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던포엠 칼럼>
자유로운 바람꽃의 시혼과 서정적 개아(個我)
-황성운 시인의 「나에게 띄우는 편지」그 절제의 미학
엄창섭(김동명학회 회장, 모던포엠 주간)
1. 생명기표의 통신(通信)과 감성의 시학
그토록 간절함 기대 속에서 밝아온 한 해(年)가 역사의 뒤안길로 퇴행(退行)하는 일몰(日沒)의 시간대다. 차지에 그 쓸쓸함 뒤에 주위의 소중한 이들과 안부를 나누며 정(情)을 나누는 행위는 아름다운 오랜 날, 우리 모두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모름지기 창조하는 영혼은 보다 ‘생명적인 활력(gold brain)’이 넘쳐나기에 더없이 위대한 까닭에 삶의 일상에서 순수서정성을 눈부신 존재의 꽃으로 작열시키는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아니하는 암울한 현재성에서 갈등과 모순의 이분법에 기인(起因)한 마음의 깊은 상처(trauma)로 좌절한 이들에게 밝은 미래의 비전을 일깨워 줄 중차대한 소임을 담당하여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문인의 시대적 소임을 엄숙하게 수행하면서 날(刃) 푸른 존재감으로 밝은 미래의 지평을 따뜻한 감성으로 열어가는 경기도 시흥출생으로 시집 『나에게 띄우는 편지』(고글, 2018)를 묶어낸 황성운 시인은 ‘대륙의 심장’에 강직한 충정(忠情)과 자존감을 지닌 실체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만남의 소중함’을 평소 거론하는 평자이지만, 모처럼 한국의 대표 파워 불로거인 배선희 시인을 통해 근간에 ‘풍수마루의 주인으로 『운명을 다듬다』(주)매경출판, 2016)의 저자인 일봉(日峰, 김경우)선생’을 만난 것처럼, 연규석 시인과의 또 그런 연(緣)으로 따뜻한 가슴의 황성운 시인과 그렇게 교감(交感)을 나누게 되었다. 그 자신이 일상의 서정성을 ‘눈부신 존재의 꽃’으로 형상화시킨 시집의 자서(自序)인 「시인의 말」에서 “살아오면서 간간히 주워 모은/감정의 조각들을 부끄러운 마음으로/여기에 풀어 놓는다.”라고 술회하며 담담이 풀어놓은 진정성도 그렇지만 그의 서시(序詩)는 “입김을 불어 넣어/세상 밖으로 내민/진실의 꽃.(詩)”에서의 시적 변명처럼 전율(戰慄)을 안겨줄 이미지의 형사(形似)는 아득한 성채(城砦)로 견고하게 응축되어 그 진정성은 새삼 이채롭다.
또 하나 언어공해가 심각한 현재적 일상에서 피폐된 영혼의 정화(淨化)를 위해 생명기표로, 고뇌의 밤을 지새우는 뜻있는 이와의 소중한 만남은 신선한 감동을 불러주기에, 불확실한 연계층위에서 아득한 기억들과 자잘한 시적 질료(質料)를 불러 모으고 작동시켜 가슴 저며 오는 서정적 미감의 실체와 작위(作爲)는 새삼 다정다감하다. 일단 시적 분할과 통합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현존성에서 시집 『나에게 띄우는 편지』의 목차 구성은 가끔은 서로 간의 안부를 묻는 일상의 항해(航海)처럼 닻을 내리는 현재진행형으로 「제1부. 사랑의 역사」에서 「제8부. 그날이 오면」이라는 기대감의 변형에서 여백의 틈새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치밀한 연계성을 지탱하며 비교적 짜임새 있게 직조(織造)된 결과물의 빛남이다.
