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있는 것 중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꼽으라면 '어머니'와 '고향'이 아닐까싶다.
그래서 아무리 자식이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 앞에서는 어린아이일 뿐이고, 아무리 큰 성공을 했다 할지라도 잊지 못하는 것은 고향인 것 같다.
하물며 헤어진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한 순간 고향과 어머니와 가족들을 생이별하고 다시는 못 만날 처지가 되어 반 백년이 넘도록 소식조차 모른다면 그 가슴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문곡 김규동(金奎東) 시인, 고향과 어머니를 잃고 산 지 50년, 기다리고 기다려도 풀리지 않는 문제로 이제는 그 그리움을 풀어내는 방법은 오직 통일밖에 없다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통일 염원으로 승화시키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나무에 시로 새기는 시인, 올해 연세 일흔일곱이 되신 시인의 가슴에 차있는 그리움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햇볕 밝고 바람 시원한 주일 오후, 김규동 시인이 사시는 대치동 미도아파트로 선생을 찾아뵈었다. 그러나 댁으로 선생을 찾아 뵙기 전에 나는 아파트 앞 잔디에 앉아 먼저 선생의 시 <어머니의 손>을 펼쳐 읽었다.
깎인 나무조각처럼 /어머님의 손은 차다/야위고 지친/마디 굵은 어머님 손에/조국의 순수한 것은 쥐어져 있다/흙 묻은 궂은일과 희망이/함께 쥐어져 있다/우리들이 잃어버린/위대한 순수는 쥐어져있다/고구려의 흙바람 소리 남아 있다/외세에 물들지 않은/온갖 깨끗한 것들이/금은보석 되어 남아 있다//
평생을 하여도 다 못한/쉬임없는 근로 속에/어머님이 남겨준 것은/물질이 아니요 영화도 아닌/소박한 조선의 혼이다/이것을 지키기 위해/이처럼 숨차도록/어머닌 싸우고 또 싸운 것이다//
깎인 나무토막처럼/어머님의 손은 차다/야위고 지친 그 손에/그러나/아름다운 조선은 침묵처럼 새겨져있다// 김규동의 <어머님의 손> 전문
엘리베이터를 내려 선생님 댁의 벨을 누르자 손수 문을 열어 주시는 노 시인, 시인의 안내로 안에 드니 사모님께서도 반겨 맞아 주신다. 방 하나는 서재 겸 집필실로 쓰고 계셨고, 응접실엔 최근에 제작하신 서각 작품들이 빙 둘러 세워져 있는데 창가에 작은 탁자를 놓고 작품 구상도 하시고, 쉬기도 하시는 것 같았다.
사모님께서 내오신 차를 마시며 시인을 바라봤다. 겉으로 뵙기에는 너무나 왜소한 체구, 작은 바람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너무나 가냘퍼 뵈어 안쓰러움을 느끼게까지 하는 선생님의 외형적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어린아이와 같이 맑고 빛나는 눈의 선생에게선 간난의 세월, 파란 많은 시대를 살아오신 분에게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강인함이 풍겨져 나왔다.
9층의 아파트 창가에 탁자를 놓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새로 작업하셨다는 서각(書刻) 작품들을 설명해 주시는 노 시인은 분명 한 시대의 거인이셨다.
가까이 살면서도 찾아 뵙는 게 어렵다고 인사를 드리고, 강남문협 창간 때 축하의 글과 함께 보내주셨던 시집 <<깨끗한 희망>>을 보여드렸더니 수줍은 듯 반가워하시는 모습에서 역시 대 시인은 이만큼 연세가 드셔도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까지 잃지 않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규동 시인은 192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의사인 김하륜님과 김옥길님의 장남으로 태어나 1944년 경성고보를 졸업했는데, 그 때 재학 중 수학.영어교사였던 김기림에 사사했다고 한다. 그것은 문학인생의 예고였다고 볼 수 있겠는데 영화 감독 신상옥, 정치인 김철, 시인 이활 등은 그 때의 동창이라고 한다. 김기림 선생과의 만남은 김규동 시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그 때 사사했던 김기림 선생은 바로 1930년대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호를 편석촌(片石村)이라 했다. 함경북도 성진 출생으로 니혼대 문학예술과와 도호쿠제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3년에 이효석 등과 구인회를 창설했고, 35년엔 장시 '기상도'를 발표했으며, 45년엔 조선문학가동맹을 조직, 활동을 주도했던 시인이요 평론가로, 한국에 처음으로 한국적 모더니즘 문학운동을 선언하고, 자연발생적 시를 배격하며 주지성을 강조하였으며, 감상성(感傷性)을 거부하고 문명비평의 정신을 주장한 작가로 <태양의 풍속> <기상도> <바다의 나비> <새 노래> 등의 시집을 발표한 이론과 창작을 겸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다.
