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갑내기인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은 늙음을 ‘나이 듦’이라 점잖게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굳이 ‘늙음’이라 했다. 두 표현 사이에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약간의 인식차가 있지만,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나이 들어가는 것이고, 늙어가는 것이고, 곧 병들고, 끝내는 죽어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건강한 몸을 물려받은 때문인지 내게 전혀 말을 걸지 않던 내 몸이라는 놈이 ‘고희(古稀)’라는 70을 넘어서자 “너 나에 너무 무심한 것 아냐!”하고 속사포같이 불만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사실 70년간 켜켜이 쌓인 육체적 피로는 그동안 충성심을 발휘하던 내 몸을 화나게 한 것이다. 거기다 촌놈이 50년간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낮선 서울생활을 해오면서 쌓인 과도한 스트레스마저 겹치자 심신이 모두 용량초과 상태에 빠진 것이다. 지난 해 겨울 전립선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올 초에는 머리에 통증이 있어 정밀검사까지도 받아야만 했다.
대학 때 기숙사[正英舍] 동기 박재갑 국립암센터 전 원장은 2년 전 만날 때는 “100살 전에는 죽으려 해도 의사가 죽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하더니 올 신년모임에서는 120살이라 고쳐 말한다. 이제 돌연사가 아닌 이상 죽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나의 상황은 그래도 양호한 모양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병이 일찍 찾아오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TV에는 간혹 머리를 빡빡 깍은 소아암 환자도 보이고,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현대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마를 안고 살아가는 안타까운 사람도 소개되곤 한다.
그 동안 식민과 전쟁, 가난, 민주화의 와중에서 생존을 위해 달리기에만 급급했던 한국인들에게는 육체적 피로는 있었지만 나름 희망은 있었다. 근대화로 풍요한 여건에 노년에는 남부럽지 않는 안락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돌아가는 걸 보니, 나이 들어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옳다. 최대 축복으로 찬양되던 ‘장수시대’로 진입했지만 오히려 불안만 커져간다. 옛날에는 40대 후반만 되어도 최소한 가장, 혹은 사계의 원로로 대접받았고, 적당한 나이에 죽어서 다들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대접은커녕 영락없이 천대의 대상으로 내몰린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고교 동창 김민영이 지은 [말의 황금가지](최선의삶, 2003)라는 책에는 “가족이라는 영어단어인 ‘Family’의 어원은 아버지, 어머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Father and Mother, I Love You)라는 의 각 단어 첫 글자를 합성한 것이다”라 쓰여 있다. 그런데 이제 노인은 가족에게 마저도 외면당하고 있다. 법륜 스님은 「행복하게 나이 드는 법」이라는 제목의 모 신문 인터뷰에서 “떨어지는 낙엽도 예쁘듯 늙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깨고, 남한테 신세졌으면 좀 갚고, 움켜쥐고 집착한 것 있으면 훌훌 털고 베풀면서 살아야한다”고 노년들에게 충고하였지만, 참으로 실상과 동떨어진 우원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많은 주름에다 빤짝이는 대머리, 검버섯으로 얼룩진 얼굴, 구부정한 자세, 그리고 뒤뚱거리며 걷는 걸음걸이, 그것들이 어찌 예쁘다 할 수 있을 것이며, 생명이 있는 것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진대, 그 앞에 두렵지 않고 왜소해지지 않고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긴 노년기간 이 세상 누굴 믿고 거의 바닥난 잔고마저 빼내서 베풀면서 살아가라는 말인가! 우리나라 노년 중에 그런 사람 몇 명이나 될 것인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자포자기와 자살로 이어지기도 하는 데도 말이다. 어쩜 이 시대 노인에게는 희망이란 절망의 동의어처럼 들리는지도 모른다. 겉과 속, 바깥과 안에서 이 두 단어는 명칭을 달리한 채 장소와 상황에 따라 출몰하기 때문이다. 속은 끓더라도 겉은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우리는 한마디로 노인 우울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어느 것 보다 무서운 것은 ‘늙음’이란 단어다. 사람이 가진 귀중한 것 모두를 소리 없이 빼앗아가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늙음은 꿈만이 아니라 애써 가꾸어 놓은 종생의 성과마저도 우리로부터 빼앗아간다. 인간적 오만은커녕 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려 쌓은 것들이 바벨탑처럼 무너지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현대’라는 시대가, ‘현대인’이라는 인간군상이 갖는 파괴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계승할 시대가 아니고, 기성세대는 극복해야 할 존재로서 인식될 뿐이다. 그렇다고 그런 조류에 저항 없이 순응하는 것만이 능사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지난 일요일 아침 신문을 읽었다. 늙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가수 박인희의 귀국 환영회에 소위 ‘청춘이 끝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모여들었다는 기사였다. 박인희를 처녀, 아니 소녀로 여전히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고 하였다. ‘개저씨’라 폄훼 당하며 회고할 자격마저 빼앗긴 늙은이들에게도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이를 하나씩은 품고 살아가는 가는 모습이 이 시대의 조류와 대조되어 사뭇 애잔하다.