비교적 조금은 긴 호흡으로 “다른 사람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본인이 그 그림에 대해 어떤 의미를 담아 혼신의 노력을 다했는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면, 당신은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그 그림은 바로 당신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림)”에서 회화적 처리에 의한 정신풍경화의 단정적인 일회성(一回性)은,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화자(persona) 자신의 당당한 자존감을 통해 투명한 의미망의 확장은, 마치 “무명 적삼 휘감은/간절한 합장(合掌)//울어대던 귀뚜리/숨을 멈추니//달려가던 달님도/발길 멈춘다.(염원)”의 절박하고도 ‘간절한 합장’을 통한 그 발원(發願)이 ‘한민족의 피와 혼의 상징인 단군(檀君)이 실존인물로 새롭게 고증되고, 보다 긍정적으로 우리의 상고사(上古史)가 권력의 군림이 아닌 교화(敎化)의 역사’로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워준 신선한 충격(衝擊)은 한순간 기이함으로 변형되다 ‘멈춤의 통로’를 거쳐 합일에 이르는 현상(現象)이다.
이와 같이 황성운 시인의 “잊을 수 없어/밤 새워 펜 끝으로 끄집어낸/그리움의 조각들이 쌓이고 쌓여/끝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때/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당신 우리는 그렇게/하나가 되어/거칠고 험한 세상을 헤쳐 나왔지(사랑의 역사)”에서 발현(發現)되고 지속되어 ‘정화(淨化)의 매개인 자기희생의 눈물’에 의한 교시적(敎示的) 의미는 마침내 극대화로 잇닿는다. 따라서 “책의 바깥은 없다.”라는 데리다의 지론처럼 책은 간접체험을 통해 새로운 지적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이기에 그 그늘은 넓고 깊어 피폐한 영혼을 정화시킬 뿐더러 감동의 회복과 미적 주권을 확립시키고 내적 충만인 사유의 시간을 지닐 수 있는 인자(因子)인 까닭에, 그 자신의 시집 『나에게 띄우는 편지』는 즉물적 현상을 따뜻한 감성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긍정적으로 인식하라는 자기인식의 교시(敎示)를 수용하고 있다. 한편 그의 시집은 ‘일상의 개아에 순수서정성을 융합(融合)시키는 진술시와 묘사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나는 홀로/타다 남은 동강이 되어/오늘도/비렁길을 걷는다(漫行)”에서 다시금 입증되듯이 비로소 시적 상상력과 발상의 특이성은 놀랍게도 ‘해조음이 바람을 타는’ 지극히 슬로 라이프적이어서 초자연과 인간의 접점(接點)을 통한 작위(作爲)에 해당한다.
그렇다. 에밀 슈타이거(E.Steiger)는 서정의 본질을 회감(會減)으로 정의하면서, ‘시인은 자연을 회감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고 제시하였듯이, 어디까지나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서정감은 타자 중심의 사유를 관통(貫通)해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유추(類推)할 때, 비로소 서정이 양면성을 지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같은 연고로 황성운 시인이 충동적으로 ‘한 순간의 격정과 끓어오르는 분노에 평정을 안겨주고 감미로운 심적 현상을 자극시켜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그의 시편에 대한 지극한 관심사(關心事)야말로, 또 하나의 축복이고 깊은 상처로 고통 받는 영혼의 치유(治癒)에 해당한다.
2. 인식의 전환과 사유(思惟)의 깊이
일단, 심층적 논의에 앞서, 랜섬(J. C Ransom)이 “시는 자연미의 표현이며, 상상이라는 훌륭한 기능이 시의 작인(作因)이다.”라는 지적처럼, 꿈의 시학이라 일컬어도 결코 과장되지 아니할 그 자신의 내면인식은, 비교적 푸른 식물성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으로, 아득한 기억 뒤편의 잊혀 진 황홀함에서 비롯된 행복한 언어의 집짓기에 해당한다. 그 같은 연유로 그만의 담백한 시격(詩格)은 따뜻한 감성에 의한 시적 정조(情調)의 특이성은 눈부시다. 이 점에 있어 ‘최후의 절창(絶唱)을 위하여 날카로운 가시에 영혼을 주고 선혈(鮮血) 흘리는 생리(生理)’를 결단코 거역하지 아니하고, “잊어야지/잊어야하지/그럴수록/가슴을 찔러대는 당신은/가시나무//나는/당신을 찾아 헤매는/가시나무 새.(가시나무 새)”를 통해 압도하는 신선한 충격은 자연의 순치(馴致)를 쫓고 순응(順應)하는 바람꽃의 영혼(靈魂)이다. 때문에 절박한 삶의 현상에서 요청되는 것은, 사유하는 자의 삶과 관심사이다.
