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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여행기⑬ - 이스터 섬과 모아이 석상
깜깜한 새벽. 어슴푸레 들리는 비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밖을 보니 폭풍이 몰아오는 듯 세찬 비바람이 치고 있었다.
봄비라고 하기엔 기세가 너무 강하다. 내일까지 비가 계속된다는데 이 일을 어쩐담~
* 세찬 비바람에 숙소 마당의 야자수나무가 휘어진 모양
어젯밤 거실 샹들리에 아래서 이스터 섬 입도(入島) 축하 건배를 하며 내일의 일정을 기대하며 얼마나 가슴 설레었는데.
이스터 섬은 스페인 어로 이슬라 데 파스쿠아(Isla de Pascua), 현지어로는 라파 누이(Rapa Nui)라 불린다. 1722년 네덜란드의 탐험가가 부활절에 이곳에 상륙하면서부터 이스터 섬(부활절 섬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8세기부터 외부인들의 본격적인 유입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천연두, 노예사냥 등으로 인해 4천 명에 달하던 인구가 111명까지 줄어들기도 했다. 화산 폭발로 생긴 현무암과 초원들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도와 비슷한 풍경을 보여 준다.
우중(雨中)의 아침,
남편은 벌써 일어나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관조하며 기도문을 쓰고 있었다.
수 만 리 머나먼 대한민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여기까지 왔는데……
우린 그냥 비 그치기만 기다리며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스터 섬의 상징인 모아이 석상을 보아야 하고, 쿼드바이크로 이스터 섬의 초원을 달리고, 태평양 해변을 거닐어야 했다.
12:00경
아•점을 챙겨 먹고 남편과 딸은 여전히 강한 세력의 비바람을 뚫고서 렌트카를 마련해 왔다.(쿼드바이크는 기상 때문에 불가능하였다)
대여 시간은 딱 하루 24시간이란다.
낡고 털털한 지프차를 몰고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빗속 사지(死地)(?) 기행에 나섰다.
주택가를 벗어나자 넓디넓은 초원이 펼쳐지며 더욱 세찬 비바람이 시야를 흐리게 했다. 흙과 돌이 자연 그대로인 비포장도로는 곳곳이 움푹 패여 운전에 노련한 남편인데도 간혹 바퀴가 웅덩이에 빠지는 곤혹을 겪기도 했다.(자전거로 이스터 섬 일주를 시도한 아들의 경험에 의하면 길이 하도 울퉁불퉁해 뙤약볕 아래서 자전거를 끌고 다녀야만 했다는 고약한 길이다.)
* 하루 동안 발이 되어준 렌트카
남태평양의 거센 파도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섬을 쓸어버릴 듯 거대한 파고를 일으키고 있었다. 대자연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 하물며 풀 한 포기인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있으리오. 우산은 무용지물이 되고 방수등산복을 둘러쓴 채, 비 내리는 벌판에서 이스터 섬의 신비, 세계 7대 미스터리 유적에 속하는 모아이 석상을 찾아 다녔다.
검푸른 태평양을 뒤로 하고 초원 벌판 한 가운데 일렬로 우뚝 서 있는 모아이 석상(아우 통가리키, Ahu Tongariki. 한 곳에 15개 모아이가 일렬로 서 있음)을 시작으로 태평양을 바라다보고 있는 모아이, 누워 있는 모아이, 언덕 위에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모아이, 산 위에 군데군데 앉혀 있는 모아이, 망가진 모아이…….
* 모아이 석상(아우 통가리키, Ahu Tongariki. 15개 모아이) 안내 표지판과 모아이 앞에 선 남편과 딸
* 모아이 석상(아우 통가리키, Ahu Tongariki. 15개 모아이) 앞 초원 벌판에 누워 있는 모아이
모아이는 이스터 섬 넓은 초원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심한 폭풍우에도 꿈쩍 않는 부동의 검은 석상 모아이. 위엄, 신비, 신기운(神氣運)에 무섬증까지 들었다. 적출되어버린 안구로 인해 오뚝한 콧날이 더욱 선명하고 검은 눈자위의 깊은 골이 섬뜩하기도 하여 선뜻 다가서지도, 찬찬히 들여다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훼손의 우려 때문에 차단 거리가 있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이스터 섬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약 900여 개의 모아이 석상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제작했고, 이스터 섬까지 어떻게 운반했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고 한다.
