 왕으로 분장을 해서 왕의 역할을 할 때, 그 때, 이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들어서 썼죠. 지금도 어떤 영화감독의 사상이나, 인격, 의도 등을 연기로 잘 표현해주는, 특별한 배우를, 그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이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였어요.
따라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의 그 도식을, 다시 번역을 하면 이래요. 한 본체! 수스탄티아와, 세 역할(役割)이 되는 거예요. 뭐하고 비슷해요. 양태론 하고 비슷하잖아요? 모달리즘(modalism)! 그죠? 그건 이단입니다. 여러분!
정확하게 양태론은 아니지만, 양태론적 그림자가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는 삼위일체론이에요. 그 터툴리안의 부족한 삼위일체론을, 어거스틴이 이어 받았어요. 전승을 해서! 그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론을 이야기했는데, 역시 양태론적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요.
어거스틴도, 삼위 하나님 각자의 개체(個體)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그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의 개체적인 인격체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세 위격이 한 본체 안에 들어있다고만 이야기를 했어요.
어거스틴은, 한분 하나님의 내적 분리를 통해서요, ‘상호간에 관계에 있어서만,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시다.’라고 가르쳤어요. 거의 일신론(一神論)에 가까운 해석이에요. 여러분 삼위일체론이, 일신론에 대항하여 나온 것입니다. 다음 주에 제가 원고를 드릴 테니까, 잘 읽으세요. 집에 가서!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은요, 심미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불러요. 여러분, 이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다 나오는 거예요. 국민학생들이 배웠던 거예요. 심미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한 인간 안에 있는 기억과, 지성과, 의지! 기억, 지성, 의지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것으로 봤어요.
그러나 기억, 지성, 의지는, 한 인간의 어떤 측면들을 나타내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세 인격체로서의 개체성을 가진, 인격적 개체로서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한 거예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도, 양태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의 존 칼빈은, 세 인격의 인격적 개체성을 강조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독자적 개체성을 확실하게 부각을 시킨, 삼위일체론을 가르쳤어요. 쉬운 말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다 다른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각자가, 각자의 인격(人格)을 갖고 있는 개체라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섣불리 결론을 추론하지 말고, 끝까지 들으세요.
지금 속으로 ‘어! 그럼 삼신론(三神論)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신 분 계실 텐데…. 끝까지 잘 들어보세요. 제가 생각하기에, 칼빈은 아타나시우스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로 연결되는,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 존재하는, 정통삼위일체론을, 깊이 알고 있었던 거 같아요. 여러분이 이걸 아셔야, 여호와의 증인과 붙어서, 그들을 박살낼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여러분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붙어 앉아서, 만방으로 깨져요. 뭘 알아야지!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논쟁도 모르면서, 무슨 여호와의 증인하고 이야기를 해요. 그들은 정확한 논리를 갖고 오잖아요? 이야기 해보셨어요? 그래, 문 안 열어 줬죠? (하하하하) 자신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한 터툴리안식의 삼위일체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 아시죠? 칼 바르트와, 구교의 신학자인 칼 라노에 의해서 다시 전승이 되어졌는데, 그 중 칼 바르트는,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에서의, 그 페르소나가, 세 페르소나에서의 그 페르소나가, 계몽시대 이후에 쓰였던, 그 페르소나의 단어와 완전히 다른 단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칼 바르트의 책을 보면, 그 페르소나는, 계몽시대 이후에, 그 개체성이 들어있는 그 의미의 인격체라는 말이 아니었고, 단지 역할(役割)이라는 의미로, 터툴리안 시대에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한 인격체, 펄슨(person)! 한 인격체와, 세 존재 양태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것도 역시 양태론을 못 벗어난 것입니다. 칼 라노도 마찬가지예요. 칼 라노는요. 삼위일체를 한 인격체와, 세 본체의 양태라고 표현을 했어요. 한술 더 떠서! 제가 이런 신학자들의 이름을 말씀 드리는 건, 그런 신학자들의 책을 사서 읽어 보시란 뜻이에요.
이것은 터툴리안이, 한 하나님을 하나의 본체로 표현을 한 것에서 유래되고 있는 거예요.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의 본체가 드러나는 세 가지 양태로 표현한 거예요. 역시 양태론의 그림자를 벗어버리기 어려운,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인 거예요. 혹시 노파심에서 말씀 드리는데, 양태론이 뭔지는 아시죠? (하하하) 모달리즘(Modalism)! 예? 주여!
그 3세기 때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3세기면 여러분,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예요. 3세기 때, 그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 일신론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 가지 역할을 하신 것뿐이라고 주장을 했잖아요?
그는 하나님은 한 인격이신데, 성자, 성부, 성령, 이렇게 세 인격이 아니라, 쓰리 펄슨(person)이 아니라, 한 인격인데, 세 가면(假面)! ‘프로소폰’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세 가면이에요. 그거는요! 프로소폰! 세 가면을 가지고 계신 거라고 주장을 했어요.
구약 때에는, 성부하나님으로 가면을 쓰고 오시고, 예수님 안에서는 성자 예수로, 또 교회시대 때는,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가면만 바꿔 끼고 내려오신 거라는 거예요. 이걸 신학에서는 경륜적(經綸的) 삼위일체론이라고도 해요.
예를 들어, 태양이라는 본체가, 빛과 열을 내잖아요? 빛과 열! 태양 본체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하나다! 이게 양태론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많이 배우셨죠? 물은 얼음으로도 될 수 있고, 수증기로도 될 수 있다. 모양은 다르지만 하나다. 이게 양태론인 거예요. 모달리즘(Modalism)! 가면만 바꿔 쓰는 거예요. 원래는 한 인격(人格)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만일 그들의 이론이 맞다면,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전부 연극이죠? 아무도 없는데, 누구한테 기도한 거예요. 땀이 피가 되도록! 그 양태론, 일신론의 약점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절규도 쇼예요. 그렇지 않아요? 하늘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분이 지금 내려와 있다 말입니다. 가면을 바꿔 쓰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장대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한 거라면,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은, 누구에게 재물로 바쳐진 거예요? 그리고 그 제물을 누가 받고, 우리를 용서했죠? 보세요. 성경이 하나, 하나 막혀 가요. 그죠?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은, 그 양태론에 근거하여 이해를 하면, 하나도 이해가 안 돼요. 또 다른 보혜사? 그건 뭐냐 말이에요? 예수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낸다 그랬는데, 자기가 올라가서 가면만 바꿔 쓰고 내려온다는 뜻이에요?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누구를 보내는 것도, 전부 가짜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되고 말아요.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보내게 하시겠다.’ 그랬는데 그게 전부 의미 없는 말이 되잖아요? 양태론이라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렸던, 아버지의 목소리! 또 변화산에서 들렸던 아버지의 목소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복화술 하신 거예요? (하하하하) 입 딱 다물고?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아래 내려와 계셨는데, 누군가가 말씀 하셨단 말입니다. 완전히 인격적 개체성이, 이 삼위 하나님 안에 들어있다 말입니다. 여러분! 그건 여러분이 명확히 구분을 하셔야 돼요. 이제 양태론이 이해가 가세요?
제가 조금 있다가 삼신론 하고 삼위일체론 안에서, 인격적 개체성과의 차이가 뭔지를 설명을 해 드릴게요. 일단 제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만 와보세요.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의 인격적 개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은 한 분이다.’에 매여서, 일신론적 관점을 버리지 못하는 한, 전부 이 양태론에 걸리게 된다 말입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 봤는데, 그건 너무 아파서 착각한 건가요? 분명히 둘을 봤단 말입니다.
우리는 한분 하나님을 믿어요. 맞습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어요.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에요. 맞습니다! 그러나 세 인격이에요. 제가 올바른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이제 설명해 드릴게요.
제가 보기에, 성경적 삼위일체론을, 가장 잘 정리를 해 놓은 신조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예요. 우리는 지금 사도신경만 알고 있죠? 사도 신경은 다 외우시죠? 그게 사도 신조거든요. 그 사도신경보다, 저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더 조금 구체적이고, 명확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아요. 제가 그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적어왔어요. 한번 보세요.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 분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로서, 빛으로 오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 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동일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성령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의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치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세 분이 각각 공히, 영광과 예배를 받아 마땅한,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어요. 사도 신경과 아주 흡사하죠?
그런데 특이한 것이, 하나님은 하나라는 개념이 이 안에는 들어가 있지 않아요. 사도 신경도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전부 개별적 본체로서의 하나님으로 본다 말이에요.
이 신조가 만들어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가르쳤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회의예요.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영원 속에서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인긴 하나님인데, 영원 속에서 창조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는 늘 함께 계셨는데, 영원 속에서는, 성자 하나님이 없던, 어떤 때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 어느 시점에서 창조(創造)가 되었다고 우겼던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겠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인격적 개체라는 게 무너져 버리면요,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 된, 피조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성립이 안 돼요. 제가 다음 주에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거기에 대해서는! 그래서 이단(異端)인 거예요.
여러분! 여호와의 증인들이, 예수님을 아리우스처럼 이야기를 하죠.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을 대는데,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는 것들을 구절로 갔다가 들이밀어요.
저희 교회 설교를 여호와의 증인들이 꽤 많이 듣고 있어요. 저한테 이 메일을 자주 보내는 분도, 서너 분이 돼요. 여호와의 증인에 아직도 다니시는 분들이, 그 분들이 들으면, 굉장히 분노하시겠지만, 할 수 없어요. 그러한 신론, 신관을 갖고는 절대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한 이단들에 주장을 일축하는 신조가, 바로 이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였던 거예요. 그래서 이단에 대항하던 교부들과 학자들이, 신조를 통하여,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그러나 인격적이며, 개체적인 본체로서의, 하나님임을 강력하게 밝혔던 거예요. 신조로 만들어서!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권능과, 동일한 위엄과, 동일한 신성을 지닌, 다른 본체를 가지신, 한 본질의 하나님인 거예요. 그게 올바른 삼위일체론이에요. 그 세 하나님은, 제가 세 하나님이라는 위험한 표현을 썼는데, 잘 들으세요. 세 하나님은, 서로에 대해서, 열등(劣等)하거나 종속적일 수 없어요. 물론 사역적 측면에서는, 종속이론(subordinationism)을 적용할 수 있어요. 그건 내가 다음 주에 설명해 드릴게요.