훗날 1948년 2월 김규동 선생이 단신으로 서울로 남하하게 되어 홀어머니와 두 누님과 동생의 연락이 끊겨버린 채 남한에 머물게 된 결정적 동기가 바로 김기림 선생이 왜 월북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고자 하여 서울로 찾아갔던 때문이었다는 것은 김기림 선생이 납북되어 북쪽에서 남은 삶을 살게 된 것을 생각하면 실로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것이다.
선생은 1947년 아버님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 위해 수학하던 연변의대의 수학을 중단하고, 건국 및 문화운동에 투신하였는데 이듬해 서울로 남하한 후인 48년 3월부터는 경성상공중학(현 중대부고)의 교사로 있으면서 김기림, 김광균, 장만영과 모더니즘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해 가을에 <<藝術朝鮮>>에 시 <강>이 입선함으로 사실상 등단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무직으로 전전하다가 52년 여름부터 연합신문사 문화부장, 54년 6월부터 한국일보 문화부장을 지냈으며, 57년부터 도서출판 삼중당 주간으로 있다가 60년 8월 한일출판사를 자영하게 되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만 10년 동안 작품 활동에 침묵했는데 작가가 작품활동으로는 생활도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2년부터 작품활동을 재개했고, 특히 민주화의 요구에 따라 민주회복을 위한 문인들의 선언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4.11.27. 이헌구.김정한.박연희.고은.김병걸.백락청.김윤수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선언대회에 참가했고, 75.3.15. 자유실천문인협회 '165인 문인선언'에 참가하였으며. 동회의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6년에는 앤솔로지 <實驗室>을 간행했으나 3호로 종간되고 말았다.
1979.6월에는 문동환.고은.김병걸.박태순.안재웅.이석표 등과 카터 방한 반대 데모로 구류처분을 받기도 했던 그는 8월 24일에는 박태순이 작성한 '文學人宣言文'을 내외기자회견에서 낭독했고, 80년 5월 15일에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하는 등 민주화 투쟁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84년10월16일 민주통일국민회의 창립대회에선 중앙위원이 되기도 했지만 정치 쪽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러나 선생에게 있어서 문인의 현실 참여와 우리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後半期> 그룹 조직은 잊을 수 없는 일일 것 같다.
격동하는 상황 속에서 부산으로 피난한 일군의 시인들은 현대시 모임인 <후반기> 동인을 조직하고 새로운 에스프리를 주장하는 모더니즘 시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규동 시인과 박인환, 구상, 김경린, 이봉래, 김차영 등이 주축을 이룬 <후반기> 동인들은 1930년대 이상, 김기림, 정지용, 장만영, 김광균 등이 추구하던 모더니즘 시의 방법과 정신을 계승하면서 현대문명의 메커니즘과 그 그늘을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런 <후반기>의 모더니스트들은 전란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 문명을 기계적이며 도식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김규동과 조향, 김경린 등이 보여준 모더니즘적 모색과 실험은 문학 내적인 필연성에 의한 육화된 표현을 얻지 못하고 형태주의적 미망과 주장에 사로잡혀 신기한 것만 추구하는 퇴영적 요소를 지닌다는 점에서 실패했다고 보는 바 이 또한 한국 시단이 가지는 슬픈 숙명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시운동이 우리 나라 시문학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으리라.
그런데 이러한 선생이 80을 바라보며 시작한 일은 시를 나무판에 새기는 일이란다. 50년이 넘도록 시를 종이에 써왔던 선생이 왜 새삼스럽게 이런 작업을 시작했을까.
선생은 지난 2001년 1월30일~2월4일까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통일염원 시각전'을 열었다. 3년 동안 깎고 새긴 작품 102점이 전시되었다. 선생 자신의 시가 절반쯤 되고, 나머지는 두보, 김삿갓, 정약용 같은 옛사람들의 시와 신채호, 한용운, 김소월 등의 작품에 장 콕토, 엘뤼아르, 보들레르 등 외국 시인들의 시와 문장까지 망라되었다. 특히 임화, 오장환, 김기림, 박태원 등 월북 문인들에 대해 각별한 정을 보이고 있는데 '남에서도 북에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불행한 선배 작가들의 진혼곡 삼아 파 보았던 것이다'라고 시인은 말씀하셨다.
선생이 시를 나무에 새기는 것은 50년 이산의 세월이 옹이로 박인 나무에 통일을 새기고 '규천(奎千)아, 나다 형이다.' 북에 남은 아우와의 만남을 새기는 것이요, '시대를 넘어 영원히 남아달라'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기도 한 것이다.
