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
초등학교 운동장에 볼링 같은 삐죽 막대를 촘촘히 세워놓고 지나게 했다. 넘어지지 않게 돌아 나와야 한다. 몇 해 뒤엔 면허시험장 마당에 하얀 금을 긋고 세 곳을 거친다. 들어갔다 나오는 게 어렵다. 진땀을 빼며 겨우 통과했다. 필기와 코스, 주행을 모두 마치니 과거급제한 기분이다.
여러 사람 손을 거쳐 바래진 팥죽색의 브릿샤를 얻어 몰았다. 곰실곰실 간다. 그래도 자가용이라고 아이들이 야단이다. 앞 유리창 위 쇠가 삭아 덜렁거린다. 비 오면 줄줄 흘러 팔과 다리에 내린다. 접착제로 두껍게 붙이면 굳어있다가 뜨거운 여름날 녹아서 질질 퍼진다. 힘이 없어 작은 오르막에도 헉헉한다. 좀 높은 곳은 일찌감치 속도를 내야 넘어간다.
같은 차를 두 대나 몰았다. 뒤에 스피커를 구해 얹어두고 노랠 들었다. 방학 때마다 부모님과 가족을 태우고 산천 좋다는 델 갔다. 그 고물로 다니다 고장 나면 어쩌려고 그랬나. 겁 없이 전국을 누벼도 멈추지 않았다. 길이 좋았나 덜커덕 험한 비포장을 달렸다. 진탕 길에 빠지고 비비적거리며 가기도 했다.
철판이 삭아 만지면 푸석하게 떨어진다. 운전석 바닥을 꾹 눌렀더니 뿌지직하며 내려앉는다. 하는 수 없이 폐차장에 가져갔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마구 뜯어냈다. 내 몸 싣고 다니던 정든 차인데 뒤돌아보니 잘 가세요 희번득이며 유리창이 말한다. 중고 엑셀을 샀다. 참하게 생겨 닦고 기름치고 다듬어 사용했다.
이것도 힘이 달려 대티터널을 오르는데 골골한다. 다른 차들은 휙 지나치는데 나만 뒤처진다. 냅다 밟았다. 엔진 깨지는 소릴 내면서 끙끙댄다. 무슨 차가 이리 힘없나. 그래도 평평한 길은 잘 간다. 앞에 차도 그랬지만 문틈으로 바람들어오는 소리가 요란하다. 만드는 게 서툴러 이가 맞지 않아서이다.
거기다 에어컨에서 쉰 걸레 냄새가 난다. 필터를 바꿔도 소용없다. 기름 타는 냄새도 솔솔 올라와 주행 중에 화재 걱정이다. 창문을 반쯤 열고 팔을 걸쳤더니 푹 내려갔다. 안쪽을 뜯어보니 가녀린 철사가 약해 보였다. 어디 갔다 오는데 배기관이 터졌다. 콸콸 소리가 커 탱크 지나가는 소리다.
옆 차들 보기 민망하다. 세워서 밑을 보니 낮아서 들어갈 수가 없다. 겨우 팔을 넣어 만지니 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났다. 캔을 밟아 쭈그려 막고 철사로 동였다. 계속 탈탈거리고 요란을 피운다. 여전하다. 밤중에 전조등이 나갔다. 어두운 시골길에 꼼짝 못 한다. 더듬더듬 갓길에 세우고 휴즈를 갈았다.
벨트가 끊어진다. 충전기가 나간다. 여기저기 고장 나서 애먹였다. 이리 저래 하는 걸 보고 따라 고치다 보니 반 정비사가 됐다. 타이어는 쉽게 갈아 끼운다. 달래어 잘 타고 다니는데 누가 가져가라며 하얀 좀 큰 차를 준다. 캐피탈로 근사하다. 붉고 거무스레한 것을 타다가 훨씬 멋지다. 다니기 좋아하는 나는 살판났다.