신성에 있어서, 똑같은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있으면서, 사역적 측면에서는, 종속적일 수 가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에서, 절대 종속적일 수는 없어요. 그런데 터툴리안이나 오리겐도요. 성자의 성부 종속론의 그 문제점을 때때로 드러내곤 해요.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주의 신론’이라는 책을 보면, 거기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안토니 후크마의 인간론이나 구원론! 그리고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주의 신론! 이런 것들은 여러분 잘 읽어 두셔야 돼요.
그런 걸 읽다 보면, 제 책이 얼마나 쉬운지 아시게 될 거예요. (하하하하) 그런데 여러분 반드시 읽으셔야 돼요. 성경만 읽으면 됐지, 굳이 그런 거 까지 왜 읽어야 되냐? 성경을 올바로 읽기 위해서, 여러분이 잘 공부를 해 두셔야 돼요. 정 나는 자신 없다 싶으면, 제가 다 읽고 설명을 잘 해드리는 거니까, 잘 들으세요. 듣지도 않고, 읽지도 않으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늘 똑같아! 늘 제자리걸음이에요.
성부와 성자 성령의 각 위 사이에는, 종속적인 면이 전혀 없고, 위격적 의미의 차이가 전혀 없어요. 동일한 인격체예요. 동일한 개체예요. 이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 사이에 열렸던,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아주 중요한 항목이 결정되는데, 현대의 신학자들은, 바로 이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삼위일체론을, 정설로 받아드려요. 저도 개인적으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이나, 칼 바르트나, 칼 나노의 삼위일체 도식보다, 이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삼위일체 도식이, 성경적으로 정확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 기본도식이 뭐냐 하면, 하나의 본질! 서브스턴스(substance)! 우시아(ousia)라고 해요. 그 하나의 본질과, 세 실체! 서브시스턴스(subsistence)인데 그걸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라 그래요. 제가 그 ‘휩포스타시스’에 대해서 여러 번 설명해 드렸었는데, 여기서 세 실체! ‘휘포스타시스’는 ‘페르소나, 가면, 역할’ 이런 단어하고는 완전히 다른 단어예요. 그 ‘휘포스타시스’는 독립적이며, 인격적인, 개체를 뜻하는 단어예요.
그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그 삼위일체론에 쓰인 그 단어가 바뀌었어요. ‘페르소나’에서 ‘휩포스타시스’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휘포스타시스’는, 완전히 독립적이며, 인격적인, 개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이면서, 한 본질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은, 일신론으로서의 한 인격이 아니라, 세 분의 개체예요. 그런데 한 우시아(ousia)에요. 한 서브스턴스(substance)! 여기에서 한 본질이라는 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을 지녔다는 거예요. 우열이 없는 동일한 신성!
아리우스의 이야기처럼,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난 존재다.’ 이런 게 없이, 우열이 없는 동일한 신성! 동일한 권능! 그리고 각자가 독립적으로, 자기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면서, 독립적으로 자기의 일만 추구할 수 없는, 그러한 하나로서의 하나! 그게 한 본질(本質)이란 뜻이에요. 여러분!
반면에 헬라, 희랍,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어때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처럼, 뮤추얼 인드웰링(mutual in-dwelling)! 서로 내주(內住)하면서, 이 분의 뜻이 이 분의 뜻이고, 이분의 능력이 이분의 능력이고, 그 동등한, 그 동일한 능력! 그 동일한 뜻! 동일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뮤추얼 인드웰링(mutual in-dwelling)을 하면서, 절대 의견이 갈릴 수 없는, 연합되어져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각자의 영역 안에서, 도교(道敎)에도 나오죠? 천신(天神)! 수신(水神)! 지신(地神)! 각자의 영역이 있죠? 각자의 영역 안에서, 때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충돌하기도 하는 신(神)! 고런 게 삼신론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인격적 개체로서, 명확하게 구별이 되지만, 절대 충돌이 없고, 분열이 없고, 각자에 영역을 추구하느라, 뜻이 갈릴 이유가 전혀 없는, 동일한, 우열이 없는, 신성과 능력과 성품을, 갖고 계신 그러한 하나로서의 하나님을,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일신론하곤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나중에 여러분 들으세요. 그러면은 금방 이해가 갈 거예요.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이 원고만 쓰는데, 제가 이틀 걸렸거든요. 그런데 짧아요. 몸살이 걸렸어요. 이걸 짧게,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쓰느라고!
그런데 지금은 단어들이 조금 생소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해가 안 가는 건데, 여러분 어휘력을 조금 많이 늘리셔야 돼요.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책을 지지리도 안 읽는 보통사람들이 쓰는 고 단어와 어휘만을 갖고, 그 엄청난 복음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책도 많이 읽으시고, 또 많이 들으시고 보셔서, 어휘력을 늘리셔야 돼요. 여러분!
그러니까 제가 원고를 드리면, 사전을 찾아가면서, 그 어휘들을 찾으세요. 단어들을 찾아서, 내 걸로 만들어 놓으세요. 그나마 우리 교회 교인들은 단어의 정의라든지, 의미 같은 것을, 다른 이들보다 꽤 많이 알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도 아직 부족해요. 그러니까 그런 어휘들이나 단어들을, 여러분이 잘 숙지하고 계셔야 돼요.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세 본체라는 건데, 그 동일한 본질이라는 건, ‘호모 우시온’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 세 본체의, ‘휘포스타시스’라는 그 단어가, 히브리서에 쓰였어요. 다행스럽게도! 한번 볼까요? 히브리서 1장 3절에 나오죠.
(히브리서 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여기서 본체가 ‘휘포스타시스’인 거예요. 예수님을 묘사하는 부분이에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개별적이며, 인격적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이신, 그러나 개별적이며 인격적인 본체이신, 그 ‘휘포스타시스’의, 가시적 육화(肉化)! 현상으로 보였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본체(本體)!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는,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이시다. 그런데 그 인격적, 독립적인 개체이신 그 예수님이. 이 땅에 가시적인 모습으로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게 ‘본체의 형상’이란 뜻인 거예요.
따라서 하나의 본질이며. 세 실체! ‘휘포스타시스’라는 표현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권능을 지닌, 같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신조인 거예요. 그렇게 세 본체이면서, 쓰리 ‘휘포스타시스’이면서, 하나의 본질! 하나의, 원 ‘우시아’라는 개념을, 아주 훌륭한 한 단어로 요약하여 잘 표현한 사람이, ‘다메섹의 요한’이라는 사람인데요. 지금부터 제가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아직까지 좀 헷갈리시죠, 그죠?
그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은 하나님이신데, 이 세 하나님은, 상호통제(相互統制)! 이 상호통제와 함께 하시므로, 하나 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어요. 이 상호통제라는 단어, 이런 단어도 여러분, 제가 한문으로도 써놨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이게 무슨 뜻인지, 사전을 잘 찾아보세요.
그가 세 분 하나님의 하나 됨을 가리키는 단어로, 상호통제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단어가요, 헬라어로 뭐냐면, ‘페리코레시스’예요. 이 단어는 여러분이 필히 외워두셔야 돼요.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정확하게 오늘 본문의,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라는 어절에 축약(縮約)이에요.
그 ‘페리코레시스’란 단어는, ‘서로 침투하여 내재한다.’는 뜻이에요. 신과 신 사이,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뮤추얼 인듀웰링(mutual in-dwelling)이, 바로 ‘상호내재(相互內在),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예요. 그래서 서로 침투하여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끊어낼 수도 없고, 독립적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유지하고, 추구하며, 일을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요.
만에 하나, 이 세 인격이 하나가 튕겨져 나가, 다른 일을 도모하고, 다른 영역을 추구하면, 이 두 존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그런 관계예요. ‘페리코레시스’라는 관계가! 그러니까 세 횃불이 있는데, 이 횃불이 연합하여, 하나의 불꽃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빠지면, 이 불꽃 자체가 없어져버리는 그런 상태! 그게 ‘페리코레시스’예요.
그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는 원래 윤무(輪舞)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윤무가 뭐냐면, 윤이 뭐예요? 수례바퀴 윤(輪)자잖아요? 윤회(輪回)할 때, 우리가 그 글자를 쓰잖아요? 수레바퀴 윤(輪)! 그러니까 윤무가 뭐냐 하면, 서로 서로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만들어요. 그리고는 도는 거예요. 돌면서, 즐겁게 춤을 춰요. 즐거운 일을 하는 거예요. 돌면서!
그런데 이게, 눈에 보이지 않게 빠르게 돌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각자 개체가 손을 잡고 돌아가고 있지만, 하나가 되겠죠? 옛날에 어렸을 때 읽었던, 이솝 이야기에서, 돼지들이 그렇게 빨리 돌았더니, 햄이 됐던가요? 뭐 하여튼 그런 이야기 있었잖아요? 그죠? (하하하)
그때 제가 햄을 한 번도 못 먹어 봤을 땐데, 그 동화를 읽으면서 얼마나 햄이 먹고 싶던지! 그래 정말 돼지들이 이렇게 빨리 돌면 햄이 되는가? 굉장히 궁금해 했던 적이 있어요. 아이, 이놈의 기억력은 네 살 때 본 것도 기억나니! 허허허 뭐 예 그런 거예요.
‘페리코레시스’는 윤무(輪舞)라는 거예요. 동그랗게 모여서서 원을 그리면서, 돌면서 춤을 추는데, 이 여럿이,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일을 성취해 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중에 하나가 빠지면, 원이 깨져 버려요. 그게 ‘상호통제’라는 단어에 의미예요. 여러분! 상호 침투하여 들어와서, 내재하는 관계!
그런데 여러분, 제가 다음 주에 설명해 드릴 건데, 아휴 다음 주에 할거 되게 많네요. 그 관계 속에, 우리가 들어갔어요. 삼위 하나님이 손을 잡고 춤을 추시는데, ‘어! 잠깐만! 여기 하나 껴주자!’ 하고 교회를 그 사이에 껴줬어요. 같이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래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삼위일체 속으로, 초청받아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나라에 가면 여러분이, 예수님과 공동상속자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엄청난 복음을 알고 있는 이들이, 세상에 지금 이 시대의,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에 빠져서, 그런 것들만을, 기독교의 목적지인양 생각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윤무(輪舞), ‘페리코레시스’로 초청받아서, 지금도 같이 돌고 있어요. 여러분 안에 누가 계세요? 성령!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죠? 지금 상호통제가 이루어 진거죠. 들어와 있어요. 여러분 안에 예수가 들어와 있다는 건, 예수 안에 여러분이 들어와 있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지금 뮤추얼 인듀얼링(mutual in-dwelling)이 된 거죠, 그죠?