`통일염원'이라는 전시회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사실 선생은 <북에서 온 어머님 편지> <고향> 같은 통일지향적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해 왔으며, 지난 번 전시되었던 작품의 다수도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향한 희구를 노래한 것들이었다.
이 손/더러우면/그 아침/못 맞으리//내 넋/흐리우면/그 하늘/쳐다 못 보리//반백년 고행길 걸은/형제의 마디 굵은 손/잡지 못하리/이 손 더러우면//내 넋 흐리우면/아,그것은/영원한/죽음//
<아,통일> 전문
아직 멀었다/끝까지 가야//이 파도 넘으면/보인다 끝이//노를 저어라/팔뚝에 힘을 넣자//어둠이 깊어야/빛살 찬연하나니.// <희망> 전문
선생이 토해내는 '통일'에의 절규, 그리고 목놓아 노래하는 '희망'의 세기가 언제쯤 활짝 열릴까? 그래서 선생의 작업이 더 급해지는 지도 모른다.
시가 무엇인가. 일상이 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관념이나 상상의 세계만이 아닌 우리의 생활 속에서 접하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시가 되어야만 시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선생의 시야말로 일상이었다. 그런데 시를 즐겨 읽고 외울 뿐 아니라 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더욱 시가 생활 속에 들어가는 것이 될 것 아닌가.
처음엔 이런 전시회까지 생각지는 않으셨단다. 그런데 서양화가인 며느리의 권유에 지고 마셨단다.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한 두 개씩 새기다 보니 한 100개가 됐어요. 애초 전시회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는데 며늘아기(서양화가 안보숙)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쑥스러움도 무릅쓰고 전시회를 갖게 된 거지요." 하신다.
지난 전시회의 작품집도 며느리인 안보숙 화가의 작품이란다. 직접 사진을 찍고, 디자인을 하고, 출판까지 했다고 한다.
작업은 남양주의 작업장에서 하시지만 선생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이곳에도 다음 전시회를 위해 3개월 동안 작업한 신작 서각(書刻) 작품들이 여러 점 놓여 있다.
시를 직접 쓰고, 그것을 다시 서각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번 전시회를 보고 쓴 한 칼럼에는 '혼사를 앞 둔 처녀가 낭군을 그리며 섬섬옥수로 비단 폭에 한 올 한 올 새기듯이 시인도 그랬다. 비단 대신 잘 다듬은 나무판이고, 섬섬옥수 대신 80고개를 바라보는 투박한 손놀림이지만 어찌 처녀의 정성에 못 미칠까'(2001.2.3.대한매일.김삼응 주필)라고 표현한 것처럼 노 시인의 작업은 그만큼 정성으로 하늘의 문을 여는 통일 염원이 담긴 성스러운 작업이었다. 어쩌면 시를 나무판에 한 글자씩 새겨 '시각'(詩刻)한 102점의 작품 속엔 지나간 반세기동안 다 못 흘린 눈물과 한숨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번 전시회 작품 '역사적 인간'이 뜻하듯 '오! 역사적 인간이여 그렇다. 역사란 행동이다.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행동이 없는 시를 생각할 수 있을까? 실천하는 문학은 시대를 넘어 남으리' 시인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노 시인이 나무를 만지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쯤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을지문덕 장군 등의 상을 깎아서 주변에 나누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팔만대장경을 보고는 `시도 나무에 새겨서 길이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는 것이다. 그래 3년 전부터 시를 나무에 새기는 작업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먼저 붓으로 화선지에 글씨를 쓰고는, 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문질러 반반하게 만든 다음, 글씨가 쓰인 화선지를 풀칠해 붙입니다. 그리고는 글씨에 따라 나무를 판 뒤 물로 씻고 채색한 다음 라커 칠까지 마치면 작업이 끝납니다. 이렇게 작품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 평균 1주일 정도 걸립니다. 물론 별다른 사고 없이 계획한 대로 일이 진척되었을 경우에 그렇지요."
시인은 또 말한다.