그 같은 연유로 프랑스의 신비주의자인 기욤 드 생티에리가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바로 자기 안에 그 모습을 비추는 자의 찬란함에 정복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지만, 무엇보다 명백한 것은 인간은 점진적으로 영적 상승을 통해서 동물적 상태에서 이성적 상태로, 다시 또 이성적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이동할 수 있는 존재이다. 까닭에 “불현듯 스친다./기세 좋게 타올랐던 불꽃의 종말//나는/하얗게 타버린 한 줌의 재일까?/타다 남은 동강일까(어느 순간)”의 전문이나 또는 그의 시편 <한 마리 새가 되어>에서의 충동은 마치 「불과 물, 공기」를 통해 세상을 해석한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욕망은 형상을 만들고, 피조 된 형상은 다시 욕망과 조응한다."는 진술처럼 비록 인간에게 새처럼 날 수 있는 날개는 없을지라도 하나의 욕망, 그 열정은 끝내 새로운 비상의 나래 짓인 꿈을 지향해 이처럼 놀랍게도 현상학적으로 변주(變奏)되고 있다.
특히 매순간 존엄한 삶의 생존을 위해서는 자신을 물음 앞에 겸허히 놓아 볼 일이기에 그 자신의 표제 시(標題 詩)인 <나에게 띄우는 편지>는 “한 곳에만/머물 수 없지 않느냐/마음에 담아가야지/소유를 탐하는 그 순간/행복은 달아날 거야//사랑하며 지내기에도/짧은 삶인데/무엇을 탐하느냐/떠날 때는 빈손인 것을”에서와 또 다른 시의미를 응축하고 있다. 까닭에 스스로의 삶을 반추(反芻)하면서 진정한 가치와 의미의 추구를 위하여 끊임없이 지혜롭게 자성(自省)의 시간으로 다스리는 일상은 못내 아름답기에, ‘사랑하며 지내기에도 짧은 삶⤍떠날 때는 빈손’이라는 그 같이 빛나는 잠언(箴言)은 끝내 ‘어떤 내일을 맞이하고 삶의 가치를 무엇에 둘 것인가?’라는 물음과 결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삶의 처소에서 ‘일상의 통섭(通涉)과 온전한 화평을 위한 상생(相生)의 해법’을 모색한 끝에 황성운 시인은 그 자신의 결정체(結晶體)를 시적인 작위(作爲)로 빚어내어 암울한 시간대에서 눈물겹게도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시키듯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시대적 소임을 엄숙히 수행하고 있다. 오랜 날 그 자신이 본질적 고독 앞에서 참담한 한국전쟁(The Korea War)의 그 아픈 상흔(傷痕)을 매개로 한 끝에 ‘대륙의 심장’에 각인(刻印)시켜 민족적 자긍심을 당당하게 지켜내고 “인적이 끊어진 지 언제런가/쓰러져가는 비목은/녹슨 철조망에/아직도/통한을 토해내고(휴전선의 밤)”에서 나직한 통곡의 애국충정을 숨죽이며 신음하는 현상은 처연하다. 따라서 그 자신의 집념(執念) 또한 법정 스님의 유지문(遺志文)처럼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는 관점에서 기인(起因)하기에 소외된 인간관계층위의 회복을 위한 이 시대의 ‘진정한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역할·분담’이 다시금 요청된다.