전해지기는, 4C 경 이스터 섬으로 건너왔다는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각 부족의 수호신을 뜻하며 각 부족들이 경쟁적으로 석상을 만들다보니 숫자가 많아졌고, 이스터 섬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자연이 피폐되고, 식량부족으로 인해 부족간의 전쟁이 심화되자 16c~17c부터 석상 제작이 급격히 줄고 상대 부족의 모아이를 파괴하고 넘어뜨리고 신성한 힘의 원천이라고 믿었던 모아이의 눈을 모두 뽑아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눈을 가진 모아이는 타아이에 있는 ‘아우코데리쿠’가 유일하다고 한다.
얼마 전 TV에서 칠레 이스터 섬 대표단이 영국 런던을 방문해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아이 석상’의 반환을 간곡하게 요구하는 장면을 보았다. 1868년 칠레 이스터 섬에서 영국 해군이 약탈했다고 전해지는데 영국 측에서는 자신들이 석상 보존을 더 잘 한다는 이유로 돌려주기를 계속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비바람의 재촉으로 아우 비나푸(Ahu Vinapu), 아나카이(Anakai), 타가타(Tagata), 아키비(AHV Akivi), 푸나 파우(Puna pau), 타하이(Tahai), 라노 카우(Rano kau)……의 석상을 속성으로 둘러보고, 그 와중에도 이스터 섬의 넓은 초원, 짙푸른 태평양의 물살을 길벗 삼아 비 오는 이스터 섬의 낭만을 즐기며 하루를 보냈다.
* 비바람을 뚫고 다닌 바닷가와 살펴 본 모아이들
9/29(토)
소풍날, 날씨에 조바심치는 초등학생 마냥,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날씨부터 살폈다. 다행히 어제보다는 비바람이 약간 누그러진 상태다.
사과, 스크램블 에그, 신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서둘러 나섰다. (달걀과 라면이 주식이 되어 버림. 1년 내내 라면 1~2봉지 먹을까 말까 하는데)
어제 비 때문에 개장을 하지 않은 '오롱고'(Orongo)와 ‘라노 라라쿠’(Rano raraku)를 가려는데 오늘도 기상 때문에 개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낙심할 겨를이 없이 어제 심한 비바람으로 인해 여운을 남긴 채 발길을 돌려야 했던 15개 석상이 있는 통가리키(Tongariki)로 향했다. 몇 팀의 관광객들 틈에 서서 15개 모아이 석상 앞에 엄숙함으로 신비, 신령의 기운에 또 다시 휩싸였다. 오락가락 비바람도 아랑곳없이 가이더를 통해 이스터 섬의 모아이들을 심도 있게 관람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모아이 역사에 대한 모호한 깊이를 더해 준다. 통가리키(Tongariki) 석상의 미스터리를 여전히 호기심으로 품은 채, 아나케나(Anakena) 해변으로 달려갔다.
* 아나케나(Anakena) 해변으로 안내하는 표지판
* 아나케나(Anakena) 해변에 있는 모아이와 바다 전경
* 아나케나(Anakena) 해변의 고운 백사장
녹색초원에 쭉쭉 뻗은 야자수들이 그리는 해변은 비로 인해 더욱 싱그러웠다. 하와이가 이렇게 아름다울까? 여기에도 널따란 태평양을 배경으로 모아이 군단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세지 않은 바람, 가랑비를 맞고서 태평양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는 관광객도 있었다.(딸도 수영복을 준비해 갔으나 날씨가 쌀쌀하고 렌트카 반납 시간에 쫒겨 입수(入水) 안 함) 아나케나(Anakena) 해변의 밀가루 같은 모래를 밟고서 태평양 바닷물에 손을 적시는 여유를 가진 후, 모아이 제조공장이라고 불리며 이스터 섬에서 모아이가 한 곳에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곳 라노 라라꾸(Rano Raraku)를 향해 가속도를 냈다. (기상이 호전 되자 라노 라라꾸(Rano Raraku)를 개장하였다는 정보를 들음)
그냥 평지에 분포되어 있는 모아이들과 달리 낮은 산 능선 둘레길을 따라 산 곳곳에 꽂혀 있는 모아이들이 태평양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당히 큰 규모의 라노 라라꾸(Rano Raraku)의 초입에서 몇 개의 모아이를 본 후 볼거리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니 너무 아쉬웠다. 모아이들이 있는 둘레길을 걸으면서 태평양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 관광객들, 산마루에 올라가 태평양을 가슴에 담고 있는 관광객들, 무엇보다 아들의 블로그에서 극찬하던 정말 멋진 것 – 사진으로 본 그 멋진 곳을 보지 못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아쉬움이 지금까지 미련으로 남아 있다.