“버린 나무가 숱합니다. 처음에는 느티나무나 대추나무처럼 단단한 나무를 썼는데, 누군가 그것이 `자연훼손'에 해당한다고 지적을 해서 깜짝 놀란 다음부터는 해송이나 홍송 같은 수입 나무를 씁니다. 목질이 무르기 때문에 날카로운 획을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나은 것 아니겠어요?”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도 '자연훼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당장 재료를 바꿔버리는 노 시인의 마음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깨달음을 준다. 그나마 선생이 이런 작업을 하는 재료는 좋은 나무를 잘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재소에서 잘라 쓰고 남은 조각들을 이용하신다고 한다. 해서 처음에 제재소로 나무를 주우러 가서는 괄시도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지금은 신문이나 T.V에서도 보도가 되고 해서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주고자 하지만 구박도 수모도 많이 받았다는 말씀을 들으며 선생을 다시 바라보니 아닌게 아니라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 같은 모습에서 그들이 어찌 대 시인이요, 한국 민주화 역사의 중심에 계시던 분임을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싶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또 하나 종이에 쓰는 시와 나무에 새기는 시가 어찌 같을 수 있으랴. 시를 길게 쓰면 그만큼 많이 새겨야 하니까 가능한 한 말을 줄이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말의 소중함, 말을 아껴 써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었다”는 노 시인,
"원고지에 시를 쓰는 것은 쉽지요. 그러나 나무판에 새기다 보면 한 글자를 파는 것도 너무 힘이 들어요. 그러다 보니 말을 줄이게 되지요. 필요 없는 말을 되도록 줄이는 것이지요. 시는 힘들게 쓸수록 짧아지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80이 되어서야 얻은 거지요. 원고지 여섯 장짜리가 몇 줄이 되어버린 것도 있어요."
선생에게서 말을 절제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가르침을 받는다. 종이에 쓸 때보다도 더욱 말을 아끼게 된다는 선생의 말씀은 곧 우리가 너무나 쓸데없는 말들을 헤프게 하고 산다는 뜻이 아닐까.
'피카소'를 존경하고 좋아하신다는 시인, 그래서 시인은 피카소 초상을 벽에 걸어놓고 그 아래에 의자를 갖다놓았는데 자주 그곳에 앉아있곤 하신단다.
앞으로의 계획을 여쭤 보았더니 우리 시대 생존 작가와 시인들 작품을 중심으로 다시 100점쯤을 제작해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시란다. 그러면서 '이제는 내 유작전을 준비하려 합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도 전시를 하면 좋을 것 같고요." 하신다.
문학평론가 이동순이 전시회를 보고 서울경제신문에 썼던 말이 떠오른다. "한 시인이 진정한 새로움에 대한 깊은 갈망을 가지고 매우 커다란 방법적 변화를 실재로 이루었다면 이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육필로 적은 자신의 시를 직접 나무에 새기는 노 시인의 손끝에서 정녕 통일의 기운은 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북에 계신 가족들을 찾아볼 생각을 해보셨느냐고 했더니 다시 헤어질 수 있는 용기가 없어 찾을 생각도 못한다는 말씀에서 얼마나 아픈 가슴을 누르고 살아왔을까를 짐작하게 된다. 그래서 선생은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유일한 방법인 '통일'을 그토록 염원하는 것인가 보다.
고향엔/무슨 뜨거운 연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을 두르고 돌아앉아서/산과 더불어 나이를 먹어가는 가을/
마을에선 먼 바다가 그리운 푸플라 나무들이/목메어 푸른 하늘에 나부끼고//
이웃 낮닭들은 홰를 치며/한가히 古典을 울었다//
고향엔 고향엔/무슨 뜨거운 연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규동의 <고향> 전문
시인이 시를 짓듯 시각도 글씨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김규동 시인, 그래서 글씨를 쓰고 또 새기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면서 쓰고 새기느냐가 글씨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시인, 선생은 이러한 작업을 '시인의 몸부림'이요 '시를 쓰는 몸부림'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몸부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떠나오는 내게 '문단에 휩쓸려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문학은 문학대로 하면서 문단활동도 해야 하는 것'이라는 뼈있는 말씀을 주심은 요즘 우리 문단 일각의 복잡한 소문을 알고 하시는 말씀일까. 아니면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온 순전한 느낌일까. 헤어짐을 당해낼 용기가 없어 차라리 찾지도 만나지도 않는다는 노 시인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칼끝에서 그가 민주화의 오늘을 맞은 것처럼, '희망'도 '통일'도 '고향'도 '어머니'도 모두 모두 살아났으면 싶다. 일어서려는데 선생의 서재에 걸려있는 서각된 시 '삶'이 자꾸 눈을 끈다. 선생께서 그곳에 서시더니 시를 읽어주신다.
'네 가슴에/내 가슴에/아직도 흐르고 있는/이 강물은 무엇이냐/푸른 하늘과/부드러운 흙은 무엇이냐/아, 이별들은 무엇이냐/이 눈물은 무엇이냐/달빛은 무엇이냐/이 한은 무엇이냐/
선생의 시를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힌다. 삶이란 정녕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