여러 해 타서 그런가. 이것도 낡아져서 시동이 자꾸 꺼진다. 가다가 갑자기 조용하니 당황스럽다. 급히 켜면 찍찍하다가 겨우 크르릉 하며 걸린다. 오르막에선 낭패다. 기름이 줄줄 새서 뒤 차가 빵빵하며 알려준다. 위험천만이다. 불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정비소에 가 뒤 의자를 들어내고 바닥을 살피니 출렁출렁 넘친다.
어찌 이리 허술하게 만들었나. 야무지게 못 하나. 민주공원을 내려오는데 바퀴 소리가 심하고 먼지가 퍽퍽 난다. 뭔가하고 내려보니 좌측 뒤 타이어 축이 밀려났다. 판 스프링을 묶어주는 쇠가 느슨해졌다. 하나가 부러져 헐렁하다. 옆 동료가 배를 잡고 킥킥 히죽거린다.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그런다. 이런 고장을 처음 본다며.
가다가 멈춰서는 중고에 이골이 났다. 자녀들이 새 차를 주문했다. 수십 년 그렇게 다니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승용차를 가졌다. 그랜저이다. 퇴직하면서 기념으로 받았다. 복어처럼 부풀려 몸이 큼직하다. 그리 큰데도 엔진 소음이 없다. 바람 소리 들리지 않고 쉰내와 윤활유 타는 냄새도 안 난다.
어언 십여 년을 탔다. 함께 늙어가는데 아직 멀쩡하다. 고장이 나지 않아 찜찜하다. 시달리는 게 버릇이 됐는데 어찌 탈이 안 나나. 기지개 쭉 켤 때 찌직 발이 빠지거나 잘 가다가 시동 꺼지는 일도 없다. 눌러도 창문이 털컥 빠지지 않아 좋다. 뒷자리 사람이 가끔 휘발유 냄새를 말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새는 데도. 이제 그런 게 없다.
다들 좋은 차를 사 몰려는 것인가보다. 외국 차들이 부쩍 늘었다. 내 타던 꾀죄죄한 낡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작은 경차도 멋지고 성능이 좋아 보인다. 머플러가 열에 터져 소리 소리치던 것이 엊그제다. 사근사근한 게 참배 맛이다. 커서 부담이었는데 내 몸처럼 착 달라붙어 다닌다.
옆에 뭣이 있는가. 흰 차는 핸들이 우측으로 자꾸 틀어져 갔는데 이 차는 앞만 보고 똑바로 간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나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더 좋단다. 차선주행과 속도를 지키고 앞차 추돌을 피하는 등 자동이 많아 운전이 쉽다니 부럽다. 연료와 전기 겸용으로 다니는 차가 나오다가 전기차가 출고된다.
보닛을 열면 불 댕기는 충전기와 폭발로 움직이는 엔진에다 주위에 여러 부품이 얼기설기 붙어있다. 연료탱크와 배기관이 길게 밑을 지나고 열기를 식히는 냉각기도 갖춰야 한다. 건전지로 가는 전기차는 간단하다. 한번 충전하면 부산서 서울까지 가고 간단히 또 충전하면 목적지까지 내려갈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배터리로 매연과 소음 없는 꿈의 자동차가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이제 곧 무게도 가벼워져 작은 것에서 알맞은 크기의 전기차가 선보일 것이다. 액체연료로 가던 도로 주행차와 철로 위 기차, 공중 비행기가 머잖아 전기로 다닐 날이 가까웠다. 가정과 공장은 벌써 전기로 살아간다.
그래도 나는 향긋한 휘발유 냄새가 좋다. 발그레한 빛깔을 들이마시고 싶다. 가다가 떨어지면 개울 물 퍼넣어 “맹물로 가는 차” 영화도 있었는데. 아무리 변해도 지금 차가 좋아 함께 살련다. 미련하게 덩치 커도 얼마나 켕기고 안겨 오는데 버리겠나. 멋없어도 지루하지 않고 수더분해서 믿음직하다.