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渡河]
머리를 거울에 비추면 잠이 달아났어
병실 수납장에 감춰 둔
두개골을 꺼내 읽는 중이었지
강력본드와 타카핀으로 쓰여진 문장은
들어낸 종양이 골자였어
종양을 덜어낸 자리는 빛으로 채워져
건너온 웜홀처럼 빠르고 공허했지
젊은 의사는
난독의 구간이라 말했어
내 과거에 대한
인과응보일 거라 생각했지
어디서 시작됐는지
균열의 근거는 보이지 않았어
머리를 화병에 꽂고 꽃이 피기를 기다렸지
꽃병의 모가지는 잘록해서 비틀기가 쉬웠거든
텅 빈 머리를 들고 노래를 불렀어
눈을 감아야 들리는 노래
이제
눈 감은 것들의 생명력으로
청명한 내일로 갈 수 있을까?
텅 빈 쪽으로 흐르는 슬픔은 건너지 마
어쩌면
내가 먼저 네 안에
깊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을지도 몰라
시인수첩 2021년 가을호
시작노트
살아가는 일은
눈앞에 가로놓인 무수한 강을 건너가는 일이다
때로는 발목까지
때로는 목젖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가쁜 숨을 뱉어내는 우리는
도대체 어느 별에서 추방당한 죄인들일까?
이른 아침
눈 뜨면 쓸쓸하고
눈 뜨면 아름다운 이 땅에서
우리는
날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대륙을 꿈꾼다
부디
모두들
끝끝내 자신의 신대륙에 상륙해
가이없는 지존으로 살아가시길...
숨
인간과 사물 모든 것들은 마음 안에서 생성과 사그라듦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내 삶에 궁극의 목적은 마음의 평화였다.
주변을 둘러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자극과 격동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것, 그것이 평화로 가는 길이며 그것만이 혼탁한 공간을 정화시킬 수 있는 한줄기 빛이며 희망이라 여겼다
누군들 마음 안에서 평화로운 순간 이어가기를 꿈꾸지 않겠는가 다만, 그 궁극의 평화는 우리 내면에서 갈구하는 최고의 삶의 목적, 존재의 이유일진데 혹자들은 그 앞에 가로 놓여 있는 유혹의 빛깔을 가진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안개의 장막을 길 앞에 걸쳐놓은 이유로 자신의 목적을 망각한 채 금방 동이 날 어떤 빛의 달콤함에 발목 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산다는 것에 아니, 살아감의 이유에 대해 밤새도록 시퍼렇게 매달릴 때 가득하면서도 텅 비어있는 지극히 공허한 슬픔이 타협할 수 없을 만큼 모질게 자신을 흔들 때, 사물은 그저 사물로서의 의미일 뿐 평화를 공유할 수 있는 동반자는 되지 못했다.
운다는 것, 자신의 모든 것을 긁어 내다 버리면서 깊이 운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비우는 일이며 그 작업이 완성될 때 그 안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안주할 수 있는, 모자람도 더함도 없는 방이 생기는 것이며 그 방안에는 삶의 평화가 있고 모든 이치가 있으며 우주로 소통되는 길이 있음을 알았을 때, 자신이 어떻게 서야 하는지, 걸음걸이는 어때야 하는지, 두 손의 위치는 어딘지, 고개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시선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며 또한 무엇과도 비교하지 말고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미워하지도 말며, 억지웃음은 짓지 말 것이며, 누군가에게 어떤 처우를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말 것이며, 가볍게 울고 웃지도 말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자신을 놓아 주는 것, 그리하여 그것이 자신의 무늬로 온전히 각인 될 때, 절대의 평화를 얻는 것이며 그런 후에야 한 가닥 빛이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이며 무한히 넓은 세계로의 여행은 시작 되는 것이다.
[남상진]
-2014년 애지등단
-010-8530-9460
-시집[현관문은 블랙홀이다], [철의시대이야기]
-depag@naver.com
-경남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대실로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