* 라노 라라꾸(Rano Raraku) 안내판 표지와 초입의 모아이
14:30분
렌트카를 반납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샌드위치로 소문난 ‘클럽 샌드위치 레스토랑’을 찾았다. 주말 관광객들로 자리에 여유가 거의 없었다. 수제맥주에 핫도그, 파히타의 조화로움은 가히 극찬할 만했고, 다음날 이스터 섬을 떠나는 마지막 끼니를 위해 다시 찾을 정도로 맛있었고, 양도 많았다. 그저 간식거리가 아닌 식사용으로 충분한 내용의 음식이었다.
* ‘클럽 샌드위치 레스토랑’의 수제맥주에 핫도그, 파히타
참 얄궂게도 이스터 섬의 오후 날씨는 활짝 갠 하늘이 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나들이를 수월하게 했다.
그러나 행여나 볼 수 있을까 기대했던 남태평양 한 가운데서 수평선 너머로 지는 아름다운 노을은 끝내 보지 못하고 타하이(Tahai) 주변 해변가를 맴돌며 아들이 배경 삼아 찍었던 모아이 석상에 별 뜻 없는 의미를 부여하며 저녁 발걸음을 재촉하여 숙소로 향했다.
* 타하이(Tahai) 해변가 안내 표지판
* 타하이(Tahai) 주변 해변가에서 남태평양을 바라보는 모아이
* 타하이(Tahai) 해변가에 있는 공원묘지
가는 도중, 태평양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공원묘지에 꽂혀 있는 십자가, 헌화한 하얀 꽃들이 어둠 깔리는 저녁물에 스산하게 보였다. (이스터 섬에서 나고 자라서 사망에 이른 사람만이 이곳에 묻힐 수 있다고 한다)
토요일밤 이스터 섬의 중심가는 야시장 개장으로 손바닥만한 가게들이 수공예품들을 전시하며 조명을 켜기 시작했다. 치안이 철저히 잘 되어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인적 드문 골목 주택가는 외지인인 우리에겐 으슥한 밤길이라 안심이 안 되어 숙소로 바로 돌아왔다.
이스터 섬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위하여 캐리어 속 먹을거리를 모두 꺼내어 상을 차렸다. 쌀, 라면, 빵, 고추장, 계란, 3분 짜장……
평상시에 먹지 않는 빵, 라면, 3분 짜장으로 차린 이스터 섬의 마지막 상차림은 그런대로 성찬이었다.
* 빵, 라면, 3분 짜장으로 차린 이스터 섬의 마지막 상차림
* 이스터 섬에서의 마지막 밤에 셋이서 화투를 치다
그냥 보내기에 아까운 밤, 셋이서 화투를 치고 있는데 쿵쾅 쿵쾅 - !!!
젊음과 음악이 뒤엉킨 23세 칠레 아가씨의 생일 축하파티가 이스터 섬의 밤을 울리고 있었다. 귀에 설지 않은 남미 음악이 친근하게 스며들며 이스터 섬 마지막 밤을 잠에 혼곤히 빠져들게 했다.
첫댓글 섬은 다들 날씨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하늘 표정이 달라지니 자연에 의존하고 순응하는 민속신앙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거리상으로는 매우(가장 멀다 할 만큼) 멀지만, 사람 사는 모습이나 자연의 힘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낯설지는 않은 느낌입니다. 정성스런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