예, 지금 그런 상태를 누리고 있는 분들이, 사업이 조금 망했다고, 내가 병이 걸렸다고, 내 소원이 좀 안 들어 줬다고, 내 비전과 야망이 묵살됐다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냐고요? 오히려, 하나님은, ‘너희들이 바로 그 ‘페리코레시스, 윤무’ 속으로 들어왔다는 거,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굉장히 기쁘고 행복할 텐데…, 정말 그것만으로 행복하니?’라고 물으시는 차원에서, 그런 것들을 잠시 빼앗아 갈수도 있어요. 그 상황에서 우리의 존재가 폭로되는 거죠.
‘나는 여전히 이런 존재구나!’ 내지는 ‘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그렇게 죽을 만치 괴롭지는 않네. 왜? 나에게 소망이 있으니까!’ 요렇게 우리를 진단해 가시는 거예요. 그게 인생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무슨 ‘꿈꾸는 자’가 오고, 형통의 원리를 상속하고, 이게 뭐예요? 도대체 성경을 전부 그리로 연결을 해버리면, 이 엄청난 복음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얘기를 하면서도 좋아 죽겠네요. 그냥! (하하하하) 예, 우리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고, 그 관계가 영원히 취소될 수 없다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가 무엇으로 좌절하며, 무엇으로 실패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잘 이기시란 말이에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여러분은 약을 드셔야 되는데, 신약과 구약을 드셔야 돼요. (하하하) 그거 이외에는 약이 없어요. 응, 약이 없어요. 그 복음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은, 아주 빨리 다른 이들보다, 아주 빨리 회복이 돼요. 분명합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 배우셔야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여러분이, ‘하나’라는 개념이, 제안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계셔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조금 더 설명해 드리고 마칠게요. 삼위일체론에서, ‘한 하나님! 세 인격체’라는 표현을 쓸 때, 하나와 그 셋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면, 여러분 절대 이해 못합니다. 그걸 같은 평면에서 다루게 되면요,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수학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괴상한 모순의 결과가 초래돼요.
‘그래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뭐!’ 그러지 말잔 말이에요.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는 건, 해결을 해야죠. 삼위일체론에서 ‘하나’가 지칭하는 것은, 하나님은 목적이 다를 수 없고, 독자적 계획이 있을 수 없으며, 신성과 능력과 엄위의 본질에 있어서 똑같다는 의미에서, 전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하나’예요.
세 인격! 쓰리 ‘휘포스타시스’는 그 전체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각 인격체로서의, 개체로서의, 세 분 하나님! 인제 조금 이해가 가세요?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한 하나님! 세 휘포스타시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삼위일체에요. 별로 힘들지 않잖아요?
그렇게 셋은, 각자 인격적 개체로서의 세 분 하나님을 가리키는 거고, 한 분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나누어지거나 분리되거나 다룰 수 없는, 하나의 신성을 가진, 삼위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인 거예요. 절대 일신론적 개념 아닙니다. 잘 구별하세요. 그걸 일신론적으로 이해를 하면, 양태론이 된다. 그랬어요. 모달리즘(Modalism)! 그거는 교회 전체 2천년 역사 중에, 계속 이단으로 정죄 받은 거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의 하나님을 형성하는 근원으로서의 신성을 가진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타나시우스가 이렇게 기록했어요.
그런 까닭에 한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그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신성 자체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 분이 아버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이 말해질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거 이외의 다른 건, 하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쉬운 말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인격체지만, 한 하나님이시고, 거룩한 하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한 가지 역사를, 세 분이 같이 만들어 가신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도, 세 분이 나누어서, 오시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한 가지 일을, 절대 반대할 수 없는 세 분이, 동일한 뜻을 가진 세 분이, 같이 이루어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예요. 그러나 일신론은 아니라는 거예요. 계속 반복해 드려요. 제가! 아시겠죠? 예! 그게 삼위일체에요. 어렵지 않아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인격체지만, 한 하나님이시고, 거룩한 하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위협하는 삼위일체론은, 양태론과 같은 이단적 일신론에 빠질 위험이 크다.’ 이게 아타나시우스의 말이에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제가 삼신론(三神論)에 대해서 잠깐 설명해 드릴게요. 쓰리 갓(three gods), 세 명의 하나님! 혹은 세 분의 신들(three gods)! 이렇게 말하는 삼신론과, 인격적 개체성을 인정하는 삼위일체론과 어떻게 다른가?
간단히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이 아니에요.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체의 인격적 개체성을 언급했다고 해서, 삼신론이 맞다고 해선 안 돼요. 왜냐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세 인격체시지만, 하나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갑바도기아 교부들은요, 세 ‘인격,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결코 ‘세 하나님들(three gods)’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세 하나님들’이라는 말과, ‘쓰리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은 달라요.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세 하나님들이 아니다. ‘낫 쓰리 갓즈(Not Three Gods)’라는 책을 썼어요. 이 글에서 그레고리는, ‘우리는 성부이신 하나님! 성자이신 하나님! 성령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세 하나님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세 개의 횃불에서, 하나의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이, 하나의 본질과 세 ‘휘포스타시스’의 형국이기 때문에, 결코 그 하나의 불기둥을, 세 개의 불기둥이라 부를 수 없다는 거예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세 인격체이지만, 하나의 거룩과, 같은 하나의 동일한 신성과,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의 삶과, 역사만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인 거예요.
그리고 삼신론은 세 개의 독자적인 신들을 전제하는 거죠. 세 개의 ‘독자적인 신들’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돼요. 독자적인 신들! 세 개에 독자적인 신들이 전재가 되어 있고, 그 신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요,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어떨 때는 상호충돌을 일으키는 게, 삼신론이란 말이에요.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건, 그렇게 독자적인 신들이 아니라, 신들은 맞아요. 성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맞지만, 독자적인 신들로 활동할 수가 없고, 꼭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뜻과, 하나의 능력과, 하나의 본질로만 일을 하는 거예요. 아 힘들어! (하하하하) 2천년 동안 정리가 된 걸, 한 시간에 이야기를 하려니까! 이해가 가시죠? 그래도 조금? 그죠? 제가! 다음 주까지 들으시면, 조금 더, 확실하게 여러분이 이해를 하실 거예요.
자 계속해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성 삼위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서로 분리되실 수 없고, 함께 거하시고, 서로 안에 거하시고, 함께 일하시기 때문에, 결단코 세 하나님들의 삼신론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그레고리의 말을 제가 조금 풀어서 설명을 해드리는 거예요.
‘신적 본성을 논함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독자적으로 행하시고, 아들이 그 속에 함께 일하지 않는 경우는, 상상할 수도 없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성령과 관계없이, 아들이 행하시는 일이 있다는 거, 역시 상상도 할 수 없다. 삼신론하고 이 삼위일체하고 어떻게 다른지, 조금 이해가 가시죠?
예, 그에 의하면, 성령의 모든 일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하나의 물줄기 같은 것이라서, 이걸 따로 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일을, 한 하나님이 하신다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하나님’인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의 활동 속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거하고, 아들의 활동 속에는 아버지가 함께 거하고, 이렇게, 상호통제! 그런 상태에서 일을 한다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도,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가 일을 하신다.’ 그러고 우리가 서두에 읽었던 것처럼, 예수가 성령을 보낸다고도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성령을 보낸다고도 이야기하고, 교회 안에 성령이 영원히 계실 것이다.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인 내가,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막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떠세요? 아까 처음에, 그 이야기를 대했던 것과, 지금 요 이야기들을 조금 듣고, 그 구절들을 다시 떠올리니까,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가 가시죠? 예?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잘 정리를 해서, 기록을 해 놓은 게, 삼위일체론이라는 조직신학의 한 부분인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없지만, 요런 것들을 전부 정리를 해서, 삼위일체론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은 거죠. 그래서 그게 우리가 그걸 배우고, 성경의 다른 부분들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직신학 공부는, 우리가 성경을 읽는데, 울타리로 반드시 갖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자 삼신론의 또 하나의 중요한 오류는, 삼신론은 세 신들의 독자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세 신 중 그 어떤 신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존재가 될 수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신들이, 각자 신들이, 자기의 독자적인 일을 한다면, 모든 걸 규정하고 감싸 안는, 진짜, 최고의 신은, 존재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삼신론은, 각자의 신의 개성을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신들의 신성을, 폄하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각자가 완전한 하나님이세요. 그렇기 때문에 이 분의 뜻을, 이분이 거스를 수 없고, 이분의 뜻을 이 분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예요. 각자가 온전하기 때문에!
그러나 삼신론은, 각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독자적인 일을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신도 완전하지 못 해요. 그 전체를 규정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삼신론은 안 되는 거예요.
삼위일체론과 삼신론이 다른 점 또 하나 알았어요. 점점점점 삼위일체론이 삼신론과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구분이 되잖아요? 그렇죠? 예 저만 되는 거 같아요. 계속! 응 (하하하하)
자, 결론을 맺습니다.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각자 모두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그런 이론이에요. 삼위 하나님은, 모두, 그리고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신이세요. 아버지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이, 상호통제의 상태에 있고,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의 신성 또한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신성이에요. 이것은 아들의 신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을 규정하는 이론이지만, 삼신론은, 결국 세 신들의 신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이론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페리코레시스’가 없으면, 삼신론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삼위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 윤무’의 상태로 뮤추얼 인듀얼링(mutual in-dwelling) 하기 때문에, 삼신론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나 각자가 인격적 개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삼위일체론은, 누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사도들과 성경에 기자들이 가르쳤던 그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체계화 해 놓은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통제적 삶을 통해서, 한 하나님이고 하나의 삼위일체 신의 역사를, 이룩해 가고 계시는 거예요. 큰 뼈대는 인제 잡히신 거예요. 그죠?
