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미작대기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가을로 기억된다. 아버지를 따라 동산 너머 뒷들 논으로 갔다. 논바닥에는 전날 묶어둔 볏단들이 어서 일으켜 달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게 높이보다 훌쩍 높이 쌓아 올린 볏짐을 지고서 집으로 향했다. 시내를 건너고 모롱이를 돌아 오르막을 오르면 아버지의 가쁜 숨소리가 온 들녘에 퍼지는 듯했다.
“아버지! 나는 언제 어른이 돼요?”
“응 밥 많이 먹고 키가 크면 된다.”
나도 볏짐을 져보고 싶었다. 짚 멜빵으로 깻단 여남은 단을 지고 첫걸음을 떼니 몸이 지그재그로 비틀거렸다. 아버지는 “아직은 힘들지.” 하며 몇 단을 내려주었다.
며칠 후였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와아룡, 와룡!” 탈곡기 소리가 울렸다. 나는 볏단을 나르고, 아버지는 짚북데기를 끌어내며 벼알을 쓸어 모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타작은 끝이 났다. 방문 앞에 쌓인 벼 가마니를 보며 저녁을 먹으면 가족이 함께 고생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했다. 아버지의 지게도 타작을 도왔다는 듯이 추녀 끝 저만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푸근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초가이엉을 엮고 있던 날이었다. 골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동네 ‘광평댁’ 최 씨 어른과 청년 두 사람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어른은 때 묻은 장부를 들추며 아버지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청년들을 시켜 벼 가마를 마당으로 옮기게 했다. 창대로 찔러 보고는 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금세 대저울로 달아 리어카에 싣고는 마당을 빠져나갔다. 아버지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우리 것인 줄로 알았던 벼 가마들은 우리가 두고 먹을 양식이 아니었다. 동구를 힘들게 오르던 아버지의 지게에는 볏단과 함께 장리(長利) 빚이라는 짐이 지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봄여름, 가으내 엎드려 일했던 뒷들 논이 소작논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결혼하고부터 아들을 바랐던 아버지는 내리 딸 넷을 낳자, 실망이 컸던 것 같다. 그나마 둘을 홍역으로 잃고부터는 상심하여 한동안 가정을 보살피지 못했다. 그러느라 농지개혁으로 분배받았던 서너 마지기의 논밭마저 지켜내지 못하고 팔아야 했다. 마음을 잡은 것은 형이 태어나고부터였지만 그때는 살림이 더 힘들어져 빚을 지게 되었다고 들었다. 선산 자락을 일구어 논밭으로 만들고, 누에치기와 가마니 짜기로 소득을 올리기도 했지만, 식구들 먹을 양식조차 부족했다. 결국엔 입 하나라도 덜어보려고 누나를 마을의 부잣집 부엌일을 돕는 아이로 보냈다.
어느 날 들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여느 때보다 지쳐 보였다. 지겟작대기가 자꾸 미끄러져서 쇠를 갈아 끼워야겠다며 연장통을 가져오라고 했다. 곁에서 물미*를 갈아 끼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게 아버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익상아! 너만큼은 공부시켜서 꼭 눈을 뜨게 해주고 싶구나.”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막내인 나 하나라도 중학교에 보내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싶어 했던 아버지 덕분에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이웃집에 살던 목수에게 부탁해서 나에게도 지게를 만들어 주었다. 내 지게에는 땔감이나 꼴짐이 담겨 있었을 뿐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넘어져 가는 집안을 꼭 일으켜 세우고 싶은 아버지의 바람도 지워져 있었다는 것을.
고등학생이 되자 내 짐은 더 무거워졌다. 왕복 네 시간 거리를 기차로 통학했다. 토요일이면 지천역(驛) 밤숲에서 놀다 오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유혹을 받았지만, 입학 때 받은 장학금 혜택을 이어가야 한다는 절실함에 한눈팔 새 없이 삼 년을 오롯이 긴장으로 보냈다. 2학년 때는 여행비가 없어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아버지를 불러 설득했지만, 아버지는 “취직해서 네가 돈 벌면 제주도에 가볼 기회가 있지 않겠냐?”며 달랬다. 친구들이 여행을 간 동안 나는 농사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말없이 논바닥에 엎드려 일만 했다. 불현듯 오래전 장리 빚을 갚던 날이 떠올랐다. 언젠가 나를 불러 눈을 뜨게 해주고 싶다고 했던 아버지의 말도 환청으로 들려왔다.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아버지가 지게 작대가 되어 나를 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들녘 속으로 모든 서러움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애쓴 끝에 졸업 후 스무 살에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복직해서 삼 년이 되던 때에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셨다. 장례를 마치고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서니 처마 밑에 아버지가 평생 졌던 지게가 기력을 다한 듯 서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있던 작대기를 주워 지게를 받쳐주니 양어깨 위로 내가 새롭게 지고 갈 짐의 무게가 가늠되었다.
그 후 일터에서 무거운 측량기를 메고 산야를 누빌 때도, 시간이 흘러 가장(家長)이 되어 감당하기 버거운 짐을 지고 빙판길을 걸어가야 했을 때도 잊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볏짐 가뿍 담긴 지게를 지고서 물미작대기를 짚으며 뒷들 비탈길을 오르던 아버지가 보였다.
*지게를 버티는 작대기 끝에 끼우는 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