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보내준 시를 읽다가
김선미
한 정거장을 지나쳤어
2가는 되돌아가는 길이고 3가는 앞으로 가는 길
가까운 곳으로 길을 잡는다
뒤돌아 가는 길은 잘못 산 것 같아 왜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단정하고 아름다운 임신한 여자가 배를 허공에 내밀고 약국 문을 열기 시작하고
찢겨진 자동차 앞 범퍼를 길가에 세워놓고 남자가 땅에 바짝 엎드려 테이핑을 하고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들고 길에 서서 마시는 사람 걸어가면서 마시는 사람
무단횡단 하는 사람
이것은 모두 타락 이후의 일이지
나는 손가락으로 가방을 타닥타닥 두드리며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의 성기는 다르다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는데
이전은 성기를 손가락처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어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있었다고
이후는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절제되지 않는 형식이어서
법이 필요해졌노라고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다 믿지 않는 건 이유가 될 수 없다니
나는 성기대신 손가락을 차례대로 하나씩 접다가
펴보다가
손가락 하나를 펴 손가락질을 하다가
주머니에 넣고 빼고 하다가
법률은 이렇게 생기는구나
은총이 눈처럼 흩날리며 내려오면 좋겠다 좋겠다
가을이 깊도록 날은 따뜻해서
단풍잎은 손가락을 접은 채 말려 들어가고
2023년< 시사사 >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