하나의 일! 절대 반대가 있을 수 없는 어떤 일! 그 일을, 세 인격이신 하나님이 일을 해 가시는데, 각자가 인격적 개체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상호 뮤추얼 인듀엘링, ‘페리코레시스’ 하시면서, 뱅글 뱅글 돌면서, 하나가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 목적과 한 열매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하나라는 거예요.
제가 오늘 설명을 굉장히 잘 한 것 같은데, 여러분이 이해를 잘 못하신 거 같아서,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하하하!) 다음 주에 제가 이 원고를 드릴 테니까, 잘 읽으시고 다음 주도 잘 들으시고, 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만큼은, 여러분이 흔들리지 말아야 돼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을 딱 만나거든, 한번 붙어보자! 이런 정도가 되셔야 돼요. 그리고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논쟁부터 시작해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까지, 쫙 이야기해주면서, ‘너 이거 알아?’ 이렇게 좀 얘기를 해주세요! 그냥 문 두드리면 안 열어주려고, 막 안에서, 꽉 붙들고 흐흐흐. 뭐 이상한 거 물어볼까봐. 실력을 키우세요. 실력을!
다음 주에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초월(超越)과 내주(內住)! 그건 굉장히 다른 건데, 초월과 내주를 유지하시고, 그리고 이루어 내시며,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완성에 기여하시는지를, 제가 조금 설명해 드리고, 그 삼위일체 속으로 초대받은 교회에게 쏟아 부어진, 그 은혜에 대해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고, 마치도록 하죠. 요한복음 14장 20절. 큰 소리로 함께 합독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6) - 三位一体の神 2 (ヨハネ14:20)
この「三位一体の神 2」は、ヨハネの福音書講解説教 第74講の内容と同じです。
そのため、その内容を持ってきました。
今日の御言葉を分かち合います。
ヨハネの福音書14章20節の一節だけを見ます。
共にお読みしましょう。
(ヨハネの福音書 14:20)
20 その日には、わたしが父の中におり、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中におり、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中にいることを、あなたがたは知るようになります。
私たちは先週、イエス様のその昇貴(しょうき)の後に成し遂げられる、聖霊降臨の事件が持つ意味と内容について、非常に深く学びました。
弟子たちを孤児のように放っておかないために、「わたしは再びあなたがたのところへ来る」とおっしゃったイエス様の約束が、聖霊降臨によって成就され、聖霊降臨は、イエス様の地上での働きを教会の中で霊的に引き継ぐためであることを確認できましたよね? 皆さん、覚えていますか?
つまり、聖霊なる神様は、イエス様の「第二の自己(自我)」なのです。
それを「アルター・エゴ(alter ego)」と言いますが、あ、もちろんそれはあくまでも、聖霊の働きにおける機能的な側面での「別の自己」と表現しているものであって、私が本質的で存在論的な面での「別の自己」と言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
下手をすると、それは「様態論的(ようたいろんてき)」な概念として受け取られる可能性があります。
「別の自己」だとただむやみに言えば! それは異端です、皆さん! 私は今、三位一体論に基づいた「第二の自己、アルター・エゴ(alter ego)」だと申し上げているのです。
今日の本文をご覧になると、主が「その日には」、つまり主が「聖霊として再び来られる日には」という意味でしょう。
「その日には、わたしが父の中におり、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中におり、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中にいることになる」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
あわせて10節では、「わたしが父の中におり、父がわたしの中におられる」という御言葉も語られています。
つまり、こういうことです。
イエス様の中には父なる神様がおられ、父なる神様の中にはイエス様がおられます。
そして、聖霊なる神様の働きによって、私たちがイエス様の中におり、イエス様が私たちの中におら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ところが、そのイエス様の中には神様がおられます。
したがって、私たちの中にはイエス様と神様と聖霊なる神様が共に住まわれるのであり、その三位の神様の中に、私たちが住むことになったのです。
それが14章1節から展開されている「住まい」のお話です。
今、その「住まい」の話が、いよいよ具体的に繰り広げられるのです。
ところで皆さん、本当にそれがどういう話なのか、よく理解できていますか? 私はこの句を持って、本当に十数年も悩んだ気がします。
一体これはどういう意味なのか? 本当にちゃんとは分からなかったのです。
「神様がイエス様の中におられ、イエス様が神様の中におられ、私たちの中にイエス様がおられ、イエス様の中に私たちがいる! 私たちの中に聖霊がおり、聖霊が私たちの中にいる。
」これが一体どういうことなのか、という話です。
今日は私がその部分について詳しく説明して差し上げます。
ただなんとなく分かったつもりで通り過ぎないでください。
簡単な内容ではないので、来週までつなげて説明するつもりです。
ですから、今日の説教が多少中途半端に終わるように感じても、少し我慢して、来週の説教までつなげてよく聞いてください。
今週と来週の説教原稿をしっかり整理して、まとめてお配りしますから、家で熱心に読んでおいてください。
今日の説教の内容は、講解説教の性格を帯びた「組織神学」の講義になると思います。
少し堅苦しいかもしれませんが、神様と福音を、聖書を理解する上で必ず熟知し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部分ですので、皆さんよく聞いてください。
少し面白くない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皆さん久しぶりに組織神学の解説を聞くと思って、一度よく聞いてみてください。
今日の説教をよく聞かれた方は、今後、三位一体や「キリストとの結合(Union with Christ)」といった教理に関する聖書的な理解に、非常に大きな助けとなるでしょう。
私たちが先週学んだように、私たちの内に内住される聖霊なる神様の降臨は、私たちを「愛する者」へと造り変え、戒めをすべて守った者へと造り変えてくださいました。
ここまでは理解できますよね? そして、その救済の事件がどのように私たちに与え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かを、一歩ずつ説明し、悟らせてくださるのが助け主聖霊の役割でしたよね?
イエス様が、神様の戒めを死ぬまで守り抜かれ、その戒めを守ったという事件を、私たちのものとして転嫁(てんか)させてくださいました。
そして、神様と敵であった者を命懸けで愛してくださり、その愛もまた、私たちのものとして転嫁させてくださいました。
それで「戒めを守ること」と「神を愛すること」が、私たちのものになりました。
合っていますか?
ですから、前回の本文に出てきたように、「わたしを愛する者は、わたしの戒めを守る」と言われた後に、主の十字架を背負う姿が登場するのです。
イエス様は十字架を背負われるまで戒めをすべて守り抜かれ、その戒めを守ることは、神様に対する愛の発露から出たものではないですか。
ですから、イエス様が死ぬまで神様の御言葉を守り抜かれたのですから、そこには神様への愛と戒めを守ることが、両方とも入っているのです。
すでに十字架の中に!
ですから、神様を愛して戒めを守られたご自身の功績が私たちに転嫁されなければ、私たちは絶対に生き返る見込みがないことを暗示するために、「わたしを愛する者は、わたしの戒めを守る」と言われたのです。
どうせ私たちができないことはご存知なのです。
それなのにそのように言っておいて、「わたしが守り、わたしが愛する」とおっしゃるのです。
それでそれが私たちのものになり、それが私たちのものになったということを自覚した者たちは、神様の戒めを守り、神様を愛する者として、せめて少しずつでも、奮闘する歩みを生きる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
満足はできませんが!
そのように完成された聖徒の救済事件が、聖霊の「さらに大きなわざ」! 覚えていますか? その「さらに大きなわざ」が何なのか。
その働きを通じて、私たち聖徒に、恵みによって、タダで、いや不可抗力的に与えられ、適用されたのです。
それが救いです。
ところが、私たちが今共に学んでいるヨハネの福音書14章では、その聖霊なる神様が、御子なる神様の要請、御子なる神様の執り成しによって、父なる神様が遣わされることによって来られるのだと記録されています。
ここからが本論です。
14章16節を見てください。
(ヨハネの福音書 14:16)
16 わたしは父にお願いします。
そうすれば、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あなたがたに与え、いつまで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させようとしてくださいます。
そうでしょう? 「わたしは父にお願いする。
そうすれば、父はもう一人の助け主をあなたがたに与える。
そしてその助け主が、あなたがたと永遠にともにいるようになる」と話しています。
ところが、15章と16章では、イエス様が助け主を遣わされるものとして表現されています。
15章26節を見てください。
(ヨハネの福音書 15:26)
26 わたしが父のもとからあなたがたに遣わす助け主、すなわち父のもとから出る真理の御霊が来るとき、その方が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くださいます。
16章7節を見てください。
(ヨハネの福音書 16:7)
7 しかし、わたしは真実を言います。わたしが去って行くことは、あなたがたにとって益なのです。
わたしが去って行かなければ、助け主は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来られません。
でも、行けば、わたしは助け主を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遣わします。
そうですよね? 正確には誰が遣わすのですか? 神様が遣わされるのですか? それともイエス様が遣わされるのですか? このようにヨハネの福音書には、聖霊が、神様が遣わされる神の使いであると同時に、神の御子の使い、神の御子が遣わされる神の御子の使いとして記録されています。
東方教会、すなわちギリシャ正教とロシア正教! ギリシャ正教とロシア正教! そして西方教会の分裂が、まさにここから来たということをご存知ですか? 皆さん、東方教会は聖霊が「父なる神様からのみ」出ると主張し、西方教会(西方教会はローマ・カトリックと改革派教会を指します)は、聖霊が神様からだけでなく、「神の御子からも」出ると主張しました。
結論は、西方教会が正しかったのです。
なぜなら聖書が聖霊を「神の御霊」とも言い、その「イエス・キリストの御霊」とも言っているからです。