3. 시적 교감(交感)과 시인의 시대적 소임
모름지기 삶이 공존하는 공간과 시간대에서 생명의 촛불이 다 연소(燃燒)되기 전에 ‘인간과 진리, 그리고 자신에 대해 열정을 쏟던 젊은 날의 순수한 감동’을 불러내려는 그의 시혼은 투명하고 한층 뜨겁다. 존재감을 회복시키는 성정(性情)이 지극히 선하고 어진 황성운 시인의 경우, 보편적으로 밝은 미래사회를 추구하는 일관성을 지닌 노력은 긍정적 삶의 눈부신 편린(片鱗)에 견주어지기에 꼬인 전통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항시 정신기후와 시적 토양을 알맞고 풍요롭게 조성하는 좋은 시인임은 무론하고, 독자의 시대 요청에 부응하며 어느 만큼의 만족을 감동으로 이행시키는 존재이다. 그의 시집 목차 「제4부. 봄의 서곡」에서 <목련>, <낙화>, <들꽃>, <연꽃>, <국화>, <쑥부쟁이> 등에서 일률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가장 지상적이며 여성상징인 <꽃>’과 총체적 의미로 비중 있게 관심을 기울인 시편을 주의 집중하면 다행스럽게도 날아오름이나 새로운 만남과 조화로 단절, 결핍에서 오는 안타까움을 해소할 수 있다. 이처럼 황성운 시인의 시편을 통해 확인되듯이,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는 귀향자(歸鄕者)로서 불안한 우리의 삶에 종종 신선한 감동을 충격적으로 안겨준다. 까닭에 그의 시편을 ‘가장 행복한 심성의 최고 열락을 눈부신 언어의 기록으로 평가’해도 결코 과장되지 않을뿐더러 따뜻한 응시(凝視) 통해 언어의 절제된 힘과 내면적 체험의 깊이를 형상화하여 절절한 삶의 애환을 일깨워 혼돈에의 방황을 끝내려는 역동성은 한층 더 음조가 낮고 정조가 다감(多感)하여 눈물겹다.
차지에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신비이며,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기에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로 인식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표현론자(表現論者)는 문학을 작가의 내면인식에서 꿈틀거리는 심리적 충동이나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은 유념할 바이나 “전원 교향곡의 선율이/비 오는 날의 수채화처럼/바람을 타고 색칠한다//하늘에서 용이 내려와/에머랄드 빛 바다에 흩뿌려 놓은/환상의 보석(하롱베이)”에서와 같이 그의 시적 모티프는 담백한 시격에 맞물려, 시적 상관물(相關物)은 감사하게도 그 자신이 집착하며 몰두한 또 다른 관심사의 예이다. 비록 19세기 황폐화하는 독일의 근대화를 한 세기 앞당기며 민족혼을 일깨운 피히테(Johann Fichte)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논고에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충격적인 교훈을 일깨워주었기에, 비록 비생산적인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참담한 현상에서도 황성운 시인은 시적 상상력을 확장시켜 “때로는 막아서는 돌담도/때로는 황량한 들판도 있겠지만/삶은 속도보다 방향이 아니던가.(바람길)”의 보기처럼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며 ‘지혜⤍지식⤍지성⤍영성’으로 변모시켜 나아가듯이 도시발전의 지속화(持續化)에 비로소 생각의 속도를 견주어 곰씹어 볼 바다.
또 한편 총체적으로 우리가 직면한 위기적인 상황은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할 때야 극복할 수 있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인류의 역사는 혼돈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해 왔기에, 그 자신이 하찮은 미물에게도 깊은 배려와 분별력을 지니고 “찬 서리에 속절없이 떠나고//외로이/멍들린 마음 달래며/고독과 씨름을 합니다.(까치밥)”를 통해 무엇보다 ‘세심한 나눔의 정(情)’과 너무도 고귀한 정신적 유산을 배경지식(schema)으로 기억 흔적에 담아두어야 할 본말(本末) 그 자체가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이다. 모든 강물이 합수하여 ‘생명의 본원(本源)’인 바다(海)에 이르러 일체의 대상을 끌어안고 포용하는 수성(水性)의 대의도 끝내 눈부신 시어로 빚어진 몸의 시학이며 작열하는 존재의 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과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인 황성운 시인에게 거는 소박한 기대감이라면, 홀로 깊은 사유를 합리적으로 의식하되 피멍든 손으로 움켜잡은 팽팽한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고, ‘創造者의 이름에 합당한 것, 신과 시인 말고 없다.’는 그 역설처럼 영감의 비의(秘義)를 명백히 밝혀내는 ‘순수한 서정시의 초병(哨兵)’으로서 시대적 소임을 온전히 실천궁행하되 의미망을 확장하는 정신작업에도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