그러나 이런 가슴 속 불덩이를 다스리는 법 또한 연습해야 하고, 늙음 자체도 선선히 받아들여야 하게 되는 일도 순리라 여겨진다. 요즈음 ‘지공거사’가 되어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다보니 지하철에서 내게도 노년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일들이 더러 생기기도 하고, 보이기도 한다. 누님 같은 여인이 가끔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보고 놀라다가 이제는 체념하게 되었다. 노인석 위에 걸린 요실금 팬티 광고는 나의 나이를 새삼 헤아려 놀라게 만든다. 선우용녀(1945년생)에서 유지인(1956년생)으로 다시 최란(1960년생)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저 광고 말이다. 특히 최란은 저 유명한 농구 슈터 이충희의 부인이니 아직 노인이라기엔 까마득한 나이가 아니던가! 이런 변화를 보고 체험하면서 내가 늙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만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니 일부러 꼿꼿한 체 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꾸미지 않는 제 모습, ‘이렇게 늙었습니다’라고 보여드리려고 있는 그대로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화장기 없는 주름진 맨얼굴의 박인희가 신문지상에서 환영받는 걸 보니 말이다. 그래 늙음을 그대로 보이는 것이, 그렇게 늙는 법을 나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바른 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칼자루 진 것은 늙은이는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젊은이도 아니다, 시간일 뿐이다”라고 누군가 한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같은 시대를 호흡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늙고 어림의 구분을 따진다는 것은 딱히 현명한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얼마나 그 사람이 진취적이고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가가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름 자기 인생관을 정립한 이후 크게 변하는 것도 사실 없다. 우리는 시간의 변화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나이의 변화는 그저 나무의 줄기의 마디나 나이테의 수자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늙고 젊었다는 편견을 입히고 상대방을 위축되게 만드는 시선을 보내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자 어리석음 같기 때문이다. 백발에서 남다른 경륜을, 대머리에서 정연한 논리를 느끼면 어떨까!
거의 30년 전에 발간된 서울대 사학과 동창회 명부를 우연하게 보게 되었다. 1947년 1회 졸업생부터 30년 후인 1977년에 입학한 35회 ‘학생’들까지의 명단을 보니, 참으로 평등한 것이 죽음이라는 선물이었다. 학계를 호령하던 쟁쟁한 학자도, 경력 난에 아무 표기 없는 그저 그러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생명도 하나의 법칙이 있어 지속하려는데, 이를 중단시키려들면 무리가 따른다. 세상이 지속가능하려면 태어남만 있어서는 유지될 수 없다. 태어남은 있는데 죽음이 없다면 이치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문제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이다. 존재란 얼음이 물이 되고 다시 구름이 되듯이 본래 생겨남과 사라짐이 없이 그저 변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늙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나이가 들면 주름살도 생기고 눈도 좀 침침하고 걸음걸이도 불편해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90살이 되어도 눈이 초롱초롱하고 피부도 탱글탱글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늙어가는 것이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중병에 걸렸다 하자. 1년 밖에 못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1년을 괴롭게 살다가 죽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1년을 사느냐, 100년을 사느냐가 핵심이 아니다. 열흘을 사는 것도 소중한 인생이고, 100년을 사는 것도 소중한 인생이다. 1년 밖에 못산다고 할수록 그 하루하루를 더 기쁘게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 남이 10년 사는데 자기는 1년 밖에 못살면 10년 살 사람보다 10배 더 기쁘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루도 못살 사람이 1년이나 살 사람을 격려하고 위문하는 것이 인간이다. 병 위문 후 당장 그에게 닥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늙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생 역정이다. 그러나 우아하게 늙느냐 아니면 흉하게 늙느냐는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이 사람을 우아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묘약이며, 반면 불평, 의심, 절망, 경쟁, 공포가 흉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독약이란다. 요즈음 시중에서 유행하는 노인 14계명 중의 마지막 계명인 “내가 가지고 떠날 것은 없다. 그러니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라.”가 여실히 다가오고 있다. 남한테 신세졌으면 반이라도 갚고, 남 칭찬 못했으면 듬뿍 칭찬도 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움켜쥐었으면 약간만 떼어서 베풀고, 이렇게 1년, 그리고 여생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어 남는 것만큼 우리에게 귀중한 유산이 더 있을까.(2016.4.12)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ㄱ ㅅ
나이 듦이나 늙음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 말고 보기 좋고 탐스럽게 익어 감으로 합시다.
이왕 나이 들어가니 man is mortal 이니깐 노인으로 늙어가느니 보다는 어르신으로 늙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