神様から出る霊とも言い、イエス・キリストから出る霊とも言っているわけです。
ローマ人への手紙8章9節を見てください。
(ローマ人への手紙 8:9)
9 もし神の御霊があなたがたのうちに住んでおられるなら、(見てください)あなたがたは肉のうちにではなく、御霊のうちにいます。
キリストの御霊を持たない人は、キリスト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
見てください。
パウロが一つの文章の中で、聖霊を神の御霊とも呼び、キリストの御霊とも呼んでいます。
ガラテヤ人への手紙では、聖霊を最初から「御子の御霊」とも呼んでいます。
ガラテヤ人への手紙4章6節を見てください。
(ガラテヤ人への手紙 4:6) 6 あなたがたが子であるので、神は「アバ、父よ」と呼ぶ御子の御霊を、私たちの心に遣わしてくださいました。
聖霊は、イエス・キリストの御霊ですか? 父なる神様の御霊ですか? つまり、聖霊は父なる神様が遣わされる方でもありながら、御子が遣わされる方でもあるのです。
言い換えれば、聖霊は神の御霊であると同時に、御子の御霊でもあるのです。
ですから皆さん! 唯物論的な観点で聖書を読むと、絶対に理解できません。
このようなことは完全な矛盾(むじゅん)ではないですか? 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
私たちが先ほど読んだように、確かにヨハネの福音書14章16節では、聖霊なる神様が永遠に弟子たちとともにいらっしゃると言われましたが、マタイの福音書28章では、
イエス様が私たちと永遠にともにおられると話されています。
20節を見てください。
(マタイの福音書 28:20)
20 見よ。わたしは世の終わりまで、いつもあなたがたとともにいます。
私たちの内に永遠にともにおられる方は誰ですか? 私たちの内に聖霊がおられるのですか? イエス様がおられるのですか? このように矛盾のように見える話の解決策として、
私たちが必ず知っ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教理が、まさに「三位一体」の教理なのです。
私は「そんなキリスト教はありません」という本でこれについて一度説教をしましたが、この区域長の聖書勉強をしていると、いまだにまともに理解されていないようです。
それが「初級クラス」だったなら、今日は「中・上級クラス」です。
ですからよく聞いてください。
実は三位一体という単語は、聖書のどこにもありません。
その三位一体という言葉を最初に使った人が、ラテン神学の父と呼ばれるテルトゥリアヌスです。
名前は聞いたことがありますよね? テルトゥリアヌス! 160年に生まれた人です。
テルトゥリアヌスは、2世紀末と3世紀初めに北アフリカのカルタゴで生まれ、そこで活動した卓越したキリスト教弁証家であり教父でした。
その方が『パクセアスに反論して(Against Praxeas)』という本で、三位の神の一つの本質(ほんしつ)と三つの位格(いかく)を初めて主張しました。
聖書にある話を整理して話したのです。その人が最初に作ったのではなく。。。。ですが、少し足りませんでした。
その理論は後に、ニカイア信条と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信条の形成に大きな影響を与えました。
しかし実際、テルトゥリアヌスの三位一体論には、少し問題があったのが事実です。
テルトゥリアヌスは、三位一体の神に言及するとき、一つの本体(ほんたい)! ラテン語でスブスタンティア(substantia) 一つの本体! そして三つの人格(じんかく)、ペルソナ(persona)で表現しました。
当時、ペルソナという単語は、個体性を持つ一人の人格(パーソン)を意味する単語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当時、ペルソナという単語は、舞台で俳優がある役割を演じるとき、その役割を指す表現でした。
つまり、ある俳優が王に変装して王の役割をするとき、そのとき、このペルソナという単語を持ち出して使いました。
今でも、ある映画監督の思想や人格、意図などを演技でよく表現してくれる特別な俳優を、その監督のペルソナと言うではないですか? このように、このペルソナは「仮面」という言葉でも翻訳が可能な単語でした。
したがって、テルトゥリアヌスの三位一体論のその図式を改めて翻訳すると、こうなります。
「一つの本体(スブスタンティア)と三つの役割(やくわり)」になるのです。
何と似ていますか。
様態論(モーダリズム)と似ているではないですか。
様態論! それは異端です、皆さん!
正確には様態論ではありませんが、様態論的な影が非常に濃く落とされている三位一体論です。
そのテルトゥリアヌスの不十分な三位一体論を、アウグスティヌスが引き継ぎました。
伝承して! そのアウグスティヌスが三位一体論を語りましたが、やはり様態論的な影が濃く落とされています。
アウグスティヌスも、三位の神それぞれの個体(こたい)性を付与するよりは、その父、子、聖霊が一つの個体的な人格体であるとは言わず、明確に語らず、曖昧に「三つの位格が一つの本体の中に入っている」とだけ語りました。
アウグスティヌスは、お一人の神様の内的分離を通じて、「相互間の関係においてのみ、父であり、子であり、聖霊である」と教えました。
ほとんど一神論(いっしんろん)に近い解釈です。
皆さん、三位一体論は一神論に対抗して出てきたものです。
来週、私が原稿を差し上げますから、よく読んでください。
家に帰ってから!
アウグスティヌスの三位一体論は、「審美的三位一体論」と呼ばれます。
皆さん、これはウェストミンスター小教理問答にすべて出てくるものです。
小学生たちが学んでいたものです。
「審美的三位一体論」と呼ばれますが、彼は一人の人間の中にある記憶と、知性と、意志! 記憶、知性、意志が、三位一体の神様の姿を現す何かだと見ました。
しかし、記憶、知性、意志は、一人の人間のいくつかの側面を表すものでしょう? そのため、三つの人格体としての個体性を持つ、人格的個体としての神様を説明するには、あまりにも不十分なのです。
アウグスティヌスの三位一体論も、様態論から完全に抜け出せていないのです。
しかし、宗教改革時代のジャン・カルヴァンは、三つの人格の人格的個体性を強調しながら、父、子、聖霊の独創的個体性をはっきりと浮き彫りにした三位一体論を教えました。
分かりやすく言えば、父なる神様! 御子なる神様! 聖霊なる神様は、すべて「別の神様」だと言ったのです。
どういう意味か分かりますか? 各自が各自の人格(じんかく)を持っている個体だということです。
誤解しないで、軽率に結論を推論しないで、最後まで聞いてください。
今、心の中で「え! それじゃあ三神論(さんしんろん)じゃないのか?」と思った方がいらっしゃると思いますが……最後までよく聞いてください。
私が思うに、カルヴァンはアタナシオスからカッパドキア教父たちへとつながる、ニカイア信条と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信条の背後に存在する「正統三位一体論」を深く知っていたようです。
皆さんがこれを知ってこそ、エホバの証人とぶつかって、彼らを粉砕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そうでなければ、皆さんはエホバの証人の前に座って、完膚なきまでに叩かれます。
何を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アリウス、アタナシオス論争も知らずに、どうしてエホバの証人と話をしますか。
彼らは正確な論理を持ってくるではないですか。
話をしてみましたか? そうですね、ドアを開けませんでしたよね?(ハハハハ)自信がないから! そういうものなんです。
そのようなテルトゥリアヌス式の三位一体論は、20世紀に入って、カール・バルトをご存知ですか? カール・バルトと、旧教の神学者であるカール・ラーナーによって再び伝承されましたが、そのうちカール・バルトは、テルトゥリアヌスの三位一体の図式におけるそのペルソナが(三つのペルソナにおけるそのペルソナが)、啓蒙時代以降に使われていたそのペルソナの単語とはまったく別の単語であった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
カール・バルトの本を見ると、そのペルソナは、啓蒙時代以降の、その個体性が含まれている意味の人格体という言葉ではなく、単に「役割(やくわり)」という意味で、テルトゥリアヌスの時代に使われていたということを正確に知っていまし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カール・バルトは三位一体を「一つの人格(Person)と三つの存在様態」という表現を使いました。
それもやはり様態論を抜け出せていないのです。
カール・ラーナーも同様です。
カール・ラーナーは、三位一体を「一つの人格と三つの本体の様態」と表現しました。
さらに上を行っています! 私がこのような神学者たちの名前を申し上げるのは、そのような神学者たちの本を買って読んでみてくださいという意味です。
これはテルトゥリアヌスが、一人の神様を一つの本体として表現したことに由来しています。
三位の神様を、一人の神様の本体が現れる三つの様態として表現したのです。
やはり様態論の影を振り払うのが難しい、問題の多い三位一体論なのです。
もしやの老婆心から申し上げますが、様態論が何であるかはご存知ですよね?(ハハハ)モーダリズム(Modalism)! え? 主よ!
その3世紀のときにサベリウス(Sabellius)という人が(3世紀といえば皆さん、イエス様が亡くなってからいくらも経っていないときです)、3世紀のときにそのサベリウスという人が、一神論を主張しながら、「神様はお一人なのに、三つの役割をされただけだ」と主張したではないですか。
彼は「神様は一つの人格(Person)であって、子、父、聖霊という三つの人格(Three Persons)ではなく、一つの人格なのに三つの仮面(かめん)!」。
「プロソポン」という単語を使いました。
三つの仮面です、それは! プロソポン! 「三つの仮面を持っていらっしゃるのだ」と主張しました。
旧約のときには、父なる神様として仮面をかぶって来られ、イエス様の中では御子イエスとして、また教会時代のときは、聖霊なる神様の姿として、仮面だけ取り替えて降りてこられたというのです。
これを神学では「経綸的(けいりんてき)三位一体論」とも言います。
例えば、太陽という本体が光と熱を出すではないですか。
光と熱! 太陽の本体は、互いに違うようですが、一つだ! これが様態論です。
皆さん、このようにたくさん教わりましたよね? 水は氷にもなれるし、水蒸気にもなれる。
形は違うけれど一つだ。
これが様態論なのです。
モーダリズム(Modalism)! 仮面だけ変えるのです。
元々は一つの人格(じんかく)だというのです。
皆さん! もし彼らの理論が正しいなら、夜が更けるまで祈られた、汗が血となるほど祈られたイエス様の祈りは、すべて「お芝居」ですよね? 誰もいないのに、誰に向かって祈ったのですか。
汗が血となるほど! それが様態論、一神論の弱点というわけです。
だとしたら、十字架の上で「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いうイエス様の絶叫もショーです。
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天には誰もいません。
その方が今降りてきているわけです。
仮面を付け替えて! それだけでなく、彼らの主張通り、イエス様と神様の人格が同一なものなら、十字架にかかられたイエス様は、誰にいけにえとして捧げられたのですか? そしてそのいけにえを誰が受け取って、私たちを許したのですか? 見てください。
聖書が一つ、一つ行き詰まっていきます。
そうでしょう?
そして私たちが学んでいるヨハネの福音書14章、15章、16章は、その様態論に基づいて理解をすると、一つも理解できません。
「もう一人の助け主」? それは何だと言うのですか? イエス様がもう一人の助け主を遣わすと言われたのに、自分が上がって仮面だけ付け替えて降りてくるという意味ですか? そうでは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
誰が誰を遣わすというのもすべて偽りになり、イエス・キリストの執り成しの働きも、何の意味もないものになってしまいます。
イエス様が「わたしが父にお願いして、父から聖霊を遣わされるようにする」と言われたのに、それがすべて意味のない言葉になってしまうではないですか、様態論なら!
イエス様がバプテスマを受けられたときに聞こえた、父の声! また変化山で聞こえた父の声! 「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かなう者。
これに聞け。」 イエス様が腹話術をされたのですか?(笑)口を固く結んで? そうではないでしょう?
イエス様が下におられたのに、誰かがお話しになったわけです。
完全に人格的個体性が、この三位の神様の中に入っているのです、皆さん! それは皆さんが明確に区分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これで様態論が理解できましたか?
私が少し後に、三神論と三位一体論の中で、人格的個体性との違いが何であるかを説明して差し上げます。
ひとまず私が導く通りによくついてきてみてください。
このように三位の神様の「人格的個体性」を認めず、「神様はお一人だ」に縛られて、一神論的な観点を捨てられない限り、すべてこの様態論に引っかかることになるのです。
ステパノが死ぬとき、神の右に立っておられるイエスを見ましたが、それはあまりの痛さに錯覚したのでしょうか? はっきりと二人を見たではないですか。
私たちは「お一人の神様」を信じます。
その通りです。
お一人の神様を信じます。
その方は全能であられ、天地を創造された方です。
その通りです! しかし「三つの人格」です。
私が正しい三位一体論について、これから説明します。
私が思うに、聖書的な三位一体論を最もよく整理してある信条が、「ニカイア・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信条」です。
私たちは今「使徒信条」だけを知っていますよね? 使徒信条はすべて暗記されていますよね。
それが使徒信教なのですが。
その使徒信条よりも、私はニカイア・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信条のほうが、もう少し具体的で明確だと思っています。
しかし、それを知っている人は多くありません。
私がそのニカイア・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信条を書き写してきました。
一度見てください。
わたしたちは、唯一の神、全能の父、天と地、見えるもの、見えないもの、すべてのものの造り主を信じます。
わたしたちは、唯一の主、神のひとり子、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ます。
主は、あらゆる世に先立って、父から生まれた方。
神よりの神、光よりの光、まことの神よりのまことの神。
造られたものではなく、生まれた方。
父と同一の本質であり、この方によってすべてのものは造られました。
主は、わたしたち人間のため、またわたしたちの救いのために、天から下り、聖霊により、おとめマリアから、肉体を受けて人となられました。
ポンテオ・ピラトのもとで、わたしたちのために十字架につけられ、苦しみを受け、葬られました。
そして聖書にあるとおり三日目によみがえり、天に昇り、父の右の座に着かれました。
主は、生きてる者と死んだ者とを裁くために、栄光のうちに再び来られます。
その御国は終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
わたしたちは、主であり、命を与える聖霊を信じます。
聖霊は、父から(および子から)出られ、父と子とともに礼拝され、栄光を受けられます。
聖霊は、預言者を通して語られました。
わたしたちは、唯一の、聖なる、公同の、使徒的な教会を信じます。
罪の赦しのための唯一の洗礼を認めます。
死者のよみがえりと、来たるべき世の命を待ち望みます。
父! 子! 聖霊の働きについて、具体的に語っていますが、その三位がそれぞれ等しく、栄光と礼拝を受けるにふさわしい、完全な人格体としての神様であると記録されています。
使徒信条と非常によく似ていますよね?
ところが特異なのが、「神は一つである」という概念がこの中には入っていません。
使徒信条も同様です。
むしろ父なる神様と、御子なる神様! そして聖霊なる神様を、すべて「個別的本体」としての神様として見ているわけです。
この信条が作られたニカイア公会議では、イエス様を神の被造物として教えたアリウスが、異端として定罪された会議です。
アリウスは、イエス・キリストを指して、永遠の中で創造された「被造物としての神」だと言いました。
神ではあるのだけれど、永遠の中で創造された神だというのです。
ですから父なる神様! 御子なる神様! 聖霊なる神様が、この歴史と時間の中では常に共におられたけれど、永遠の中では、御子なる神様がいなかった「あるとき」があったというのです。
つまり、御子なる神様は、神様によって、ある時点で創造(そうぞう)されたと言い張ったのです。
それについては、私が来週詳しく説明いたしますが、イエス様が神様と同一の本質を持たれた「人格的個体」であるということが崩れてしまえば、神様によって被造された「被造神」であることを私たちが受け入れてしまうと、私たちの救いは成立しません。
私が来週詳しく説明します、それについては! だから異端(いたん)なのです。
皆さん! エホバの証人たちが、イエス様をアリウスのように語りますよね。
エホバの証人たちは、イエス様を神であると認めません。
そしていろいろな聖書の句を挙げますが、とんでもない、話にならないような句を突きつけてきます。
私たちの教会の説教を、エホバの証人たちがかなりたくさん聴いています。
私にメールをよく送ってこられる方も、三、四人いらっしゃいます。
エホバの証人に今も通っていらっしゃる方々が。
その方々が聴けば、非常に憤慨されるでしょうが、仕方がありません。
そのような神論、神観を持っていては、絶対に救われません。
そのような異端たちの主張を一蹴する信条が、まさにこのニカイア・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信条だったのです。
それで、異端に対抗していた教父たちや学者たちが、信条を通じて、「イエス様も神様と同一の本質を持たれた、しかし人格的であり、個体的な本体としての神である」ことを強力に明らかにしたのです。
信条を作って!
ですから整理すると、父と子と聖霊は、同一の権能と、同一の威厳と、同一の神性を備えた、別の本体を持たれた、「一つの本質の神」なのです。
それが正しい三位一体論です。
その三位の神様は(私は「三人の神」という危険な表現を使いましたが、よく聴いてください)、三位の神様は、互いに対して劣等(れっとう)であったり従属的であったりすることはあり得ません。
もちろん、働きの側面では「従属理論(subordinationism)」を適用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それは来週説明します。
神性において、全く同じ権能と威厳を持ちながら、働きの側面では従属的であり得ます。
しかし本質的な意味において、絶対に従属的であることはありません。
ところが、テルトゥリアヌスやオリゲネスもですね、御子の父への従属論のその問題点を時折露呈させたりします。
ヘルマン・バヴィンクの『改革派神論』という本を見ると、それについて非常に詳しく出ています。
アントニー・フークマの『人間論』や『救済論』! そしてヘルマン・バヴィンクの『改革派神論』! こういうものは皆さん、よく読んで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んなものを読んでいると、私の本がいかに易しいかがお分かりになるでしょう。
(笑)ですが、皆さん必ず読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
「聖書だけ読めばいいのに、あえてそんなものまでなぜ読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聖書を正しく読むために、皆さんがよく勉強し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どうしても自分には自信がないと思うなら、私がすべて読んで説明をよくして差し上げますから、よく聴いてください。
聴きもしないし、読みもしないならどうしますか。
だからいつも同じ! いつも足踏み状態なのです。
父と子と聖霊の各位の間には、従属的な面が全くなく、位格的な意味の差が全くありません。
同一の人格体です。
同一の個体です。
このニカイア信条と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信条の間に開かれた362年のアレクサンドリア会議で、古代教会の三位一体論の礎を築いた、非常に重要な項目が決定されますが、現代の学者たちは、まさにこのアレクサンドリア会議の三位一体論を正説として受け入れます。
私も個人的に、テルトゥリアヌスの三位一体の図式や、カール・バルトやカール・ラーナーの三位一体の図式より、このアレクサンドリア会議の三位一体の図式が、聖書的に正確な三位一体の教理を説明していると考えています。
その基本図式は何かというと、「一つの本質! サブスタンス(substance)!」 ウーシア(ousia)と言います。
その一つの本質と、「三つの実体! サブシスタンス(subsistence)!」なのですが、それをギリシャ語で「ヒュポスタシス」と言います。
私がその「ヒュポスタシス」について何度か説明して差し上げましたが、ここで「三つの実体! ヒュポスタシス」は、「ペルソナ、仮面、役割」といった単語とは全く別の単語です。
その「ヒュポスタシス」は、独立的であり人格的な「個体」を意味する単語です。
そのアレクサンドリア会議で、三位一体論に使われたその単語が変わりました。
「ペルソナ」から「ヒュポスタシス」に変わりました。
ところで「ヒュポスタシス」は、完全に独立的であり人格的な「個体」なわけです。
ですから、父なる神様! 御子なる神様! 聖霊なる神様は、完全に独立的な個体でありながら、一つの本質を持っているという意味で、「神は一つだ」と語るのです。
つまり、三位一体の神様は、一神論としての「一つの人格」ではなく、「三人の個体」なのです。
しかし「一つのウーシア(ousia)」です。
一つのサブスタンス(substance)! ここで「一つの本質」というのは、父と子と聖霊は、同一の神性を備え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優劣のない同一の神性!
アリウスの話のように、「イエス様は神様より少し劣った存在だ」といったことがなく、優劣のない同一の神性! 同一の権能! そして各自が独立して自分の領域を持ちながら、独立して自分の仕事だけを追求することのできない、そのような「一つとしての、一つ」! それが「一つの本質(ほんしつ)」という意味なのです、皆さん!
反対にヘラス、希臘、ギリシャ、ローマ神話に出てくる神々はどうですか。
父なる神様、御子なる神様、聖霊なる神様のように、「ミューチュアル・インドウェリング(mutual in-dwelling)」! 互いに内住(ないじゅう)しながら、この方の御心がこの方の御心であり、この方の能力がこの方の能力であるという、その同等の、その同一の能力! その同一の御心! 同一の意志を持っているという意味です。
そのようにミューチュアル・インドウェリング(mutual in-dwelling)をしながら、絶対に意見が分かれることのない、連合されているそのような状態ではなく、各自の領域の中で(道教(どうきょう)にも出てきますよね? 天神(てんしん)! 水神(すいしん)! 地神(ちしん)! 各自の領域がありますよね?)、各自の領域の中で、時には自分の利益のために衝突することもある神! そういうのが三神論というわけです。
しかし、人格的個体として明確に区別されますが、絶対に衝突がなく、分裂がなく、各自の領域を追求するあまり御心が分かれる理由が全くない、同一の、優劣のない神性と能力と性質を持っていらっしゃる、そのような「一つとしての神」を「三位一体(さんみいったい)」と言うのです。
それは一神論とは違うものです、皆さん! 後で皆さん、聴いてください。
そうすればすぐに理解できるはずです。
私が皆さんに分かりやすくするために、この原稿を書くのだけに二日かかったのです。
それなのに短いです。
具合が悪くなりました。
これを短く、皆さんに分かりやすく書くために!
ですが、今は単語が少し不慣れで皆さんが今理解できていないだけなのですが、皆さん、語彙力をもう少し増や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
私たち普通の人々が、本をちっとも読まない普通の人々が使う、その程度の単語と語彙だけで、あの途方もない福音をすべて理解できると思われてはいけません。
本もたくさん読み、またたくさん聴いて見て、語彙力を増や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皆さん!
ですから、私が原稿を差し上げたら、辞書を引きながら、その語彙を探してください。
単語を探して、自分のものにしておいてください。
それでもうちの教会の教徒たちは、単語の定義や意味などを、他の人たちよりかなり多く知っているほうなのです。
それなのに、まだ足りません。
ですから、そのような語彙や単語を、皆さんがよく熟知し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ですから、父、子、聖霊は、同一の本質を持たれた「三つの本体」だということですが、その同一の本質というのは「ホモ・ウシオン」と言います。
ところで、その三つの本体の「ヒュポスタシス」というその単語が、ヘブル人への手紙に使われました。
幸いなことに! 一度見てみましょうか。
ヘブル人への手紙1章3節に出てきます。
(ヘブル人への手紙 1:3)
3.御子は、神の栄光の反映であり、神の本質の完全な現れであって、その有力な言葉によって万物を支えておられます。
イエス様を描写する部分です。
受肉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は、個別的であり人格的本体であられるイエス・キリスト! 御子なる神様であられる、しかし個別的であり人格的な本体であられる、その「ヒュポスタシス」の可視的肉化(にくか)! 現象として見えたという意味です。
ですから、その本体(ほんたい)! 「ヒュポスタシス」という単語は、イエス様は人格的に完全に独立した個体であられる。
ところで、その人格的、独立的な個体であられるそのイエス様が、この地に可視的な姿として、形として現れたというのです。
それが「本質の現れ」という意味なのです。
したがって、「一つの本質であり、三つの実体! ヒュポスタシス」という表現は、父、子、聖霊としておられる三位の神様は、同一の神性と権能を備えた、同じ神様であることを宣言する信条なのです。
そのように三つの本体であり、スリー・ヒュポスタシスでありながら、「一つの本質! 一つの、ワン・ウーシア」という概念を、非常に素晴らしい一つの単語に要約してよく表現した人が、「ダマスコのヨハネ」という人なのですが。
今から私がもう少し簡単に説明して差し上げます。
まだ少し混乱していますよね?
彼は、「神様は、父、子、聖霊としておられ、この三位の神様は、本質が同じ神様であるけれど、この三位の神様は、相互統制(そうごとうせい)! この相互統制を共にされることで、一つであることを維持していらっしゃる」と教えました。
この「相互統制」という単語、このような単語も皆さん、私が漢字でも書いておきましたから。
後でこれがどういう意味なのか、辞書をよく引いてみてください。
彼が三位の神様の一つであることを指す単語として「相互統制」という単語を使いましたが、その単語がギリシャ語で何かというと「ペリコレーシス」です。
この単語は皆さんが必ず覚え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単語です。
「ペリコレーシス」という単語なのですが、その単語が正確に今日の本文の「わたしは父の中におり、父はわたしの中におられる」という語句の縮約(しゅくやく)です。
その「ペリコレーシス」という単語は、「互いに浸透して内在する」という意味です。
神と神の間、そして神と人間の間で起こり得る「ミューチュアル・インドウェリング(mutual in-dwelling)」が、まさに「相互内在(そうごないざい)、ペリコレーシス」という単語です。
ですから、互いに浸透して内在しているため、切り離すこともできず、独立して独創的な領域を維持し、追求しながら仕事をすることもできない、そんな状態です。
万が一、この三つの人格のうち一つが弾き出され、別の仕事を企て、別の領域を追求すれば、この二つの存在は無用なものになってしまう、そんな関係です。
「ペリコレーシス」という関係は! ですから、三つのたいまつがありますが、このたいまつが連合して、一つの炎として出ているのです。
ところがここで一つが抜ければ、この炎自体がなくなってしまうような状態! それが「ペリコレーシス」です。
その「ペリコレーシス」という単語は、元々「輪舞(りんぶ)」という単語から派生した単語なのですが、輪舞とは何かというと、輪(りん)は何ですか?
車輪の「輪」の字ではないですか。「輪廻(りんね)」のとき、私たちがその文字を使いますよね。
車輪の「輪」! ですから輪舞とは何かというと、お互いに手を取り合って、丸く円を作ります。
そして回るのです。
回りながら、楽しく踊ります。
楽しいことをするのです、回りながら!
ところがこれが、目に見えないほど速く回れば、どうなるのでしょうか。
各自の個体が手を取り合って回っていますが、一つになりますよね? 昔、幼い頃に読んだイソップ物語で、豚たちがそんなに速く回ったらハムになったのでしたか?
何かそんなお話があったではないですか?(笑)
そのとき、私はハムを一度も食べたことがなかったときなのですが、その童話を読みながら、どんなにハムが食べたかったことか! それで、本当に豚たちがこんなに速く回ればハムになるのか? 非常に不思議に思っていたことがあります。
ああ、この記憶力は四歳のときに見たものまで覚えているなんて! ホッホッホ、まあ、そんなものです。
「ペリコレーシス」は輪舞(りんぶ)だというのです。
丸く集まって立って、円を描きながら、回りながら踊るのですが、この数人が一つの目的と、一つの仕事を成し遂げるのです。
ところが、このうちの一つが抜ければ、円が壊れてしまいます。
それが「相互統制」という単語の意味なのです、皆さん! 相互に浸透して入ってきて、内在する関係!
ところで皆さん、私が来週説明するつもりなのですが、ああ、来週やることがすごく多いですね。
その関係の中に、私たちが入りました。
三位の神様が手を取り合って踊っていらっしゃるのに、「お! ちょっと待って! ここに一人入れてあげよう!」と教会をその間に入れてくれたのです。
一緒に回るのです。
それで「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中に」という言葉が登場するのです。
皆さん、教会とはそうです。
皆さんが、神様のその三位一体の中へと招待されて入っていくのです。
ですから神の国に行けば、皆さんがイエス様と共同相続人になるのです。
皆さん、このような途方もない福音を知っている者たちが、世の中の今のこの時代の神秘主義や現世利益主義に陥って、そのようなものだけがキリスト教の目的地であるかのように考えているということが、どれほど残念なことでしょうか。
私たちは三位の神様の輪舞(りんぶ)、「ペリコレーシス」へと招待されて、今も一緒に回っています。
皆さんの内に誰がおられますか。
聖霊! イエス・キリストがおられますよね? 今、相互統制がなされたわけですよね。
入っています。
皆さんの内にイエスが入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イエスの中に皆さんが入っているという言葉と、全く同じ言葉なのです。
今、ミューチュアル・インドウェリング(mutual in-dwelling)がなされたわけですよね、そうでしょう?
はい、今そのような状態を享受している方々が、事業が少し失敗したからと、私が病気になったからと、自分の願いが少し叶わなかったからと、自分のビジョンや野望が黙殺されたからと、神様を恨むことができますか? むしろ神様は、「お前たちがまさにその『ペリコレーシス、輪舞』の中に入ったということ、それを悟ったなら、それだけで非常に嬉しく幸せなはずなのに……。
本当にそれだけで幸せなのかい?」と問われる次元で、そのようなものを一時的に奪われることもあります。
その状況で私たちの存在が暴露されるのです。
「私は依然としてこのような存在なのだな!」あるいは「おお、それにもかかわらず、まあ、そんなに死ぬほど苦しくはないな。
なぜ? 私には望みがあるから!」 このように私たちを診断していくのです。
それが人生です、皆さん!
それなのに、何の「夢見る者」が来て、順風満帆の原理を相続して、これは一体何ですか。
一体、聖書をすべてそちらに結びつけてしまえば、この途方もない福音は、居場所を失ってしまうのです。
話をしながらも嬉しくてたまりませんよ、もう!(ハハハハ) はい、私たちの内に神様が入っておられ、その関係が永遠に取り消されることはないというこの現実の前で、私たちが何によって挫折し、何によって失敗をするというのですか。
皆さん、よく勝ち抜いてください。
辛く苦しいときごとに、皆さんは薬を飲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新薬」と「旧薬」を飲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笑)それ以外に薬はありません。
うん、薬はありません。
その福音を正しく理解した人は、非常に早く、他の人々より非常に早く回復します。
間違いありません、皆さん! だから皆さんがよく学ば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ここで皆さんが、「一つ」という概念が提案することをよく理解し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それについて私がもう少し説明して終わりにします。
三位一体論で、「お一人の神様! 三つの人格体」という表現を使うとき、一つとその三つを同じ平面で扱うと、皆さん絶対に理解できません。
それを同じ平面で扱うようになると、一つが三つになり、三つが一つになる、数学的に容認できない奇妙な矛盾の結果が招かれます。
「それでも信仰で受け入れようじゃないか!」 そう言わないようにしましょうよ。
いくらでも解決できることは、解決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三位一体論で「一つ」が指し示すものは、神様は目的が異なることはあり得ず、独創的な計画があり得ず、神性と能力と厳威の本質において同じであるという意味で、全体としての神様を指す「一つ」です。
三つの人格! スリー・ヒュポスタシスは、その全体の神様を成している各人格体として、個体としての、三位の神様! 今、少し理解できましたか、皆さん? そのような意味で「お一人の神様! 三つのヒュポスタシス!」と話すのです。
それが三位一体です。
そんなに大変じゃないですよね?
そのように「三つ」は、各自が人格的個体としての三位の神様を指すものであり、「お一人の神様」という表現は、分けられたり分離されたり扱うことのできない、一つの神性を持った三位の神様を、全体的に包括する概念なのです。
決して一神論的な概念ではありません。
よく区別してください。
それを一神論的に理解すると「様態論」になる、と言いました。
モーダリズム(Modalism)! それは教会全体の二千年の歴史の中で、ずっと異端として定罪されてきたのです。
決してそうではありません。
このように聖書は、一つの神様を形成する根源としての神性を持った三位の神様を、「お一人の神様」として表現するのです。
それでアタナシオスがこのように記録しました。
「それゆえ、お一人の神がおられるだけである。
その神以外の他の神はない。
父と子が一つであるため、神性自体も一つである。
したがって、子について言われ得ることは、すべて父についても(その方が父であるということを除いては)、等しく言われ得る。
」
父なる神様と、御子なる神様が、父と子というその名前で呼ばれること以外の違いは、一つもないという意味です。
易しい言葉で、父と子と聖霊は、それぞれ異なる人格体ですが、お一人の神様であり、聖なる一つの三位一体の神様の歴史を、一つの歴史を、三位が一緒に作っていかれるのです。
それで私たちの救いも、三位が分け合って来られるかのように見せられたのです。
ですから、一つの仕事を、絶対に反対することのない三位が、同一の御心を持った三位が、共に成し遂げていかれるのです。
だから「一つ」です。
しかし一神論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ずっと繰り返して差し上げますね、私が! お分かりですよね? はい! それが三位一体です。
難しくありません。
「父と子と聖霊は、それぞれ異なる人格体ですが、お一人の神様であり、聖なる一つの三位一体の神様の歴史を作っていく。
父と子と聖霊の人格的個体性を脅かす三位一体論は、様態論のような異端的な一神論に陥る危険が大きい。
」 これがアタナシオスの言葉です。
だとしたら、今から私が「三神論(さんしんろん)」について少し説明します。
スリー・ゴッズ(three gods)、三人の神様! あるいは三柱の神々(three gods)! このように言う三神論と、人格的個体性を認める三位一体論とはどう違うのか?
簡単に結論から申し上げますと、三位一体論は三神論ではありません。
三位一体論で、父・子・聖霊の三つの人格の人格的個体性に言及したからといって、三神論が正しいとしてはなりません。
なぜなら? 父・子・聖霊であられる神様は、三つの人格体ですが、一つとして存在するお一人の神様だからです。
カッパドキア教父たちは、「三つの人格(ヒュポスタシス)」という用語を使いながらも、決して「三人の神々(three gods)」という単語を一度も使いませんでした。
「三人の神々」という言葉と、「三つのヒュポスタシス」という言葉は違います。
ニュッサのグレゴリオス(Gregory of Nyssa)は、「三人の神々ではない(Not Three Gods)」という本を書きました。
この文でグレゴリオスは、「わたしたちは父である神! 子である神! 聖霊である神と言うが、決して『三人の神々』とは言わない」とはっきり明かしています。
もう一度申し上げますが、三つのたいまつから一本の火柱が立ち上るのが、一つの本質と三つのヒュポスタシスの形局であるため、決してその一本の火柱を「三本の火柱」とは呼べないということです。
父、子、聖霊なる神様は三つの人格体ですが、一つの聖さと、等しい一つの同一の神性と、一つの聖なる三位一体の神の生と歴史しかないため、三位一体の神様は三人の神々ではなく、お一人の神様なのです。
そして三神論は、三つの「独創的な神々」を前提とするわけです。
三つの「独創的な神々」という言葉に、注意を払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
独創的な神々! 三つの独創的な神々が前提とされていて、その神々が独創的な領域を持ち、独創的な活動をしながら、あるときは相互衝突を起こすのが、三神論というわけです。
しかし、三位一体というのは、そのように独創的な神々ではなく(神々であることは確かです。
御子なる神様! 父なる神様! 聖霊なる神様であることは確かですが)、独創的な神々として活動することができず、必ず一つの目的と、一つの御心と、一つの能力と、一つの本質でだけ仕事をするのです。
ああ、疲れた!(笑)二千年の間に整理されたことを、一時間でお話ししようとするなんて! 理解できましたか? それでも少しは? そうでしょう? 私が! 来週まで聴けば、もう少し、はっきりと皆さんは理解されるでしょう。
さあ、続けて。
ニュッサのグレゴリオスは、三人の神々という表現に反対しながら、その理由として「聖三位の神様は、決して互いに分離されることはあり得ず、共に住まわれ、互いの中に住まわれ、共に働かれるため、決して三人の神々の三神論にはなり得ない」と語りました。
そのグレゴリオスの言葉を、私が少し噛み砕いて説明して差し上げているのです。
「神的な本性を論じるにあたって、父が独創的に行われ、子がその中に共に働かない場合は、想像もできない」とこのように語りました。
そして聖霊と関係なく、子が行われる仕事があるということ、やはり想像もできません。
三神論と、この三位一体とがどう違うのか、少し理解できましたか?
はい、彼によれば、聖霊のすべての仕事は、父から子を通じて成されるのです。
ところがそれは一条(ひとすじ)の流れのようなものなので、これを切り離す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のです。
それで一つの仕事を、お一人の神様がされると語るというわけです。
そのような意味で「お一人の神様」なのです。
つまり、聖霊の活動の中には父と子が共に住まわれ、子の活動の中には父が共に住まわれ、このように、相互統制! そんな状態で仕事をされるわけです。
ですからイエス様が受肉してこの世に降りてこられたのに、「わたしの内に父がおられ、父が仕事をされる」と言い、私たちが冒頭で読んだように、イエスが聖霊を遣わすとも言い、神様が聖霊を遣わすとも言い、教会の中に聖霊が永遠におられるだろう。
いや、イエス・キリストであるわたしが、永遠にいる。
このように、ばんばん語るわけです。
いかがですか? さっき最初にその話に接したときと、今この話たちを少し聴いて、その句たちを再び思い浮かべてみると、もう少し鮮明に理解できませんか? はい? そういうことなんです。
それでそのようなものをよく整理して記録しておいたのが、「三位一体論」という組織神学の一部分なのです。
ですから、三位一体論! 三位一体という言葉は聖書にありませんが、このようなものをすべて整理して、「三位一体論」というものを、作っておいたわけですね。
ですから私たちはそれを学び、聖書の他の部分の理解を容易にするのです。
ですから、組織神学の勉強は、私たちが聖書を読む上で、垣根として必ず持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さあ、三神論のもう一つの重要な誤りは、三神論は三人の神々の独創性が前提とされているため、その三神のうち、どの神も「すべてを規定する存在」にはなれません。
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神々が、各自の神が、自分の独創的な仕事をするのなら、すべてを規定して包み込む、本当の、最高の神は、存在し得ないではないですか? だとしたら、三神論は各自の神の個性を認めてあげるのではなく、むしろその神々の神性を貶めることになりますよね? そうではありませんか?
父なる神様! 御子なる神様! 聖霊なる神様は、各自が完全な神様です。
そのため、この方の御心に、この方が逆らうことはできず、この方の御心をこの方がそのまま受け入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各自が完全であるから!
しかし、三神論は各自が各自の領域で、各自の独創的な仕事をするということを前提とするものであるため、どの神も完全ではありません。
その全体を規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そうでしょう? だから三神論はだめなのです。
三位一体論と三神論が違う点、もう一つ分かりました。
だんだん、だんだんと、三位一体論が三神論とどう違うのか、明確に区分されるではないですか。
そうでしょう? はい、私だけ分かっているような気がします。
ずっと! うん(笑)。
さあ、結論を結びます。
三位一体論は、父と子と聖霊の三位の神様が、各自が皆、完全な神性を持っているという、そんな理論です。
三位の神様は皆、そしてすべてのものを規定する絶対的な神です。
父の神性と、聖霊の神性が、相互統制の状態にあり、一つであるため、聖霊の神性もまた、すべてのものを規定する絶対的な神性です。
これは御子の神性の場合も同様です。
三位一体論は、三位の神様の完全な神性を規定する理論ですが、三神論は、結局三人の神々の神性の限界を露呈させる理論にならざるを得ないのです。
つまり「ペリコレーシス」がなければ、三神論になるのです。
ところが三位の神様は「ペリコレーシス、輪舞」の状態でミューチュアル・インドウェリング(mutual in-dwelling)するため、三神論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しかし各自が人格的個体だと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今、この三位一体論は、誰かが作り出したものでもなく、使徒たちと聖書の記者たちが教えたその教えを、神学的に体系化しておいただけのものです。
ですから父、子、聖霊であられる神様は、相互統制的な生を通じて、お一人の神様であり、一つの三位一体の神の歴史を、成し遂げていらっしゃるのです。
大きな骨組みは、これで捉えられたはずです。
そうでしょう?
一つの仕事! 絶対に反対があり得ない、ある仕事! その仕事を、三つの人格であられる神様が仕事をして行かれるのですが、各自が人格的個体であり、完全な神様です。
ところが、相互にミューチュアル・インドウェリング、「ペリコレーシス」しながら、ぐるぐる、ぐるぐると回りながら、一人が仕事をするかのように、そのように一つの目的と一つの実りを作り出すという意味で、「一つ」だということです。
私は今日、説明を非常にうまくやったと思うのですが、皆さんがよく理解できなかったようで、非常に残念です。(笑) 来週、私がこの原稿を差し上げますから、よく読んで、来週もよく聴いて、この三位一体論においてだけは、皆さんが揺らいではなりません。
ですから、エホバの証人にばったり会ったら、「一度やってみようじゃないか!」という程度には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して、アリウス、アタナシオス論争から始めて、ニカイア、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信条まで、ざーっと話をしてあげながら、「あんた、これ知ってる?」と少し話してあげてください! ただ、ドアを叩いても開けてあげまいと、中でおどおど、ぎゅっとしがみついて……笑。
何か変なことを聞かれるんじゃないかと思って。
実力をつけてください、実力を!
来週は、この三位一体の神様が、いかに超越(ちょうえつ)と内住(ないじゅう)!(それは非常に異なるものですが)超越と内住を維持し、そして成し遂げられ、私たちの救いと、神の国の完成に寄与されるのかを、私が少し説明して差し上げ、その三位一体の中へと招待された教会に降り注がれた、その恵みについて学んでいくことにいたします。
今日の本文をもう一度読んで、終わりにしましょう。
ヨハネの福音書14章20節。
大きな声で一緒に合読いたします。
(ヨハネの福音書 14:20)
20 その日には、わたしが父の中におり、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中におり、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中にいることを、あなたがたは知るように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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